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style="text-align: left;">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br> <br> 고정희 <br><br>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br>선산뒤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br>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br>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br>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br>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br>방생의 시냇물 따라<br>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br>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br>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br>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br>망망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br><br>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br>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br>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br>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br>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br>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br><br>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br>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br>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br>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br>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br>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br><br><br>고구마<br><br> 김명숙<br><br>'지나는 길에 들러라'<br>고구마 가져 가라는 오빠의 전화<br>지난번 받은 감자도 아직 남았는데<br><br>베란다 한구석<br>고구마 상자 바라보면 <br>흙투성이 손 내밀며<br>아버지 빙그레 웃으시네<br><br>따끈한 고구마 한 입<br>가슴에 숭숭 구멍내는 <br>가을 바람 밀어내네<br><br></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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