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90/ 허락도 없이 사람을 죽인 비느하스는 왜 하나님의 극찬을 들었는가? 그리고 어떻게 그의 행위는 속죄의 효력을 발휘하게 되었는가?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내 노를 돌이켜서 내 질투심으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그러므로 말하라 내가 그에게 내 평화의 언약을 주리니 그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민 25:11~13)
이스라엘이 싯딤에 도착하였다. 싯딤은 '아카시아 들판'이라는 의미의 아벨싯딤(민 33:49)의 줄임말이다. 그러니 이곳은 싯딤나무 혹은 아카시아나무가 무성한 평야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랜만에 아카시아 숲속에서 쾌적한 쉼터를 찾았을 것이다. 문제는 항상 그럴 때 찾아오는 법.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무장한 대군이나 광야의 맹수보다 더 치명적인 악을 만나게 된다. 자연의 혜택이 매우 풍부한 그곳은 음탕하고 비열한 바알숭배가 만연한 곳이었다. 민수기는 바로 이곳에서 그들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민 25:1)하였고, 그 여자들의 초청으로 "그들의 신들에게 절" (2절)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 음행이 곧 바알숭배로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염병이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사사들에게 “너희는 각각 바알브올에게 가담한 사람들을 죽이라”(5절)고 명하셨다.
그런 상황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였다. 한 이스라엘 남자가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을 데리고"(6절) 장막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영적 권위와 가치를 대놓고 무시하는 행동이다. 이에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그 남자의 막사로 따라 들어가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8절) 찔러 죽였다. 그러자 염병이 그쳤다. 14절과 15절은 이 남자의 이름이 시므리요, 그 미디안 여자의 이름이 고스비임을 밝힌다. 불명예스러운 이름공개이다.
시므리와 고스비를 죽인 비느하스의 행위는 종교보다 깊다는 '거룩한 분노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의분이라고 하더라도 잔인한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행위를 극찬한다. 하나님은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 (11절)하였다고 하였다. 당신의 마음을 대신하였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가 풀어지셨고 그 덕분에 이스라엘을 소멸하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비느하스와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 (13절)을 약속하시면서 그 이유는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13절)고 하였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개인적이고 즉각적이고 충동적이다. 그는 그렇게 행동할 아무런 공적 자격이나 권한을 갖고 있지 않았다. 또 그는 그렇게 행동하라는 어떤 명령이나 허락을 받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본인의 판단에 따라 즉각적으로 응징하였다. 그런데 속죄의 효과를 가져왔다. 이 경우는 개인의 어떤 특정 행동이 속죄의 효과를 가져온 유일한 경우이다. 물론, 고라의 사건 때에 아론이 향로를 들고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서서 속죄의 행동을 하여 염병이 그친다(민 16:46~48). 물론 아론은 당시에 대제사장이었기에 그렇게 할 만한 자격과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비느하스는 그렇지도 않았다. 이 케이스는 매우 다르다. 그만큼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비느하스와 그 후손들은 이 일로 하나님으로부터 평화의 언약 곧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을 얻게 되었다. 시편 106 30~31절은 “비느하스가 일어나 중재한 그 일이 “그의 의로 인정되었다"고 밝힌다. 이 표현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여호와께서 “의로 여기셨다(창 15:6)는 것과 같다. 한마디로 비느하스도 이 일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의 행위를 의롭게 여기신 것은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의 뜻과 부합되었고, 그의 동기가 순수하였기 때문이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였다는 말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를 비느하스가 잘 대변하였음을 보여 준다. 죄악에 대한 비느하스 자신의 증오는 명령이나 강압에 의해서 하는 행위보다 더 강하게 하나님의 심정을 나타낸 것이다.
비느하스의 행위는 성소에서 제사장들이 드린 속죄 의식으로 한 행위가 아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릴 때처럼 어떤 명령을 받고 한 행위도 아니다. 그의 행위는 그야말로 그 행위 자체가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속죄의 효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의 행위가 하나님의 영원한 의에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증오와 죄를 막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 준 실물교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