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시골마을에서 어른들을 만나면 버릇처럼 던지던 인삿말이 있었다. 하나같이 “진지잡수셨습니까.”였다. 그러면 어른들은 인사말을 듣고 흡족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다른 행동은 몰라도 이런 인사만 입에 달고 있으면 마을의 어른들로부터 가정교육 잘 받고 예의가 바른 놈으로 평가받았다.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인사가 전통으로 내려왔을까. 그것은 개발독재 시대의 곤궁한 살림살이에서 온 듯하다.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보니 혹시 마을 어른들이 밥을 잘 챙겨먹고 하루 일을 시작하는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런 가난의 눈물이 밴 인삿말은 독재정부가 무너지고 민주화 사회로 변하면서 다른 인사로 바뀌게 되었다. “안녕하세요"라는 단 한마디 인삿말로 어른들의 무사평안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인삿말도 바뀔 처지가 되었다. 집집마다 애완견을 기르는 사람들이 많아 애완견들이 상전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개를 자식처럼 떠받들다보니 개보다는 견공이란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요즘은 워낙 애완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 '개새끼'라고 했다가는 몰매를 맞기 십상이다. 그렇다. 요즘 집의 상전은 뭐니뭐니해도 애완견이다.
물론 팔자가 센 개들도 있다. 불독처럼 인상이 험하고, 똥개처럼 이름조차 더러운 놈들은 한평생 도둑을 지키거나 쫄깃쫄깃한 탕으로 변해 미식가들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애완견들이 누리는 팔자는 가족 못지않다.
애완견을 위해서라면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제 몸은 씻지 않아도 애완견은 윤기가 흐를 정도로 싹싹 씻긴다. 인형 옷도 입히고, 깜찍한 모자와 앙증맞은 신발까지 신겨 나들이를 하기도 한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으면 머리핀도 꽂아주고 얼굴을 단장시켜 외모를 꾸민다. 제 부모에게 이런 대우를 해주었더라면 효자효녀로 소문나 칭찬이 자자했을지 모른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옛날에 브라운관에서 방영된 한 편의 드라마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애완견과 시어머니가 가출했을 때 가족들이 애완견을 먼저 찾아나서는 대목에서는 울화통마저 치민다.
물론 드라마는 비뚤어진 사고를 가진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기 위한 의도였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 만은 않는 것 같다. 드라마 같은 세태가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잠복해 있다. 거리마다 애견센터나 애견 미용실이 들어서는가 싶더니 애견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의 소식도 간간히 들려온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애완견이 좋다한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완견은 단순히 동물로 대접하는 게 정상이다.
흙을 밟고 돌아다니며 도둑을 지키고 주인에게 충성하는 것은 개에게 주어진 운명이다. 그런데 정신 나간 사람들은 여전히 애완견을 인격체로 떠받들고 있다. 상전의 자리에 앉혀 특별대우를 해 주고 있다.
더위라도 먹을까, 감기라도 들까 노심초사하면서 애완견을 키우고 있다. 그러다보니 먼 훗날에는 "댁의 상전 편안하십니까"하는 인삿말이 나오지 말라는 법이 없다.
진정으로 애완견을 사랑한다면 이제라도 그들을 속박에서 해방시켜주기 바란다. 그것이 애완견에게 고통을 줄여주고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상생의 삶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