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지오마리애의 사도직과 선교에 대한 고찰
들어가는 말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늘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공경하며, 모시고 살아간다. 그러나 진정으로 성모 마리아를 자신의 어머니로 모시고 따르는지는 우리 자신에게 진정 물어 볼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강력하고 힘 있는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어머니를 따르는 레지오 마리애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우리 가톨릭 교회는 '평신도 사도직적 전통의 교회' 라는 역사적 평가를 받아왔다. 평신도들은 가톨릭교회의 탄생과 발전에 중추적 역할을 다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평신도들은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이웃에게 전파하였다.오늘날 갈라진 형제 개신교 신자들은 가톨릭교회의 성모 신심에 대하여 우상 숭배라는 그릇된 이해와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신심이 약한 우리 신자들도 성모신심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경계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각 교구의 본당 안에서 가장 많은 신자들이 활동하는 평신도 단체는 레지오 마리애 단체일 것이다.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지 않은 본당은 거의 없을 정도로 매우 활성화 되어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레지오 마리애가 무엇을 하는 단체인지 어떻게 시작되었고, 한국에는 언제 도입되었으며 어떻게 발전하게 되었는지, 발제자는 본 논문을 통하여 한국 레지오의 역사와 그 조직, 또한 사도직과 선교이념, 방법 등 활동에 대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의 레지오 마리애는 다른 나라의 레지오에 비하여 급속한 발전을 이루면서 선교의 일익을 담당한 것 같다. 한국 천주교회에 있어서 레지오 마리애는 '평신도 사도직 단체'라고 하는데, 레지오 마리애가 가지고 있는 선교의 이념과 배경에는 어떤 방식이 있었는지? 또한 이념과 방식은 한국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한국 레지오 단원들의 고유성과 발전 요인들은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본 발제자는 현재 쁘레시디움 단장으로서의 사도직을 수행하고 있기에 한국 천주교회의 선배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의 숭고한 선교 이념을 어떻게 계승 발전 시켜야 하는지 고찰하고 또한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 역사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결론에서는 본 논문을 요약하는 동시에 '레지오의 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국 레지오의 고유성과 발전 요인을 평가 하고자 하며, 끝맺음으로 논문에서 살펴본 레지오의 선교 이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레지오 마리애의 발전을 위한 방안을 제시할 것이다.
제1장 : 레지오 마리애란 무엇인가?
레지오 마리애는 가톨릭 교회가 공인한 단체로서, 모든 은총의 중재자이시며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의 강력한 지휘 아래, 세속과 그 악의 세력에 맞서는 교회의 싸움에 참가하기 위하여 설립된 군대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명칭은 라틴어로 '마리아 군단' 이라는 뜻이다. 레지오 마리애는 고대 로마 군단의 형태로 조직 되었으며 그 명칭도 거기에서 유래되었다.
1.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
"레지오 마리애의 첫 번째 회합은 1921년 9월 7일 저녁 8시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탄 축일 전야에 아일랜드 더블린 시 프란시스 거리에 있는 마이러 하우스에서 있었다." 이 첫 번째 회합에 참석한 사람들은 빈첸시오회의 지도신부인 토허 신부와 프랭크 더프및 여성 13명이었다. 이러한 모임은 '자비의 모후' 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는데, 주 1회 매주 수요일 정기 모임을 갖고 회원 2명씩 조별로 하여 병원으로 환자를 찾아가 위로하도록 파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레지오 마리애 교본에 명시되어 오늘날 쁘레시디움 주회와 행동 단원의 주간 활동으로 전해오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의 모체가 되고 있는 '자비의 모후회'의 탄생 동기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몇몇 회원이 주일마다 모여 기도와 영적 독서를 하고, 활동 중에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해결하고 '교구 빈민원' 의 환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하여 모임을 갖게 된 데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레지오 마리애의 뿌리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큰 영향을 받았다.
2.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
"레지오 마리애의 정신은 바로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라고 하겠다. 성모님의 깊은 겸손과 온전한 순명, 천사와 같은 부드러움, 끊임없는 기도, 갖가지 고행과 영웅적인 인내심, 티 없는 순결, 천상적 지혜, 용기와 희생으로 바치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갖추고자 열망하며, 무엇보다도 성모님이 지니신 그 높은 믿음의 덕을 따르고자 갈망한다. 성모님의 이와 같은 사랑과 믿음에 감화된 레지오는 어떤 일이든지 모두 해보려고 하고 할 만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할 수 없다는 불평을 결코 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단원들이 평생 묵상하고 실천해야 할 것으로서 이 열 가지 덕목들은 레지오 단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3.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
일반적으로 군대는 '전투 부대와 보급 부대로 나누어지는데, 레지오 마리애
에 있어서 전투 군인은 행동 단원이고. 보급 군인은 협조 단원이다.
1) 행동단원
행동단원은 일반 행동단원과 쁘레또리움 단원으로 구분한다. 일반 행동단원은 상훈에 있는 네 가지 사항을 준수하는 단원이다. 쁘레또리움 단원은 일반 행동단원보다 높은 등급의 단원으로서 행동단원의 통상적인 의무와 함께 다음과 같은 신심행위를 추가해서 이행한다. 첫째 매일 뗏세라에 있는 모든 레지오 기도문을 바친다. 둘째 매일 미사참례와 영성체를 한다. 셋째, 매일 성교회가 공인한 일정 형태의 성무일도를 바친다.
2) 협조단원
레지오는 활동의 열매가 기도에 달려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각 쁘레시디움은 기도로써 행동단원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협조단원을 모집한다. 협조단원이란 행동단원의 임무를 이행할 수 없거나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레지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함으로써 레지오에 참여하는 단원이다. 협조단원은 일반 협조단원과 아듀또리움 단원으로 구분된다. 일반 협조단원은 그냥 협조단원으로 불리며 이 협조단원의 봉사는 뗏세라에 있는 모든 기도문을 매일 바치는 것이다. 아듀또리움 단원은 윗 단계 협조단원으로서 뗏세라에 있는 모든 기도문을 매일 바치는 것 외에도 매일 미사참례와 영성체, 성교회가 인정한 성무일도를 추가로 바쳐야 한다. 레지오는 특히 사제와 수도자들이 아듀또리움 단원이 되기를 바란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영신적인 힘을 만들어내는 발전소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제2장: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 이념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랭크 더프의 선교 이념이라고 하겠다. 레지오 마리애는 프랭크 더프의 선교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탄생 되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는 프랭크 더프의 선교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프랭크 더프의 선교 이념을 3가지의 주제인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서의 선교', '선교 활동을 통한 성화', '마리아를 통한 선교'로 나누어 보고자 한다.
1.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선교
레지오의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는 1913년에 레지오의 뿌리인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여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과 양식을 나누어 주는 활동을 하였다. 프랭크 더프는 가난한 사람들을 방문하는 길에 항상 그들을 물질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도우려 했다.
그는 빈첸시오 활동을 하면서 가난한 이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 경제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그들이 신앙을 실천하는데 무지하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하지 않았기 때문에 빈첸시오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프랭크 더프는 물질적으로는 빈곤하지 않지만 영적으로 빈곤한 이들, 그리고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사도직을 시작하게 되었다. 더프는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걸어서 더블린 시의 뒷골목을 다니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기적의 패와 성수를 나누어 주면서 쉬는 교우와 비신자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실천하였던 것이 프랭크 더프의 선교의 시작인 개인적 선교 활동이었다.
1917년 더블린시의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 회원들의 수가 많아 두 개의 협의회로 나누게 되었고 회장으로 프랭크 더프가 선출되었다.
프랭크 더프는 그가 담당한 성 패트릭스 협의회를 통하여 빈첸시오 회의 고유한 활동인 빈곤한 이들에 대한 물질적인 원조 뿐 아니라, 다양한 선교 활동을 실시하였다. 먼저 성 패트릭스 협의회의 회원들은 신자가 아닌 어린이들을 모집하여 교리 수업을 시작하였고, 신자들에게 매일 미사를 권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계기는 어린이 들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도 확대되었다.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는 여성들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어 처음으로 여성들이 빈첸시오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이러한 프랭크 더프의 선교 활동은 크나큰 성과를 보게 되었다. 평신도로서 선교 활동을 하고자 많은 이들이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원자가 늘어나고 선교 활동이 활발해질 때에, 이를 조절하고 감독하기 위하여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는 기구를 설립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비로소 프랭크 더프의 선교 활동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단체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와 그의 동료들의 선교 활동은 아직 레지오의 선교 활동이기 보다는 빈첸시오회의 한 지부에서 협의회의 회장에 의해 실행된 빈첸시오회의 특별한 활동이었다. 이와 같이 프랭크 더프는 자신의 선교 활동을 위하여 빈첸시오회의 조직과 인력을 사용하였다.
선교 활동을 위한 관리 기관을 설립하고 4년 후인 1921년 9월 7일 더프는 선교를 위한 평신도 사도직 단체를 창설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단체의 회원들은 모두 빈첸시오회의 회원이었던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4년간의 빈첸시오회 회원들의 성공적인 선교 활동을 주지하면서 더 이상 평신도는 선교에 있어서 수동적 존재가 아니며, 수동적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되겠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선교활동에 있어서 평신도는 '자비의 모후'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고 후에 레지오 마리애로 개칭되었다. 레지오 마리애는 설립 당시부터 평신도들에게 선교활동이라는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사목적 사도직에 착수하였다.
레지오 마리애의 설립 당시에는 평신도 사도직으로서 선교활동에 대한 선례가 없었기 때문에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은 매우 획기적인 것이었다. 레지오 마리애의 탄생 직후부터 선교활동의 수행은 선교활동에 있어서 평신도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하게 하였다. 즉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의 설립과 활동은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의 선각자적인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활동은 평신도 사도직 활동으로서의 선교를 의미하며, 동시에 평신도 사도직의 사명 의식을 일깨우고자 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2. 선교활동을 통한 성화
1) 성화(聖花)의 모델 마리아
더프는 교본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은 단원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데 있다." 고 밝히고 있다. 레지오의 목적인 성화란 하느님의 성스러움에 이르거나 참여한다는 것이며,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프랭크 더프는 마리아를 성화의 전형적 모델로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마리아는 성부께 대한 온전한 순명과 그리스도와의 온전한 일치 그리고 성령의 역사하심에 전적으로 협조하였기 때문이다.
마리아는 성화의 모델이면서 동시에 모든 은총의 중재자로서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프랭크 더프는 마리아는 모든 어머니들이 아기가 태어나 성숙할 때까지 늘 곁에서 보살펴 주듯이 당신 자녀들이 "그리스도의 완전성"(에페4,13)에 도달할 때까지 돌보아 주어 성인으로 만드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레지오의 선교활동은 마리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즉 마리아의 협조가 이 세상에 구세주를 모셔온 것처럼 레지오의 선교활동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는 전파되어 간다. 레지오는 선교활동 안에서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룬다. 선교활동을 통하여 레지오 단원 뿐 아니라 활동 대상자 또한 성화 된다. 따라서 레지오 단원들은 남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활동 이전에 자신이 먼저 성화되도록 늘 노력해야 한다.
2) 성화의 한 방법인 선교활동
레지오의 목적인 성화를 이루는 방법을 프랭크 더프는 두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기도와 활동이다. 여기에서 활동이란 마리아의 '교회의 사업' 에 협조하는 것이다. 마리아의 '교회의 사업' 이란 뱀의 머리를 바수고 그리스도 왕국을 건설하는 일 이라고 프랭크 더프는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뱀의 머리를 바수고 그리스도 왕국을 발전시키는 일' 이라는 교본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라고 말씀하신 교회의 사명인 복음 선포를 의미한다.
성화의 방법인 기도와 선교활동은 성화를 위한 분리된 각각의 방법이 아니라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보완적 관계이다.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의 선교활동은 기도를 통한 예수님과의 일치에 잘 수행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단원을 모집할 때에도 선교활동을 위한 행동 단원과 단원들의 선교활동을 영적으로 지원하는 협조단원으로 두 가지 종류의 단원을 모집하였던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행동단원과 협조단원과의 관계를 독수리와 독수리 날개로 비유하였다. 즉 기도는 활동에 있어서 독수리의 날개와 같은 것이다. 독수리가 날개가 없다면 날아갈 수 없듯이 기도는 선교활동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라고 하겠다. 또한 날개는 독수리의 몸에서 떨어질 수 없듯이 기도는 활동의 영적 자원을 지원함으로써 독수리를 날개 한다.
따라서 프랭크 더프는 활동과 더불어 기도를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레지오 단원은 매일 까떼나를 의무적으로 바치도록 하고 있는데, 이것은 활동에 있어서 기도를 통하여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함이다. 또한 모든 레지오 단원들은 하루에 적어도 몇 분 동안은 묵상과, 성경 봉독을 해야 함을 교본은 말하고 있으며, 모든 단원은 될 수 있으면 매년 한 번씩 봉쇄 피정을 해야 한다. 프랭크 더프는 "평신도 사도 양성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지 않을 때가 있는데 그런 경우에는 레지오 내의 피정을 영적으로 잘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 고 피정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프랭크 더프가 제시한 성화를 위한 방법으로서 기도와 활동은 균형과 조화를 통하여 상호 보완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레지오 단원들은 두 가지 방법 중 하나 만을 선택할 수 없으며 기도와 활동의 균형적 발전을 지향해야 한다. 레지오의 선교활동은 기도를 통하여 얻은 영적인 자원을 바탕으로 수행되는 성화의 방법인 것이다.
3. 마리아를 통한 선교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는 '레지오 마리애', 즉 '마리아의 군대' 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마리아를 통한 선교' 를 의미한다. '마리아를 통한 선교' 라고 표현되는 프랭크 더프의 선교 이념은 마리아의 신원과 관련된 독창적인 두 가지 선교 원리를 담고 있다. '마리아의 신원과 관련된 두 가지 선교 원리' 란 첫째로 초자연적인 동기에 의한 변성 원리와 둘째로 마리아 모성의 실현으로서 선교활동을 말한다. 이 두 가지 원리를 통하여 레지오는 선교의 모델과 영성을 마리아에게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 마리아 모성의 실현인 선교
마리아를 통한 선교의 원리는 마리아의 모성을 실현하는 '마리아의 도구' 라는 것이다. 모성을 실현하는 선교활동은 교회의 어머니이며, 신비체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신원을 바탕으로 한다.
프랭크 더프는 마리아의 모성을 신적 모성과 인류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영적 모성애로 구분하였다.
마리아를 통한 모성의 실현으로서의 선교활동에서, '마리아의 모성'은 인류와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영적 모성애를 의미한다. 프랭크 더프는 마리아의 영적 모성이 결정적으로 표현되는 곳이 요한복음 19장 26-27절임을 제시하고 있다. "갈바리아의 비통 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려서 마리아에게, '여인이여 이 사람은 당신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성 요한에게는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 요한을 통하여 선택받은 모든 이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이처럼 인류가 영신적으로 태어나는 일에 동의하고 수난하심으로써 완전한 협력자가 되셨기에, 마리아는 글자 그대로 완전한 의미에서 우리의 어머니가 되셨다.
마리아의 모성은 단지 영신적으로 태어나는 일에 협력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성장시키는 양육의 역할을 포함한다.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이고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 마리아로부터 인성을 받으셨을 때 하느님 육화의 신비로 사람을 죄에서 해방시키고자 했던 새로운 계획' 에 가장 친근한 협력자라는 이유뿐만이 아니다. '마리아는 공동체에 대하여 모든 덕의 모범으로서 빛나고 있다.' 는 점에서도 교회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새 생명을 탄생시키는 것에서 그 역할을 그치지 않는다. 어머니는 그 자식을 기르고 가르치는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는 아드님의 인류 구원 사업을 위한 협력에 참여한 뒤에, 마리아는 지금도 하늘로부터 구원받은 각 영혼 안에 하느님 생명이 태어나도록 보살피는 어머니 역할을 계속하고 계신다."
이러한 마리아의 영적 모성은 그리스도 구성원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프랭크 더프는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에서 머리의 어머니임과 동시에 그 지체들이 어머니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마리아를 설명하고 있다. "마리아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태어나게 하는 데 있다. 마리아는 이 신비 체의 생명이며 얼이신 성령의 힘에 의지하여 이 신비 체를 성장시키는 임무를 완수하신다. 영혼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고 '성숙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는 것'(에페 4,13)은 마리아의 품에서 마리아의 모성적 보살핌에 의한 것이다."
마리아의 신비 체에 대한 역할 즉, 전체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탄생시키고, 기르고, 보살피는 마리아의 모성은 레지오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레지오의 선교활동은 새로운 지체들인 영세자들을 탄생시키는 활동이 된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활동은 단순히 새로운 지체를 탄생시키는 활동만이 아니라 신비 체의 지체를 기르고 성숙시키는 어머니로서 역할이 되어야 하며. 쉬는 교우와 신자들의 재 복음화를 위한 활동들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의 모성을 실현하는 선교활동에서 또 하나 중요한 개념은 '마리아를 통한 선교' 에 있어서 마리아를 하나의 수단이나 혹은 방법으로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레지오 단원들은 마리아의 자녀인 신비 체의 지체들을 탄생시키고 양육하는 선교활동에 동참하도록 사명 의식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프랭크 더프는 마리아와의 일치가 마리아의 모성을 실현하는 레지오 선교활동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수행 방법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사도직을 실천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마리아께 의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곧 우리가 자신을 마리아와 결합시킴으로써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마리아의 연장' 으로서 행동해야 한다. 강조하자면 동정녀의 '발뒤꿈치' 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리아께 온전히 맡겨 드리면 드릴수록 마리아 자신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우리에 의해서 행동하시는 정도가 커진다고 하겠다."
제3장.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방법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방법의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첫째는 로마 군대의 조직을 응용한 조직적 형태의 선교 방법과 둘째는 '접촉활동'을 통한 '대화의 만남'인 선교 방법이다.
1) 군대의 조직을 응용한 형태의 선교
레지오 마리애의 원래의 명칭은 '자비의 모후'였다. 자비의 모후회가 점차 성장하게 되면서 프랭크 더프는 조직적 형태의 선교 활동을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더프는 효율적이면서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로마 군대를 자신의 선교 단체에 응용하였다. 로마 군대의 조직적 형태를 도입하면서 '자비의 모후회'는 레지오 마리애 즉 마리아의 군대라는 영적인 군단으로서 새로운 신원으로 탄생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레지오 마리애는 조직적 형태의 선교 방법을 위하여 군대의 조직력을 바탕으로 삼고 있음을 나타내게 되었다.
레지오의 조직체계와 명칭과 편제는 로마 군대의 체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러나 프랭크 더프는 로마 군대의 체제의 기능과 정신면에 있어서는 자신의 선교 이념을 반영하여, 레지오 마리애를 탄생시켰다. 프랭크 더프가 자신의 선교 이념을 반영한 모습을 가장 잘 나타내주는 것은 레지오의 상징인 백실리움이다. 레지오의 상징인 백실리움은 원래 로마 군대의 상징이었다. "레지오의 백실리움의 도안은 비종교적인 표상인 로마 군대의 깃발을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시킨 것이었다. '비둘기'가 독수리 대신 들어갔으며, 성모님의 모습이 로마 황제나 집정관의 상 대신으로 채택되었다. 그 전체적인 구도는 결국 성령께서 온 세계에 생명의 은혜를 내리실 때 성모님을 그 수로(酬勞)로 삼으시고 레지오를 차지하는 모습으로 되어있다." 즉 프랭크 더프는 레지오의 정신에 있어서 로마 군대의 정신을 마리아의 정신으로 변형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프랭크 더프는 '정신적의 변형' 뿐만 아니라 '조직의 기능'을 변형시켰다. 즉 로마의 조직을 군사적 기능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기능으로 변형 시켰던 것이다. '군사적 기능에서 선교활동을 위한 기능으로서의 변형'이란 구체적으로 로마 군대의 보고 체계와 관리 체계를 의미한다. 로마 군대는 각 군 조직체의 정기적 보고를 통하여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각 지역 사회에 맞는 전투 계획을 수집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각 조직의 권한과 기능을 명확히 명시하여 통일적이며 체계적인 조직력을 갖추었다. 레지오 마리애는 이러한 로마의 보고 체계와 관리 체계를 선교 활동에 적용하여 각 지역의 특성에 맞는 선교 활동의 방법을 수립하여, 선교 활동에 대한 경험을 교환한다. 또한 각 조직의 선교 활동의 지역적 범위와 기능을 제한하여 선교 활동의 체계성과 조직력을 확보하였다.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은 기능에 따라 활동기구인 쁘레시디움과 상급 평의회 그리고 선교의 토착화를 위한 연구 기관이며 동시에 레지오의 부설 단체라고 말할 수 있는 빠뜨리치안 회로 나눌 수 있다. 레지오의 조직을 크게 기능면에서 활동기구와 연구기구로 나누어 레지오의 조직적 형태의 선교 방법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
2)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
레지오 마리애는 피라미드식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기본 단위체인 지단은 쁘레시디움이라고 부르고, 관리 기관인 평의회로서는 꾸리아, 꼬미시움, 레지아, 세나뚜스, 그리고 세계 중앙 평의회로서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가 있다. 모든 관리 기관은 쁘레시디움처럼 상급 평의회에 속하거나 꼰칠리움에 직속된다.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에서 여러 가지 관리 기관을 두는 목적은 그 조직 체계를 보존하는 데 있다.
(1) 쁘레시디움(Praesidium)
쁘레시디움은 레지오 마리애의 심장이다. 레지오의 기본 단위체로서 본당에서 조직되는 지단을 쁘레시디움이라고 한다. 이 명칭은 고대 로마 군대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는 파견대를 뜻한다. 각 쁘레시디움의 명칭은 주로 성모님의 호칭이나 성모님의 특전, 혹은 성모님의 행적을 가리키는 말로 짓게 된다. 소속된 모든 단원을 통솔하는 권한을 가지며 단원들은 모든 정당한 명령에 충실히 복종해야 한다. 각 쁘레시디움은 공인된 관리기관을 통하여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에 가입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레지오 단원의 자격을 얻지 못한다. 따라서 꾸리아나 그 상급 기관 또는 꼰칠리움의 정식 허가를 받지 않고는 쁘레시디움을 설립하지 못한다. 정기적인 주회를 가져야 하며, 영적 지도신부와 함께 단장, 부단장, 서기, 회계 등 간부가 선임되어야 한다. 쁘레시디움의 설립은 4명의 적은 인원으로도 허가를 받을 수 있지만 20명이 넘어서는 안 된다.
(2) 꾸리아(Curia)
꾸리아는 비록 최하급 평의회이기는 하지만 레지오의 기간(基幹)이 되는 평의회로서 중요한 기관이다. 꾸리아는 고대 로마에서 행정 단위의 하나였으며 집회소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레지오의 조직 단위로서의 꾸리아는 어떤 도시나 마을 또는 지역에 설립된 둘 이상의 쁘레시디움을 관리하는 기관을 뜻한다. 레지오의 운명과 발전은 꾸리아에 달려 있다. 교본은 꾸리아를 가리켜 그 소속 쁘레시디움의 심장이며 일치의 중심이라고 말한다. 꾸리아는 상급 평의회 또는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의 정식 허가와 관할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다. 꾸리아는 그 지역에 있는 쁘레시디움의 간부로 구성되며 영적 지도 신부도 포함된다. 꾸리아는 직속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레지오의 정신과 규칙을 잘 지키도록 관리, 감독하는 직무를 맡고 있다.
(3) 꼬미시움(Comitium)
꼬미시움은 고대 로마의 시민회의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레지오 마리애에서는 한 꾸리아에, 그 고유한 기능 이외에 하나 또는 여러 꾸리아를 관장하여 관리하도록 권한이 주어진 평의회, 즉 상급 꾸리아를 꼬미시움이라고 부른다. 꼬미시움은 꾸리아와 마찬가지로 상급 평의회 또는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의 정식 허가와 관할 교구장의 인가를 받아 설립한다. 꼬미시움은 한 교구에 조직된 교구 평의회이다. 따라서 꼬미시움은 보통 한 교구 이상의 지역을 관할할 수 없으며, 관할 교구장이 임명한 영적 지도 신부를 포함하여 꾸리아의 직속 쁘레시디움의 간부로 구성된다. 꼬미시움은 새로운 평의회가 아니기 때문에 꾸리아로서의 기능과 업무를 그대로 지니며 소속 쁘레시디움을 직접 관리한다. 덧붙여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산하 꾸리아를 관리 감독한다.
(4) 레지아(Regia)
레지아는 레지오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하여 1975년에 새로 창설된 평의회이다. 레지아는 고대 로마 황제의 관저와 집무실이었으나 후에는 왕의 도읍 또는 궁정을 가리켰다. 레지오 마리애에서는 꼬미시움으로서는 너무 크고, 세나투스로서는 조금 작은 지역을 관장하기 위하여 창설된 관구 평의회이다. 레지아는 꼰칠리움의 공식 허가를 받아 설립한다. 해당 레지아가 꼰칠리움의 직속이 될지 혹은 세나투스에 직속될지 그 결정은 꼰칠리움이 하게 된다. 레지아는 그 레지아에 직속되는 그 모든 레지오 기관의 간부들과 레지아의 지위가 부여된 해당 평의회 의원들로 구성된다. 물론 여기에는 레지아와 관련된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포함된다.
(5) 세나투스(Senatus)
세나투스는 고대 로마제국의 원로원이었다. 레지오 마리애에서는 한 국가의 레지오에 관할권을 행사하는 평의회, 즉 국가 평의회를 세나투스라고 부른다. 세나투스 설립은 꼰칠리움에서 결정하며 반드시 꼰칠리움의 직속이 되어야 한다. 관할 지역의 크기 또는 그 밖의 이유로 한 세나투스가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없는 나라에서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세나투스를 설립할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도 각 세나투스는 꼰칠리움에 직속되며 그 자체의 관할 관구에서 꼰칠리움이 위임한 권한을 행사한다. 세나투스는 관할 교구장이 임명한 영적 지도자를 포함하여 그 세나투스에 직속되는 모든 레지오 기관의 간부들과 그 세나투스와 관련된 평의회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6)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 (Concilium Legionis Mariae)
꼰칠리움의 성격을 띤 최초의 회합은 1924년 11월 2일에 더블린에서 개최되었다가 1930년 2월 16일에 정식으로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가 되었다. 꼰칠리움은 세계 160여 나라의 26만여 개의 쁘레시디움을 관장하고 있다.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의 세계 회의라는 뜻으로서 레지오의 최고 관리권을 가진 중앙 평의회이다. 꼰칠리움은 교본에 규정된 대로 항상 교회 당국의 권위를 따르면서 레지오 규칙의 제정, 변경, 또는 해석하는 권리, 쁘레시디움 및 하급 평의회를 설립하거나 해산하는 권리, 레지오의 방침을 결정하고 모든 분쟁과 제소를 심판하며 단원의 자격 문제 및 사업 또는 그 수행 방법의 적합성 등에 관한 모든 점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꼰칠리움은 월례회의를 갖되 그 장소는 더블린에 둔다. 꼰칠리움은 그 직무의 일부를 하급 평의회 또는 각 쁘레시디움에 위임할 수 있으며 그러한 위임의 범위는 어느 때라도 변경할 수 있다. 꼰칠리움은 꼰칠리움에 직속되는 모든 레지오 기관의 간부들과 더블린 대교구의 성인 꾸리아 간부들, 아일랜드 교회 당국이 임명한 영적 지도자로 구성된다.
제4장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 역사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탄생과 발전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한국 레지오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시기별로 구분하여 본다.
첫째로 레지오 조직의 확장과 둘째로 레지오의 고유한 특징을 반영하는 선교활동들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배경
1) 사제의 부족 현상
6. 25 사변 직후 한국 교회의 사정은 밀려오는 영세를 위한 입교자들에 대하여 예비자들을 위한 필요한 교리 교육 단체나 전교를 위한 물적 인적 자원이 매우 부족하였다. 더군다나 전쟁으로 인하여 많은 사제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사목을 수행할 사제들이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세례를 받기 위한 예비자들의 교육 또한 지금에 비하여 매우 엄격하였다. 당시 한국 교회의 예비자 교리 교육 과정은 최소한 6개월이었다. 이 기간 동안 예비자는 세 차례에 걸쳐 '찰고' 라는 교리 문답 시험 과정을 걸쳤다. 교리 문답 책은 12가지 기도문과 320조목의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 같은 모든 것은 세례를 받기 위한 엄격한 준비 요건이었다. 거기에다 연세가 높으신 어르신들은 대개 글을 읽을 줄 몰라 기도문과 교리 문답을 암송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처럼 예비자 관리가 어려운 상황에서 사제의 수가 6. 25 전쟁 후 많이 모자라는 것을 감안하여 현 하롤드 주교는 레지오 마리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현 하롤드 주교는 예비자 안내에서부터 시작하여 세례를 받게 하고 신자로서의 위치를 발견할 때까지 방문하여 돌보는 등의 역할을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통하여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즉 사제들의 수가 부족하게 된 당시의 여건이 자연적으로 평신도 사도직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에게 당시 예비자를 교육시키고 선교와 교리 교육을 실시하는 사도직으로 초대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2)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
현 하롤드 주교는 광주 교구장 서리로 취임(1950년)한 후 한국 가톨릭 교회의 활성화 방안에 관하여 여러 가지로 검토한 결과 광주 교구에서 먼저 평신도 사도직 활동을 활성화하고 촉진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면서 당시 세계적으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 특히 중국 공산당의 탄압 속에서도 신자들이 굳건하게 신앙을 보존하고 목자 없는 교회를 유지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는 레지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현 하롤드 주교는 레지오를 광주 교구에 도입하여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1956년에 현 하롤드 주교가 광주 교구장으로서 반포한 사목교서 『레지오단 조직에 적극 협조하라』는 한국의 레지오 도입 목적이 바로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에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현 하롤드 주교는 초대교회의 발전에 있어서 신자들의 모범적인 신앙의 삶을 사목 교서의 서두에 소개하면서 성직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관한 모든 사도직을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신비 체의 참된 지체로서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초대 가톨릭 신자들은 초창기의 교회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건전한 가정을 이룩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가정과 더불어 확고한 신앙을 같이 향유함에 전심전력을 기울여 왔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초대 신자들의 불타는 정신을 본받아야 할 것이며, 선교의 사명을 이해함에 있어서 소극적이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성직자들만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에 관한 모든 사도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이 신비 체의 참된 지체로써 교회 사업에 있어서 달리 대처할 수 없는 그 중요한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현 하롤드 주교는 평신도들이 선교에 있어서의 참된 지체로서, 교회 사업에 있어서 대치 할 수 없는 역할의 의미와 방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평신자 여러분들이 그리스도께서 자기 품안에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계신 모든 외교인들과 매일 접촉하는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외교인들을 따뜻한 교회의 품안에로 인도하는 것도 역시 신자 여러분들이 해야 할 일이다."
현 하롤드 주교는 평신도 사도직의 장점을 "외교인들과 매일 접촉하는 생활을 하고 있음"에 두고 있다. 즉 평신도들은 성직자들과는 달리 외교인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공유함에 있어서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그들과 접촉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평신도들은 그들의 다양한 삶의 분야들을 통하여 성직자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부분까지 다양하고 넓은 범위와 대상에 대하여 사도직을 펼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이어서 현 하롤드 주교는 사목교서에서 레지오 마리애가 신자들의 선교활동에 있어서 가장 적합한 방법임을 강조하였다. 또한 교구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활동에 동참 할 것을 촉구하였다. "외교인들을 귀화시키는데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지향하고 계신 그 사명을 신자들로 하여금 달성케 하기 위하여서는 이미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레지오 마리애가 가장 적절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여 본 교구에 이 레지오 단이 튼튼한 지반 위에 강력히 조직되어 확립되기를 바라며 또한 제위 신부들과 여러 신자들이 적극적인 협조가 있기를 권고하는 바이다."
3) 평신도 사도직의 조직과 훈련의 필요성
현 하롤드 주교는 『나는 레지오를 택했다』라는 제목으로 가톨릭 시보에 기고한 기사의 서두에서 평신도 사도직의 중요성에 대한 그의 사상과 이의 실천에 관하여 현실적으로 문제를 다루었다. '현실적 문제' 란 바로 6.25 직후 평신도 사도직 수행을 위한 유기적이며 효율적인 조직의 부재를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열심히 모든 교회 성장의 비결이라는 것과 조직을 잘하고 훈련을 잘 쌓은 평신도 없이는 결코 그 성장을 바랄 수 없다는 것과 열심을 교회 성장의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어느 신부에게나 명백하고 너무나 기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즉석에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에 대한 문제점은 누구든지 올바른 조직에 따라 가야만 하는 것이나, 이러한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못하고 있다. 한국에서의 레지오 마리애는 우리가 갈망하던 사도직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즉 하롤드 주교의 증언은 평신도 사도직에 있어서 조직적 사도직의 중요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현 하롤드 주교는 평신도 사도직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하여 우선적으로 조직과 교육의 필요성을 느꼈지만 그 올바른 조직을 확립 하는 것은 6. 25직후 사목의 상황으로 비추어 볼 때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왜 현 하롤드 주교가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의 틀을 갈망하게 되었는가는 1952년 '광주교구 예비자의 폭발적인 증가 사태'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시기는 전쟁의 상처를 씻고, 광주 교구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모두가 힘을 합쳐 공산군의 점령 후에 교구를 그 전 대로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하던 중이었다. 아직 교구를 다시 재정비하기도 전에 1952년 무려 1천여 명의 입교자가 교회의 문을 두드렸다. 그들의 입교는 과히 폭발적인 것이고,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성인 입교자 1천여 명에 비하여 교구민의 수는 8천 명에 불과하였다. 즉 1952년 한 해에만 신자 증가율이 12,8%나 되었다.
현 하롤드 주교는 기사에서 이러한 폭발적인 교세의 신장을 "공산군의 폭풍"에 대한 "영혼들의 선풍"이라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선풍인 폭발적인 입교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물질적, 인적 자원은 매우 부족하였고, 몇 개의 평신도 단체가 있었지만 어떤 효율적이면서 확고한 조직을 갖지 못한 미흡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그는 "선풍의 위협"이라는 단어로써 당시의 어려운 교구 사정을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교구의 어려운 사정은 그에게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효율적이며 구체적인 조직의 체계와 교육의 방안을 시급히 강구하게 되었다.
2.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과정
1) 중국 레지오 마리애의 영향
6.25 전쟁 직후 사목의 어려운 상황과 이의 해결을 위한 평신도 사도직의 활성화 방안에 대하여 고심하던 현 하롤드 주교는 1952년 여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에서의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구체적인 조직과 활성화라는 열매를 찾고자 고심하던 주교에게 레지오는 그의 요구에 적합한 평신도 단체였다.
그러나 현 하롤드 주교는 레지오 마리애를 즉시 자신의 교구에 도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중국과 한국의 선교 상황이 달랐기 때문이다. 1949년에 모택동의 공산당이 권력을 장악하자 전형적인 마르크스 전술에 따라 가톨릭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박해의 상황에서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은 불가능하였다. 때문에 레지오의 활동은 비밀 조직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949년에 중국에서 활동한 2천 5백여 명의 외국인 사제가 1954년까지 모두 추방되어 61명만 남게 되었으며, 20만 명의 레지오 단원들 중에 대략 2만 명가량이 투옥되고 그중 2-4천여 명이 순교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러한 박해 상황에서도 레지오는 확고한 조직 체계와 활동력으로 신앙을 굳건히 지켜나갔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매우 달랐다. 중국에서는 박해 상황이었지만 오히려 한국의 상황은 그와 반대로 전쟁 직후 입교자가 밀려드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기사에서 어려운 중국의 박해 상황 안에서도 굳건히 활동하는 중국의 레지오 마리애의 활동을 '위대한 활동'이라 표현했지만 동시에 그는 '비정상적인 레지오'라고 언급하고 있다.
2) 교본의 연구와 평가
현 하롤드 주교는 레지오 마리애의 도입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서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을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교본은 레지오 마리애의 영혼이며 뿌리로서 레지오의 목적과 역사, 사도직 활동의 원리, 레지오의 신심과 마리아의 신심, 조직의 운영과 확장, 실질적 활동의 예와 방법에 대한 지침등 레지오의 신원에 관한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해설서이기 때문이다.
현 하롤드 주교의 교본 연구를 위한 정확한 기간은 알 수 없다. 다만 기사문을 통하여 진술한 내용에 근거하여, 일본을 방문한 1952년 여름부터 1953년 5월 한국 레지오의 설립을 이전까지로 추정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현 하롤드 주교가 레지오를 한국에 도입하고자 결심한 시점은 교본을 연구 중이던 1952년이며 레지오 사도직의 신심에 관한 교본의 내용을 긍정적으로 판단하게 되었을 때부터라고 하겠다.
3) 쁘레시디움 시대
1953년에서 1959년까지는 '쁘레시디움'의 시대이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6.25전쟁이라는 상황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짧은 기간 동안 사도직을 통한 선교 사업을 체계적으로 수행해 나갔다.
창단 6년 만에 모든 교구 안에서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어 레지오 활동을 전개하였다. 창단 원년인 1953년부터 1959년까지를 '쁘레시디움 시대'라 하는 것은 모든 교구에 '쁘레시디움'이 창단된 1959년에 그 의미를 두고자 한다.
① 쁘레시디움의 탄생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아일랜드에서 레지오 마리애를 창단한지 32년째 되는 해인 1953년 5월 31일 전남 목포시 산정동 본당 교리실에서 탄생되었다. 첫 해에 3개의 쁘레시디움이 다음해인 1954년에 한 개의 쁘레시디움이 탄생되었다. 치명자의 모후(남성 쁘레시디움). 평화의 모후(여성 쁘레시디움), 죄인의 의탁(혼성쁘레시디움)은 1953년 5월 31일에 산정동 본당에서 창단되었으며, 상지의 좌 쁘레시디움은 1953년 11월 19일 경동 본당에서 창단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성장은 1956년부터 급속히 이루어졌다. 1956년 하롤드 주교는 상해 꾸리아 지도 신부였던 에드워드 맥 엘로이 신부에게 레지오를 더욱 더 활동과 조직을 단단하게 하기 위하여 맥 엘로이 신부에게 지도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쁘레시디움의 창단 직후 3년 만에 광주, 청주, 춘천, 원주, 전주, 서울, 제주 교구(창단순)로 쁘레시디움이 확장됨에 따라 관리 체계를 갖추기 위하여 1955년 10월 12일 한국의 최초의 꾸리아인 '목포 매괴의 모후'가 설립되었다. 1956년에 들어서면서 레지오 조직은 영남지방으로 뻗어감에 따라 경상북도, 충청남도, 경인지방을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되자 광범위한 조직을 관리하기 위하여 꾸리아가 지역 단위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매괴의 모후' 꾸리아에 이어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8월 20일 청주 '구세주의 모친', 9월 2일 춘천 '평화의 모후', 11월 2일 부산 '임마꿀라따'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1957에도 꾸리아의 설립은 이어졌다. 1월 29일 서울 '상지의 좌', 2월 17일 진해 '그리스당의 도움'(마산교구), 7월 17일 전주 '파티마의 모후'
8월 22일 왜관 '천주의 모후'(대구 대교구), 8월 28일 제주 '치명자의 모후'가 설립되었다.
1958년 4월 '인천 바다의 별'이 설립되었으며, 1959년 3월 12일 논산 '루르드의 성모', 9월 27일 함창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안동교구)가 설립되었다.
이렇게 꾸리아가 조직 체계를 관리함에 있어 이 평의회를 관장 관리할 꼬미시움이 광주, 부산, 춘천, 청주 교구에 승격 설치되었다. 이중에서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대표권을 가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시움이 1958년 7월 13일 국가 최상급 평의회인 세나뚜스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각 본당으로 레지오가 확산됨에 따라 부작용도 발생되었다. 본당의 레지오 지도 신부들이 레지오의 목적인 선교 활동보다는 레지오가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기금 조달, 자선 사업, 본당의 잡무 등으로 쁘레시디움을 운영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를 지켜 본 하롤드 주교는 "나는 전부는 아닐지라도 쁘레시디움이 실패하는 책망의 대부분을 지도 신부에게 돌리고 싶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쁘레시디움의 운영에 있어서 지도 신부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하롤드 주교는 쁘레시디움의 운영에 있어서 부정적인 지도 신부의 유형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예를 들어 레지오 단원들이 성당의 청소 또는 제대 꾸며주기를 원하는 처사, 또는 비서격인 잡무라든가 기금 조달하는 일을 레지오 단원들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현 하롤드 주교는 레지오 운영에 있어서 레지오 본연의 활동인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만일에 레지오가 친구를 사귀어 얻고 사람들을 천주께 이끌어 들이기 위하여 나아가지 않는다면 쁘레시디움은 죽은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레지오의 활동 무대는 시장의 한복판이지 사무실이 아닌 것이다."
② 소년 쁘레시디움 창단
소년 쁘레시디움은 18세 이하 청소년들로 구성된 단체이며 꾸리아의 사전 승인을 얻어 창단하는 특수한 쁘레시디움이다. 한국 레지오 창단 3주년을 맞던 1956년 1월 12일 한국 레지오의 요람인 산정동 본당에서 창단한 '성조들의 모후', '바다의 별' 쁘레시디움이 한국의 첫 번째 소년 쁘레시디움이다. 그 해 7월 17일 부산 대신동 본당 '소년의 모후' 쁘레시디움 창단을 계기로 타교구로 전파되었다.
③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첫 교본
1955년 현 하롤드 주교가 입수한 영어판 교본을 대구 교구 김약진이 번역, 광주 교구 최일환이 국문 교정, 김성도 신부의 검열을 거쳐 목포 매괴의 모후 꾸리아에서 한국의 첫 교본인 요약본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을 발행하였다. 곧 이어 정규 교본 『레지오 마리애의 직무 수첩』이 1956년 6월 1일 발행되었다. 이어서 1958년 4월 6일 수정 증보판 『레지오 마리애의 교본』이 발행되었다. 이 교본은 현 가톨릭 대학교 한공렬 신부와 최민순 신부가 내용을 우리 어휘 문법에 맞게 수정하여 발행한 것이다. 이 교본의 발행으로 인하여 비로소 한국 레지오의 교본이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4) 꾸리아 시대
1960년부터 1978년까지의 한국 레지오는 꾸리아의 활동이 두드러진 '꾸리아 시대'라 말 할 수 있다. 1960년에서 1978년까지는 선교 활동을 위한 기반이 완성된 시기이다. 1960년에 전 교구에 쁘레시디움을 지휘 감독하며 그 지역에 맞는 활동을 구상하는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꾸리아 시대부터는 레지오가 무엇인가 하는 '정체성 인식'의 단계에서 각 지역에 맞는 '지역적 특성을 살리는 선교 활동의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여기에 때를 같이하여 레지오의 홍보 매체인 가톨릭 시보와 경향 잡지는 레지오의 정체를 알리는 선교 활동에 대한 교육적 자료를 기재하였다. 또한 레지오 마리애의 기관지를 발간함으로써 활동과 조직의 운영에 관한 경험과 정보를 교환하였다.
① 전 교구의 꾸리아 설립과 꼬미시움 승격
1960년 1월 17일 수원 '천지의 모후' 꾸리아가 설립되어 마침내 한국 모든 교구 내에서 평의회인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모든 교구 내의 꾸리아 설립의 의미는 레지오에 있어서 두 가지의 의미를 나타낸다. 그것은 조직의 체계화와 선교 활동에 있어서 지역 특성에 맞는 체계적 활동의 실현이다.
꾸리아는 어떤 도시나 마을 또는 지역에 둘 이상의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었을 때, 그 지역에 있는 쁘레시디움을 운용하고 단원을 교육하고 감독하는 기초 평의회이다. 꾸리아는 별도의 구성원이 아닌 꾸리아 산하의 쁘레시디움의 간부들로 구성된다. 꾸리아의 주된 임무는 쁘레시디움간의 경험을 교환하고 새로운 활동의 방법을 그 지역의 환경에 맞게 고안하고 검토하는 일이다.
1960년 3월 30일 서울 '무염시태', 전주 '파티마의 모후' 꾸리아가 각각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1961년에는 대전 '다윗의 적루', 마산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가 각각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경인 지방은 다른 교구에 비하여 레지오 마리애를 다소 늦게 받아들였으나 활동이 활발히 진행되어 1964년에 수원 '천지의 모후' 1965년에 '인천 바다의 별' 꾸리아가 각각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관동 지방에서는 춘천 '평화의 모후' 꼬미시움에 이어 원주 '치명자의 모후' 꾸리아가 꼬미시움으로 승격되었다.
②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의 사절단 내한
1965년 2월 12일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에서 동남 아시아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시찰 사절로 파견 된 요아기나 루가스 사절이 한국 레지오를 돌아보기 위하여 내한하였다. 이것은 꼰칠리움의 첫 공식 방문이었다. 루가스 사절은 2월 13일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 방문을 시작으로 전국 11개 꼬미시움의 운영, 활동 사항을 돌아보며 평의회와 쁘레시디움 주회를 참관하고 제2차 토론대회에 참석하였다.
루가스 사절이 시찰을 통해 밝힌 한국 레지오의 특징과 발전을 위한 실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 레지오의 지난 10년간의 발전은 매우 비약적인 것이다. 인도네시아나 일본의 쁘레시디움에 비겨 조직이나 활동이 수준 이상을 달리고 있어 크게 만족했다고" 언급하였다.
둘째, 교본의 규칙을 그대로 따르는 답습의 단계를 벗어나 선교 상황에 맞게 응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언어, 풍속, 생활, 사고방식이 다른 민족이 획일적인 토대로 활동할 때 어려움이 발생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교본은 레지오가 탄생된 이후 30여 년 간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기에 융통성 있는 적용을 통하여 늘 쇄신되며 현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셋째, 활동의 참여도와 능동성을 높이기 위하여 '신앙의 주체의식'을 강조하였다. 즉 레지오의 선교 활동은 '신앙은 나의 것' 이라는 자발적인 의지 안에서 평신도 사도직으로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③ 월보 창간
1963년 이전 레지오 마리애의 소식과 홍보는 주로 가톨릭 시보와 경향 잡지에 의존하였다. 한국'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뚜스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창단 10주년이 되는 1963년 5월 1일 『레지오 마리애』를 발간하였다. 레지오 마리애의 최초의 기관지로서 아일랜드의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에서 발행하는 『Maria Legionis』의 기사를 번역한 내용과 한국 레지오의 활동과 소식을 함께 실었다. 이러한 레지오 마리애는 1년여 동안 발행하다 중단되었고 곧이어 발행한 한국 세나뚜스 월보가 1965년 5월 8일 발간되었다. 한국 세나뚜스 평의회 회의록 성격을 띤 월보는 회의 내용과 꼰칠리움 레지오니스 서한을 주 내용으로 발행하였다. 특히 통신 수단이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정보 교환의 유일한 수단으로 커다란 효과를 발휘하였다. 창간 후 23년 동안 발행되었으나 1988년 6월 12일 제276호를 끝으로 다시 『레지오 마리애』 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다.
④ 빠뜨리치안회
광주 '중재자의 모후' 세나뚜스는 빠뜨리치안의 설립과 활성화를 위하여 1965년 1월 25일 빠뜨리치안회 를 발행하여 각 교구 평의회에 배부하였다. 이러한 목적은 신자들의 교리지식 함양과 선교 사명 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단원들이 활동 중에서 직면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모임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1963년 중단되었으며 현재 서울 세나뚜스에 한 개의 빠뜨리치안회가 있다.
5) 세나뚜스 시대
1979년 서울 레지아가 세나뚜스로 승격됨으로써 한국 레지오는 두 개의 (광주, 서울)세나뚜스를 갖게 되었다. 1979년 서울 세나뚜스의 승격 직후 한국 레지오는 세나뚜스 협의회 주관으로 두 차례의 '민족 복음화 운동'을 실시하였다. 1979년 이후 1997년까지를 '세나뚜스 시대' 라 구분하는 것은 그 때부터 한국 레지오의 선교 활동과 행정서식 통일안 제정과 같은 기반 확충을 위한 작업들이 세나뚜스 협의회의 주관아래 실행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레지오는 '민족의 복음화'와 더불어 '선교의 과학화' 를 지향하였다. 선교의 과학화를 위한 활동으로 한국 레지오는 한국 실정에 맞는 보고 체계를 확립하였다. 1992년 이후 한국 레지오의 성장은 급격히 둔화되어 이의 해결을 위한 방안으로 단원들의 선교 정신에 대하여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① 민족 복음화 운동
세나뚜스 시대에서 괄목할 만한 것은 두 차례의 '민족 복음화 운동' 이다. 1979년 서울 세나뚜스의 승격과 함께 교구별 본당별 활동 중심에서 국가 평의회의 대규모 활동사업 중심으로 성격이 전환되었다.
복음화 운동의 특징은 "선교의 과학화"라고 할 수 있다. 선교의 목적과 대상 그리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방법에 대하여 계획 설정에서부터, 과정, 결과에 대한 분석이 치밀한 자료의 분석과 통계, 그리고 하위 조직에 대한 관리, 운영과 결과에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② 200만 신자화를 위한 복음화 운동
서울 무염시태 레지아가 세나뚜스로 승격되어 1979년 2월 25일 출범하였다. 창단 회의를 가진 뒤 양 세나뚜스와 부산 레지아가 연합으로 한국 천주교회 선교 200주년을 맞이하는 1984년에 200만 신자화를 이룩하기 위한 민족 복음화 활동 안을 발의하기로 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한국 세나뚜스 협의회에서 준비 과정을 거쳐 제5차 간부 연석회의(1979년 7월 16일부터 17일)에 상정하게 되었고, 의결을 거쳐 한국 세나뚜스 협의회 명의로 주교회의 의장 및 각 교구장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하고 활동에 도입하기로 하였다.
맺음말
1. 본문의 요약
제1장 '레지오란 무엇인가'에서 레지오는 가톨릭 교회의 마리아 군단이라는 뜻으로 레지오의 역사와 정신, 그리고 선교 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레지오 마리애의 역사는 이러하다. 1921년 9월 7일 저녁 8시 아일랜드 더블린시 프란시스 마이러 하우스에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회합에 참석한 사람은 토허 지도 신부와 프랭크 더프를 비롯하여 여성 13명이었다. 명칭은 '자비의 모후'라는 이름으로 하고 매주 수요일 정기 모임을 갖고, 2명씩 조 별로 활동하였으며, 레지오의 뿌리는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에서 시작되었다.
레지오의 정신으로는 성모 마리아의 정신이라 하겠다. 겸손, 순명, 부드러움, 기도, 고행, 인내, 순결, 지혜, 사랑의 열 가지 덕목은 레지오 단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또한 레지오의 선교 방법에 대하여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로는 조직적 형태의 선교와 둘째는 접촉을 통한 대화의 만남인 선교 방식이다.
레지오 마리애의 단원 구성은 행동 단원과 협조 단원으로 구분된다. 행동 단원은 일반 행동 단원과 쁘레시디움 단원으로 구분되며, 일반 행동 단원은 상훈에 있는 네 가지 사항을 준수하는 단원이다.
협조 단원은 행동 단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거나 이행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으로 레지오의 이름으로 기도를 함에 레지오에 참여한다.
제2장 레지오의 선교이념에서 가장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은 프랭크 더프의 선교이념이라 하겠다. 더프의 선교이념을 3가지의 주제인 '평신도 사도직 활동, 선교활동을 통한 성화, 마리아를 통한 선교로 나누어 고찰하여 본다.
첫째, 레지오 마리애의 창설자인 프랭크 더프는 1913년 빈첸시오회에 가입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영적으로 개인적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1917년 시작한 그의 선교활동 4년 뒤인 1921년 '자비의 모후'라는 사도직 단체를 창설하게 되었다.
둘째, 레지오 마리애의 목적은 '단원의 성화를 통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데 있다'고 밝힌다. 즉 하느님과 일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레지오는 선교활동 안에서 마리아의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룬다. 단원들은 복음을 전파하는 활동 이전에 자신이 먼저 성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프랭크 더프는 성화를 이루는 방법으로 기도와 활동을 택하였다. 기도와 활동은 균형과 조화를 통하여 하나만을 선택할 수 없으며 이러한 균형적 발전은 영적인 힘을 얻기 위함이다.
셋째, 프랭크 더프의 선교 이념인 마리아를 통한 선교는 초자연적인 동기에 의한 변성 원리와 마리아의 모성으로서 선교 활동을 말한다. 모성을 실현하는 선교는 교회의 어머니이며, 신비체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신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제3장에서는 레지오 마리애의 선교 방법으로 군대 조직을 응용한 조직적 형태와 접촉 활동을 통한 '대화의 만남'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레지오 마리애의 원래의 명칭은 '자비의 모후'였다. 이 조직이 점차 성장하면서 더프는 강력한 조직력을 가진 로마 군대의 조직적 형태의 활동을 레지오에 응용하게 되었다. 프랭크 더프가 자신의 선교 이념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은 백시리움이다. 백실리움의 도안은 로마 군대의 깃발을 레지오의 목적에 맞도록 변형시킨 것이다. 전체적인 구도는 성령께서 생명의 은혜를 내리실 때, 성모님을 그 수로로 삼으시고 레지오를 차지하는 모습으로 되어있다. 즉 더프는 레지오의 정신에 있어서 로마 군대의 정신을 마리아의 정신으로 변형시켰던 것이다.
다음으로 조직적 형태의 조직은 쁘레시디움, 꾸리아, 꼬미시움, 레지아, 세나투스라는 조직이 있다.
쁘레시디움: 레지오 마리애의 심장이라고 하며, 기본 단위체로써 조직되는 지단, 명칭의 해석은 파견대를 뜻하고 있다. 정기적인 주회를 가져야 하며, 단장 부단장, 서기, 회계등 간부가 선임되어야 한다. 설립은 4명의 적은 인원으로도 허가를 받을 수 있지만 20명을 넘어서는 안 된다.
꾸리아: 레지오의 기간이 되는 꾸리아는 고대 로마에서 집회소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두 개의 쁘레시디움을 관리하는 기관을 뜻하며 별도의 회원으로 설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있는 쁘레시디움 간부들로 구성된다. 직속 쁘레시디움의 단원들이 레지오의 규칙과 정신을 잘 지키도록 관리 감독하는 직무를 맡고 있다.
꼬미시움: 이 조직은 고대 로마의 시민회의를 지칭하는 용어였다. 한 교구 내에 조직된 교구 평의회이며 관할 지역은 교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구성원은 영적 지도 신부를 포함하여 꾸리아의 직속 쁘레시디움 간부로 구성된다. 기능은 꾸리아로서의 업무를 그대로 지니며 소속 쁘레시디움을 직접 관리한다. 덧붙여 꾸리아 조직을 관리 감독한다.
레지아: 명칭은 고대 로마의 황제의 관저와 집무실이었으나 후에는 도읍 또는 궁정을 가리켰다. 꼬미시움으로서는 너무 크고 세나투스로서는 조금 작은 지역을 관장하기 위하여 창설된 관구 평의회이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전국의 꼬미시움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이라고 하겠다.
세나투스: 고대 로마제국의 원로원이었다. 국가의 레지오에 관한 업무를 감독하는 평의회이다. 관할 교구장이 임명한 영적 지도자를 포함하여 모든 레지오 기관의 간부들과 세나투스와 관련된 의원들로 구성된다.
꼰칠리움: 레지오 마리애의 세계회의를 의미하며 레지오의 최고 관리권을 가진 중앙 평의회이다. 레지오의 규칙을 해석하는 권리, 하급 평의회를 설립하거나 해산시키는 권리, 또한 방침을 결정하고 분쟁과 제소응 심판하며 레지오에 관련된 사업의 적합성등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다. 레지오 기관의 간부들과 더블린 대교구의 성인 꾸리아 간부들 아일랜드 교회 당국이 임명한 영적 지도자로 구성되며, 월례회의는 더블린 시에서 한다.
4장에서의 선교 역사는 사제 부족인 6.25 사변 직후 예비자들을 위한 교리 교육 단체나 전교를 위한 물적 인적 자원이 매우 부족하였다. 전쟁으로 사제들이 많이 희생되었기 때문에 그 양상은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예비자들의 교육이 매우 엄격하였기 때문에 예비자 관리가 더욱 어려움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 현 하롤드 주교는 레지오 마리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레지오 단원들로 하여금 예비자 관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하여 예비자들을 교육시키고 선교와 교리 교육을 실시하는 평신도 사도직으로 초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굳건하게 신앙을 보존하고 교회를 유지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레지오의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주교는 평신도들이 선교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자기 품 안으로 돌아오기를 원하고 외교인들을 인도하는 일을 신자들이 해야 한다고 하였다. 즉 평신도 사도직의 장점을 외교인들과 매일 접촉하는 생활을 하고 있음에 두고 있다. 평신도들은 성직자들과 달리 외교인들과 함께 삶의 터전을 공유함에 있어 자연스럽게 그들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교구의 어려운 사정은 평신도 사도직을 위한 효율적이며 구체적인 조직의 체계와 교육의 방안을 시급히 강구하게 되었다.
레지오의 도입 과정을 보면 중국 레지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현 하롤드 주교가 1952년 일본을 방문하였을 때, 중국 레지오의 영향을 듣게 되었으나 주교는 즉시 자신의 교구에 레지오 마리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중국과 한국의 상황이 매우 달랐기 때문이다. 1949년 모택동이 권력을 장악하자 마르크스의 전술에 따라 가톨릭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박해의 상황에서 레지오의 활동은 불가능하였다. 중국에서는 박해 상황이었지만 한국의 상황은 그와 반대로 전쟁 직후 입교자가 밀려드는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주교는 어려운 상황 안에서도 굳건히 활동하는 중국 레지오의 활동을 위대한 활동이라 표했지만, 한편으로는 비정상적인 레지오라고 언급하였다.
한국 레지오 마리애는 아일랜드에서 창설된지 32년째 되는 해인 1953년 5월 31일 '치명자의 모후' '평화의 모후' '죄인의 의탁'의 쁘레시디움이 전남 목포시 산정동 본당 교리실에서 탄생되었다. 이러한 조직의 성장은 1956년부터 급속히 이루어졌으며, 1955년 10월 12일 한국 최초의 꾸리아인 '목포 매괴의 모후'가 설립되었다. 이어서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청주 '구세주의 모친' 춘천 '평화의 모후' 부산 '임마꿀라따'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1957년 1월 29일 서울 '상지의 좌'에 이어 진해 '그리스당의 도움' 전주 '파티마의 모후' 왜관 '천주의 모후' 제주 '치명자의 모후'가 설립되었다. 또한 1958년 4월 인천 '바다의 별'과 함께 논산 '루르드의 성모' 함창 '구세주의 모친' 꾸리아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꾸리아의 조직 체계를 관리할 꼬미시움이 광주, 부산, 춘천, 청주 교구에 승격 설치되었다. 이 중에서 한국 레지오의 대표권을 가진 광주 '중재자이신 마리아' 꼬미시움이 1958년 7월 13일 국가 최상급 평의회인 세나투스로 승격되었다. 이로써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투스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의 관할권을 가지게 되었다.
1955년 현 하롤드 주교가 입수한 영어판 교본을 대구 교구 김약진이 번역, 광주 교구 최일환이 국문 교정, 김성도 신부의 검열을 거쳐 목포 매괴의 모후 꾸리아에서 한국의 첫 번째 교본인 요약본을 발행하였다.
1965년 2월 12일 요아기나 루가스여사가 꼰칠리움 레지오니스의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시찰 사절로 내한하였다. 이것은 꼰칠리움의 첫 번째 공식 방문이었다. 사절단은 한국 중재자이신 마리아 세나투스의 방문을 시작으로 전국 11개 꼬미시움의 운영, 활동사항을 돌아보며, 평의회와 쁘레시디움의 주회를 참관하였다.
사절단은 시찰을 통해 밝힌 보고문에 한국 레지오의 특징과 발전을 위한 실천사항을 발표하였다.
첫째: 한국 레지오는 짧은 기간에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일본과 인도네시아의 쁘레시디움에 비하여 조직이나 활동이 수준 이상을 달리고 있어 매우 만족하였다고 하였다.
둘째: 교본의 규칙을 따르는 단계를 벗어나 상황에 맞게 응용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또한 교본은 30여 년 간의 경험을 토대로 작성된 것이기에 상황에 맞게 늘 쇄신되며 현대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셋째: 신앙의 주체 의식을 강조하였으며 신앙은 나의 것이라는 의지 안에서 평신도 사도직으로서 수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2. 레지오 마리애의 발전을 위한 제언
"1957년 9월 인천 교구 답동 본당 '매괴의 모후' 쁘레시디움이 설립됨으로써 시작된 인천 교구 레지오 마리애는 1986년 레지아로 승격됐으며 2008년 7월 현재 1개의 레지아 산하 15개의 꼬미시움 189개의 꾸리아 2607개의 쁘레시디움에서 2만 2500여 명의 행동단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이러한 단원의 증가세로 보아 전국의 레지오 단원의 수는 행동단원이 약 27만여 명 으로 추정되며 쁘레또리움 단원 협조단원 아듀또리움 단원 모두 합하여 55만 여 명으로 추정된다. 레지오 단원이 . 한국의 레지오는 도입 초기부터 최근에 이르기 까지 한국 교회에 있어서 평신도 사도직 단체로서 조직적인 선교 활동을 통하여 교회의 성장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여기에 레지오의 발전을 위하여 제언을 하는 바이다. 첫째, 각 단원들은 레지오의 목적의식인 '성화'에 대하여 깊은 성찰을 해야 하며 보다 더 기도생활에 충실해야 하겠다. 기도와 활동은 바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기도 안에서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찾고 식별하게 된다.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선교사의 모델이라고 하겠다. 둘째, 쁘레시디움의 보다 더 적극적인 활성화를 모색해야 하겠다. 단원들의 성향과 취미생활을 고려하여 보다 더 강한 응집력을 갖도록 힘써야 하겠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각 쁘레시디움의 단장들과 꾸리아의 단장들은 단원들의 성향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로는 예비 단원으로 입단한 단원의 성격과 취향을 예의 주시하여 활동하기에 알맞은 쁘레시디움으로의 자유로운 이동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더불어 꾸리아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지금의 꾸리아의 분위기는 각 쁘레시디움의 경쟁의 장을 연상케 하고 있는데 레지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 1965년 꼰칠리움의 특사로 내한한 루가스 여사의 말대로 "융통성 있는 규칙의 적용으로 과중하지 않고 싫증나지 않도록 레지오를 운영하므로써"단원들이 회합과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꾸리아와 쁘레시디움의 운영에 있어서 상급 평의회나 회의록을 낭독하는데 할애하는 시간을 줄이고 의견 교환및 토론등에 중점을 둠으로써 능동적인 주 회합이 이루어져야 하겠다. 이와 같이 제시한 레지오 마리애의 발전을 위한 제언은 무엇보다도 마리아께 대한 온전한 의탁과 전구에 의해서만이 실현될 수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며 부족한 논문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참고 자료
1. 꼰칠리움 레지오니스,『레지오 마리애 공인 교본』, 대한민국 세나뚜스 옮김, 가톨릭 출판사, 1992.
2. 이원순, 『한국 교회사의 산책』, 한국 교회사 연구소, 1988.
3. 로버트 브랜쇼, 『프랭크 더프의 생애』, 안상인 옮김, 성 요셉출판사, 1989.
4. 최경용, 『레지오 마리애 교본 해설』, 대구 가톨릭 신문사.
5. 한국 가톨릭 대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가톨릭대사전』, 가톨릭출판사, 1991.
6. 김영대, 『레지오의 관리와 운영』, 성모출판사, 1990.
7. 최경용, 『레지오 마리애의 영성』, 바오로 딸, 1998.
8. 프랭크 더프, 『놀라운 기적』, 푸른군대 본부 옮김, 크리스챤 출판사, 1984
9. 김영대, 『레지오의 관리와 운영』, 성모출판사, 1990.
10. 가톨릭 시보편집부, 『한국레지오 활발』,470(1965,5,9) 3면.
11. 유재국, 『교리 교육사』, 가톨릭 교리 신학원, 1990.
12. 경향 잡지 편집부, 『전남 광주 교구에 평신도 사도직』, 『경향잡지』48(1956/4), 천주교중앙협의회, 168-171쪽.
13. 현 하롤드, 『나는 레지오를 택했다 -부제: 공침의 반격 삼아』, 『가톨릭 시 보』,385(1963. 8. 4), 1면.
14.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레지오 마리애 관리 운영의 지침서』, 1997.
15. 서울 무염시태 세나뚜스, 『서울 세나투스 총람』, 1984.
16. 천주교 광주 대교구, 『광주 대교구 50년사』, 빛고을, 1990.
17. 부산교구사 편찬 위원회, 『부산 교구 30년사』, 흥진출판사 1990.
18. 서울 대교구총람 편찬위원회, 『서울 대교구 교구 총람』, 가톨릭출판사, 1984.
19. 『레지오마리애 활동 수첩
레지오 단원으로 활동하시는 분들에게 약간의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인천교구 '교리신학원' 을 졸업하며 제출한 소논문입니다.
하늘의 문 꾸리아 희망의 어머니 쁘레시디움 단원 천세종 베드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