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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붓다의 향기 뜨락 원문보기 글쓴이: 日光
불교의 경전은 다른 어떤 종교의 경전보다 양적으로 많다.
특히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불교의 그 많은 경전과 그 안의 방대한 내용 모두가
한 인간인 사람이 최상의 경지에 도달한 나머지 나왔다는 것이다.
불교의 경전이 인류사에 최고의 성전(聖典)임을 알아야 한다.
불교의 경전은 학문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 아니다.
또 어떤 제3의 세계에서 계시를 받아서 기록된 그런 내용도 아니다.
이것은 평범한 한 인간이 부단한 노력과 피나는 수행을 통해서
닦아 성취한 깨달음,
'사람이 부처다' 라는 깨달음을 통해서 얻은 가르침 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노력만 하면 부처가 된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금강경은 그 많은 경전중에서도 제일 많이 읽히는 경전중의 하나다.
역사적으로 道를 이룬 많은 도인과 조사 선지식들은
금강경 공부를 하신 분들이 가장 많다.
금강경은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
인생의 삶을 좀 더 의미있고 보람되게하기 위하여
2004년 출판한 금강경 이야기를 현실생활에 실천하며
살아갈수 있도록 에세이 형식으로 이야기하고자 발원하였다.
불교라는 것
부처님의 마음이 그렇듯이 중생인 우리의 마음에도
하루하루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어가는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부처님의 화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익하고 의미있고 보람된 것인지를
일깨워 자각하게 하는데 있는 것이다.
비가 쏟아 부어도 그릇이 엎질러져 있으면 한 방울의 물도 담기지 않는다.
그릇이 반듯하게 놓일 때 그 그릇에 물이 가득 담길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문을 열고 부처님 이야기에 귀 기울여서
깨달음을 얻어 금강반야바라밀의
삶을 살아가는 유익하고 성숙한 자신이 되길 두 손 모아 기원한다.
불교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 금강경이다.
오래 되었다고 구약 늦게 되었다고 신약이 아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한 번을 다 읽지 못했을지라도
그 경 제목만 읽어도
다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금강 반야 바라밀경」
이렇게 한 번만 음미해 보아도 알 수 없는 신통 묘용함이 자신도 모르게
가슴 깊이 닿아오고 느껴지는 묘한 힘을 알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죽어서 천도재를 지낼 때도 제일가는 것이 금강경이다.
선망부모님을 천도해 드릴때 경 전체를 다 읽지 못하여도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 즉견여래」
라는 사구게만 읽어도
전 권을 다 읽은 공덕이 있는 것과 마찬 가지이다.
금강 -깨달음의 세계다.
어떤 외형적인 타격이나 압력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다이아몬드같은 굳건함을 말한다.
반야 -지혜라 한다.(무상정등각)
어두운 세계를 이해하고 수용하며 밝은 세계로 이끌어 주는 배려심을 말한다.
지혜란 나를 이익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을 이익되게 하는 실천을 말하는 것이다.
바라밀-무상한 인생길 이다.
왔으니 가야하는 틀림없는 길이다.
어린 아이에서 청소년 청소년에서 시집 장가 가고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길이다.
지구촌 사바세계에서 살아가는 모든 민족과 생명이 그렇게
생.노.병.사.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길은 불변의 법칙 「무상」의 길인 것이다.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이다.
돈과 권력 명예 학식 지식 신의 힘으로도 이 길은 바꿀 수 없다.
선 - 착한 일을 하면 기쁘고 건강하고 즐겁다.
악 - 남을 속이면 괜히 쑥스럽고 부담이 되며 주눅이 든다.
자기를 속이지 않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
좋은 사람 미운사람 함께 나누는 마음이 행복의 길로 가는
「바라밀」 언덕이다.
길을 갈 때 그 길을 잘 아는 사람과 간다면
편리하고 안전하며 유익할 것이다.
모르고 가는 길은 이정표도 없이 자기 추측대로
자기 고집대로 간다면
그 길은 위험하고 험난한 길이 될 것이다.
어두운 밤 등불이 없다면
그 길은 넘어지고 다치는 너무나 위험한 길이 될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가는 길
그 길은 안전하고 두러움이 없는 해탈의 길이 될 것이다.
삶의 길
인생의 길은 생각하며 걸어야 한다.
시기와 때에 따라 학생의 신분으로 또는 직장인의 신분으로
인생이란 길을 간다.
여자는 아내의 길
남자는 남편의 길 그 길을 간다.
부부로서 가는 길
동료로서 가는 길
아버지의 길. 어머니의 길.
서로의 길은 다르지만 가는 곳은 똑 같다.
지도자의 길. 성직자의 길이 제일 힘든 길이다.
좋은 길잡이을 만나야 한다.
여행을 하더라도 가이드를 잘 만나면 효율적인 관광을 할 수 있듯이
인생길 삶의 길에서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과제다.
그래서
인생난득이요.「사람 몸 받기 어렵고
불법난봉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무상심심 미묘법 백천만겁 난조우」 라 하는 것이다.
인생에 스승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다.
부처님 법을 배우면 안목이 열린다.
빵 굽는 사람에게 빵 만드는 법을 배우고
청소 잘하는 사람에게 청소하는 잘 하는 법을 배우고
빨래 잘 하는 사람에게 세탁 잘하는 법을 배운다.
안목이 열리면 주의의 모든 환경을 슬기롭게 반야지혜로
이끌어내는 「보리 살타」가 되는 것이다.
의사가 잡는 칼은 사람을 살리고 도둑이 잡으면 흉기가 되는 것이다.
선물에 댓가를 바라면 뇌물이 되고
사랑에 집착을 부리면 상처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자기의 길을 바르게 가는 사람이다.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제 자리에서 자기 답게 걸어가는 사람인 것이다.
이 세상에 사랑과 자비보다 더 큰 권력은 없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을 박히는 죽음을 통해 영생의 길을 걸으시고
부처님은 자비심으로 왕의 자리를 버리시니 영원한 해탈의 길을 걷고 계신다.
부처님과 함께 가는길 그 길이 금강반야 바라밀의 길이다.
부처님의 제자 아난존자는 多聞第一(다문제일) 이다. 부처님을 25년간 시봉하였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기억하고 잘 아시는 분이다.
그러나 그는 경을 결집하는 침엽굴에서 깨닫지 못했다고 해서 가섭존자에게 쫓겨났다. 부처님을 가장 잘 알고 부처님의 말씀 논리를 모조리 기억하지만 경을 결집하는데 참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면 부처님을 모른다는 말이다.
아무리 좋은 학교 좋은 교수밑에서 오랜 공부를 하였더라도 자신의 창의력이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다는 말과 같다는 말이다.
쫓겨난 아난은 목숨을 건 수행 교족정진 -발래하는 사람처럼- 한쪽발 뒷꿈치를 들고 칠일간 용맹정진하여 깨달음을 얻은 후에야 경을 결집하는데 동참 하게 된 것이다.
그가 깨달은 후의 첫마디가. 세기를 초월하고 영원을 초월하는 문자 「여시아문」(如是我聞)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이다. 깨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는 언어요 문자다.
수행은 바로 고행이다. 자녀가 공부 잘하기를 바라지 않은 부모는 없다. 고생과 수행에는 공짜가 없다. 고생 고행은 고행대로 가치가 있는 것이고 수행은 수행대로 얻는 것이 있는 것이다. 노력하지 않고 화려한 법당에서 부처님 빽으로 누린 영화는 누린만큼 뒤에는 과보가 있는 것이다.
수행의 힘은 화려하고 장엄한 법당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비바람 부는 자연에서 힘을 얻고 자연에서 위로 받고 자연의 세계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道의 극치 인생의 깨달음 그 모든 것은 자기 그릇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
1.법회인유분.
이와 같은 내용을 들었습니다.( 여시아문 )
부처님 께서 공양을 드실 때가 되어 가사을 입으시고 발우을 들고
마을로 들어가서 걸식을 하셨습니다.
차례대로 걸식을 마치시고 본 곳으로 돌아오시여 공양을 마치신
뒤 발을 씻으시고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차례대로 걸식을 하셨다.
가난한 집이나 부자집이나 가리지 않으시고 차례대로 걸식하셨다는 점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얕은 분별심으로 사람들은 잘사는 부자집에 걸식하면 틀림없이
음식이 고급스럽고
맛이 있으며 많이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잘 살고 못 살고 맛있고 맛없고 적고 많고
천하거나 귀하거나 차별없이 차례대로 「선근인연」
기회를 균등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성자이신 부처님은 일생을 걸식으로 사신 분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 시대나 지금 시대에도 부처님처럼 추앙받고 존경받는 분은 없다.
그런 분이 날마다 마을로 내려 가시여 일생을 걸식하고 사셨으니
우리가 존경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부처다 라는 부처의 「상 」이 있으면 걸식은 할 수가 없다.
나 라는 자존심 을 세우면 그는 보살이 아니다는 말이다.
높은 지워 권력 많은 재물 명예와 인기 에
「상」이 있으면 안된다는 가르침이다.
자비와 겸손이 없다면 그는 사람으로서 실패한 사람이다.
귀하거나 천하거나 차별하지 않은 인품이 보살의 인품이다.
"완장" 소설의 주인공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다.
권력을 이용하고 재물을 이용하며 명예와 인기에 부합하여 민생을
억압하고 희롱하며 자가당착에 빠져 추악한 짐승같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인생이란 따지고 보면 하루 주먹밥 세끼다.
개미들의 행진처럼 방향감각을 더듬이로 더듬거리며
한치 앞도 내다 보지 못하고
앞서 가는 놈따라 더듬거리며 따라가는 꼴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제왕보다 높은 자리에 계시면서
매일 매일 일생을 걸식하신 부처님의 실천수행은 종교인 모든 성직자들이
깊이 깊이 감내하여야 할 피를 토하는 아픔이 되어야 한다.
조금 안다고 거만하고 학력이 높다고 거드름 피우지 말아야 한다.
명함이나 이력서 특히 미술 시인 등 교수등 학식있는 군상들이
빼곡히 써 내린
약력서를 보면 씁쓸함을 금치 못한다.
소위 빽그라운드의 화려함은 자신을 자멸하게 하는 장송곡임을 알아야 한다.
창작과 창의는 자연적인 내신에서 나온다
치장하여 가리고 분장하여 모방과 위선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추하면 추한대로 자유로운것이 아름다움이다.
걸식!
우리들은 잘나거나 못나거나 모두 빌어먹고 살고 있는 것이다.
권력에 빌고 재물에 빌고 명예에 빌고 인기에 빌어먹고 산다.
잘난 체 하는 것 보다 추한 것은 없다.
우리들의 삶이란
수 없이 많은 과오를 범하고 살아간다.
알면서도 범하고 모르면서도 범한다.
세족!
발을 씻는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 더럽고 추한 행동과 말을 참회하는 것이 씻는 것이다.
옷이 더러우면 세탁 하듯이 나쁜 버릇과 습관을 씻어야 한다.
실수을 알아차리고 유치한 것들을 알아차려야 한다.
법당에서 부처님께 절하는 것은 거짓된 마음을 씻어 내는 수행이다.
거만한 마음 나라는 자존심 나다라는 아만심을 씻어 내는 일이다.
부처님께서 인간이 가지는 병 중에 가장 크고 고쳐야 할 병이
상병이란 것을 아시고
이런 각도 에서 저런 각도에서 이런 입장에서 저런 입장에서
우리들의 상병을 치료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나라는 상 나 라는 자존심 나 라는 교만이 큰 병이다.
미워지고 싫어지고 성나고 분노하는 것이 모두 나 라는 상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허물을 들추면 듣는 찰나에 분노하는 것이 인간이다.
자기는 분노하면서 남의 험담을 하는 자신은 눈치채지 못하고
버릇처럼 한다는 사실이다.
말 한디가 역적을 만든다.
글이나 문자는 지울 수가 있지만 말은 한 번 뱉으면 주어 담을 수가 없다.
좋은 일을 해놓고 생색을 내면 모든 공덕이 사라진다.
나 라는 상의 때를 씻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는 부처님의 빽을 믿고 종횡무진하면서
거만하고 교만을 부리면서
온 동네를 휘젖고 다녔으나 아무도 그를 부처님의 아들이라서
제제 하지 못했다.
이 말은 들은 부처님 께서 하루는 라훌라를 조용히 불러
세수대야에 물을 떠 오게 하고
그의 발을 손수 씻어 주었다.
부처님의 행동에 놀란 라훌라는 가슴을 조였다.
부처님은 아들의 발을 씻어 준 다음 그를 쳐다 보면서
라훌라야.
예, 부처님.
너의 발을 씻은 물을 네가 먹을 수 있겠느냐?
라훌라는 깜짝 놀라 대답했다.
더러워서 먹을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그렇다.
네가 지금 마을에서 하고 다니는 행동이 네가 씻은 물을
남이 먹으라는 것과 같은 행동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느냐 ?
하지 않겠습니다. 부처님!
우리들도 라훌라 같이
권세를 업고 직위를 업고 안아무인격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 셋이만 모이면 동료나 친구의 험담을 한다.
자기는 남의 험담을 하면서 친구가 자기의 험담을 하면 참지를 못한다.
커피를 마시며 식사를 하면서 술을 마시며 사우나나 찜질방에서
모두들 그렇다.
습관과 버릇을 고쳐야 한다.
손을 씻고 발을 씻고 세수를 하고 목욕을 하고 모두가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다 .
마음 때를 씻을 줄 아는 지성적인 사람이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귀를 씻어서 듣고 눈을 씻어서 보고 입을 씻어서 말을 할 줄 알아야 한다.
말이 향기로운 세상을 만들자.
말이 향기로운 사회를 만들자.
말이 향기로운 사람이 되라.
서두르고 분주한 일상에서 하루에 한 번쯤은
방 바닥에 방석을 깔고 조용히 앉아 보라.
흔들리는 의자에 앉기보다는 방 바닥에 앉으면 더욱
자연스럽게 흐트러진 마음이 가라 앉을 것이다.
잠시 하고 있는 일을 멈추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양심의 짓거리가 무엇인지 돌아보라.
직장인의 입장에서
국민의 입장에서
자기가 맡은 소임의 책임자로써 공정하고 평등한가.
아버지의 입장에서
어머니의 입장에서
남편의 입장에서
아내의 입장에서 구김살이 없는지 잘 살펴야 한다.
제자리에서 제 직분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불안할 수 밖에 없다.
마음닦는 공부의 바탕은 양심인 청정심 이다.
마음이 청정한가.
마음이 원만 한가.
천백억으로 분주한 마음을 잘 나투어 쓰는가 이다.
아들을 만나면 아버지요.
아내를 만나면 남편이요.
주어진 소임에 따라 직분의 이름이 다르지만 그 사람이 그 사람이다.
할머니가 빨간 옷을 입고 연지 찍고 분바르고 꾸미지만
그렇다고 젊어지는 것은 아니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자리에 계실때가 품격있고 고우신 것이다.
느리게 가는 앞차를 보고 짜증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서두르는 것에 익숙되어 버렸다.
30년 전에 벌써 「서있는 사람들」 이란 법정스님의 책이 나왔다.
요즘엔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이란 혜민스님의 책이
백만부 이상 베스트 셀러가
되는 것이 모두가 느끼는 감정이 같기 때문이란 것이다.
늙기는 싫어 하면서 모두가 바쁘게 허둥거리는 삶을 살아간다.
생각이 바쁘니 몸이 쫏기고 몸이 쫏기니 마음이 바쁘다.
잘 살고 행복하려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의 삶들을 살아간다.
잘산다는 것은 마음이 평온한 것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구애받지 않은 자유로운 마음이다.
「오늘 이시간 존재하는 모습이 나의 실상」 이다.
자기의 자리에서 소중하고 존귀한 자신의 가치를
일께우며 살아가는 깨어 있는 사람이 되라.
부처님께서도 번잡한 고행을 멈추시고.
보리수 나무아래 조용히 앉으시여 깨달음을 얻으신 것이다.
최상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사람은
어떻게 그 마음을 머물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 받아야 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자기 마음을 자유롭게 조복 받는 일이다.
자기를 통제하고 억제할 수 있다면 그는 성공한 사람이다.
대승경전에서 보살이라 부르는 말과 뜻은
발심한 사람
무엇인가 인생에 대한 의미을 가지려 하고 뜻있게 살려고 하는 사람
인생의 보람과 가치를 생각 하면서 살려고 하는 사람
그런 마음이 준비된 사람을 보살이라 한다.
우주에 존재 하는 생명종류에는
탯줄로 태어난 생명- 사람이나 소,고양이 개.등.
알로서 태어나는 생명- 계란 .고기알 곤충알.등
습기에서 태어나는 생명- 빗물을 담아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
화하여 생겨나는 생명- 누에가 나비가 되는 것 등.
그리고.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생각이 있는 것 생각이 없는 것.
생각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
부처님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제도하시지만
한 생명도 제도 하신 바가 없다고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만유중생을 도우시지만
한사람도 도운바가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
나 라는 상,
남이 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수자라는 상.
상을 내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는 중생을 거치지 않은 부처는 없다는 사실이다.
중생이 부처라는 사실 이보다 위대한 인류사의 진리는 없다.
「당신이 바로 부처님」 이다, 는 말씀이다.
아상 -자아 의식
인상 -한계의식
중생상 -열등의식.
수자상 -차별의식이다.
각양각색의 사람과 생명이 각양각색인 문화 속에서
「생.노.병.사」로 살아간다.
그래서 무량 무수 무변 무량광 무량수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만유중생을 제도하셨지만
한 사람도 제도 하신바가 없다고 하셨다.
중생을 다 구원하셨지만
구원하신 바가 없다는 금강경의 말씀은 인류가 지향해야할 대 자유의 선언이다.
사람은 미워해야할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에 허물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 나름대로 100%의 선하고 착함이 있는 것이다.
상대의 선하고 착함은 내가 이끌어 내는 사랑의 용서와 칭찬에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배려하는 마음이요 상대의 지난 아품을 이해하는 것이다.
좋은 마음을 가지고 좋게 쓰면 좋은 일만 생긴다.
남을 험담하면 결국 자기를 험담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을 고치는 용기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과 생명은 사랑을 먹고 자란다.
사랑은 마음으로 통하여 만나고 마음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다.
종지 - 남의 생명을 끝 없이 사랑하는 것이다.
법이란 - 잘못을 고치자고 하는 것이 법이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위대한 존재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불성」은 컴프터의 소포트 웨어 보다
더 많은 키 워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신이 가진 능력보다 실질적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불가사의하고 위대한 문화유산과 과학은
인간의 능력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불경. 성경. 코란. 사서삼경. 모두가 인간이 이루어낸 거룩함이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특별히 부여한것은 하나도 없다.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각자 이미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을 드러내 보이실 뿐이다.
우리에게 없는 기능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장되고 잠재되어 있는 「불성」을 깨어나게 하는 역할을 하시는 것이다.
유내스코가 지정하는 석굴암 불상은 예술의 극치다.
팔공산 꼭대기에 다른 곳에서 옴겨 온 돌로 조성해
그 곳에 앉힌 갓바위 부처님은 불가능한 불사다.
길이 없어 갈수도 없고 산이 높아 알 수도 없는 곳에
터를 잡고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설악산 봉정암은
불가능하고 불가사의한 일이다.
신이 한 것이 아니요 신통이 한 것도 아니다.
모두가 인간이 가진 「불성, 불심」으로 이루어 낸 불가능의 가능이다.
중생 한사람 한사람의 「불성 불심」이 팔만 대장경을 만들고
불가사의한 세계문화유산
을 창조하고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달 나라에 쏘아 올린 인공위성 세계를 손바닥에 올려놓은
스마트 폰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의술
이 모두가 인간이 가지는 위대한 「불성」에서 나온 것이다.
자신의 위대함을 2-3%밖에 쓰지 못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이라 한다.
나머지 98%는 사장하고 살아간다니 깨어나지 못함은 억울하지 않은가.
신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신마져도 인간이 만든 신이다.
모든 존재가 「불성」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이 이보다 휼륭한 가르침은 없다.
인간이 인간을 용서해야지 신이 인간을 용서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은 하찮은 종이 절대 아니다
인간 개개인이 위대한 존재란 사실을 알고 살아갈 때
모든 범죄가 사라지게 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결국 한사람인 자기 문제다.
바로 당신인 「나」다.
내가 깨어나지 못하면 나를 상실하고 사는 것이요.
내가 나에서 깨어나면 나 안에 존재하는 「불성」을 알아서
부처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깨어나면 현실에서
천안통.천이통, 타심통. 숙명통을 얻는다.
천안통 -지혜의 안목으로 볼 줄 알고,
천이통 -보리심 으로 들을 줄 알고,
타심통 -자비심 으로 배려할 줄 알고.
숙명통 -깨달음 으로 행복한 삶을 얻는다.,
둘도 없는 위대한 존재
그 가 바로 「자신」이다.
아름답고 향기롭고 무한이 슬기로운 사람이
바로 당신인 「나」다.
부처님께서
어떤 형식이나 형상에 머물지 말고 보시를 해야 바른 보시라 하신다.
인간은 집착하는 감정의 동물이다.
자기가 아니면 안된다는 것에 집착하고.
누구에게 마음을 섰다하면 기대심에 집착 하고.
자신만 사랑 받기위해 몸부림 치며 집착 하는 감정의 동물이다.
집착하는 모습은 아름다운 모습이 아니다.
집착이 지나치면 유치하고 더럽고 추하다.
요즘말로 사람은 매너가 좋아야 한다.
자기가 한것에 대해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일을 했어도 좋은일 한것에 대해 생색을 내거나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묘행무주-
아름다운 행위는 머물지 않는다.
끈적끈적 들어 붙지않는다.
노래말 가사처럼 미련따워 없는 거야- 다.
사랑은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미명하에 옭아매거나 밧줄로 묶으려 든다면 사랑은 떠나 버린다.
사랑의 관계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다.
나와 물질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좋은 매너에서 아름다운 관계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멋있는 사람은 절대 생색을 내지 않는 사람이다.
생색을 내지 않아도 사람들은 벌써 다 안다.
잘 알아 달라는 마음이 생기면 그길로 추하고 치사하고
유치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사람의 습관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아만과 습이 되어 버린 성품에서 빠저 나오는 것이 마음공부다.
요즘 나의 카페에 상식이하의 사람이 추하고 유치한 자기를 드러내고 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이다
스스로 자신을 더러운 시궁창에 들어가고 있다.
남을 비방하는 죄 보다 더 큰 죄는 없다.
그 글에 수긍하는 생각이 일어난다면 아직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
마음 쓰는 것이 아름다워야 한다.
말에 향기가 나고 바라는 것 없이 배푸는 것이 보시행이다.
물질을 주는 보시보다 마음으로 주는 보시가
더욱 숭고하고 공덕이 있다 하셨다.
묘행무주.
아름다운 마음은 집착하지 않은 마음이다.
수보리야.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하면 그 복덕이 불가사량-
헤아릴수 없이 많으니라.
모든 것에 머무는 바 없이 보시 배풀면서 살라.
보살이란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을 말한다.
자기 발전을 부단히 꾀하려는 사람
그러면서 남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보살이다.
배풀고 사는 사람은
좀 더 삶을 의미있게 살려는 사람이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 뭔가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다.
알고 보면 우리들의 삶 자체가 보시로 구성되어 있다.
꽃은 피어서 우리에게 기쁜 마음 을 열게 보시 한다.
삼라만상 우주 만물이 서로 어울려 주고받으며 공생하며 살아간다.
해와 달 바람과 비가 꽃을 피게 한다.
꽃은 나비와 벌에게 꿀을 주고 잎은 떨어저 거름이 되고.
열매는 새와 동물 인간에게 먹을 것으로 보시 한다.
보시에는 법보시가 으뜸이다.
사성제. 육바라밀. 팔정도에서는 중생이 부처라는 사실을 가르친다.
탐욕과 무명 업식에 방황하는 중생을 광명의 길로 이끌어 주는 것이 법보시다.
팔만대장경이 법보시이다.
항하사 모래알 수와 같은 금은보화로 보시 하는 것보다.
부처님 진리의 말씀을 남에게 일러주는 법보시가 더 큰 공덕이라 하신다.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보다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말씀이다.
많은 보시 중에도 「화안애어」보시가 또한 으뜸이다.
화안애어-웃는얼굴 고운 말이다.
속속드리 자비한 관세음 보살의 미소
세계인이 좋아하는 모나리자의 미소
미소는 남여노소 지구촌의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표정이다.
부드러운말 향기로운 말 사랑하는 말 모두가 무상 보시다.
머무는 바 없이 보시하라.
댓가를 바라지 않은 미소 댓가를 바라지 않은 칭찬 이 무주상 보시다.
무주상이 보시의 복덕이다.
유혹하지 않은 서비스 현혹하지 않은 서비스가 무주상 보시다.
보시에 상이 있으면 간 경화에 걸린다.
댓가를 바라는 선믈은 간을 굳게 만든다.
섭섭하고 괴씸하고 자기가 나에게 그럴 수 있나,하면
간이 스트래스를 받는 다.
보시의 정신은
인류가 지향 해야 할 최고의 덕목이다.
남을 이롭게 하면 바로 즉시 나를 기쁘게 한다.
배풀면 기쁜 마음이 생기고 간 경화에 치료가 되는 보약이 된다.
남편에게 포근한 아내가 보시하는 주부다
아내에게 믿음직한 남편이 보시하는 남편이다.
이 세상에 보시 보다 즐겁고 보람된 일은 없다.
보답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고 다음 기회로 미루면 복 받기가 어렵다.
즉시 즉시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현명한 자신이 되어야 성공한다.
금강경의 가르침의 핵심 종지는 무상 과 무주 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한 것이다.
장관이라는 벼슬 군수라는 벼슬 국회의원 단체회장 차장 반장 이라는
벼슬이 다 이름뿐이라는 말이다.
그저 잠시 가지는 직분의 이름일 뿐 자기 소유는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무상이라 하는 것이다.
장관의 직분에서 물러난 사람이 계속 장관행세을 하려 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약견재상 비상 즉견여래.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허망하나니.
만약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보는 안목이 열릴 때 여래를 볼수 있느니라.
장관직에서 물러났으니 어떻게 마음을 머무르며
장관직을 지냈다는 상내고 싶은 마음을 항복 받을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상대가 나를 몰라주니 그만 섭섭한 것이다.
험담하는 말이라도 듣는다면 화나고 성나며 분노한다.
행위에 따라 보고 듣는 감정도 다르다.
무량 무수 무변 하게 일어나는 것이 마음이다.
나 라는 상.
내가 누구인데 너와 비교도 안되는 나인데,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인데
알아주지 않는다고 성내고 분노심이 생기면 상병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무주- 머무는 바 없이
무상- 나라는 상을 내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수천억의 기부금을 내는 것보다 모범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더 좋은 공덕이 된다 하셨다.
칭찬과 자랑은 다르다
내가 누구인데 라는 상은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
주 - 란 삶이다.
처소 직업으로도 생각 할 수 있고.
마음속에 자신의 의지를 생각하는 머무름이라 말할 수도 있다.
관심사가 머무는 곳
결국 어떤 마음을 쓰고 살아가는 가는가 이다.
어떤 가치관(종지)을 가지고 살아가는가
무상과 무주로 살아가라
수단과 방법으로는 세계를 제패할수 없다.
짝달박한 싸이가 노래와 춤으로 세계에 뜨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체구다.
그의 위트. 그의 넉서리는 무상의 겸손. 무주의 알랑가 몰라 이다.
남을 편하게 하는 것이 무상이다.
남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무주이다.
남을 즐겁게 하거나 도우면 성공할 수 밖에 없다.
수보리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가이 형상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형상으로 여래를 볼 수 없나이다.
여래를 본다는 말은 사람의 진실을 본다는 말씀이다.
부처가 부처가 아니라.
중생인 우리가 바로 부처라는 가르침이다.
사람의 걷모습인 미모나 육체로서 그사람의 전부를 판단할수가 있겠느냐
그 사람의 벼슬 직위로써 그사람의 전부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 비상즉견여래」
무릇형상이 있는 것은 다 변하여 허망한 것인줄 알아야
진정한 참모습의 자신을 알수있다는 말씀이다.
여래는 남이 아니라 자신이다.
하나의 생명체로서 당당하고 존엄한 여래가 바로 자신인 것이다.
자신이 여래요 부처라고 알고 살아가는 자신이 되라는 가르침이다.
외형적인 모습
메이크업 한 미모 몸을 돗보이는 페선 S라인 육체미등 모두가 한 때이다.
양귀비 마라린 먼로 장록수 모두가 허망을 ?은 미혹한 중생일 뿐이다.
따뜻한 가슴 보이지는 않지만 어머니의 가슴이 여래의 모습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그사람을 다 알 수는 없다.
그 사람의 말로써 그 사람을 다 알 수는 없다.
그 사람의 필체로 그 사람을 다 알 수는 없다.
「범소유상 개시허망」
젊음이 그러하고 권세가 그러하다.
황금으로된 대웅전에 모셔진 불상이 진짜 부처가 아니다.
아파하고 안타까워 하고 안절부절하는 오늘에 존재하는
바로 자신이 진짜 부처이다.
당신을 떠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이 바로 「실지실견」이다.
청춘에 집착 하지 말고 미모에 집착 하지 말고 인기에 집착하지 말라.
보이는 것은 다 변한다.
소유하고 있는 것도 다 변한다.
오직 남는 것은 선업과 악업이 남을 뿐이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나 라는 상이다.
모두가 허망한 것이니 나 라는 상(자존심) 에 갇혀
괴로워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나 라는 한 세계.모든 번뇌는.
나라는 상을 바탕으로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다.
여리실견.
우리가 보고 있는 탁자위의 불상이 부처님은 아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설법을 통해서 우리들은 부처님을 볼 수 있다.
가르침을 통해서 바른 견해를 얻고
바른 견해를 통해서 부처님의 진실상 졍견으로 만날 수 있다.
고려청자에 대한 지식이나 안목이 없으면
개의 밥그릇으로 사용하는 우를 범하고 살게되는 이치다.
양귀비가 천하일색이지만 연못가에 가면 고기들은 놀라서 달아난다.
사람들은 양귀비를 좋아하지만 고기들은 놀라기만 한다..
똑같은 보름달을 보지만 .
만의 만 사람이 생각과 느낌이 다르다.
달을 보고 정분의 아름다운 축억을 뗘올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달을 보고 떠나버린 이별의 아픔에 통곡하며 슬퍼하는 사람도 있다.
살아온 경험이나 살아온 삶에 따라서
쌓아온 업식과 습성에 따라 사물을 보는 감정이 다르다는 말이다.
실견 -있는 그대로 보라.
정견-생각이나 의미을 부여하지 말고 그대로 보라.
있는 그대로 실답게 보는 것이 깨달은 마음에서 보는 바른 안목이다.
수보리야.
육신으로써 여래를 보느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육신으로써 여래를 볼 수 없습니다.
탁자위에 장엄하게 앉으신 불상으로 부처를 보았다고 할 수 있느냐.
아닙니다. 부처님
조각된 물질의 모습인 형상으로 부처를 볼 수는 없습니다.
탁자위의 불상 부처님은
갓난 아기가 어머니을 찾는 거와 같은 이치다.
배 ?으면 울고 불안하면 어머니 품 속을 찾는 거와 같다.
어린아이처럼 성장하지 않고 막연하게 부처님을 믿고 따를 수는 없다.
「불가이신상 즉견여래」.
가이 신상 조각된 불상으로는 부처님 여래라고 하는 실상을 볼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의 실견이
오늘에 살고 있는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부처님이 남기신 팔만대장경이 바로 「나」의 인생 삶의 현장인 것이다.
어떤 안목으로 부처를 보고 이해하는가 이다.
벌써 봄인가 했더니 초여름이다.
쉼 없이 변해가는 절기다.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될 수는 없다.
변화 무상함을 아는것이 「여리실견」이다.
여리실견 -있는 그대로다
철저히 허망한 것을 가슴깊이 뼈저리게 느낄 때 깨달음이 온다.
철저한 깨달음이 있을 때
늘 새롭게 태어나는 「불사신」의 자기를 볼 수있다.
자기를 넘어 서는 것- 그것이 바로 「밤소유상 개시허망」이다.
허망한 고통은 본래 없다.
고통은 또 허망한 것이다.
무상 이란- 덧 없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무상속에 진상을 깨닫는 것이 「에세이 금강경 마음공부」다.
나의 행복은 내가 만드는 것이다.
수보리야.
옳은 법도 취하지 말고 그른 법도 취하지 말라,
옳은 법도 오히려 반드시 버리려 하거늘
하물며 그른 법이겠는가.
불교를 바르게 이해하고 바른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 드릴 줄 알아야 한다.
마음과 정신적으로 불교를 바르게 가르치는 글을 읽지 않고
비 정상적인 간판을 걸고 요술이나 신통 귀신등을 들추어 내는 책을 읽고 마치 그것이 불교인양 알고 있다.
처음 절에 들어오는 사람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다.
절에 들어가면 병을 고치는 법 도술을 가르처 주는 줄 안다.
사주를 보고 점을 치고 귀신을 점지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다.
소위 지식인이란 사람들이 수 많은 불교서적 중에도 비불교서적을
더 많이들 읽고 있다.
불법은 계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어떤 경우라도 계를 지키지 않은 것은 수행자가 아니요.
불교를 펴는 사람이 아니다.
「지계수복자 」지계가 모든 복전의 터전이 된다.
제일 먼저 삼귀의 계다.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는 신심이다.
일반 제가 불자는 오계와 함께
십계 십중대계 사십팔계의 보살대계 가 있다.
출가 수행자는 비구 250계 비구니 340계가 있다.
불교의 계는 개차법이 있어서 융통성을 강조한다.
잘 지킬줄도 알아야 하고 잘 범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예를 들면 어리석은 수위에게 잡상인을 들어보내지 말라고 하니까
그 날 오는 사람 아무도 들어보내지 않은 우치를 말한다).
신심.
첫째.「반야바라밀」이 능히 일체의 모든 번뇌를 지배하는 것을 믿는다.
둘째. 지혜로운 마음이 일체 세상의 일을 선처함을 믿는다.
셋째. 반야바라밀이 일체 모든 부처님의 출생지 태어난 곳임을 믿는다.
넷째. 자기 몸 자성가운데 본래 불성이 청정하여 더러움이
물들지 않고 부처님의 성품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不二 둘 아님을 믿는 것이다.
다섯째. 육도 중생이 본래 상이 없음을 믿는다.
본래 상이 없는데 공연한 중생이 미혹과 망상에서 상을 만든다.
여섯째. 일체 중생이 능히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 탁자 위의 부처님이 내려와서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자성 스스로 깨친 마음의 힘으로 이루는 것임을
아는 것이 바른 불교를 믿고 아는 사람이다.
인생에 대해서 또는 진리에 대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갖는 신념이
곧 믿음이다.
금은 보화를 아무리 많이 가진 집안이라도
인류와 국가에 자유와 정의를 위해서 희생한 사람이 없다면
금은 보화가 아무리 많아도 존재 가치에 대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더럽고 추한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오늘의 삶이 시련과 고통 척박한 삶일 지라도
부처님 (남편과 아내)을 서로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된다면
시궁창에 있어도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불교의 이치다.
사람을 위하는 것이 불교다.
사람을 위하자는 것이 불교다.
요행이나 신비를 바라는 눈뜨고 못보는 사람이 되지 말라.
나를 좋아 하든 미워하든 자비로써 차 한 잔을 나누는 불자가 되라.
불성인간
이 세상에 사람보다 나약한게 없다.
이 세상에 인간 보다 강한게 없다.
삶의 영역에서 스스로 도퇴되어 불가항력을 스스로 만들어 자살을 택한다.
빠져 나올 길 없는 미망에 옥상에서 뛰어 내리고 바위 위에서 뛰어 내린다.
바보는 자살하지 않은다.
좀 배우고 판단하는 지능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한다.
그런가 하면
장애인의 몸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부처님의 깨달으신 가장 위대한 업적은 인간이 부처라는 사실이다.
대만에 증음스님이라는 비구니 스님이 계시는데
공덕 자재회를 처음에 회원 세사람이 만들어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각국 봉사 회원이 5백만명이라 한다.
대학 병원이 6개이고 대학교가 6개이며 TV방송국도 3개나 된다고 한다.
어느날 몸이 아파서 병원에 들렸는데 임산부가 피를 흘리며
병원에서 돈이 없어 ?겨 나는 것을 보고
발심하여 돈없어 병원에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와야 겠다는 원력을
세우시고 만드신 것이
공덕 자재회라 한다.
이 세상에 사랑하지 못 할 사람 없고
이 세상에 믿지 못 할 사람 없고
이 세상에 용서 못 할 사람 없다 -라는 스님의 발원문이
바로 현존하고 살아있는 관세음 보살이다..
유교에서도 천지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 가르치신다.
사람 몸받기가 백천만겁 난조우라 한다.
팔만사천 대장경의 가르침이 인간의 존엄함을 일깨우는 가르침이다.
천박하게 살거나 비겁하게 살거나 남을 속이며 상처주지 말고 살아야 한다.
사람마다 가슴속에 세존과 다를 바 없는 그런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선재선재- 착하고 착한것이 우리들이란 것이다.
불성 인간
부처님의 성품을 가진 것이 바로 우리다.
닦아서 부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본래 구족되어 있는 불성을 바로 보라는 주장자 탁자 치는 소리다.
말로서 사람을 죽인다.
말로서 사람을 억울하게 만든다.
말이 지나치면 남에게서 죽임을 당한다.
사람이 아름다운 것은 그 사람의 품행이다.
고귀하고 존귀한 자신의 인생을 천하게 비겁하게 나약하게 만들지 말자.
고운 말 고운 미소 착한 마음 선한 행동 부처님의 가르침
보리심 으로 살아가자.
사랑하고. ...............
믿어주고. ................
용서 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이 바로 불성인간이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무량 대복이다.
거기다 불법을 만났으니 더 무량대복이다.
「득여시 무량복덕」 이다.
무량대복이란.!
부자집에 태어나거나 권세가 있는 집에 태어나거나.
왕자나 공주로 태어나는 것이 대복이 아니다.
왕자로 태어나 귀향가고 역적으로 몰려 참살당한 왕자가 왕보다 더 많다.
공주로 태어나 한 많은 일생을 외로움으로 죽어간 여인도 너무 많다.
어느 나라을 막론하고 군주시대의 역사가 그러 하다.
잘 먹고 잘 입고 보석을 칭칭감는다고 복 받은 것은 아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면 돈에 구속되어지고
권력을 오래 가지면 원망과 증오에 찌든다.
미모가 남보다 뛰어나면 춘화가 될 수 밖에 없다.
욕망에 갇히면 약자를 억압하여 「갑」이
「을」을 약탈하며 유린하게 된다.
부처님을 믿으면 복을 받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오직 무량대복을 받을 수 있는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이다.
시집가는 딸에게 어머니가 이른다.
얘야! 시집가거든 좋은 일은 하지마라.
왜요? 어머니.
좋은 일 해 놓고 좋은 일 했다고 생색을 낸다면 미움만 사게 되느니라.
「법상응시하황비법」.
좋은 일도 하물며 버려야 하거는 하물며 좋지 않은 일이겠는가
잘 했다는 것 옳은 일 했다는 것에 집착하게 되어지면
자연히 넝쿨에 호박이 따라 나오듯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따라 나오게 되는 것이다.
「상」 이 일어나면 모든 공덕이 사라진다.
무주상 보시
무주상 선행
무주상 공덕 실천 이 무량대복을 받을 수 있다.
뽐내지 말고. 자랑하지 말고 자기만 잘 했다는 집착을 버리라.
「불응취법」
응당히 꼭 옳은 법을 취하지도 말며
응당히 비법 그른 법도 취하지 말라.
천고에 변할 수 없는 도리.
자만심을 일으키면 모든 복덕이 사라진다는 가르침이다.
남의 내면을 이해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복 받을 사람이다.
사려가 깊고 안목이 있는 그런 사람도 복 받을 사람이다.
불교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다.
생각뿐인 믿음은 복이 될 수가 없다.
초파일에 연등 하나 밝히는 실천이 복 받을 행위다.
아버지 자리를 잃어 버리지 말라.
어머니 자리를 잃어 버리지 말라
아버지가 무량대복전 이요.
어머니가 무량대복전 이다.
그 옛날 삼천년 전 왕권정치 시대에
금지옥엽 귀하신 신분 태자가 무엇을 얻으려고 무엇을 위하여
제왕의 자리를 버리고 고행길에 투신 하셨을까.
6년의 긴 고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으시니
인류사의 최대 사건인 「중생」
사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으신 것이다.
죄업과 선업은 본래 존재 하는 것이 아니다.
죄도 사람이 짓고 선행도 사람이 하는 것이다.
세계의 지성 유네스코가 부처님의 경전 팔만대장경을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부처님은 팔만사천 법문을 설하시고도 자기는 한마디도 한 것이 없다 하신다.
무득무설,
얻음도 없고 설 함도 없다.
정말 대단한 말씀이다.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떨어지면 도인이 아니란 말씀이다.
공부을 잘하고 박사 자격을 가졌다고 인생을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인품과 덕성을 지닌 품성이 좋은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 하느냐.
여래가 최상의 깨달음을 얻었다 하는가.
부처님의 모든 것에 대해서 제가 이해하는 바로는 고정된
그 어떤 도리가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이라 이름 할만한 것은 없습니다.
깨달음 이란
마음의 세계에 거대한 변화가 온 것을 말한다.
그 거대한 변화를 꼭 꼬집어 한마디로 말할수는 없다.
색깔로도 표현 할 수 없고 모양으로 그려볼 수도 없고
향기로 뿜어 볼 수도 없다.
깨달았다고 하지만 깨달음의 흔적은 본래 없다.
깨닫기 전에도 밥을 먹고 깨달음 후에도 일상적으로 밥을 먹는다.
거대한 마음의 변화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알 수가 없다.
태어날때 부터 맹인인 사람에게 장미꽃을 아무리 설명해봐야
진짜 장미꽃을 설명으로는 알 수 없는 이치다.
사람 사람 얼굴이 다 다르다.
사람 사람 마다 마음이 다 다르다.
얼굴이 다르고 음성이 다르고 때에 따라 감정이 다 다르다.
그래서 팔만 대장경이다.
어제의 내가 다르고. 오늘의 내가 다르다.
무득무설
무엇이 설법인가
색즉시공 이요 공즉시색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걱정이 생긴다.
애정이 있기 때문에 시비가 생긴다.
애착이 있기 때문에 근심과 상처가 생긴다.
우리들은 인생이란 강을 건너야 한다.
대학을 나와서 직장을 얻으려면 경쟁의 강을 건너야 한다.
연인을 만나 사랑의 강도 건너야 한다.
아버지의 강
어머니의 강
인생의 강을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려면 뗏목이 필요하다.
좋은학벌 부유한 환경 이 뗏목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뗏목이 좋다고 하여 내리지 않는다면 넓은 바다로
떠내려가 난파선이 되고 말 것이다.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을 뗏목에 비유하신다.
아는 것이 병 이란 말이 있듯이 자기 식견에 갇히고
집착에 빠질까바 경계하시는 가르침이다.
불교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뗏목 놀이가 있다.
방생가고 삼사순례 가고 108배 참회 1.000배 3.000배 십만독
대다리니 기도등
니빠싸나 명상 염불 사경 독경 참선 100일 기도 1.000일 기도
지장기도 관음기도
등 수 많은 뗏목이 기다리고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 하셨다.
나의 설법을 너희들은 뗏목에 비유로 알라.
뗏목은 강을 건너는 데 목적이 있지 타고 노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세탁소에 갓 들어 오는 새 옷걸이에게
헌 옷걸이가 한 마디 했다.
너는 옷걸이라는 사실을 한시도 잊지말길 바란다.
새 옷걸이가 말했다.
왜 옷걸이라는 것을 그렇게 강조 하시는지요.
헌 옷걸이가 대답했다.
잠깐씩 입혀지는 옷이 마치 자기의 신분인양 교만해지는 옷걸이를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잠깐씩 입혀지는 직분과 명예가 자기 것인양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직위와 직분을 이용하여 거드름을 피우고 유명세가 있다고
남을 업신여기는 추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한다.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심통의 암 병이다.
나 - 라는 생각의 상 자존심을 내려 놓아라.
인상 - 남이라는 생각 비교하고 차별하는 상을 내려놓아라.
중생상 - 중생이라는 생각 착각 오해 하는 상을 내려 놓아아.
수자상 - 오래 산다는 생각 내 아니면 안된다는 상을 내려놓아라.
인생은 흘러가는 강물이다.
굽이치고 낙하하고 맴돌고 체워져서 흘러간다.
삶이란 멈추지 않은 강물이다.
죽는 날 까지 자기의 근본 에너지(心)를 마음껏 쓰면서 살아가는 것이
올바른 바라밀의 길이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 세계에 가득한 금은 보화로 보시하였다면
그 복덕이 얼마나 많겠느냐.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나 세존께서 하시는 많다는 말씀의 뜻은 말일 뿐 입니다.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 가운데 네 글귀 만이라도 받아 지녀서
남을 위해 말해 준다면
그 복덕은 앞의 복덕보다 훨신 뛰어 나느니라.
남을 도울 때 물질로 도우는 것보다 빵를 만드는 기술이 더 좋은
방법이 되듯이
사람은 배우고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란 것이다.
아프리카에 굶주리는 이들에 빵를 주기보다는 하루속히
배움의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이
더 좋은 방법이란 것이다.
기술은 배움에서 나온다.
인터넷 컴프터 스마트폰 자동차 비행기 모두가 과학 기술이다.
물질로 도와주는 것보다 창의력 기술을 개발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박봉에 시달리면서 공부를 시키는 이유가 법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법이란 헌법만이 법이 아니다
여기에서 법은 금강경 법을 말한다.
각 나라마다 문화와 습관의 차이에 의해서 관습이 다 다르듯이
통념과 이념이 그 나라 그 사람의 규범이 된다.
옛날 어리석은 유생이 남녀칠세 부동석을 만들어 자기 딸을 키웠다.
지금 세상에 적용해야 할 아무런 가치가 없다.
지금도 자기 집안에서는 그런 법이 있다는 규범으로 가족을 제약하는
어리석은 유생 양반이란 집안이 많다.
법이란 흘러가는 물이다.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것이다.
물길을 막아서 자기의 밭으로 끌어들이는 억행은 하지 말아야한다
가진 자들이 자본을 이용해서 자기들 이익에만 촛점을 맞춘다.
금강경의 주된 가르침 법은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 이다.
아상 - 나라는 자아의식의 법을 잘 지켜야 한다.
어리석은 유생처럼 자기 가족에 군림하여 자기만 귄세을 누리려는 어리석음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상
- 남이라는 한계의식에서 협조하고 조화롭게 더불어 공존하는 법을
훈습해야 한다.
중생상 - 비교하고 차별하는 얄팍한 군상의 열등의식에서 벗어나는
용기 새 헌법이 필요하다.
수자상 - 나이가 많은데 정년퇴직 했는데 지금 무엇을 하겠는가 하는
한계의식에서 깨어나야 한다.
우리는 법에 의해서 새롭게 태어난다.
새롭다는 것은 깨쳤다는 말이다.
모든 법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의식하며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이 새로운 법이다.
어제를 반조해 보면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다.
마음의 도리를 아는 것.
알았다는 것 깨달았다는 것이 법이다.
불교 특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 법이다.
일체법 할때 법이 부처님 가르치려는 법의 진리다.
귀의 불 귀의 법 귀의 승
부처님께 귀의하는 법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는 법
부처님 승단에 귀의하는 법
자유롭고 편안하게 순리대로 자신을 승화하는 것이 가장 좋은 법이다.
법에 제약을 받지 말고 법의 통제에도 걸리지 말라.
결국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