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로 시작
7월, 한해의 반이 지나고 나머지 반을 맞이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시작을, 기말고사를 망치는 것으로 시작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이번 시험은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 공부를 하기가 너무 싫어서 도무지 펜을 손에 잡고 교과서를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 달 전, 6월 모의고사가 있기 전부터 나는 성우학원에 들어가는 학원비와 부모님의 설득에 있어서 골머리를 썩고 있었고, 그렇게 6월 모의고사를 어영부영 보고 난 직후부터 부모님께 드릴 편지를 쓰는 것에 주력했으며,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것을 성공하고 나서는 그대로 미션 하나를 끝냈다는 안도감에 긴장이 풀어져 버려 며칠간 앓아야 했었다. 그러고 나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니까, 이게 뭐람, 기말고사까지 앞으로 2주도 채 남지 않았었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 새로 배우는 내용은 없었다. 그저 1학년, 2학년 때 배웠던 것들을 복습하면서 수능특강이나 수능완성을 풀 뿐인 나날들이었다. 새로운 지식을 학생들에게 이해시킬 필요가 없는 수업은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한 시간 졸고 일어났더니 단원 하나가 끝나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랬더니 기말고사 시험 범위는 당연히 폭탄이었다. 사회탐구 중의 몇 과목과 수학은 이미 ‘전 범위’라는 말도 안 되는 범위를 말하고 있었고, 국어와 영어는 문제집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는 내용들이 한 가득일뿐더러, 지문의 양이 너무 많았다. 답이 없었다. 도무지 2주 안에 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조금 노력하기라도 했으면 2주 동안 어떻게 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새로운 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고, 내신을 잘 받아서 대학에 갈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정시로 어디 대학을 넣어보겠다는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걸 열심히 해서 뭘 하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설령 나중에 대학에 가고자 해도 그 때는 내신이 아니라 정시로 지원해야 할 테고, 내 바로 아래 학년부터 바로 교육과정이 바뀌어서 수능 내용도 상당 부분 바뀔 텐데 뭐 하러, 뭐, 그런 생각, 그런 마음이.
어쨌든 그랬다. 그래서 야자시간에 대충 시간을 보냈고, 빨리 지나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다보니 벌써 6월이 다 지나고 7월이 되어버렸다. 기말고사를 맞이했다.
첫날, 첫날부터 수학이 들어 있었다. 어땠냐고? 뭘 바랄까. 그냥 적당히 봤다. 다른 과목들도 마찬가지였다. 쉬는 시간에 별표 쳐져 있는 것만 대충 훑었더니 주관식은 어떻게든 맞췄는데, 객관식에서 다 망쳤다. 평균보다 조금 못하게 나올까. 어쩌면 항상 평타는 치던 성적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신기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리 아쉽지 않았다.
이건 정말로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었다. 뭐가 그렇게 신기하고 이상한 일이었냐 하면, 스트레스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항상 시험기간만 되면 아팠고, 우울해했는데 이번에는 그런 증상이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스트레스성 윤활막염, 헤르페스, 손가락 관절부위의 습진과 우울함. 심지어 그 망쳐진 성적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결국 그런 거지, 사실 이번 시험에 성적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성적이 아주 낮게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울교대 출신의 학교 선생님이신 두 부모님 아래서 당연히 잘해야만 했던 내가, 그분들의 기대를 벗어날 수 있을 증거라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랐으니까.
뭐, 어쨌든 이건 좋은 일인가? 성적만 보자면 이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니었다. ‘성적만 보자면’ 말이다. 하지만, 글쎄, 나는 이게 나름대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일단 내게는 성적이라는 게 그리 중요하지 않고, 고등학교 올라오고 나서부터 항상 나를 괴롭혔던 것들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하하,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에 있을까?
그래, 나는 이렇게 한해의 남은 반을 시작했다. 이제 반년이 지났는데, 많은 것이 지나간 기분이다. 성우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 부모님을 설득시킨 것, 선생님께 내 의사를 전한 것, 모든 것이 반년에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반년동안 내 나름대로 고등학교 시절의 마무리를 준비하고, 또 시작되는 내 나름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야겠다.
말풍선)
중학교 때부터 꾸던 꿈, 이제 시작합니다 :)
첫댓글 멋있어요....!
당당한 그 모습
[렛세이] 응원 감사합니다! 렛세이어 분홍 님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꼭 지켜봐주세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