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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 김희태 소장
문화유산 숨은 가치 세상에 알리는 프론티어
“제게는 비지정 문화유산이 ‘꽃’과 같습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 구절 속 꽃이요.”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각종 역사기록물을 나침반 삼아 문화유산이 있거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현장을 구석구석 답사 다니며 ‘역사의 흔적과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태봉산에 있는 ‘외금양계비’가 화성시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됐을 때 뭉클했습니다. 왕릉에 세워진 금표(禁標) 중 유일하게 지금까지 실물이 남아있는 비석인데 그동안 방치돼 있었거든요. 우리 연구소의 활동을 통해 비석이 세상에 알려졌고 학계의 관심과 검증을 거쳐 가치를 인정받은 사례라 뿌듯했죠.”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는 경기도 수원과 화성을 기반으로 한 국가유산 지킴이 단체로 김희태 소장이 주축이 돼 2018년 설립했다.
Q. 국가유산지킴이의 여러 활동 영역 중에서 문화유산‘조사와 연구’에 집중하고 있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 이름 그대로 역사에 이야기를 더하는 게 저희 활동의 지향점입니다. ‘이야기’는 창작이 아닌 사실을 기반으로 해요. 문화유산에는 오래전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기 때문에 팩트를 추적하며 그 의미를 곱씹는데 몰두하고 있습니다.
특히 비지정문화유산에 관심이 많아 이 분야에 역량을 모으고 있습니다. 현장 조사 – 지속적인 모니터링 – 사료 연구 – 홍보 – 후속 활동까지 연계하려 애쓰고 있죠. 산속에 방치돼 있던 외금양계비도 이런 과정을 거쳐 2023년에 화성시 문화유산으로 지정됐어요.
경기도 안성 배태리 태실 조사도 기억에 남아요. ≪조선의 태실3≫(1993년 발간)에 태봉산 중태봉에 있다는 구절과 안성 지역신문에 실린 사진 한 장에 의지해 안성의 태봉산을 찾았어요. 마을 주민들에게 중태봉 위치를 물어가며 산을 샅샅이 뒤져 어렵게 태실비를 발견했습니다. 삼국시대 왕자 태실로 알려졌는데 비문에 새겨진 연대를 판독하니 의구심이 들더군요. 연호를 실마리 삼아 고증을 거쳐 조선시대 성종의 왕자 태실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경기도에 제보했어요. 그 후 경기문화재연구원이 현장 실사와 검증을 거쳐 조선시대 태실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죠.
저희 연구소는 잊혀지고 버려졌던 비지정 유산의 이름을 되찾아주고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고 있어요. 적은 인력으로 선택과 집중을 위해 지금은 유산 조사와 연구에 집중하고 있어요. 앞으로 전문 역량을 쌓아 차근차근 확장해 나가야 겠죠.
Q. 유산을 발견한 것 못지않게 그 가치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일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기록화 작업과 온라인을 통한 홍보에 신경을 씁니다. 연구소 자체적으로 학술발표회를 열어요. ‘화성 외금양계비의 연구와 과제(2022년)’ 등 정기적으로 연구 성과 공유회를 꾸준히 열며 축적한 지식을 나누고 연구소의 연구 활동을 홍보합니다.
언론 홍보도 꾸준히 신경 씁니다. 지역 언론사나 온라인 미디어에 문화유산을 주제로 글을 연재하며 페이스북, 블로그 등 SNS채널에 우리 활동의 결과물과 의미를 기록합니다. ‘문화유산 콘텐츠’가 여러 루트를 통해 차곡차곡 축적될수록 불특정 다수에게 닿을 확률이 많아지기 때문이죠. 고정적으로 글을 올리는 홍보 채널이 약 20곳 됩니다.
비지정 유산을 알리기 위해서는 지자체, 정부 기관, 학계와 우호적인 네트워킹도 중요해요. 수원시, 화성시, 경기도문화재연구원 등의 공무원, 연구진, 지자체 의원들과도 소통하고 있어요. 유산 조사와 연구, 기록화, 공공 기관과의 연대, 언론과 온라인 홍보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애쓰는 중입니다.
Q. 연구소 회원은 어떻게 구성돼 있나요?
40~50대가 주축이 된 일반지킴이 9명, 가족지킴이 1팀이 활동합니다. 열성적으로 참여하는 진성 회원들로 문헌 연구와 현장 답사에 진심인 분들이죠. 연구소에서 매월 진행하는 답사는 주제를 정해 움직입니다. 일정이 빡빡할 뿐만 아니라 험하고 낯선 산길을 올라야 할 때도 있어요.
특히 비지정 문화유산은 마치 고난도 보물찾기 같아요. 금표나, 태실을 찾아 땀 뻘뻘 흘리며 산을 올라 나무 덤불 속에 가려진 비석을 발견할 때 뭉클함을 느끼죠. ‘왜 여기에 있을까?’를 회원들끼리 추론하며 새겨진 글귀를 한 글자씩 짚어가며 서로의 지식을 총동원해 토론하고 추론하면서 새로운 걸 발견하는 데서 매력을 느끼죠. 유산 모니터링, 환경정화 활동도 꾸준히 펼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안동 봉정사 금혈비(禁穴碑)도 저희 연구소와 인연이 깊어요. 기존 자료를 근거로 봉정사 일대를 답사하다 사찰 부근에 방치돼 있던 비석을 발견했어요. 비문 속 글자를 판독해 보니 기존 자료의 오류가 보이더군요. 우리가 새롭게 발견한 내용과 수정할 부분을 정리해 관련 기관에 알렸습니다.
회원들은 현장 답사와 조사, 학문적 토론을 즐기는 분들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이란 험난한 시간도 거뜬히 이겨내고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연구소는 회원들이 낸 회비로 운영되고 아직까지는 국고 지원을 받지 않고 있어요. 앞으로 지킴이 회원을 20명까지 확대할 예정인데 연구소가 꾸준히 성장할 수 있도록 활동의 방향성을 구체화하고 회비 구조, 법인화 등에 대해 논의할 계획입니다.
Q. 비지정 유산에 애정이 깊습니다. 어떤 지점에서 끌림을 느끼나요?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이 있습니다. ‘비지정 유산’을 가치가 떨어진다고 여기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가치가 있지만 아직까지 지정되지 않은 문화유산이란 따스한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지정 유산은 공적으로 보호받는 영역 안에 있지만 비지정 유산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훼손이나 도난에 취약합니다. 저희 연구소가 이 분야에 집중적으로 힘을 쏟는 것도 우리 역사의 귀한 흔적을 지켜내기 위해서입니다.
한편 일반인들의 편견 때문에 비지정 유산으로 남아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본인 소유 땅에서 문화재가 발견되면 불편하는 분들이 있어요. 사유재산이 침해될 것을 우려해 쉬쉬하기도 해요. 이 부분은 앞으로 일반인들의 인식 전환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해요. 사실 비지정 유산이 지역의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소유주의 재산권 행사가 제한되지는 않아요. 야외에 계속 두면 훼손될 우려가 있다면 진품은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현장에는 모조품과 안내판을 설치하는 등 케이스별로 국가 차원의 체계적인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24년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으로 지자체가 비지정 유산까지 관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인력과 예산의 뒷받침이 되지 않는데다 전문성이 부족해 엄두를 내지 못하고 실정이지요. 앞으로 국가유산지킴이 단체들이 힘을 보태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지자체와 협력해 지역 내 비지정 유산 현황 조사와 DB 구축, 문화유산 활용 프로그램 개발 등을 차근차근 해나가야 하지요. 각 단체의 전문 역량을 키워나갈 기회라고 생각해요.
저희 연구소의 활동 기반이 되는 화성만 해도 비지정 유산들이 많아요. 향토유산을 포함한 지정 문화유산이 약 70개인데 비해 비지정 유산은 2022년 조사에서 약 310개로 확인됐습니다.
화성은 동쪽과 서쪽 지역 분위기가 확연히 다른 도농복합도시입니다. 신도시로 개발된 동탄신도시와 달리 서쪽은 논밭이 많은 전형적인 농촌입니다. 연구소에서는 힘닿는 대로 화성시 비지정 유산 조사에 힘을 쏟으려 합니다.
Q. 연구소에서 정주 능행길 유적 조사에 힘을 쏟고 있는 것도 이의 연장선상이네요.
정조 능행길은 정조가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부의 화산으로 이장한 뒤 원행에 나섰던 길로 수원과 화성으로 이어지는 능행길에 18개의 표석을 세웠습니다. 수원시에 4개의 표석(지지현, 괴목정교, 상유천, 하유천), 화성시에 2개의 표석(안녕리, 만년제)이 남아 있습니다. 저희 연구소에서는 만년제 표석에 관심을 갖고 연구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안녕리 표석은 화성시 향토유산으로 지정된 반면, 만년제 표석은 아직까지 비지정 유산으로 남아있고 현재 화성시 역사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입니다. 만년제 표석이 있던 자리에 복제품을 세워 대중에게 알리고 향토유산 지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안녕리와 만년제 표석은 정조 능행길을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화성시의 의미있는 유산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수원시에는 정조 능행길 표석 가운데 하나인 지지현 표석(2022년 발견)이 아직 비지정유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표석이 수원시 향토유산으로 지정되고 기존의 지정 유산인 괴목정교와 상유천, 하유천 표석과 함께 능행길 표석으로 한데 엮어 널리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저희 연구소는 수원과 화성 일대 흩어져 있는 정조 능행길 관련 문화유산들을 국가유산지킴이 활동과 연계하려 합니다. 만년제 표지석을 널리 알리기 위해 굿즈를 자체 제작해 나눠주는 등 여러 활동을 펼치는 중입니다.
최근에 문화유산을 관광자원화 하기 위해 지자체마다 힘을 쏟고 있습니다. 이제 ‘화성하면 수원’이 떠오르고 역사, 먹거리 등이 어우러진 덕분에 많은 관공객이 찾는 명소가 됐어요. 오랜 시간에 걸쳐 지킴이 단체들의 활동과 학문적 연구, 지자체의 노력이 어우러진 결과입니다. 저희 연구소는 지역 내 숨은 보물 같은 유산을 발굴해 가치와 의미를 찾아주며 세상에 알리는 기초 작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이 쌓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화유산 활용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점점 입소문이 나서 관광자원으로 개발되겠죠.
Q. 연구소의 중심축인 김희태 소장은 1981년생으로 전국의 국가유산지킴이 단체 사이에 ‘젊은 피’로 통합니다. 어떻게 이 분야에 뛰어들게 됐나요?
저는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가 보고 듣고 느끼고 발견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히스토리텔러(history+storyteller)’입니다. 강의와 글을 통해 대중과 만나고 있어요.
대학에서 문화교양학을 전공했고 자연스럽게 역사,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전국으로 답사를 다녔어요. 많이 또 오래 다니다 보니 관심 분야가 좁혀지더군요. 왕릉, 태실, 금표처럼 테마가 있는 전문 답사로 이어졌습니다. <김희태의 이야기가 있는 역사여행> 블로그(blog.naver.com/bogirang)에 답사 경험담을 꾸준히 올리고 있습니다.
답사 현장에서 보도 듣고 느낀 점과 문헌연구 자료를 주제별로 묶어 ≪한국의 금표≫, ≪왕릉으로 만나는 역사:신라왕릉≫, ≪경기도의 태실≫, ≪조선왕실의 태실≫, ≪문화재로 만나는 백제의 흔적:이야기가 있는 백제≫ 등의 책을 썼습니다.
2015년부터 국가유산지킴이로 활동을 시작했고 현재는 국가유산지킴이 경인권거점센터 홍보기획팀장, (사)한국국가유산지킴이연합회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걸 꾸준히 하다 보니 어느덧 저만의 콘텐츠가 쌓이면서 꾸준히 기고와 강의로 이어졌고 다른 단체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맺어가는 중입니다.
연구소 회원들과 방향성이 뚜렷한 지킴이 활동을 펼치며 1~2년 마다 1권씩 책을 펴낼 만큼 유산 연구에 진심을 쏟고 있는 김희태 소장은 문화재청장 표창(2023), 수원시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활동과 시정 홍보 공적으로 수원시장 표창(2021, 2022년)을 수상했다. 최근 그는 금표(禁標) 연구에 푹 빠져있다.
Q. 수년 째 금표(禁標) 연구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금표를 총정리한 ≪한국의 금표≫ 책도 펴냈습니다.
금표는 출입이나 이용 제한을 두는 금지를 표시한 것으로 표석이나 바위에 새겨놓았습니다. 조선왕실의 태실을 조사하면서 태실에 금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울진 금강소나무숲길을 비롯해 산림 조사를 하면서도 꽤 많은 수의 금표를 확인했습니다. 화성 외금양계비를 연구하면서 왕릉 관련 금표의 존재를 알게 됐죠.
≪한국의 금표≫는 우리나라 금표를 총정리한 기초 자료로 왕실 관련 금표, 산림 금표, 사찰 금표, 제단˙신앙 금표, 장소 관련 금표 등으로 분류했습니다. 금표에는 시대가 반영돼 있어요. 당시 사회와 문화적 맥락과 함께 금표를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연구주제입니다. 폭넓고 깊게 공부해 앞으로 금표학으로 체계화하고 싶습니다.
이 외에 연구하고 싶은 주제는 우리나라 천주교 200년사입니다. 조선후기 천주교 전래와 박해, 그리고 우리나라에 뿌리내리기까지 많은 천주교인들의 대하 서사가 전국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이 주제를 입체적으로 다뤄보고 싶어 차근차근 자료를 모으는 중입니다.
Q. 국가유산청이나 국가유산지킴이 경인권거점센터에 바라는 점, 건의하고 싶은 부분이 있나요?
저희 연구소는 유산 조사, 연구의 전문성을 높이는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국고 보조금 사업에 의존하지 않고 회비로 필요한 경비를 조달하며 자립 기반을 만들려 애쓰는 중입니다. 직접적인 예산 지원보다는 저희가 주최하는 학술발표나 행사에 인력이나 대외 홍보, 포상 같은 간접적인 지원이 더 필요해요. 여러 지킴이 단체들과 지자체, 공공기관에서 관심을 갖고 저희 행사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실 때마다 큰 힘을 얻습니다.
또 다른 건의 사항은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 높이기입니다. 현장 활동을 하다 보면 문화유산 지정을 재산권 침해로 받아들이며 지킴이 활동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비지정 유산은 개인 소유가 많아 더욱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문화유산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국가유산청과 여러 단체들이 적극적으로 나서기를 바랍니다. 저희 연구소도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겠습니다. 국가유산지킴이 활동의 활성화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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