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영주이다. 영주시내에서 30여리 떨어진 평은이란 곳이다. 우리 집에서 조금만 나서면 내성천이란 시내가 있었다. 개울이라고 하기엔 좀 크고 강이라고 하기엔 좀 작은 시내였다. 내 어릴 적 내성천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내성천은 폭이 50여 미터 되었는데 여기에 40-50여개 정도의 나무다리가 놓여 있었다. 외나무다리에서 마주보고 건널 경우 서로 부딪치게 되는데, 그럴 경우 10개 정도씩 마다 수평으로 두 개의 다리를 놓아 비켜설 수 있도록 했지만, 수평 다리에서 좀 떨어졌을 경우 마주 보고 다리를 건널 경우엔 한사람이 양보해야 했다.
내가 다닌 면소재지에 있는 평은초등학교는 우리 집에서 10여리 정도 되었다. 그것도 평지가 아니라 물을 건너고 산을 넘어서 다녔기 때문에 힘들게 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지나고 보니 그 때가 참으로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 어렵고 가난했던 시절 학교 오가는 길에 봄에는 소나무 껍질도 벗겨 먹고, 찔레도 꺾어먹고, 버들피리도 불면서 친구들과 어울린 추억은 참으로 내 가슴 속에 아름답게 남아 있다.
외나무다리는 보통 일 년마다 한 번씩 교체되도록 되어 있었다. 늦가을에 새로운 다리를 놓으면 다음 해 여름을 지나면 홍수로 떠내려가기도 하고 낡아서 못 쓰게 되는 다리도 있었기 때문에 늦가을엔 다시 다리를 놓는 것이었다.
이 외나무다리를 이용해 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나에게 아름답고 쓰라린 추억이 동시에 가슴에 남아있다. 외나무다리가 들어간 말이 나오면 나는 항상 우리 마을의 외나무다리를 생각한다. 외나무다리란 최무룡의 노래는 나의 형이 좋아해서 나도 따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내고향
만나면 즐거웠던 외나무다리
그리운 내 사랑아 지금은 어디
새파란 가슴 속에 간직한 꿈을
못 잊을 세월 속에 날려 보내리
최무룡의 노래와 같이 내 고향도 복사꽃 능금꽃이 피는 아름다운 곳이었다. 제목이 외나무다리였기 때문에 그 노래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명심보감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많은 구절 중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구절이 나에게 깊이 남아 있다. 그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은의(恩義)를 광시(廣施)하라 인생하처 불상봉(人生何處 不相逢)이랴 수원(讐怨)을 막결(莫結)하라 노변협처(路逢狹處)면 난회피(難回避)니라.
(은의를 널리 베풀라. 사람이 살다 보면 어는 곳에서인들 만나지 않으랴? 원수를 맺지 말라. 좁은 길(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회피하기가 어렵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면 둘 중 한 사람은 양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곧 양보의 정신을 배운다는 것이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말에서 보듯 남과 원수를 맺으면 언젠가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으니 원수를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외나무다리에 관해서 나에게는 아주 부끄러운 추억이 있다. 아마 이 부끄러운 기억 때문에 외나무다리가 나의 뇌리에 강하게 박혔고, 외나무다리라는 말이 나오면 그냥 몰입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성천 외나무다리는 여름에 홍수로 종종 물에 잠겼다. 그래서 우리 동네 아이들은 결석을 일 년에 몇 번은 하는데, 대부분 홍수 때문이었다. 6학년 여름이었다. 그날도 평소처럼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데,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서 외나무다리가 물에 잠겼다. 그날 따라 학교에 간 학생들은 우리 동네 6학년 8명 중 나와 여학생 M 둘 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리는 물에 잠겼지만 물이 허리 아래 정도까지 밖에 오지 않아서 건널 정도는 되었다.
그런데 그 학생과 나는 같은 학년이었지만 말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한 학년이 두 반으로 남자 한 반, 여자 한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한 반이 아니었기도 했지만, 나는 부끄러워 여학생한테 말 한 번 걸어본 적이 없는 숙맥이었다. 내가 먼저 바지를 벗고 물을 건너야 하는데, 창피하기도 하고 용기도 없고 해서 망설이고 있으니까, M이 치마를 입은 채로 그냥 시내를 건너는 것이었다. 나는 M이 시내를 다 건넌 후 저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바지를 벗고 물을 건넜다. 그 당시에는 수영복은 구경도 못 했던 시절이고, 멱을 감을 땐 남자는 홀딱 벗은 채로 멱을 감았고, 여자는 팬티를 입을 채로 멱을 감던 시절 이었다.
다음 날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현덕이는 기집애 M보다 못한 놈이야. 겁이 나서 먼저 물을 건너지 못하고 M이 건너는 걸 보고 건넨 비겁한 놈이야.”
나는 그 소문에 대해서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러면 내가 기집애 앞에서 빤스 벗고 건낼 수 있어? 빤스를 벗을 수가 없어서 M보다 나중에 건넌거야.”라고 변명을 했다. 그렇지만, M보다 용기가 없다는건 나 스스로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소문은 아마도 M이 퍼뜨린 것 같았다. 한참동안 나는 우리 동네에서 쫌생이같은 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동네 사람에게 비겁한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었다.
2004년 어느 때 다음과 같은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경영학의 시조인 피터 드러커가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드러커의 담임선생 필리글러가 어느 날 학생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질문했다.
“너희는 죽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느냐?”
초등학생들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었다. 애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대답을 하지 못하자, 필리글러선생이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 50이 되도록 여기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하면 인생을 헛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 50년 후 드러커를 비롯해 동창들이 모였다. 그 동창들은 초등학교 때 배운 것이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었는데, 필리글러 선생의 “너희는 죽은 뒤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길 원하느냐”하는 것은 뚜렷이 남아 있었고 그 질문이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게 하고 잘못된 길로 가는 것을 막았다고 하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외나무다리(?) 사건은 벌써 6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까지 나에게 뚜렷이 남아 있다. 나는 동네 사람들에게 비겁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리라 생각하니 부끄럽기 한이 없다. 왜 바지를 벗고 M보다 먼저 물을 건너서 M에게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까하는 후회스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는 외나무다리도 이젠 사라지고 없다. 내 고향에 영주댐이 생겨서 내가 살던 고향과 내가 다니던 학교도 다 물에 잠기고 없다. 외나무다리도 이젠 나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다. 고향을 향한 나의 꿈은 이제 완전히 깨지고 말았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내 어린 시절의 꿈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마을은 그 원형을 상실하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며 인생에서 많은 외나무다리를 만났다. 회사원, 공무원, 또 회사원 그리고 많은 비공식조직에서 외나무다리를 많이 만났는데, 그때마다 부끄럽지 않게 외나무다리를 건너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하였다. 앞으로 어떤 외나무다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조직을 떠났을 때에 조직원으로 부터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남보다 먼저 바지를 벗고 외나무다리(?)를 건너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첫댓글 참 아름다운 추억이지요.. 저는 중학교 1학년 때 였든가 싶네요. 읍내에 서커스 팀이 왔어요.
그때는 그런 구경을 하면 학교에서 혼도 나고, 또 돈도 없었는데.. 어찌 어찌 어른 뒤에 따라붙어
구경을 했는데...춤추는 아가씨가 얼마나 이뿌든지... 구경 다하고 집으로 오는데, 아마 여름이었던 것 같에요.
동네 형들이 평상에 앉아 놀고 있는데 , 들킬까봐 개울물에 포복을 하면서 집에 와서 엄마한테 혼났던 추억...
그때가 그리워요,
내 마음의 창에 비치는 내 모습과 남의 눈에 보이는 내 모습은 너무 많은 차가 나겠지요 차이를 좁히고 공감대를 넓히는 일이 중요하고 어렵습니다 세계는 나의 표상 이라니 표상의 눈을 넓히고 아름답게 하면 세상이 편하고 아름답게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