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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도론 제6권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김성구 번역/김형준 개역
11. 초품 중 열 가지 비유[十喩]를 풀이함
【經】 모든 법은
허깨비[幻]1) 같고,
아지랑이[焰] 같고,
물속의 달 같고,
허공 같고,
메아리 같고,
건달바의 성 같고,
꿈 같고,
그림자 같고,
거울 속의 형상 같고,
변화한 것[化] 같다고 알았다.
【論】 이 열 가지 비유는 공한 법을 풀이하기 위한 것이다.
【문】 만일 모든 법이 공이어서 환 같다면 어째서 모든 법에는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감촉할 수 있고 분별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만일에 진실로 없는 것이라면 볼 수 있거나 내지 분별 할 수 있는 것도 없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없는 것인데 거짓으로 본다고 한다면 어째서 소리를 보지 못하고 빛을 듣지 못하는가?
만일 모두가 균등하게 공하여 없는 것이라면 어째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있는가?
모든 법이 공하기 때문이라면 마치 한 손가락에 첫째 손톱도 없고 둘째 손톱도 없어야 할 터인데
어째서 둘째 손톱은 보이지 않고 첫째 손톱만 보이는가?
그러므로 첫째 손톱은 실제로 있으므로 볼 수 있고,
둘째 손톱은 실제로 없으므로 보이지 않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답】 비록 모든 법의 모습이 공하지만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으로 나눠진다.
마치 환술로 드러난 코끼리ㆍ말 및 갖가지 물건과 같으니,
실제로는 없는 것인 줄 알지만 모양을 볼 수 있고 소리도 들을 수 있어서 6정(情)에 상대하여
서로 어긋남이 없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비록 공하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도 있어 서로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덕녀경(德女經)』2)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한다.
덕녀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명(無明)은 안에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아니다.”
“밖에 있습니까?”
“아니다.”
“안팎에 있습니까?”
“아니다.”
“세존이시여, 이 무명은 전생으로부터 온 것입니까?”
“아니다.”
“이생에서 후생으로 옮겨갑니까?”
“아니다.”
“이 무명은 나기도 하고 멸하기도 합니까?”
“아니다.”
“하나의 법으로 정해지는 실제의 성품이 있어 이를 무명이라 부릅니까?”
“아니다.”
그때 덕녀가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만약에 무명이 안에도 없고, 바깥에도 없고, 안팎에도 없고, 전생에서 금생으로 온 것도 아니고,
금생에서 내생으로 옮겨가는 것도 아니고, 진실한 성품도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무명으로부터 행이 인연되며,
나아가서는 온갖 고가 모입니까? 세존이시여, 가령 나무에 뿌리가 없다면 어떻게 줄기와 마디와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의 모습이 비록 공하지만 범부는
들은 것도 없고 지혜도 없으므로
그 가운데서 갖가지 번뇌를 내고,
번뇌로 인연하여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짓고,
업의 인연으로 후세의 몸을 짓고,
몸의 인연으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다.
이 가운데 실로 번뇌를 짓는 일은 없다.
또한 몸과 뜻의 업도 없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 자도 없나니,
마치 환술사가 갖가지 일을 환술로 나투는 것과 같으니라.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이 환술로 만들어진 것은 안에 있더냐?”
덕녀가 대답했다.
“아니옵니다.”
“밖에 있더냐?”
“아니옵니다.”
“안팎에 있더냐?”
“아니옵니다.”
“전생에서 금생으로 옮겨왔더냐?”
“아니옵니다.”
“금생에서 후생으로 옮겨가더냐?”
“아니옵니다.”
“이 환술로 이루어진 것이 생과 멸이 있더냐?”
“아니옵니다.”
“진실로 어떤 법이 있어 환술로 이루어졌다 할 것이 있더냐?”
“아니옵니다.”
“너는 이 환술로 만들어진 기악(伎樂)을 보거나 듣더냐?”
“저도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덕녀에게 물으셨다.
“만약에 환술이 공하고 거짓이고 진실치 않다면 어찌하여 환술에서 능히 기악이 만들어지겠느냐?”
덕녀가 세존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환의 특징[相]이란 그런 것이옵니다.
비록 근본이 없지만 볼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명도 그와 같아서 비록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안팎에도 있지 않고,
전생에서 금생으로 오거나 금생으로부터 후생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진실한 성품이 아니고,
나거나 멸하는 일도 없지만 무명을 인연하여
모든 행이 생겨나고 나아가서는 온갖 고가 일어난다.
마치 환이 쉬면 환이 짓는 바도 쉬듯이,
무명 역시 그와 같아서 무명이 다하면
행도 다하고 나아가서는 온갖 고가 모이는 일도 다하는 것이다.”
또한 이 환술의 비유는 중생들에게 일체의 유위법은 공하여 견고하지 못함을 내 보인다.
마치 ‘일체의 행은 환술로 어린아이를 속이는 것과 같아서 인연에 속해 있으므로 자재롭지 못하고
오래 머무르지 못한다’고 설함과 같다.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법이 환 같음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
‘아지랑이 같다’고 했는데, 뜨거운 열기[炎]가 햇살이나 바람에 움직이는
먼지 때문에 마치 광야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을 보고는,
지혜 없는 사람은 그것을 처음 보고서는 물이라 여긴다.
남자의 모습, 여자의 모습 등도 그와 같아서 결사ㆍ번뇌라는 햇살과
행이라는 먼지와 삿된 생각이라는 바람이 생사라는 광야 가운데서 펼쳐지는 것이다.
지혜 없는 사람은 하나의 모습으로 삼아 남자라고 하기도 하고 여자라고 하기도 한다. 이를 아지랑이와 같다고 한다.
또한 멀리서 아지랑이를 보고는 물이란 생각을 하지만
가까이 가면 물이란 생각이 없어지니,
지혜 없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성스런 법을 멀리하면 무아를 모르고
모든 법의 공함을 몰라 음(陰)ㆍ계(界)ㆍ입(入)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서
사람이란 생각ㆍ
남자란 생각ㆍ
여자란 생각을 일으키지만
성스런 법에 가까이 가서는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을 알게 된다.
이때 거짓된 갖가지 망상은 모두 제거된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법이 아지랑이 같은 줄 안다’고 말한 것이다.
‘물속의 달 같다’ 했는데, 달은 실제로는 허공 가운데 있으면서 그림자를 물위에 비춘다.
진실한 법상의 달이 법성(法性)과 같은 실제(實際)의 허공 가운데 있건만
범부들의 마음인 물에는 나와 내 것이라는 상(相)을 드러내는 것이다.그러므로 ‘물속의 달 같다’고 한다.
또한 어린아이가 물속의 달을 보고는 좋아하며 집으려 하는 것과 같으니,
어른이 이것을 본다면 웃는다. 지혜 없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몸이란 소견[身見] 때문에 내[吾我]가 있다고 본다.
진실한 지혜가 없으므로 갖가지 법을 보고,
본 뒤에는 기뻐하면서 모든 모습,
즉 남자란 모습ㆍ
여자란 모습 등을 취하려 한다. 도를 얻은 성인은 이를 보고 웃으니,
게송으로 말하리라.
물속의 달, 아지랑이 속의 물
꿈에서 얻는 재물, 죽어서 태어나는 일
이러한 것들을 진실로 얻고자 한다면
이는 우치한 자이니, 성인들이 웃으리.
또한 비유하건대 고요한 물속에서 달 그림자를 보았으나 물을 저으면 보이지 않듯이
무명이라는 마음의 고요한 물에서 나와 교만 등 모든 결사의 그림자를 보았으나
진실한 지혜의 지팡이로 마음의 물을 저으면 나 등의 모든 결사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보살들은 모든 법이 물속의 달 같은 줄 안다’고 말한 것이다.
허공과 같다 함은 이름만 있고 실제의 법이 없기 때문에
허공은 볼 수 없는 법이지만 멀리서 보기 때문에 눈에 닿는 빛이 바뀌어 옥빛으로 보인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공하여 있는 바가 없거늘
사람들이 무루의 진실한 지혜를 멀리하는 까닭에 실상을 버리고
너와 나,
남자와 여자,
집과 성 등 갖가지 사물을 보고
마음으로 집착하되 마치 어린아이가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고 진실로 색깔이 있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또한 어떤 사람이 허공을 아무리 멀리 날아 올라가도 보이는 것이 없지만
멀리서 보기 때문에 푸른빛이라고 여기듯이 모든 법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허공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허공의 성품은 항상 청정하거늘 사람들이 흐리다거나 더럽다고 말하듯이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성품이 항상 청정하거늘
음욕과 성냄 등에 가리어진 까닭에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여름날이 천둥번개에 비 내리고
구름 덮여 흐리어 깨끗지 못하듯이
범부들의 어리석음도 이와 같아서
갖가지 번뇌가 항상 마음을 덮었도다.
겨울날은 때로 해가 나오지만
언제나 구름 가려 어둡듯이
첫 과위나 두 번째 도를 얻었더라도
여전히 욕염(欲染)에 가리어져 있도다.
혹은 봄날 아침 해가 돋으려 하나
때때로 구름에 가리어져 있듯이
욕염을 여의어 세 번째 도를 얻었으나
남은 우치와 교만이 여전히 마음을 가린다.
가을 날씨가 구름 한 점 없고
큰 바다의 물이 청정하듯이
할 일을 이미 다한 무루심의 나한은
이렇듯 청정함을 얻는다.
또한 허공이 처음도 중간도 뒤도 없듯이 모든 법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마하연에서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허공은 앞 세상도 없고, 중간 세상도 없고 뒷세상도 없으니,
모든 법도 그러하다”고 하신 것과 같다. 그 경에서는 이 뜻을 자세히 말씀하고 계시다.그러므로 ‘모든 법이 허공 같다’ 말한다.
【문】 허공은 실제로 존재하는[實有] 법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허공에 실제 하는 법이 없다면 들어 올리거나 내려놓거나
오거나 가거나 굽히거나 펴거나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하는 등의 동작이 없어야 하리니, 움직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3)
【답】 만일 허공의 법이 실로 있는 것이라면 허공은 응당 자신이 머무는 자리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머무는 곳이 없다면 그 법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허공이 구멍 속에 머문다면 이는 허공이 허공 속에 머무는 결과가 된다. 그러므로 구멍 속에 머무를 수는 없다.
만일 실제 가운데 머문다면 이 실제 하는 것은 공이 아니므로 머무를 수 없다. 곧 받아들일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머무는 곳이 허공이다. 석벽 등의 실제 하는 것에는 머무를 곳이 없는 것과 같다”고 했는데,
만약에 머무를 곳이 없다면 곧 허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곧 허공이 머무를 곳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 없다는 것이 된다.
또한 형상이 없기 때문에 허공도 없다. 모든 법은 각각 형상이 있고,
형상이 있기 때문에 법이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땅의 굳은 모습,
물의 젖는 모습,
불의 더운 모습,
바람의 흔들리는 모습,
의식의 아는 모습,
지혜의 이해하는 모습,
세간의 생멸하는 모습,
열반의 영원히 적멸한 모습 등과 같다.
하지만 이 허공은 모습이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문】 허공도 형상이 있거늘 그대가 모르기 때문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물질[色]이 없는 곳이 곧 허공의 모습이다.
【답】 그렇지 않다.
물질이 없다 함은 물질을 파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는 다른 법이 없나니,
마치 등불이 꺼지면 다시는 다른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허공의 모습이 없다.
또한 이러한 허공의 법은 없다. 왜냐하면 그대는 물질 때문에 물질 없는 곳을 허공의 모습이라 했다.
만약에 그렇다면 물질이 생기기 전에는 허공의 모습이 없었을 것이다.
또한 그대가 말하기를 “물질은 무상한 법이요, 허공은 항상한 법이어서 물질이 있기 전부터 허공의 법은 있었나니,
허공은 항상하기 때문이다”고 했다. 하지만 물질이 아직 있기 않았다면 곧 ‘물질이 없어지게 되는 곳’도 없는 것이다.
만약에 물질이 없어지게 되는 곳이 없다면 허공의 모습도 없을 것이요, 허공의 모습이 없다면 허공의 법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은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다. 허공과 같이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거짓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다.
그러므로 보살들은 모든 법이 허공 같은 줄 아는 것이다.
‘메아리 같다’ 했는데, 깊은 산골이나 협곡 및 깊은 계곡, 혹은 빈 집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두드리면 소리를 따라 소리가 나니, 이를 메아리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라 하지만 지혜 있는 사람은 “이 소리는 사람이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소리가 부딪치는 까닭에 다시 소리가 나는 것으로 메아리라 부른다”고 생각한다.
메아리는 속이 빈[空] 것이어서 사람의 귀를 속인다. 사람이 말을 하려할 때에 입 안의 바람을 우타나(憂陀那)4)라 부르는데, 공기를 마셔들여 배꼽에 이르러 배꼽에 닿아 소리가 울린다. 소리가 나올 때는 일곱 곳에 닿았다가 반사되는데, 이를 말[言語]이라 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바람을 우단나(憂檀那)5)라 하는데
배꼽에 닿았다가 올라가면
이 바람, 일곱 곳에 닿나니
목과 잇몸과 치아와 입술과
그리고 혀와 목구멍과 폐이니,
여기에서 말이 이루어지거늘
우치한 이는 이를 모르고 미혹한 채
집착하여 성냄과 어리석음을 일으킨다.
그중에 지혜로운 사람 있으면
성내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음도 일으키지 않고서
그저 모든 법의 모습만 따르니
굽거나 곧거나 구부리거나 펴거나
과거ㆍ미래ㆍ현재에 관한 말이란
짓는 이 도무지 없는 것이거늘
이 일이 곧 환술인가 한다.
나무로 만든 허수아비 놀음인가
아니면 꿈속에서 생긴 일인가
스스로 열을 내어 번민하면서
유무(有無)를 분주히 따진다.
이 일을 누가 능히 알리오.
뼈에 힘줄만 얽힌 사람들이
능히 이처럼 말하고 소리 내니
마치 금을 녹여 물에 넣는 것 같도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기를 “보살들은 모든 법이 메아리 같은 줄 안다”고 하는 것이다.
‘건달바의 성(城) 같다’ 했는데, 해가 처음 뜰 때에 성의 문루나 궁전에 행인들의 오감이 보이다가
해가 차츰 높아짐에 보이지 않는다.이 성은 눈으로만 볼 수 있을 뿐 실체가 없으니, 이것을 건달바의 성이라 한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건달바의 성을 보지 못하다가 이른 아침에 동쪽을 향했다가 이를 보고는 실제라고 여기면서
즐거워하며 달려가 그리로 향하지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더욱 멀어지고 해가 높이 솟으면 아주 사라진다.
마치 기갈에 지친 사람이 더운 기운에 아지랑이 같은 것을 보고는 물이라 생각하여 그리로 향해 달려가나
가까이 갈수록 사라져서 피로만 극도에 이르는 것과 같다.
또한 깊은 산골짜기에 이르러 큰 소리로 외치면 메아리가 반응함을 듣고는 “누군가가 살고 있다” 고 여겨
그를 찾아다니지만, 찾지 못하고 피로만 극도에 달할 뿐 보이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면 생각이 저절로 깨달아지고, 목마르다는 생각과 물을 원하는 마음이 저절로 쉬게 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도 이와 같아서 공허한 5음ㆍ18계ㆍ12입에 대해서 나와 법을 보고
음욕과 성내는 마음으로 집착되어 사방으로 미친 듯이 달리면서 즐거움을 채우려 구하지만,
뒤바뀌고 속아서 마침내는 괴로워하고 번민하기에 이른다.
만일 지혜로써 나도 없고 진실한 법도 없는 줄 안다면 이 순간 뒤바뀐 생각이 멈추게 된다.
또한 건달바의 성은 성이 아니거늘 사람이 성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범부도 그와 같아서 몸이 아닌데 몸이라 생각하고,
마음이 아닌데 마음이라 생각한다.
【문】 한 가지 일만으로도 알 수 있거늘 어찌하여 여러 가지 비유를 드는가?
【답】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 마하연은 마치 큰 바닷물과 같아서 모든 법을 다 포섭한다.
마하연은 인연이 많은 까닭에 많은 비유를 들어도 허물이 없다.
또한 이 보살은 매우 깊고 날카로운 지혜를 가졌으므로 갖가지 법문과 갖가지 인연과
갖가지 비유로 모든 법을 남에게 이해시키려는 까닭에 많은 비유를 인용하는 것이다.
또한 일체의 성문의 법에는 건달바성의 비유가 없다. 그 밖에 갖가지 무상(無常)의 비유가 있으니,
"물질[色]은 물방울 같고,
느낌[受]은 물거품 같고,
생각[想]은 아지랑이 같고,
지어감[行]은 파초와 같고,
허깨비[幻]와 같다고 하였다."
아울러 『환망경(幻網經)』에서는 허공으로써 비유했으나
이 건달바의 성과는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말한 것이다.
【문】 성문의 법에는 몸을 성으로 비유했는데 여기서는 어찌하여 건달바성의 비유를 말하는가?
【답】 성문의 법에서 성의 비유란, 뭇 인연[衆緣]은 실제로 있지만 단지 성만이 거짓 이름일 뿐임을 비유한 것이다.
건달바의 성은 뭇 인연조차도 없는 것으로, 마치 불바퀴와 같아서 사람의 눈을 홀릴 뿐이다. 성문의 법에서는 나라는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성으로써 비유했으며, 여기에서는 보살은 근기가 날카로워 모든 법의 공한 경지에 깊이
들기 때문에 건달바의 성으로 비유를 드신 것이다.이런 까닭에 ‘건달바의 성으로 비유를 드셨다’고 말한 것이다.
‘꿈과 같다’ 했는데,
꿈속에서는 실제로 일이 없거늘 이것을 실제라고 여기다가 깨어난 뒤에 없는 것임을 알고 혼자 웃는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번뇌[結使]의 꿈속에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없지만 집착하다가 도를 얻어 깨어난 뒤에는
비로소 실제로는 없는 것임을 알고 혼자 웃는다.이런 까닭에 ‘꿈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꿈은 잠의 힘 때문에 아무런 법도 없는데 있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무명이라는 잠의 힘 때문에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서 있다고 보나니,
이른바 나ㆍ내 것ㆍ남자ㆍ여자 등이다.또한 꿈속에는 기쁠 것이 없는데 기뻐하고,
성낼 것이 없는데 성내고, 두려울 것이 없는데 두려워한다.
삼계의 중생도 그와 같아서 무명의 잠 때문에 성내지 않을 일에 성내고,
기뻐하지 않을 일에 기뻐하고, 두려워 않을 일에 두려워한다.
또한 꿈에는 다섯 가지가 있다. 몸이 고르지 못하거나 열기가 많으면 꿈에 불을 보거나
노란빛과 붉은빛을 보는 일이 많고, 냉기가 많으면 물을 보거나 흰빛을 보는 일이 많으며,
풍기가 많으면 꿈에 날아다니거나 검은빛을 보는 일이 많다. 또한 듣거나 본 일을 많이 생각하면
곧 꿈에서 보게 되며, 혹은 신[天]이 꿈을 통해 미래의 일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다섯 가지 꿈은 모두가 실제의 일이 없거늘 거짓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
사람도 그와 같아서 다섯 길[吾道]의 중생은 신견(身見)6)의 힘을 인연하는 까닭에 네 가지 나를 보게 되니,
이른바 ‘색음(色陰)이 곧 나인가,’
‘색이 곧 내 것인가,’
‘나 가운데 색인가,’
‘색 가운데 나인가’ 한다.
색과 마찬가지로 수ㆍ상ㆍ행ㆍ식에 대해서도 그와 같으니,
결국 넷에 다섯을 곱해 모두 스무 가지가 된다.7)
그러나 도를 얻은 진실한 지혜로 깨달으면 실체란 없음을 알게 된다.
【문】 꿈에 실체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식하는 마음[識心]은 대상[緣]8)을 만나면 곧 일어나기 때문이다.
꿈속에서 일어나는 식에도 갖가지 대상이 있다. 이런 대상이 없다면 어떻게 인식이 일어나겠는가?
【답】 실체란 없다. 다만 볼 수 없는 것을 볼 뿐이다. 꿈속에서 사람의 머리에 뿔이 있음을 보거나
꿈속에서 몸이 허공으로 날아다니는 것을 보지만, 실제로 사람에게는 뿔도 없으며 그 몸이 날아다니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문】 실제로 사람의 머리도 있고 다른 곳에는 실제로 뿔도 있는데 마음이 미혹한 까닭에 사람의 머리에 뿔이 있음을 보게 된다.
또한 허공도 실제로 있고 나는 일도 실제로 있는데 마음이 미혹한 탓으로 마치 자기의 몸이 나는 것처럼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답】 사람의 머리도 실제로 있고, 뿔도 실제로 있으나, 사람의 머리에 뿔이 났다고 하는 것은 헛된 생각이다.
【문】 세계가 광대하고, 전생부터의 인연이 갖가지로 같지 않다. 어떤 나라 사람은 머리에 뿔이 나기도 하고,
혹은 한 손이거나 한 발이기도 하고, 혹은 키가 한 자이기도 하고, 혹은 머리가 아홉이기도 하다.
그러니 머리에 뿔이 있은들 무엇을 기이하다 여기겠는가?
【답】 다른 나라 사람이 뿔이 있다면 그렇겠지만, 꿈에서 이 나라 사람으로서 아는 이가 뿔이 있다면 옳지 못하다.
또한 어떤 사람이 꿈에 허공의 끝이나 방위나 시간의 끝을 보았다면 이 일이 어찌 사실이겠는가?
어디엔들 허공이 없고 방위가 없고, 시간이 없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꿈속에는 없는 것을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대가 먼저 말하기를 “대상이 없는데 어찌 분별을 내겠는가” 하였는데,
비록 5진(塵)9)이 없지만 스스로 사유하고 생각하는 힘 때문에 법의 반연이 생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두 개의 머리가 있다” 하면, 그 말로 인하여 생각이 일어나니,
꿈속에서 없는 일을 있는 일로 보게 되는 것도 이와 같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비록 법은 존재하지 않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꿈같고 환 같으며
건달바의 성 같으니
온갖 법들이
역시 이와 같도다.
이런 까닭에 보살들은 모든 법을 ‘꿈과 같다고 안다’고 말한다.
‘그림자 같다’ 했는데, 그림자는 단지 볼 수만 있지 잡을 수가 없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눈과 감정 등으로
보거나 듣거나 느껴 알 수 있으나 실제로는 얻을 수 없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이 진실한 지혜는
사방에서 잡을 수 없나니
마치 큰 불 덩어리같이
만질 수 없는 것 같다.
법은 받아들일 수도 없고
받아들여서도 안 된다.
또한 그림자는 빛이 비추면 나타나고 비추지 않으면 없어지듯이
모든 결(結)과 번뇌가 정견(正見)의 빛을 가리면 곧 나라는 모습ㆍ법이라는 모습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또한 그림자는 사람이 가면 곧 가고, 사람이 움직이면 곧 움직이고, 사람이 머무르면 곧 머무른다.
선업과 악업의 그림자도 그와 같아서 뒷세상으로 갈 때에는 또한 가고, 금생에 머무를 때는 역시 머무른다.
과보가 단절되지 않는 까닭이니, 죄와 복이 익어지면 곧 나타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허공 가운데라도 따라 가고
산중 바위 속이라도 따라 가고
땅 밑이라도 따라 가고
바다 속이라도 따라 들어간다.
어디라도 항상 따라다니니
업의 그림자는 떨어질 줄 모른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이 그림자 같다’고 한다.
또한 그림자는 공하고 없는 것이어서 실체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으니,
일체의 법도 그와 같아서 공하여 실체가 없다.
【문】 그림자가 공하여 실체가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아비담에서는 말하기를
“무엇을 색입(色入)이라 하는가?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흑(黑)ㆍ옥색[縹]ㆍ자주색[紫]ㆍ광명ㆍ그림자 및 신업(身業)으로 짓는 세 가지 색이니,
이것을 볼 수 있는 색입(色入)이라 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없다고 말하는가?
또한 실제로 그림자가 있으니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인(因)은 나무요 연(緣)은 광명이니,
이 두 일이 합쳐져서 그림자가 생기거늘 어찌 없다 말하는가?
만일 그림자가 없다고 한다면 나머지 인연으로 생긴 법들도 모두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 그림자의 모양[色]은 볼 수가 있으니, 길고 짧고 크고 작고 거칠고 섬세하고
굽고 곧음의 형태가 움직이면 그림자도 움직인다. 이런 일은 모두 볼 수 있나니, 이런 까닭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답】 그림자는 실제로는 공하여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는 아비담 가운데 설해진 것을 말하지만,
이는 아비담의 뜻을 해석하는 사람이 지은 말이고 일종의 법문이거늘 사람들이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사실이라고 집착하는 것이다.
비바사에서 설하기를 “미진(微塵)은 지극히 가늘어서 깨뜨릴 수 없고 태울 수도 없으니
이는 항상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한 말하기를 “3세(世) 가운데 법이 있으니, 미래 가운데에서 나와서 현재에 이르고,
현재로부터 과거로 들어가 잃어버리는 일이 없다. 이것이 곧 항상함[常]이다”고 했다.
또한 말하기를 “모든 유위의 법은 새록새록 생멸하여 머물지 않는다.
이는 곧 단멸상(斷滅相)이니, 왜냐하면 먼저는 있다가 지금은 없어졌기 때문이다”고 했다.
이렇듯 갖가지 다른 말씀이 부처님의 말씀과 어긋나니, 이것으로 증명을 삼을 수는 없다.
지금 그림자는 색법(色法)과는 다르니, 색법이 생한다면 반드시 냄새와 맛과 촉감 등이 있는데
그림자는 그렇지 않다. 이는 곧 존재하지 않음[非有]이 된다.
예컨대 항아리[甁]는 두 감관으로 아나니, 곧 눈과 몸이다.
그림자가 있는 것이라면 역시 두 감관으로 알려져야 하는데,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러므로 그림자는 실제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이 눈을 속이는 법일 뿐이다.
마치 불통을 잡고 돌리는 것과 같으니, 빨리 돌리면 불 바퀴가 만들어지지만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그림자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림자가 곧 존재하는 사물이라면 마땅히 깨뜨리거나
없앨 수 있어야 하며, 형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그림자는 끝내 없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공한 것이다.
또한 그림자는 형체에 속하여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공하며,
비록 공하지만 마음에 생겨나 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모든 법이 그림자 같다’고 말한다.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고 했는데, 거울 속의 형상은 거울이 지은 것이 아니요, 얼굴이 지은 것도 아니요,
거울을 잡은 이가 지은 것도 아니요, 자연히 지은 것도 아니요, 인연 없이 된 것도 아니다.
어째서 거울이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얼굴이 거울에 다가가기 전에는 형상이 없으니, 그러므로 거울이 지은 것이 아니다.
어째서 얼굴이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거울이 없으면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거울을 잡은 이가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거울도 없고 얼굴도 없으면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째서 자연히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거울이 없고 얼굴도 없으면 형상이 없다.
형상은 거울과 얼굴을 기다린 뒤에야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히 지은 것이 아니다.
어째서 인연 없이 이루어진 것도 아닌가?
왜냐하면 인연이 없이 이루진다면 항상 형상이 있어야 할 것이요,
항상 있다면 거울이나 얼굴을 제하고도 스스로 나와야 될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인연 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 지은 것도 아니요,
남이 지은 것도 아니요,
함께 지은 것이 아니요,
인연이 없이 지은 것도 아니다.
어째서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닌가?
왜냐하면 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원인으로부터 생긴 일체의 법은 자재(自在)가 없기 때문이며,
모든 법은 인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스로가 지은 것이 아니다.
어째서 남이 지은 것도 아닌가?
왜냐하면 스스로가 없기 때문에 남도 없다.
만일 남이 지었다면 죄와 복의 힘을 잃는다.
남이 짓는 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착함과 착하지 못함이다.
착하다면 모두에게 쾌락을 주어야 할 것이요,
착하지 못하다면 모두에게 고통을 주어야 할 것이다.
만약에 고락이 섞여 있다면,
무슨 인연으로 쾌락을 주며,
무슨 인연으로 고통을 주는가?
함께 짓는다면 두 가지 허물이 있으니, 스스로가 짓는 허물과 남이 짓는 허물이다.
만일 인연이 없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생긴다면 사람들은 항상 즐거워서 모든 괴로움을 여윌 것이다.
만일 인연이 없다면 사람들은 즐거움의 원인을 짓게 되니, 괴로움의 원인을 제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일체의 법에는 반드시 인연이 있거늘 어리석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
비유하건대 사람이 나무에서 불을 구하고,
땅에서 물을 구하고,
부채에서 바람을 구하는 것과 같으니, 이
러한 갖가지 일은 각각 인연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괴로움과 즐거움이 화합한 인연은
전생의 업인(業因)과 금생의 좋은 행이나 삿된 행의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
이로부터 괴로움과 즐거움을 얻는다.
이 괴로움과 즐거움의 갖가지 인연은 실제로 이를 구하려면 짓는 사람도 없고
받는 사람도 없으니, 공한 5중(衆)이 짓고 공한 5중이 받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즐거움을 얻으면 음심으로 애착하고,
괴로움을 만나면 성을 내며, 이 즐거움이 사라지면 다시 얻으려고 애를 쓴다.
마치 어린애가 거울 속의 형상을 보고는 즐거운 마음으로 애착하며,
애착하던 것을 잃으면 거울을 부수어 찾아 구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보고 웃는다.
즐거움을 잃었다고 다시 구하는 일도 이와 같으니,
역시 도를 얻은 성인은 이 때문에 웃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거울 속의 형상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거울 속의 형상은 실제로는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거늘 뭇 사람들의 눈을 속일 뿐이다.
일체의 법도 그와 같아서 공하여 실답지 않으며, 생겨나거나 멸하지도 않거늘 범부들의 눈을 홀릴 뿐이다.
【문】 거울 속의 형상은 인연으로부터 생겼으니, 얼굴ㆍ거울ㆍ거울을 쥔 사람ㆍ광명이 화합하는 까닭에 형상이 생겨난 것이다.
이 형상을 인하여 기쁨과 근심도 내며, 그것이 다시 원인도 되고 결과도 되거늘 어찌 실로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 하는가?
【답】 인연으로 생겨나 자재롭지 못하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만일 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이는 또한 인연으로부터 생겨나지도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인연 가운데 먼저부터 있었다면 인연은 곧 필요가 없게 되며, 인연 가운데 먼저부터 없었다
해도 인연은 역시 필요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건대 우유 속에 먼저부터 낙(酪)이 있었다면
그 우유는 낙의 원인이 되지 못하니, 먼저부터 낙이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먼저부터 낙이 없었다면
물속에 낙이 없듯이 그 우유도 낙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
만일 원인이 없이 낙이 생긴다면
물에서는 어찌하여 낙이 생겨나지 않는가?
만일 우유가 낙의 인연이라면,
우유 역시 저절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곧 우유도 인연에서 생겨난 것으로
우유는 소에서 나왔고
소는 물과 풀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끝없이 모두가 인연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연 가운데 과가 있다고 말할 수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도 없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말할 수도 없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겨나
자성이 없음이 마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은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법이 인연에서 나왔다면
이 법의 성품은 실로 공하니
만일 이 법이 공하지 않다면
인연에 의해 있는 것은 아니다.
비유컨대 거울 속의 형상이
거울이나 얼굴이 지은 것 아니며
거울 잡은 이가 지은 것 아니며
저절로 지어지거나 원인 없이 지어진 것 아니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도 아니며
이 말 역시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을 중도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법은 ‘거울 속의 그림자 같다’고 말한다.
‘변화한 것[化]과 같다’ 했는데,
열네 가지로 변화하는 마음이 있다.
곧 초선(初禪)에서는 욕계(欲界)와 초선천의 둘이며,
2선에서는 욕계와 초선천과 2선천의 셋이요,
3선에서는 욕계와 초선천과 2선천과 3선천의 넷이요,
4선에서는 욕계와 초선천과 2선천과 3선천과 4선천의 다섯이다.
이 14종의 변화심으로 여덟 가지 변화를 일으키니,
첫째는 작아져서 먼지같이 되는 것이요,
둘째는 커져서 허공에 가득해지는 것이요,
셋째는 가벼워져서 기러기 털같이 되는 것이요,
넷째는 자재롭게 큰 것을 작게 하고 긴 것을 작게 만드는 하는 등의 것이요,
다섯째는 주인의 힘큰 힘이 있어서 아무도 그를 이길 이가 없으므로 주인의 힘이 있다고 한다.이 있게 되는 것이요,
여섯째는 능히 멀리 이르는 것이요,
일곱째는 능히 땅을 움직이는 것이다.
여덟째는 뜻하는 대로 능히 모두 이루니, 한 몸이 여러 몸이 되기도 하고,
여러 몸이 한 몸이 되기도 하며,
석벽(石壁)을 모두 통과하고,
물을 밟고 허공을 디디고 해와 달을 만지며,
4대를 바꾸어 땅을 물로 만들고 물을 땅으로 만들며,
불을 바람으로 만들고 바람을 불로 만들며,
돌을 금으로 만들고 금을 돌로 만든다.
이러한 변화에 다시 네 가지가 있으니, 욕계의 약초와 보물을 환술로 능히 여러 가지 물건으로 변화시키며,
신통을 얻은 사람들의 신통력으로 여러 가지 물건을 변화시키며,
하늘ㆍ용ㆍ귀신들이 태어나면서 얻은 과보의 힘으로 모든 물건으로 변화시키며,
색계에 태어나면서 얻은 과보로 선정의 힘을 닦는 까닭에 모든 물건을 변화시킨다.
변화한 사람에게 생ㆍ노ㆍ병ㆍ사가 없으며,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어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공하여 진실이 없다.일체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생ㆍ주ㆍ멸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변화한 것 같다’고 말한다.
또한 변화로 생긴 물건은 일정한 것이 없이
다만 마음이 생겨남으로써 만들어진 것으로 모두 진실함이 없다.
사람의 몸도 그와 같아서 본래 원인이 없고,
다만 전생의 마음을 좇아 금생의 몸이 생겨난 것으로 모두 진실함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변화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변화된 마음이 사라지면 곧 변화도 사라진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인연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져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변화된 일이 비록 실제로는 공하나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근심ㆍ괴로움ㆍ성냄ㆍ기쁨ㆍ즐거움ㆍ어리석음ㆍ미혹 등을 일으키게 한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비록 공하여 진실 되지 않으나,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기쁨ㆍ성냄ㆍ근심ㆍ두려움 등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변화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또한 변화하여 생겨난 법이 처음도 없고 중간도 없고 뒤도 없듯이 모든 법도 그와 같다.
변화된 것이 생길 때에는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도 가는 곳이 없듯이 모든 법도 그와 같은 것이다.
또한 변화된 것은 형상이 청정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물들지 않으며 죄와 복에 더럽혀지지도 않는다.
모든 법도 그와 같아서 법성(法性)이 여여(如如)한 것 같고, 진리[眞諦]10)가 자연히 청정한 것과 같다.
비유하건대 염부제의 네 개의 큰 강은 각각 5백 갈래의 작은 강이 속해 있는데,
이 물들이 갖가지로 오염되어있어도 대해로 들어가면 모두 맑아지는 것과 같다.
【문】 변화된 일이 공하다고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변화시키는 마음 역시 선정을 닦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마음으로 갖가지로 변화를 지어 사람이나 법이 된다. 이 변화에는 인도 있고 과도 있거늘 어찌 공하겠는가?
【답】 ‘그림자 같다’고 말한 것 가운데서 이미 대답했지만 이제 다시 대답하리라. 이 인연은 비록 있으나 변화된 결과는 공한 것이다. 마치 입으로 무소유(無所有)를 말함과 같으니, 비록 마음이 입으로 말을 내게 했지만, 마음과 입으로써 있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곧 말한 바는 무소유이나 곧 이것은 유(有)인 것이다.
가령 “둘째 머리, 셋째 손이 있다”고 말했을 때,
비록 마음과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으나 머리나 손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또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무생(無生)을 관하면 유생(有生)에서 벗어나고, 무위(無爲)에 의지해 유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비록 무생법을 무(無)라고 관찰하지만, 인연은 될 수 있다. 무위의 경우도 그러하다”고 하셨다.
변화된 것이 비록 공하나 또한 능히 마음의 인연으로부터 생겨난다.
비유하건대 허깨비[幻]나 아지랑이[焰] 등의 아홉 가지 비유와 같으니,
비록 없는 것이나 능히 갖가지 마음을 내는 것이다.
또한 이 변화된 일은 6인(因)11)과 4연(緣)12)에서 구할 수 없으니,
여기에는 6인과 4연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공하다.
또한 공이란 보이지 않기에 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실다운 작용이 없는 까닭에 공하다 한다.
이런 까닭에 ‘모든 법이 변화와 같다’고 말한다.
【문】 모든 법의 열 가지 비유가 모두 공하여 차이가 없다면
어찌하여 열 가지 일만으로 비유를 삼고, 산ㆍ강ㆍ석벽 등을 비유로 삼지 않는가?
【답】 모든 법이 비록 공하나 이해하기 어려운 공[難解空]과 이해하기 쉬운 공[易解空]으로 분별할 수 있나니,
지금은 이해하기 쉬운 공으로써 이해하기 어려운 공을 비유했다.
또한 모든 법이 두 가지가 있으니, 마음이 집착하는 곳[心着處]과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곳[心不着處]인데,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곳으로써 마음이 집착하는 곳을 풀이했다.
【문】 이 열 가지 비유가 어찌하여 마음이 집착하지 않는 곳이 되는가?
【답】 이 열 가지 일은 오래 머무르지 않으며, 쉽게 생기고 쉽게 멸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음이 잡착하지 않는 곳이 된다.
또한 사람들은 이 열 가지 비유가 눈과 귀를 홀리는 법인 줄은 알면서도
모든 법이 공함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이로써 모든 법을 비유한 것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이 열 가지 비유에 마음이 집착되어 알지 못하고,
갖가지로 힐난하고 토론하면서 이것들이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열 가지 비유는 그 쓸모가 없기에 다시 다른 법문을 말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문】 모든 법이 도무지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면,
이 열 가지 비유 등의 갖가지 비유와 갖가지 인연의 논의도 나는 이미 모두 공한 줄 안다.
만일 모든 법이 도무지 공하다면 이 비유를 말하지 않아야 하며,
만일 이 비유를 말한다면 공하지 않음이 되는 것이다.
【답】 내가 공을 말하여 모든 법의 있다는 집착을 파했다.
지금 말하는 것은 있음을 말했다면 먼저 이미 파하였고,
없음을 말했다면 힐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비유하건대 일을 맡은 비구가 손을 들고 높은 소리로 외치면 대중이 모두 조용해지는 것과 같다.
이는 소리로써 소리를 막으려는 것일 뿐 소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까닭에 비록 모든 법을 설하여도
공하여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이다. 비록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말하기는 해도 유(有)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이 변화한 것과 같다’고 말한다.
【經】 걸림 없음[無礙]과 두려움 없음[無所畏]을 얻었다.
【論】 갖가지 무리의 계ㆍ입의 인연 가운데 마음에 걸림이 없고 다함이 없고 멸함이 없으니,
이것이 걸림 없음이며 두려움 없음이다.
【문】 앞에서 말하기를 “보살들이 한량없는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음을 얻었다” 했거늘
이제 어찌하여 다시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을 얻었다 하는가?
【답】 먼저는 두려움 없는 원인을 말했고, 이제는 두려움 없는 과를 말한 것이다.
모든 대중과 나아가서는 보살 대중 가운데서 설법이 다함없고, 토론해서 지는 일이 없고,
마음에 의혹이 없어서 이미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먼저는 한량없는 대중 가운데서 두려움 없음을 얻었다 했지만 무슨 힘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지 모른다.
그 때문에 다시 두려움 없음을 말씀하셨으니, 걸림 없는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문】 보살들에게도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이 있다면, 부처님과 보살은 어떻게 다른가?
【답】 내가 먼저 말한 바와 같이 보살들은 스스로 두려움 없는 힘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두려움이 없으니, 부처님의 두려움 없음과는 다르다.
또한 걸림 없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온갖 곳[一切處]이요,
둘째는 온갖 곳이 아님[非一切處]이다.
온갖 곳이 아님이라 했는데,
한 가지 경서(經書)나 백ㆍ천 가지 경서 가운데 걸림이 없다면,
한 대중에 들어가거나 혹은 백ㆍ천 대중에 들어갔을 때도 두려움이 없다.
보살들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의 지혜 가운데서는 걸림이 없다.
하지만 부처님의 지혜 안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부처님께서 발우를 던지셨을 때 5백 명의 나한과 미륵보살 등이 모두 잡지 못했나니,
보살들의 경우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의 힘 가운데서는 걸림이 없지만
부처님의 지혜 안에서는 걸림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들이 걸림 없음과 두려움 없음을 얻었다’고 말한다.
【經】 중생들의 마음 가는 곳을 모두 알아 미묘한 지혜로써 그들을 제도하여 해탈시킨다.
【論】 【문】 어떻게 중생들의 마음 가는 곳을 다 아는가?
【답】 중생들의 마음이 갖가지 법 가운데서 곳곳으로 행하는 줄을 알되 마치 햇빛이 두루 비치는 것 같다.
보살은 중생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알고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 주는 것이다.
“일체 중생이 향해 나아감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마음으로 항상 즐거움을 구하는 것이요,
또한 하나는 지혜로 분별하여 능히 좋고 나쁨을 아는 것이다.
그대는 집착하는 마음을 따르지 말고 지혜를 따르며,
스스로의 마음을 꾸짖으라.
그대는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온갖 잡된 업을 모아 싫어할 줄 모르고
다만 세상의 쾌락만을 쫓다가 괴로워하게 됨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세상 사람들이 쾌락을 탐하다가 환란에 이르고 5도(道)에서 생을 받음은 모두가 마음이 하는 짓이다.
누가 그렇게 시키겠는가?
그대는 미친 코끼리처럼 날뛰면서 잔인하게 해치나 억제할 길이 없는 것과 같다면,
누가 그대를 길들이겠는가? 만일 잘 길들일 수 있다면 세상의 환란을 면할 것이다.
태(胎)에 드는 일은 부정하고 고달픈 것이어서 마치 지옥과 같은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미 태어나 세상에 있다면 늙음ㆍ병듦ㆍ죽음ㆍ고통ㆍ근심ㆍ슬픔이 천만 가닥이요,
하늘에 태어나더라도 다시 삼계로 타락해야 하니, 편안할 일이 없다. 그대는 어찌하여 쾌락에 집착하는가?”
이와 같이 갖가지로 그 마음을 꾸짖고는
“결코 그대를 따르지는 않으리라” 고 맹세하니, 이것이 보살이 중생들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문】 무엇을 ‘미묘한 지혜로써 그를 제도하고 해탈시킨다’고 하는가?
여기에서 무엇을 미묘한 지혜라 하고, 무엇을 거친 지혜라 하는가?
【답】 세간의 교묘한 지혜는 거친 지혜라 하고,
보시ㆍ지계ㆍ선정을 행하는 것을 미묘한 지혜라 한다.
또한 보시하는 지혜를 거친 지혜라 하고,
지계ㆍ선정의 지혜를 미묘한 지혜라 한다.
또한 보시ㆍ지계의 지혜를 거친 지혜라 하고,
선정의 지혜를 미묘한 지혜라 한다.
또한 선정의 지혜를 거친 지혜라 하고
기댈 곳 없는 선정[無猗禪定]의 지혜를 미묘한 지혜라 한다.
또한 모든 법의 모습을 잡는 것을 거친 지혜라 하고,
모든 법의 모습을 잡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 것을 미묘한 지혜라 한다.
또한 무명 등 모든 번뇌를 깨뜨리고
모든 법의 모습을 얻는 것을 거친 지혜라 하고,
법 그대로의 모습,
즉 순금이 줄어들거나 변하지 않고,
금강(金剛)이 깨지거나 무너지지도 않고,
허공이 물들거나 집착하지도 않듯이 한 경지에 드는 것을 미묘한 지혜라 한다.
이와 같은 한량없이 미묘한 지혜를 보살은 스스로 얻고 다시 중생들에게 가르치니,
그런 까닭에 ‘보살들은 중생들의 마음이 향하는 곳을 알고서
미묘한 지혜로써 제도하여 해탈시킨다’고 말한다.
12. 초품 중 뜻에 걸림이 없다[意無礙]를 풀이함
【經】 뜻에 걸림이 없다.
【論】 무엇을 뜻에 걸림이 없다13) 하는가?
보살은 온갖 원수나 친척, 또는 원수도 친척도 아닌 사람들에 대해서 평등한 마음으로 대하여 걸림이 없다.
또한 일체 세계의 중생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와서 침해하더라도 성내는 마음이 없고,
갖가지 방법으로 공경하고 공양하여도 기뻐하지 않는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부처님이나 보살에 대하여도
마음으로 애착하지 않고
외도나 악인이라도
증오하거나 성내지 않는다.
이처럼 청정함을 ‘뜻에 걸림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다.
【문】 이 보살은 아직 불도를 얻지 못했고, 아직 일체지를 얻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는가?
【답】 이 보살은 한량없고 청정한 지혜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는 것이다.
【문】 보살들은 아직 불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한량없는 지혜가 있을 수 없고,
남은 번뇌[殘結]가 있으므로 청정한 지혜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답】 이 보살들은 삼계 안에서 업을 맺는 육신이 아니다. 모두가 법신이 자재하게 되어
노ㆍ병ㆍ사를 초월하였으나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세상 가운데에서 행해
불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한다. 그러나 이미 자재를 얻었으니,
부처가 되고자 원하기만 한다면 능히 이루는 것이다.
【문】 법신 보살(法身菩薩)은 부처님과 다름이 없거늘 어찌하여 보살이라 하는가?
어째서 부처님을 예경하고 설법을 듣는가?
만일 부처님과 다르다면 어째서 한량없고 청정한 지혜가 있다고 하는가?
【답】 이 보살이 비록 법신의 경지에 이르러 노ㆍ병ㆍ사가 없으나 부처님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마치 열나흘 날의 달을 보면 사람들은 혹은 꽉 찼는지 혹은 아직 꽉 차지 않았는지 의심을 내는 것과 같다.
보살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능히 부처가 되어 법을 설할 수 있으나 아직 부처가 된 것은 아니다.
부처님은 달이 보름을 꽉 채워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과도 같다.
또한 한량없는 청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진실로 한량이 있는데 헤아릴 수가 없어서 그것을 한량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바닷물이나 항하의 모래 등은 사람들이 헤아릴 수가 없으므로 한량이 없다고 하듯이,
부처님과 보살들에게는 한량없음이 되지 못한다. 보살의 한량없는 청정지혜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하늘이나 인간 및 성문ㆍ벽지불들이 헤아리지 못하므로 한량없는 지혜라 하고,
보살이 무생도(無生道)를 얻을 때
모든 번뇌[結使]를 끊는 까닭에 청정한 지혜를 얻게 된다.
【문】 만일 이때에 이미 모든 번뇌를 끊었다면 성불할 때에는 다시 무엇을 끊는가?
【답】 이 청정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부처가 될 때 나머지 번뇌를 끝까지 다 제거하여 실로 청정함을 얻는 것이요,
둘째는 보살이 육신을 버리고 법신을 얻을 때 모든 번뇌를 끊고 청정해지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한 등잔으로도 능히 어두움을 제거하여 일을 할 수는 있으나
다시 큰 등잔이 있으면 더욱더 밝은 것과 같다.
부처님과 보살이 모든 번뇌를 끊는 것도
이와 같아서 보살들이 비록 끊어야 할 것을 이미 끊었다고는 하나
부처님이 끊은 데다 견주면 아직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을 ‘한량없는 청정지혜를 얻는 까닭에 모든 법에서 뜻에 걸림이 없다’고 말한다.
【經】 대인(大忍)을 성취했다.
【論】 【문】 앞에서 이미 등인(等忍)과 법인(法忍)을 말했거늘 어찌하여 이제 다시 ‘대인을 성취했다’ 하는가?
【답】 이 두 가지 인을 증장시킴을 대인이라 한다.또한 등인은 중생들 가운데서
모든 것을 능히 참아 유순하는 것이요,
법인은 깊은 법에 대하여 참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인이 자라나면
무생인(無生忍)을 증득하게 되고,
최후의 육신에 시방의 부처님들이 화현해서 앞에 나타나시거나
공중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이 대인을 성취한 것이라 한다.
비유하건대 성문(聲聞)의 법 가운데
난법(煖法)이 자라남을 정법(頂法)이라 하고,
정법이 자라남을
인법(忍法)이라 함과 같다.
다시 다른 법이 없어서 자라남에 차이가 있으니,
등인과 대인(大忍)도 역시 그러하다.
또한 두 가지 인(忍)이 있으니,
생인(生忍)과
법인(法忍)이다.
생인이라 함은
중생들 가운데서 잘 참는 것을 말한다.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겁 동안에 중생들이 갖가지로
삿된 마음을 가한다 해도 성내지 않고,
갖가지로 공경하고 공양하여도 기뻐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중생을 관찰함에 처음이 없다.
처음이 있으면 인연이 없고, 인연이 있으면 처음이 없으며,
처음이 없으면 나중도 없으리라. 왜냐하면 처음과 나중은 서로 기다리기 때문이다.
처음과 나중이 없다면 중간도 없으리니,
이렇게 관찰할 때에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으며,
안은도(安隱道)에 의하여 중생을 관찰해 사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를 생인이라 하고,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으면 이를 법인이라 한다.
【문】 매우 깊은 법이란 어떤 것인가?
【답】 앞에서 매우 깊은 법인에 대해 말한 것과 같다.
또한 매우 깊은 법이라 함은 12인연 가운데서 전전해서 과를 내지만
인 가운데 과가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과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이 가운데에서 나오는 것을 매우 깊은 법이라 하는 것이다.
또한 세 가지 해탈문인
공ㆍ
무상ㆍ
무작에 들면
곧 열반의 항상된 즐거움을 얻는 까닭에 이를 매우 깊은 법이라 한다.
또한 일체법은
공도 아니요,
공 아님도 아니요,
형상 있음도 아니요,
형상 없음도 아니요,
작위 있음도 아니요,
작위 없음도 아니라고 관찰하니,
이렇게 관찰하는 가운데
마음 또한 집착되지 않으면 이를 매우 깊은 법이라 한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인연으로 생긴 법
이를 공(空)의 모습이라 하고
거짓 이름[假名]이라고도 하며
중도(中道)라고도 한다.
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도리어 없어지지 않아야 하리니,
지금은 없고 앞에는 있었다면
이를 단견(斷見)이라 부른다.
항상하거나 단절되지도 않으며
또한 있음도 없음도 아니어서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고
언설(言說) 또한 다했다.
이러한 매우 깊은 법에 대하여 믿음이 걸림이 없고,
후회하거나 위축되지 않으면 이를 ‘대인을 성취했다’고 한다.
【經】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한다.
【論】 외도의 법에서는 비록 중생을 제도하나 여실하게 제도하지 못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갖가지 삿된 소견과 번뇌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승(乘)14)은 비록 제도하기는 하나 적절히 제도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일체지가 없어 방편의 마음이 얇기 때문이다.
오직 보살만이 능히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하나니,
사공의 일로써 비유하건대 한 사람은 공기 주머니[浮囊]나 풀 뗏목으로 건네주고,
한 사람은 큰 배로 건네주는 것 같다. 이 두 가지 건네주는 일은 아득히 다르듯이
보살의 교묘하게 중생을 제도하는 일도 이와 같다.
또한 비유하건대 병을 고치는 데
쓴 약이나 침 뜸으로는 통증을 주어 차도를 얻지만,
소타선타(蘇陀扇陀)15)라는 묘한 약은 병자가
눈으로 보기만 하면 온갖 질병이 모두 낫는다.
병을 제하는 것은 같으나 우열의 차이가 있듯이
성문과 보살이 중생을 제도하는 일도 역시 그와 같다.
고행과 두타16)로
초저녁에서 한밤을 지나 새벽까지 부지런히 좌선하고
괴로움을 관찰하여 도를 얻는 것은 성문의 가르침이요,
모든 법의 모습이 얽매임도 없고
풀려남도 없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맑아지는 것은 보살의 가르침이다.
문수사리본연(文殊師利本緣)17)에서는 이렇게 얘기되고 있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덕이시여,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지난 과거세에
사자음왕(師子音王)이란 부처님이 계셨는데, 부처님과 중생들의 수명은 10만억 나유타 세(歲)였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3승의 법으로 중생들을 제도하셨으니, 나라 이름은 천광명(千光明)이요,
그 나라 안의 나무들은 모두 7보로 이루어졌고,
나무마다 한량없이 청정한 법음, 즉 공ㆍ무상ㆍ무작ㆍ불생ㆍ불멸ㆍ무소유의 소리를 내니,
중생들이 그것을 듣기만 하면 마음이 열리어 도를 얻었습니다.
이때 사자음왕불의 첫 법회의 설법에 99억 사람이 아라한의 도를 얻었으며,
보살들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이 보살들은 모두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어
갖가지 법문에 들었고 한량없는 부처님을 뵈어 공경 공양드렸습니다.
능히 한량없고 셀 수 없는 중생을 제도했으며, 한량없는 다라니문을 얻었고
한량없는 갖가지 삼매의 문을 얻었으며, 최초로 발심하여 새로이 불도의 문에 들어온 보살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이 불국토의 한량없는 장엄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교화를 마치시고는 무여열반에 드시니, 6만 세 동안 법이 머물더니,
모든 나무에서 다시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때 두 보살 비구가 있었는데
하나는 희근(喜根)이요,
하나는 승의(勝意)였습니다.
이 희근법사는 용모와 위의가 순박 정직하고 세속법을 버리지 않으며 또한 선과 악을 분별하지도 않았습니다.
희근의 제자는 총명하여 깊은 진리 듣기를 좋아하였는데 그 스승은 소욕(少欲)과 지족(知足)을 찬탄하지 않고,
계행과 두타도 찬탄하지도 않고, 모든 법의 실상이 청정함만을 설할 뿐이었습니다. 그는 제자들에게는 말하기를
“온갖 법은
음욕ㆍ성냄ㆍ어석음의 모습이다.
이 모든 법의 모습이 곧 모든 법의 실상이며,
걸림 없는 바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방편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서 일상지(一相智)에 들게 하였습니다.
이때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성내지 않고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후회하지 않음으로써 생인을 얻었고,
생인을 얻은 까닭에 곧 법인(法忍)을 얻어 진실한 법 가운데서 요동하지 않으니 마치 산과 같았습니다.
승의 법사는 청정하게 계를 지키고, 12두타18)를 행하여, 4선(禪)과 4무색정(無色定)을 얻었습니다.
승의의 제자들은 근이 둔하고 분별을 구함이 많아 ‘이것은 깨끗하다’ 혹은 ‘이것은 깨끗지 못하다’ 하며
마음이 동요하고 움직였습니다.
다른 때 승의가 마을에 들어갔다가 희근의 제자의 집에 가서 자리에 앉아
지계와 소욕과 지족행과 두타행과 한처(閑處)와 선의 고요[禪寂]을 찬탄하고
희근을 비방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법을 설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사견에 들게 하니,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걸림 없는 모습을 설한다.
이는 잡된 행을 하는 사람이지 순수하고 청정하지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 제자는 근이 예리해 법인을 얻었는데,
그는 승의에게 “이 음욕의 법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승의가 대답하되 ‘음욕은 번뇌의 모습이니라’ 하였습니다.
다시 묻기를 “이 음욕의 번뇌는 안에 있습니까, 밖에 있습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이 음욕의 번뇌는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다.
만일 안에 있다면 밖의 인연을 기다릴 필요가 없고,
만일 밖에 있다면 나에게 관계가 없으니 나를 괴롭힐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사19)가 말하되 “음욕이 안에도 있지 않고, 밖에도 있지 않고,
동ㆍ서ㆍ남ㆍ북ㆍ 사유ㆍ상하로부터 오는 것도 아니라면,
두루 실상(實相)을 구하여도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법은 곧 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리니,
만약에 생멸의 모습이 없다면 공해서 없는 것이거늘 어찌 능히 번뇌가 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승의가 이 말을 듣자 불쾌하였으나 대답은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되
‘희근은 많은 사람을 속여서 삿된 길에 집착하게 하는구나’ 하였습니다.
이 승의보살은 아직 음성다라니(音聲陀羅尼)20)를
배우지 못해서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면
곧 기뻐하고 외도의 말을 들으면 화를 내며,
세 가지 착하지 못한 법을 들으면 싫어하고
세 가지 착한 법을 들으면 매우 기뻐하며,
생사의 법을 들으면 근심하고 열반의 법을 들으면
기뻐하면서 거사의 집에서 숲 속의 정사에 들어가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희근보살은 많은 사람을 속여 삿되고 나쁜 소견에 들게 하였소.
왜냐하면 그는 말하되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과 그 밖의 모든 법이 모두가 걸림 없는 모습이라 하였기 때문이요.”
이때 희근이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매우 성이 났으니, 나쁜 업에 가리워 큰 죄에 빠지게 되겠도다.
이제 내가 그에게 매우 깊은 법을 말해 주어야 되겠도다. 비록 지금 당장에는 얻은 바가 없더라도
뒷날 불도에 들 인연이나 되게 하리라.’
이때 희근은 승려들을 모아 놓고 일심으로 이런 게송을 읊었습니다.
음욕이 곧 길이요
성냄과 어리석음도 그러하니
이러한 세 가지 일에
한량없는 부처님의 길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음욕과 분노와 우치
그리고 길을 분별한다면,
이 사람은 부처님과 멀어짐이
하늘과 땅 사이 같으리.
도와 음욕과 분노와 우치는
한 법이어서 평등하거늘
이 말을 듣고 겁내는 이는
불도에서 심히 멀어지리.
음욕의 법은 생멸하는 것이 아니니
마음을 괴롭히지도 못하거늘
만약에 사람이 나[吾我]를 계착한다면
음욕에 이끌려 지옥에 들리라.
있다 없다 두 법이 다르다 하면
이는 있다 없다를 여의지 못함이니
있음 없음이 균등함을 알면
수승히 초출하여 불도를 이루리라.
이와 같이 70여 게송을 말할 때 3만 명의 천자들이 무생법인을 얻었고,
1만 8천 명의 성문들이 온갖 법에 집착되지 않는 까닭에 모두가 해탈을 얻었습니다.
이때 승의보살의 몸은 지옥으로 빠져들어 한량없는 천만 세 동안의 고통을 받았고,
인간에 다시 태어나서는 74만 세 동안 항상 남의 비방을 들었고,
한량없는 겁 동안에 부처님의 명호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 죄가 차츰 엷어져서 불법을 들을 기회를 얻게 되고 출가하여 도를 닦았으나
다시 계를 버리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계를 버리기 6만 3천 세 동안이었고,
한량없는 생 동안 사문이 되어 비록 계는 버리지 않았으나 모든 감관이 둔하고 어두웠습니다.
이 희근보살은 지금 동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나 부처를 이루시니,
그 국토의 이름은 보엄(寶嚴)이요, 부처님의 명호는 광유일명왕(光踰日明王)이십니다.”
문수사리는 다시 말씀드렸다.
“그때의 승의비구는 바로 오늘의 이 몸입니다.
나는 그때 이렇듯 한량없는 고통을 받았음을 관찰합니다.”
문수사리가 다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누구든지 3승의 도를 구하되 온갖 고통을 받지 않으려거든
모든 법의 모습을 파괴하여 성내는 생각을 품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이 모든 게송을 듣고, 어떠한 이익을 얻었는가?”
문수가 대답했다.
“나는 이 게송을 듣고, 뭇 고통이 다하였으며,
세세(世世)에 예리한 감관과 지혜를 얻어 깊은 법을 잘 이해하게 되었고,
교묘하게 깊은 뜻을 연설하게 되었으며,
모든 보살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을 모든 법의 모습을 교묘하게 말한다 하니,
이것을 일컬어 ‘여실하고도 교묘히 제도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