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창(唱)과 가무(歌舞), 하늘을 경외하고, 한바탕 어우러짐으로 나라와 부족의 안녕을 기구했던 천손민족의 원천, 팔관회(八關會)1)를 주도했고 전수해 왔던 특수 신분의 이들 기예자(技藝者)들은 고조선의 영역, 대륙 기반이 사라지면서 천손민족의 역사와 맥이 철저히 차단되었다. 그리고 이를 절단하고자 부심한 자들에 의해 백정(白丁)이라는 이름으로 전락되어 한(恨) 5백년 굴욕적인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세상에서 가장 긴 우리 민족의 극적인 노래인 창(唱)은 이로 인해 원혼의 한(恨)을 달래는 소리가 그리도 많을 터이다. 굿은 살풀이굿으로 부터 시작이 되어 판소리로 이어진다. 가면놀이와 북소리, "얼씨구" "좋다" 추임새가 이어진다. 이 또한 5백년 핍박과 굴욕을 뛰어 넘고자 하는 처절한 몸짓으로만 보임은 왜인가?.
‘전승된 지식’이 노래이다. 유럽 지방으로 떠난 이들 천손들은 무곡(舞曲)인 강강술래를 하며 이를 더욱 승화시켰다. 유럽인들은 천손민족의 ‘노래’를 ‘노엘’2)이라 이름하고, 이브 송에 삽입시켜 또 다른 하늘을 찬양했다.
그러나 혈통을 따라 남녘을 찾은 이들은 정체성을 잃었다. 피는 물 보다 진하다고 했던가. 그러나 그들은 물 보다 더 진한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보금자리를 잃은 이들은 더 이상 ‘우리’가 아님을 깨닿는 데 결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영원한 객인의 위치에서 ‘천손의 긴 이야기(唱)‘를 가슴에 품고 온몸으로 절규해야만 했다. 이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정리해 본다.
1) 통일 신라·고려 시대에, 해마다 음력 10월 15일은 개경에서, 11월 15일은 서경에서 토속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의식. 술, 다과, 놀이로써 즐기고 나라와 왕실의 안녕을 빌었다. *연등(燃燈), *仙郞 : 1 신라 말기에 화랑을 달리 이르던 말. 2 고려 시대에, 팔관회(八關會)의 무동(舞童)을 이르던 말. 3 고려 시대에, 귀한 집의 미혼 자제를 이르던 말. (국어사전)
2) 한눌 <‘노엘’은 ‘노래’이고 민간 전승의 ‘강강술래’가 아니던가>-노엘(Noel)은 노래(lore 전승적 지식, 민간 전승)의 음차인 우리말이다. 어원이 같다. http://1331.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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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白丁) 명칭과 고조선 역사 말살
“오늘 이후 이들을 백정(白丁)이라 불러라."
천민의 대명사가 된 백정의 굴레는 세종의 단호한 명령으로 시작된다.
원래 수척(水尺)·화척(禾尺)·양수척(楊水尺 무자리)이라 불린 이들 북방 유랑민들을 싸잡아 ‘백정’이라 명칭을 통일한 것은 1423년. 조의선인(早衣仙人)과 화랑(花郞)이 북방민 양수척으로 어원과 호칭이 바뀐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을 백정으로 통칭한 배경, 고조선과 맞물린 이상 징후가 사료 곳곳에 보인다.
앞서 1411년 태종은 이들을 성 90리 밖에 분산, 거주하게 하고3) 천민의 굴레를 씌워 행동반경을 감시했다. 대전회통(大典會通)4)에도 매해 그 실태를 조사하여 이들을 서울과 각 지방에 골고루 배치하여 그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생활을 엄격히 감독케 하였다고 기록했다.
대전회통/규장각 소장(출처:한국브리테니커)
때로는 이들을 병정(兵丁)으로 특별히 모집하여 전투력으로 활용했다. 도전적으로 보인 이들을 전장에 강제로 투입시켜 그 예봉을 꺾었다. 이는 1394년 태조 3년 2월 27일 사헌부에 명하여 강화도에 있는 왕씨 일족의 거취를 감시토록 하고, 각 도에 군사를 파견 왕씨(王氏)들을 제거한 사항과 닮았다.
3)刑曹啓: “謹按《經濟六典》一款, 節該: ‘食爲民天, 穀由牛出。’ 本朝設禁殺都監, 上國有禁鬻牛肉之令, 所以重農而厚民生也。 其盜殺牛馬者, 專是新白丁, 故於‘永樂九年’, 刷出新白丁, 移置都城三舍之外, 近來禁防陵夷, 乃於城中及城底, 竝還來住, 與閑雜人同盜牛馬, 恣行屠殺, 奸惡莫甚。 上項白丁及妻子, 盡行推刷, 竝遷之水邊各官, 充定軍役, 令所在官不時擧覈, 使不得逃還原住。(世宗 27卷, 7年(1425 乙巳 / 명 홍희(洪熙) 1年) 2月 4日(甲辰) 3번째기사) *사(舍) : 1사는 30리
4) 조선 고종 때 편찬된 법전. 6권 5책. 목판본. 1865년(고종 2) 왕명에 따라 조두순·김병학 등이 〈대전통편〉 이후 80년간 반포 실시된 왕의 교명과 규칙 및 격식 등을 〈대전통편〉 아래에 추보한 뒤 출판했다. 체제는 주관제도(周官制度)와 〈대명회전 大明會典〉을 모방하여 이·호·예·병·형·공전의 6전으로 나누어 편집했다. 이전 31, 호전 29, 예전 62, 병전 53, 형전 39, 공전 14개 항목으로 총 228개 조목을 담고 있다. 또한 〈경국대전〉·〈속대전〉·〈대전통편〉 등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편찬한 것이므로 이들 법전의 내용을 모두 수록하고 있다. 〈경국대전〉의 본문은 '원'(原), 〈속대전〉은 '속'(續), 〈대전통편〉은 '증'(增), 새로 보록한 것은 '보'(補)자를 음각(陰刻)하여 구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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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2년 고려 고종 때에도 백정(白丁)을 군대에 보충하였으나, 이들은 토지를 직접 경작하던 일반 농민 명칭으로 조선의 사례와는 달랐다. 후사를 위해 역사 단절 등 사전정비를 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통치의 걸림돌 양수척을 성 밖으로 몰아내라
1422년(세종 4)에는 차사원(差使員)5)을 파견하여 사민(徙民, 이민정책) 대상을 선정하여 양천 분간, 노비추쇄 등 중요 사안에 적용했다. 이들 또한 예외일 수는 없었을 터이다. 1423년 10월 8일(을묘)의 ‘백정‘ 통칭 결정은 군부를 관장하는 병조의 건의였다.6) 통치에 걸림돌이 되는 민정(民丁)과 양수척을 한데 묶어 관리에 단일화철저를 기했다. 1425년(세종 7)에 또 무악(毋岳)산 아래에 모여 살던 새 백정(新白丁)들을 도성 밖으로 쫓아냈다. 밀도살을 했다는 이유를 달았다. 새 백정은 일반 민정과 분리키 위한 용어였을 뿐이다.
화랑 유녀(花郞遊女) 및 무녀(巫女) 또한 여기에 포함되었다. 경성 안에 머물러 있는 자는 모두 적발하여 논죄(論罪)한 기록이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7)와 신증동국여지승람(제3권) 한성부(漢城府) 편에 보인다. 성종 2년(1471) 사헌부 대사헌 한치형이 올린 시의 17조에 대한 상소문에 ‘세종조(世宗朝)에 무릇 무격(巫覡)이 있는 곳이 보이면 다 성 밖으로 몰아내어’라 하여 세종의 이민정책 때 같이 실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남자가 화랑(花郞)이라 호칭하고... 여무(女巫)와 같다’하였다.
1433년(세종 15) 병조에서 튼튼하고 날랜 신백정(新白丁)을 뽑아서 운(運)을 나누어 여연(閭延)에 들여보내 줄 것을 청한다. 압록강 상류 변방지역인 여연을 방위하는데 서울 군사가 걷고 달음질하는 데 익숙하지 못해 튼튼하고 날랜 신백정을 충청·경기·황해 등 도(道)에서 뽑아서 보내 달라고 했다.8)
5) 임금이 중요한 임무를 위하여 파견하던 임시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6) 재인과 화척의 칭호를 백정으로 개명하게 하다
兵曹啓: “才人、禾尺本是良人, 業賤號殊, 民皆視爲異類, 羞與爲婚, 誠可憐憫。 乞改號白丁, 令平民相婚雜處, 籍其戶口, 給閑田與多占陳荒人田, 使之業農, 除田獵之役, 蠲柳器、皮鬣筋角之貢, 以安其生。 其家計豊實有武才者, 爲侍衛牌, 其次守城軍, 其中武才特異者, 令都節制使取才, 移報本曹, 更試甲士職敍用。 若因仍舊業, 不事農桑, 彼此流移者, 依律論罪, 仍考戶籍, 卽令還本, 其中私處奴婢, 聽本主區處。” 從之(世宗 22卷, 5年(1423 癸卯
/ 명 영락(永樂) 21年) 10月 8日(乙卯) 8번째기사)
7) 花郞游女。留住城中者。摘發論罪(與猶堂全書 第五集政法集第二十五卷○牧民心書 > 刑典六條)
8) 兵曹啓: “閭延赴防京中軍士, 不習步走, 請選壯勇新白丁于忠淸、京畿、黃海等道, 分運入送。” 從之 。(世宗 61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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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족간 살육, 말살 정책 음모
1436년(세종 18) 외구(外寇 외국으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의 제어책을 평안도 도절제사에게 보낸 내용 중에, ‘신백정 등은 항상 수렵을 익혔기 때문에, 말도 잘 타고 걸음도 잘 걸으오니 만약에 이 무리를 쓰게 된다면 이른 바, 만이(蠻夷)로서 만이를 치는 격이 될 것입니다’ 9)라는 내용이다.
동족간 살육을 통해서 백정을 말살, 정리하자는 이 섬뜩한 음모가 4품 이상이 올린 방어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세상은 좌우가 있기 마련이다. 시대별 계급간 갈등의 소지는 항상 존재한다. 그러나 음험한 계산하에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비굴한 권력의 속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남녀 모두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
이들은 남녀 모두 기마와 궁술에 능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강인한 체력과 전술 전략 또한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을 분산 거주케 하여 집단화를 차단했다. 이는 이러한 외적 상황이 빌미가 되어 취약한 왕권에 자칫 치명적인 변란의 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논리로 이를 예방, 불식시키고자 사전 작업한 것으로 풀이된다.
1462년 세조 때 강경책이 또 하달된다. 제도(諸道) 관찰사(觀察使)에게 유시하여 재인과 화척을 모여 살지 못하도록 하고 연유를 보고토록 지시했다. 세종의 백정 단일화 계획이 차질을 빚었던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다.
앞서 1451년(문종1) 지방 관료들이 사냥하는데 사사로이 백정(兩色白丁10)) 들을 동원했다. 보다 못해 병조가 나서서 이를 금지해 달라고 상소했다.11) 이로 보아 노비 보다 못한 인간 이하의 처참한 양상으로 원성이 높았으며, 그 폐해가 컸음을 알 수 있다.
9) 新白丁等, 常習畋獵, 能騎能步, 若用此輩, 所謂以蠻夷攻蠻夷也
10) 양색 백정(兩色白丁) : 조선조 때 고려 때의 재인(才人)과 화척(禾尺)을 백정이라 부르고 토지를 주어 호적에 올려 정주(定住)시켰는데, 이 재인과 화척을 일컫는 말.
11) 兵曹啓: “各道都節制使、各鎭僉節制使、守令等多徵聚軍士及兩色白丁, 畋獵。 請依《六典》, 申明痛 禁。” 從之。(文宗 7卷, 1年(1451 辛未 / 명 경태(景泰) 2年) 4月 19日(丁亥) 8번째기사)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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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정의 연속편이 이어질 때마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합니다
추종을 불허하는 발췌와 인용이
논문의 격을 더욱 높여줍니다
박사님 참으로 수고 많으십니다
그 와중에 저에게까지 글을 주시니
죄송하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회복을 위한 섭생조리에 힘쓰는데
최근에는 허리디스크 퇴행성협착증으로
병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박사님을 찾아뵙고 배우면서 위로도 드려야 도리인데
만사가 여의치 못하니 갑갑하기만 합니다
유난히도 더운 여름이었고
최근에는 연속되는 태풍으로
민심도 술렁이고 있는데
박사님이 말씀하신
선비문화마저 자취를 감추고
이념의 양분에 공직의 기강마저 무너지고 있으니
뒷자리에 숨어있는 역사의 일꾼들이
하루빨리 제자리를 찾아야 하겠습니다
환절기에
박사님 항상 강령하시고
가내 행운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대전에서 명기 올림
한문수 2010. 7. 13.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