월간 사람과 산에서 퍼온글...
설악에 살다.(31) 사라진 산사나이들
하지만 그곳에는 김성택.송원기 대원이 없었다.
장대장은 '내가 먼저 왔구나. 차 끓일 시간이 있겠는걸'하고 생각하며 안도했다.
소나무에 고정시킨 자일을 타고 장대장은 공격조가 올라올 토왕폭 우측 벽의 최상단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는 63빌딩 스카이라운지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처럼 설동을 팠던 중단의 설원과 눈 덮인 토왕굴이 달빛에 훤히 드러났다. 다만 김.송대원이 등반을 마무리하느라 애쓰고 있을 우측 벽 상단만 먹물 먹은 듯한 어둠에 잠겨 의뭉스레 숨어 있었다.
그 신비스러운 벽 쪽에서는 어쩐 일인지 김대원의 해머질 소리도 들려오지 않고, 송대원의 이마에서 반짝이던 랜턴 불빛도 비치지 않았다. 어둠 속을 뚫어지게 쏘아보던 장대장의 머릿속에 돌연 불안한 예감이 스쳤다. 잃어버렸던 보름달을 다시 찾은 후배들이 벽에 없었기 때문이다.
장대장은 호흡을 가다듬고 후배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성택아. 원기야 어딨냐! 하이 빌라! 대답 좀 해봐! 안 들려! 하이 빌라! 성택아, 원기야 대답 좀 해!"
목까지 피가 올라오도록 불러봤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렇게 고함치던 장대장은 멀리 떨어진 베이스캠프 주변에 불빛이 어른거리는 것을 봤다. '공격조원들인가'하고 생각한 장대장은 다시 힘껏 고함을 질렀다.
그 절규가 하늘을 움직였는지, 3백50여m 아래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불빛의 주인공들은 김.송대원이 아니라 베이스 캠프를 지키던 김상규.이지원 대원이었다.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벽 쪽에서 헤드랜턴 불빛이 비췄는데 어느새 그 불빛이 내려간 것 같다"는 베이스 캠프에 있는 대원들의 고함을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김.송대원이 완등을 포기하고 지금쯤 중단 설동으로 내려가 대피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장대장은 그 가능성에 실낱같은 희망을 걸기로 했다. 모든 사실은 날이 새야만 밝혀질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어쩔 방법이 없었다.
사실 장대장과 이대원도 뜬눈으로 다음날 아침해를 맞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해가 떨어지면서 기온이 영하 18도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온몸에 스며든 동상 기운을 참고 있던 이대원은 0시 무렵 도끼날 맞은 장작처럼 나뒹굴었다. 외과의사인 장대장은 이대원부터 살려야 했다.
구두를 벗기고 언 발을 우모복으로 감싸 온기를 돌게 한 다음 허리까지 빠지는 눈을 헤집으며 모닥불이라도 지필 나뭇조각을 주워 모았다. 이대원을 껴안은 장대장은 스물아홉해의 삶에서 가장 길고 혹독한 밤을 토왕성의 꼭대기에서 보내야만 했다.
박인식 <소설가.前 사람과 산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