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의 문경인물
1936년 경북대감(慶北大鑑) 등에 실린 인물
고원훈(高元勳, 1881~?)
문경 출신으로 호는 내당(來堂). 메이지(明治) 전문학교를 졸업했다(1910.7). 유학 중 태극학회, 대한학회, 대한흥학회에서 활약했다. 귀국하여 보성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경무총감부 서무과에서 경부로 근무(1911.8.11.)하였고 의원면관(1916.2.8.)되었다. 보성전문학교 학감(1916.2), 휘문고등보통학교 강사(1917.1~1919.12), 보성법률상업학교 교장(1920.2)을 지냈고 조선체육회 초대 이사장(1920.7)을 재임하다 사임하였다.(1923.11), 중추원 주임관 대우 참의(1924.27.), 전라남도 참여관(1924.12.1.), 경상북도 참여관(1926.9.6.), 평안남도 참여관(1929.1.21.), 경기도 참여관 (1929.11.27.), 평안북도 참여관(1930.4.26.),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겸했다(1929.5). 전라북도지사(1932.9.27.), 조선신궁봉찬회 발기인/고문, 전주유종회 회장(1933.10)을 지냈고, 훈4등 서보장(1934.10), 시정25주년기념 표창을 받았다(1935.10). 휴직(1936.5.21.)하였고 중일전쟁이 일어난 1937년 7월부터 시국인식 강조 강연을, 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에서 후원하는 시국강연회에서 <일본의 수호신이 되어라>고 강연했다(1937.7). 동일은행 감사(1938.1), 휴직 만기(1938.5.20.), 조선축구협회장(1938.7),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1939.6.3.), 임기만료와 동시에 재임명(1942.6.3.), 임기 만료와 동시에 재임명(1945.6.)되었다. 매일신문사 주최 대강연회에서 징병제 실시를 찬양하였다(1942.5.16.). 「유도」 (1942년 10월호)에서 <징병제 실시와 반도 청년의 각오>에서 "조선의 징병제 실시는 최대의 명예" 라고 하였다. 중추원 격려단 함경남도반에 편입되어 학도병 지원 강연에 나섰다(1943.11.4.)
광복 후 미 군정청에서 중추원 참의를 파면하였다(1945.11.3.). 반민특위에 체포 되어 (1949.8) 특별검사부에 송치되었다.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1950.7.)
김영배(金永培, 1886~1943)
문경 출신이다. 사립경달(慶達)학교를 졸업하였다(1907.3), 경상북도 비안군(比安郡, 1914년 행정구역변경 때 폐군되어 예천군과 의성군에 편입되었다) 사립봉양(鳳陽)학교 교원(1908.1), 충청북도 연풍군(폐군, 현 괴산군) 연명(延明)학교 교원을 역임했다(1909.1). 청풍군(폐군, 제천군) 고원(1911.5), 판임관 시험에 합격 (1911.10), 청풍군 서기가 되었다(1911.10.26.). 충청북도 재무부 서기(1912.9.10.), 부(府)서기(1916.6.12.), 경상북도 제1부 서기(1916.11.28.), 경상북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도 경부(1920.1.14.), 형사과장 보안과장(1923.8)을 지냈고 경시로 승진(1925.2.7.)하였다. 평안북도 운산군수(1926.10.15.), 박천군수(1930.2.28.), 강계군수(1931.7.23)를 지냈고 훈6등 서보
장을 받았다(1931.7). 용천군수(1931.12.28.), 의주군수(1935.11.27.), 황해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1939.5.17.), 황해도 농회장을 겸했다. 충청북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1941.5.31.) 도농회장을 겸했다. 전라남도 참여관 겸 산업부장(1942.12.19.), 도 농회장을 겸했다. 의원 면 본관 겸관,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1943.9.30.)를 지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 때 군용물자 조달, 전사자 위문, 국방사상 보급, 애국기 헌납 모금 등에 기여한 공로로 일본 정부가 주는 쌍광옥일장(双光旭日章) 수여 대상자 로 천거되었다.
나카야마 쥬지로우(仲山十次郎,?~?)
문경경찰서장이다. 구마모토현 출신이다. 경찰에 들어가(1915) 순사부장이 되었다(1920). 경부보 (1922), 도 경부(1932), 김천, 상주, 경주, 포항, 군위경찰서장을 거쳐 문경경찰서장이 되었다.
김덕선(金德善,?~?)
점촌산업조합 이사장이다.오이타(大分)농림학교를 졸업하였다. 점촌산업조합은 1933년 1월 설립 하였고 문경군 남부 5개면을 구역으로 조합원 2,670명, 출자구좌 3,000, 농가 총 호수의 3할을 점하 는 유력 조합이다. 주 사업은 쌀, 보리, 생사(生糸), 직물류, 감, 종이 따위, 구매는 비료 · 농구 · 식염· 석유와 건어물로 그 중 쌀과 누에견은 기후 풍토에 적합하고 전 조선에서 드문 생산지이다. 창립된지 얼마 안 되었지만 1934년도 거래고는 실로 1,191,000여원에 달하고 제 경비를 공제하고 1,210여원 의 이익금이 있는 등 내용이 자못 충실하고 금후 더욱더 발전할 전로가 역력하다. 조합장은 이규선(李圭璇)으로 지방의 덕망가이다.
단고료우이치(丹後良市,?~?)
문경군에 정착하여 오로지 마루호시(丸星) 관계 사업을 하고 있다. 그의 노력으로 이 방면의 개발은 나날이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운송주식회사 평의원, 문경무연탄광상의원으로 활약하고 국방의회 부회장, 면협의원 등 공직도 있다.
아카키 구니이치로우(赤木國一郎、?~?)
문경소학교장이다. 와카야마현 출신이다. 와카야마현 사범학교 졸업(1924)하고 현내 각지에서 교직에 있었다. 내한하여(1930), 경주군 건천에 근무하였고 문경소학교장이 되었다.(1933.9.)
하마다 미쓰오(濱田三男,?~?)
구성 (舊姓)+은 야스오카(安岡)이다. 농사 경영자로 고우지(高知)현 출신이다. 고향 농림학교 졸업 후 내한하여(1916), 경상북도 면작 기수로 취업하였다 김천 등 각 군에 근무하다가 퇴직(1920)하고 문경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는 한편 비료 · 농구 판매를 경영하였고 부업으로 새끼 가마니 만들기를 지도한 개척자이다 지금은 가마니 5만매를 생산하는 성황을 거두었다. 면협의원 학교조합의원 · 군 농회평의원 금융조합감사 제향군인희 문경분회장 소방조두 소작위원 등을 지냈다.
구병조(具秉助,?~?)
충남 출신으로 의사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1929) 하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시노자키 (篠崎) 내과에서 1930년 5월까지 연구하였다. 함흥도립병원 의원으로 임명(같은 해 5월)되었고 사임(1931.9)하였다. 경북 안강 공의(公醫) (같은 해 9월)와 문경 공의가 되었다(1933.4). 내과 소아과 전공이다.
아리사 겐지(有座源治,?~?)
문경우편소장이다. 후쿠오카현 출신이다. 내한(1906)하여 군산우체국에서 근무하였고 그 후 체신계에서 18년 근무하였다. 수원우편국장, 홍성우편국장을 거쳐 문경우편소장이 되었다. 취미는 노래이다.
후지하라 규혜이(藤原久平, 1894~?)
대지주로 오카야마현 출신이다. 내한하여 문경군에 정착(1913)하였다. 농사와 대금업을 경영하며 문경군 제1의 지주가 되었다. 조선인 50여명이 후지하라의 불망비를 신북면 고요리에 세웠다. 일본인 대금업자에게 기념비를 세운 것은 희귀한 일이다. 문경학교조합 관리자, 군농회특별평의원, 소방조두, 재향군인분회장, 면협의원을 지냈으며 취미는 바둑과 피리이다.
에무라 마모루(江村保)
문경 금융조합 이사에 이미 약력을 실어 생략한다.
오상근(吳相根, 1900~?)
주조업자로 마산 출신이다. 점촌으로 이사하여 양조업과 누룩제조업에 관여하였고 후에 대동상회를 세워 스스로 이사가 되었다. 해마다 견실한 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지방 발전에 힘쓰고 전도가 유망 하다.
다카하시 료우타로우(高橋良太郎, 1895~?)
잡화상으로 대서업代書業)을 하였다. 오카야마현 출신이다. 아마기(天城)중학교 졸업하고 내한하여 경성에서 순사(1914)를 하다가 경부보로 승진(1929)하였다. 영덕경찰서 재직 중(1919)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경찰서장 부재중 폭도(독립운동 백성)의 습격을 받아 서원을 지휘하여 진압에 힘썼다. 그러나 유치중인 조선인을 탈환하기 위하여 재삼 습격 받았을 때 격퇴한 일이 있다. 문경, 고령 경찰서를 전전하다가 사직하였다. 경북선이 개통될 때 즈음하여 점촌에 정착(1924)하여 잡화상과 대서업을 경영하였다. 점촌번영회장(1925), 면협의원(1927), 소방조두(1929)를 지냈으며 취미는 바둑이다.
야다 시즈오(矢田靜夫, 1891~?)
문경경찰서장이다.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 출신이다. 내한(1915)하여 순사, 경부보(1920), 경부(1930), 문경경찰서장이 되었다. 취미는 바둑이다.
야스오카 미쓰오(安岡三男, 1898~?)
비료와 농구판매상이다. 고우지현 출신이다. 고향 농림학교를 졸업하고 내한(1916)하여 경상북도 면작 기수로 상주군과 김천군에서 근무 중 좌천된 것을 분개하여 사직하고 문경에 정착하였다(1920). 농사를 지으며 비료와 농구를 판매하여 성공하였다. 면협의원, 학교조합의원, 군농회평의원, 금융조합 감사를 지냈고 취미는 바둑이다.
쥬바치 이와키치(中鉢岩吉, ?~?)
생지는 불명확하다. 야마가타현 경찰관(1907.4)인데 내한하여 문경경찰서에 취직(1919.9)하였 고 퇴직(1923.6)하였다. 경북선 상주~점촌 간 기차가 개통될 즈음 점촌에 정착하여 잡화상을 개업하였다. 점촌동지회장에 추대(1930.3)되었는데 이 회는 회원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고 항상 검소 강건의 기품을 기르고 있다. 아울러 지방 개발에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