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 돋는 책, 권여선, <술꾼들의 모국어>
별로 없는 어릴 때 기억 중 하나는 외식을 가선 아빠에게 된통 혼나고 입이 댓발 나왔던 장면이다. 나는 파, 양파, 마늘같이 또래 애들도 싫어할 법한 야채나 채소는 당연히 싫어했고, 아빠가 비싸다고 데려간 횟집에선 물컹물컹한 회의 식감이 소름돋아 초장에 거의 담궈야만 한두조각 먹을까 했다. 아빠는 먹을 줄 모른다고 답답해 하시다간 결국 화를 내곤 하셨고, 그러게 왜 회를 먹으러 오나 억울한 마음에 화가 잔뜩 나는 것이었다.
엄마아빠는 내가 어릴 때 잘 먹지 않았고 편식이 심했다곤 하지만, 내 스스로는 다른 초딩들도 싫어할만한 것들을 싫어한 평범한 아이였다고 생각한다. 주로 물컹한 것들을 싫어했는데 국에 들어간 무, 시큼하고 거무죽죽한 오이소박이, 씹으면 죽죽 물이 나오는 버섯, 껍질이 뽀더덕 거리는 가지 등이 싫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물컹거리는 것을 싫어하는 건 음식이 상했을까봐 피하게 되는 인간의 본능이라는 걸 어디서 보고 이상하게도 조금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평소 먹는 것만 먹고 지내던 내가 여러 음식에 도전하게 된 건 대학생 이후다. 집밥과 학교 급식을 벗어나 내 식사를 내가 선택해 먹을 일이 많아지고,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과 약속에서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 많았다. 편식은 커녕 호불호가 갈린다하는 음식들도 모두 잘 먹었고, 어릴 때 못 먹던 물컹거리는 야채들이며 회까지 모두 좋아하게 되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할 때 내가 못 먹거나 싫어하는 음식이 따로 없어 나는 의견도 내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만큼! 음식들을 좋아하게 된 나에게 권여선 작가의 산문 <술꾼들의 모국어>는 앉은 자리에서 술술 읽히는 맛깔나는 책이었다.
싱그럽고 따수운 표지만으로도 눈길을 사로잡는 <술꾼들의 모국어>. 실제로 보면 더 귀엽다. 9월이니 가을에 이 책을 읽게 됐지만, 책의 표지는 여름을 연상시키고 올해 9월은 여름이나 마찬가지의 날씨였으니 푹푹 찌는 더위에 읽은 책으로 기억남을 것 같다.
자필로 쓴 작가의 말이 책의 맨 앞장에 있어 기분이 좋다. 작가님들은 어째 글씨마저 이렇게 매력있는지. 냄비국수와 김치볶음밥에 대해 가볍게 쓴 문장들부터 음식을 사랑하는 작가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책을 독자에게 건네는 메뉴판이라고 소개하셨는데, 책은 사계절에 걸쳐 4~5가지의 음식과 에피소드들을 다루고 있고 5장은 작가님의 별식으로 따로 구성되어있다.
각각의 계절에 작가는 무슨 음식을 소개했는지. 음식에 무슨 사연이 들어있는지. 책을 넘겨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음식 중에 김밥, 물회, 간짜장처럼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올 때면 더 입맛이 돌았고 자연스럽게 그 음식들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떠올려 보게 됐다. 계절을 상징하는 음식, 그 계절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 그 계절이 되면 유독 먹고 싶어지는 음식. 거뜬히 몇 시간은 얘기할 수 있는 즐거운 주제같다.
다만 아주 조금 아쉬운 건, 이 책을 읽으면서 빠질 수 없는게 '술'인데 임신 중이라 술을 못 마신지 오래 됐다는 점. 사실 임신 전에도 절대 '애주가'에 속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맥주, 하이볼, 소토닉 같은 술을 좋아했으니 괜히 책을 읽으며 더 생각이 났다. 고됐던 일주일의 금요일이나 내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싶을 때 밤늦게 시켜먹은 참치회에 매화수나 닭발과 맥주, 꼬치와 하이볼들이 지나쳐갔다. 맛있는 음식과 술은 아무런 말 없이도 사람을 위로해주고 충전시켜주는 든든한 힘이 있다.
몇 년전 반려견이 아팠을 때 '우리 강아지가 정말 많이 아픈 거구나'를 느꼈던 순간이 있다. 밥과 간식이라면 숨도 쉬지 않고 먹던 반려견이 음식을 앞에 두고도 눈을 돌리지 않을 때였다. 가슴이 철렁이면서 그렇게 좋아하던 간식을 쳐다도 안 보는 모습에 눈물이 났었다. 결국 내 반려견은 하늘나라에 갔는데 반려견을 떠올릴 때마다 나의 잘못들만 떠오르지만 그 중 떠오르는 다행인 기억은 반려견에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줬던 것. 비싸다고 망설이면서 좋은 간식을 사줬던 것. 이거 좋고 비싼 건데 천천히 음미하면서 먹지~ 얄미우면서도 흐뭇했던 때가 생각난다. 음식은 나를 위로하면서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것이다.
대학생을 지나 아예 독립을 하게 되니 어떨 땐 매끼 챙겨먹는 게 귀찮아지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시켜먹기도 하고 외식도 하면서 입맛을 찾지만, 아주아주 드물게 아무 것도 안 먹고 잠만 자고 싶은 힘든 날들도 있었다. 지금보다 어릴 땐 입맛 없는 김에 다이어트나 하자는 생각에 그냥 냅다 자거나 라면같은 걸로 때워먹곤 했다. 하지만 이젠 그럴 땐 먹는 걸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까지 힘들었구나, 피곤했구나 하는 생각에 내 스스로 안쓰러워지면서 '더 좋은 걸로!', ' 더 건강한 걸로!' 한 끼를 챙겨먹어야지 하는 의젓한 다짐을 하게 되더라. 이왕 먹는 거 좋은 걸로, 건강한 걸로,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니까.
책에 아주 얇은 책자가 들어있었다. <자전거, 캔맥주 그리고 곰>. 3분이면 후다닥 읽는 짧은 소설인데 입에 미소가 지어지는 앙증맞은 소설이다.
비교적 작은 크기의 책이지만 읽고 나면 뭐 하나 해 먹고 싶게 입맛이 도는 귀여운 책이다. 읽으면서 나를 키우며 온갖 것을 먹이려 노력했을 엄마 생각도 많이 났다. 내가 하면 나지 않는 엄마표 국과 찌개, 나물들이 먹고 싶어지기도 했다. 현재 진행형이긴 하지만, 남편과 맛있는 것을 먹으러 떠돌아다닌 맛집들도 새록새록 생각났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저녁 얘기를 하고, 밤이 되어 누우면 다음 날 점심을 생각하는 나에게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향수를 불러일으킨 <술꾼들의 모국어>.
권여선 작가님은 유명하지만 작가님의 책을 처음 읽어보았는데, 여러군데서 추천을 받았던 <각각의 계절>과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현재 오후 6시 12분. 이 글을 마치면 금요일 저녁을 차려야 하는데, 오늘은 어떤 저녁을 먹고 어떤 시간을 보낼지 기대가 된다.
[출처] 입맛 돋는 책, 권여선, <술꾼들의 모국어>|작성자 555zzz5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