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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레미야 18장 — 토기장이의 비유
1)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예레미야 18:1~4)
먼저 예레미야 18장 1~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주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예레미야에게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곳에 가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진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토기장이의 손에서 그릇이 터졌습니다. 그러자 토기장이는 그것을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시 다른 그릇으로 만들었습니다.
성경에는 토기장이의 이야기가 구약과 신약에 모두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토기장이는 무엇을 나타내는 것일까요?
이 비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토기장이라는 말에 담긴 창조의 의미
창세기 2장 7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이어서 창세기 2장 8절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9절에는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흙으로 직접 빚어 만드셨습니다. 그렇다면 짐승과 새는 어떻게 만드셨습니까?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각종 생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19절에서는 흙으로 지으셨다고 표현합니다.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은 이 문제 자체를 자세히 다루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히브리어 단어입니다.
창세기 2장 7절과 19절에 나오는 ‘지으시고’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차르(yatsar)입니다. 이 단어는 흙이나 재료를 가지고 어떤 형태를 빚어 만드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형태가 예레미야 18장 2절에 나오는 ‘토기장이’라는 말, 곧 요체르(yotser)입니다.
우리말로 ‘토기장이’라고 번역하면 흙으로 그릇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어근을 살펴보면 무언가를 빚고 형성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토기장이의 비유는 단순히 그릇을 만드는 기술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창조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주권을 보여 주는 비유입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원하는 모양으로 그릇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자신의 피조물을 다스리시는 분입니다.
3) 터진 그릇과 노아 홍수의 연결
예레미야 18장 4절에서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졌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터졌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6장 11절에는 노아 홍수 이전의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부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때 ‘부패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 샤하트(shachat)와 관련된 표현입니다.
예레미야 18장 4절에서 그릇이 터졌다고 할 때 사용된 표현 역시 이와 같은 어근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흥미로운 연결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부패하여 심판을 받게 됩니다. 예레미야 18장에서는 토기장이가 만든 그릇이 손상되어 다시 빚어집니다.
두 장면 모두 창조된 것이 손상되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새로운 상태로 바꾸는 문제를 생각하게 합니다.
물론 이 두 본문이 완전히 동일한 사건을 묘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토기장이 비유는 창조와 심판, 그리고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주제를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은 바벨론의 침공과 포로 생활이라는 심판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통해 그 심판이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의 집에 직접 가서 그 장면을 본 것은 단순한 견학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행동으로 말씀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를 상징 행동, 곧 *sign-act*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상징 행동을 통해 유다 백성에게 심판의 의미를 깨닫게 하셨습니다.
4) 토기장이의 비유가 보여 주는 하나님의 주권 (예레미야 18:5~10)
예레미야 18장 5절부터는 하나님께서 직접 그 비유의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을 다루듯 하나님께서도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신다는 말씀입니다.
7~8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하실 때, 그 민족이 악에서 돌이키면 재앙을 내리시려던 뜻을 돌이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요나서의 니느웨를 생각해 보십시오. 니느웨 사람들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셨습니다.
반대로 9~10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세우고 심으려 하실 때, 그들이 악을 행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복을 내리시려던 뜻을 돌이키실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반응이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과 나라의 운명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선포하시는 심판과 회복의 기별에는 백성의 회개와 순종이라는 조건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경고하시는 목적은 단순히 멸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백성이 돌이켜 생명을 얻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5) 예레미야 1장 10절과 18장 7~10절의 연결
예레미야 1장 1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와 왕국 위에 세우셔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는 심판을 나타내는 네 가지 동사와 회복을 나타내는 두 가지 동사가 나옵니다.
뽑다
파괴하다
파멸하다
넘어뜨리다
건설하다
심다
이 표현은 예레미야 18장 7~10절의 내용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1장 10절에서 선지자의 사명을 통해 제시된 하나님의 주권이 18장에서는 구체적인 원리로 설명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민족을 심판하실 수도 있고, 회개하는 민족을 용서하실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복을 약속받은 민족이라도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면 그 복을 거두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레미야 18장은 하나님의 심판과 회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입니다.
6) 하나님은 재앙을 준비하시지만, 백성은 자기 계획을 고집한다 (예레미야 18:11~12)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경고하시면서도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여기서 ‘재앙을 내리다’라는 표현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을 살펴보면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사람과 생물을 빚어 만드시는 행위에 사용된 야차르라는 어근과 연결됩니다.
이러한 언어적 연결은 토기장이의 비유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창조 주권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서 세상을 다스리시며, 심판과 회복의 과정에서도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그런데 12절에서 백성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나님께서는 계책을 세우시고 백성을 돌이키려 하십니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계획대로 살겠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 반복되는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어 마하샤바(maḥashavah)입니다.
이 단어는 생각, 계획, 의도 또는 꾀를 뜻합니다. 예레미야 18장에서는 문맥에 따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계책, 백성의 계획, 선지자를 해치려는 꾀 등으로 번역됩니다.
같은 단어가 누구의 생각을 가리키느냐에 따라 다르게 번역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돌이키기 위한 계획을 세우십니다. 그러나 백성은 자기 생각을 고집하며 하나님의 뜻을 거부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해치려는 계획까지 세웁니다.
이 대조가 예레미야 18장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7) 창세기 6장 5절과 예레미야 18장의 연결
창세기 6장 5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다는 사실을 보셨습니다.
이 구절은 노아 홍수의 배경을 설명합니다.
창세기 6장에서는 인간의 마음과 계획이 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레미야 18장 11~12절에서도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이키려 하시지만 백성은 자기 계획을 고집하며 악한 길에서 떠나기를 거부합니다.
두 본문은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서로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18장의 토기장이 비유는 창세기 2장의 창조와 창세기 6장의 홍수 심판을 함께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이 부패하고 악으로 가득 차면 심판이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경고하시는 중에도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8) 우리는 진흙이고 하나님은 토기장이이시다 (이사야 64:8)
이사야 64장 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예레미야 18장 1~12절의 핵심을 잘 요약해 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손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빚으실 수 있는 분이라는 희망도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분의 뜻에 맞게 새롭게 빚으실 수 있습니다.
9)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이사야 65:2)
이사야 65장 2절에는 하나님께서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을 부르셨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도 자기 생각을 따라가는 인간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레미야 18장 12절의 백성은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사야 65장 2절의 백성도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로 갑니다.
두 본문은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고집스러운 생각을 대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바른길로 인도하시지만, 인간은 때로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뜻보다 앞세웁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길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그 뜻에 따라 내 생각과 삶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2. 옛길을 떠나 새롭고 그릇된 길로 가는 백성 (예레미야 18:13~17)
1) 자연의 질서를 버리는 것보다 더 놀라운 배신
1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여러 나라 가운데 물어보라고 하시며 이스라엘이 심히 가증한 일을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14절에서는 자연의 변하지 않는 질서를 예로 들어 백성의 행동이 얼마나 비정상적인지 설명하십니다.
레바논의 눈이 바위를 떠나겠느냐고 묻습니다. 또한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마르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서 ‘레바논의 눈’은 사람의 눈이 아니라 산에 쌓인 눈, 곧 설산의 눈을 의미합니다. 레바논 산악 지대의 눈과 높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자연의 지속성과 안정성을 보여 주는 예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연의 질서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습니다. 자신들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에게 제사했습니다.
1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내 백성은 나를 잊고 허무한 것에게 분향하거니와.”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하나님을 잊고 옛길에서 벗어나 닦지 않은 길로 행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옛길을 떠나 그릇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2) 선한 옛길로 가라 (예레미야 6:16)
예레미야 6장 1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왜 옛길이 선한 길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며 말씀해 주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옛길은 단순히 과거의 관습을 무조건 따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선한 길, 그분의 말씀에 기초한 길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우리는 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충성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다른 성격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이 날카롭고 반응이 강한 반면, 어떤 사람은 물처럼 부드럽고 차분합니다.
저는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아내에게 자신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내는 자신이 물 같은 사람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궁금했습니다. 특별히 사이다처럼 톡 쏘는 사람은 아니지만, 없으면 살 수 없는 물 같은 사람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참 멋진 표현이었습니다.
제가 군 복무 중에 잠깐 전화할 기회가 생기면 애인에게 전화하려고 서둘러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 짧은 통화 시간에 상대방이 반가운 반응을 보여 주면 얼마나 힘이 나겠습니까?
그런데 아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차분하고 담담하게 반응했습니다. 참 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칭찬인지 자랑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물은 생명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고 유익을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선한 길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3) 하나님께 등을 돌린 백성 (예레미야 18:16~17)
16절에서는 유다 땅이 두려움과 영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놀라서 머리를 흔들 것입니다.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백성을 원수 앞에서 흩으시고 환난의 날에 그들에게 등을 보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등을 보이다’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외면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레미야서에는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깨진 모습을 얼굴과 등을 통해 표현하는 구절들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예레미야 2장 27절에서는 백성이 우상을 향해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예레미야 7장 24절에서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등을 돌리며 얼굴을 향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예레미야 32장 33절에도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이처럼 예레미야서는 하나님을 배신한 백성의 모습을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얼굴을 외면하는 행위로 묘사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불순종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관계의 파괴를 의미합니다.
친구 사이에서도 서로 등을 돌리고 얼굴을 외면하면 관계가 무너집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바라보지 않고 마음을 닫아 버리면 관계는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부르셨지만, 백성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행위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얼굴을 돌리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3. 예레미야를 제거하려는 백성 (예레미야 18:18~23)
1) 선지자를 없애려는 계획
18절부터는 새로운 문단이 시작됩니다.
백성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라, 우리가 꾀를 내어 예레미야를 치자.”
여기서도 앞서 살펴본 마하샤바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백성을 돌이키려고 세우신 계획과 백성이 예레미야를 해치려고 세운 꾀가 같은 어근으로 표현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할 뿐 아니라, 그 뜻을 전하는 선지자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18절에는 제사장, 지혜로운 자, 선지자가 언급됩니다.
구약 시대에 백성을 지도하던 중요한 역할들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제사장은 율법을 가르치는 역할을 했습니다.
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과 계시를 전했습니다.
지혜자 또는 장로는 삶의 경험과 지혜를 통해 백성을 지도했습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에스겔 7장 26절에도 나옵니다. 환난이 닥칠 때 선지자에게서는 묵시를 구할 수 없고, 제사장에게서는 율법이 사라지며, 장로에게서는 지혜가 사라지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그런데 유다 백성은 이 세 가지 역할을 감당하던 선지자 예레미야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소리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제거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지자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를 거부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회개의 기회를 거부하는 일이었습니다.
2) 예레미야의 기도
19~20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를 돌아보사 나와 다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옵소서.”
예레미야는 악으로 선을 갚는 백성의 모습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는 백성을 위해 유익한 말을 전했지만, 백성은 그의 생명을 해치려 했습니다.
여기서 선지자의 사명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 해야 할 일은 백성에게 유익한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통해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진실한 경고가 사람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유익한 말을 전했지만, 백성은 그를 해치려고 했습니다.
21~23절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의 악한 계획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잡으려고 구덩이를 파고 그를 죽이려는 계략을 세웠습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보여 줍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기 때문에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가 겪은 고통은 단지 개인적인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백성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선지자의 고통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