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시와 환관...
요즈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은 뜻으로 쓰고 있지만,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뜻이었지요. 우리나라에서 “내시(內侍)”라는 직책은 고려 초기에 처음 생겼답니다..
고려 광종 때에 임금의 외가와 처가의 윗분들이면서 동시에 개국 때부터 막강했던 호족들의 정치 간섭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임금이 직접 자기 사람을 확보하여 활용할 목적으로 과거(科擧)라는 제도를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과거에서 갓 합격한 젊은 인재들을 행정 견문도 넓히고 얼굴도 확실히 익혀 둘 양으로 궁중으로 불러 서류 정리나 심부름 같은 것을 시키며 확실히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두고자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내시”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합격자 중 몇 명을 골라서 청와대 비서실에서 행정 견습생으로 쓰는 것과 같은 셈인데, 워낙 바탕이 출중한 아이들이라 이들 중에서 얼마 후 정승까지 올라간 사람이 22명이나 되었다고 하네요.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적어도 고려시대의 “내시”라고 하는 말은 심신이 모두 건강하고 과거시험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으며 임금의 총애를 듬뿍 받는 정치 초년생인데다 장래에 고위 관직이 보장되는 소위 “확실한 금수저”들이란 말과 같은 말이었던 것입니다.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가장 강력한 호족” 출신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호족”끼리의 힘싸움 과정에서 어부지리로 추대되었다는 약점을 안고 출발한 임금이었기 때문에 그 다음다음 임금까지 대대로 호족들의 위세에 눌려서 큰소리 한번 제대로 못해 보고 있던 처지였습니다.
임금 입장에서 볼 때에는 호족들이 추천한 관리들은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우니 자기가 직접 가려서 뽑은 사람이 필요했고, 뽑은 인재들은 한 시라도 빨리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니 임금 쪽에서 볼 때에도 “내시”라는 자리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었지요.
그러나 날고 기는 호족들이 임금의 이러한 속셈을 모를 리가 없지요. 12세기 의종 때에 “내시”의 인원을 확대시키면서 호족들의 자제들까지 내시 자리에 들어 갈 수 있도록 법을 고치게 하였습니다. 임금이 마음대로 독재를 못하게 하겠다는 호족들의 뜻이 반영된 것이지요. 과거 급제자들은 “좌번 내시”로, 호족 자제들은 “우번 내시”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물론 우번 내시가 훨씬 더 입김이 세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참, 내시들의 숫자가 대폭 늘어나는 이 때에, 당시까지 궁중 노비로 일하던 “성불구자”들도 특별한 재주만 있으면 “내시” 자리에 들어 올 수 있도록 했는데요. 어쩌면 이 성불구자들이야말로 임금이 믿을 수 있는 마지막 사람이라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때부터는 내시라는 직책이 과거시험의 우수 합격자 출신, 호족들의 자제 출신, 성불구자 비정규직 궁중노비 출신 등 세 가지 부류의 혼성 팀이 되어 버렸지요.
이제 내시 자리는 더 이상 임금님만을 위하는 비서관의 자리가 될 수 없었고, 따라서 임금님의 권위는 다시 별 것 아닌 것으로 돌아거고 말았습니다. 고려 시대는 다시 “힘센 호족들의 약육강식” 시대로 접어들게 되지요.
이토록 완전히 날개가 꺾여 버린 고려의 임금들은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 무관들에게 쫓겨나거나 살해를 당하게 되었고, 목숨이 붙어 있다 해도 완전히 힘을 빼앗겨 허수아비 노릇만 열심히 했는데요. 또 나중에는 몽고족이 쳐들어 와서 그네들이 고려의 무관들을 대신하여 정치를 다해 주는 통에 고려의 임금들은 더 할 일이 없어져서 더 한가한 사람들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고려말 공민왕 때에는 중국의 경우처럼 내시들의 숫자를 120여 명으로 대폭 확대하여 아예 “성불구자”들만으로 이루어진 “내시부”라는 관서를 따로 만들었고, 벼슬도 정2품까지 올려 주는 바람에 우리나라도 “높은 관직의 성불구자, 즉 환관”이라는 것도 생겨 났지요
이 때 힘을 얻은 고려의 환관들은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어도 그 권세는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우리나라도 중국처럼 “내시”와 “환관”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서 말하자면, 중국은 이미 후한 말 十常侍(십상시) 때부터 내시와 환관을 같은 뜻으로 사용해 왔고, 그로부터 약 1,000년이 지난 후에야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환관(宦官)”이라 것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 볼까요? 일단 우리나라부터 먼저 알아 보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환관”은 출발점부터 “내시”와는 크게 다릅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와 관련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의 통일신라 흥덕왕 원년(서기 826년)에 “첫 부인인 장화부인이 세상을 뜨자 정목왕후로 추존하였다. 임금이 낙담하여 궁녀를 포함한 어떤 사람과도 만나지 않았으며, 임금 주위에는 다만 환수(宦竪) 몇 명만 있었을 뿐이었다”라는 기록입니다. 당시에 왕비란 호칭은 우리나라에서는 죽은 후에야 가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환수”라는 것은 “더벅머리의 미천한 벼슬자리”라는 뜻으로, 좀더 자세히 말하면
“성불구자를 궁중의 노비로 불러다 쓰는 것”을 의미하지요.
우리나라는 중국처럼 죄인을 강제로 거세하는 궁형(宮刑)이라는 형벌이 없었기 때문에 성불구자가 거의 없는 나라여서, 아주 어렸을 때에 마루나 마당에서 대변을 보다가 변을 먹으러 왔던 강아지에게 고추를 물렸던 성불구자에게만 이 “환수”의 자리를 맡기곤 하였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생활보호” 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원래부터 이런 “환수”란 직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통일신라 시대 때에 각종 제도를 당나라 식으로 조금씩 바꾸는 과정에서 환관 제도가 도입된 것입니다.
당시의 당나라와는 달리 성불구자들에게 중요한 자리는 주지 않고, 중국의 고대에서 그랬던 것처럼 초기에는 “궁중의 침실에서 시중을 드는 노비” 역할 정도만 맡겼다고 하는데, 그래서 명칭도 “환관”이 아닌 “환수”라는 것이었지요.
12세기 경 고려 의종 때에 내시들의 숫자가 확대되면서 이 “환수”들에게도 “내시”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따라서 그동안 비정규직으로만 있었던 이 성불구자들이 7품 이하의 낮은 관직이기는 했지만 처음으로 정규직 공무원, 즉 내시라는 직책으로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급기야는 공민왕 때에 원나라의 환관제도를 있는 그대로 도입하여 내시부가 성불구자들로만 채워지고, 벼슬도 고위 관직까지 올라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이제는 장관급 고위 공무원까지 승진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 동안은 궁중의 성불구자들이 환수(宦竪), 엄인(閹人), 화자(火者), 고자(鼓子) 등으로만 불리어 왔는데, 이제부터는 당당히 환관(宦官)이란 이름으로 불리어지게 되었고, 또한 내시(內侍)의 업무를 전담하는 사람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엄인”이란 말은 그냥 “성불구자”라는 뜻의 말이고, “화자(火者)”라는 말은 사람의 고환 두 개가 사람으로부터 따로 떨어져 나가 있다는 뜻에서 “인(人)”이란 글자 바깥에 점 두 개가 따로 노는, 즉 불알 두 개가 따로 떨어져 버린 것 같은 “불 화(火)” 글자를 사용하여 만든 말이며, 이들이 “화자”라는 말을 극히 싫어하자 이번에는 “속이 텅 빈, 즉 알맹이가 없이 텅 빈 사람”의 뜻으로 “북 고(鼓)” 자를 집어넣어 “고자”라는 말을 만들어서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말도 비아냥거리는 말이기는 마찬가지이지만요.
아무리 권력이 있더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그저 놀림감의 대상이었을 뿐이며, 이들이 모여 사는 경복궁 왕궁 바로 옆의 동네는 “화자동(火者洞)이라고 불리어졌습니다. 그러나, “좀 너무했다”라는 여론이 있어서 요즈음은 동네 이름이 “효자동(孝子洞)”으로 조금 바꾸어서 사용하고 있지요.
--------------------------------------
글쓴이 : 황재순. 문학박사. 인천에서 장학사와 교장을 지냈습니다.
첫댓글 그렇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