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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햇볕이 하얗게 내리쬐는 날이나,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에는 햇감자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송송 썬 애호박으로 고명을 얹은 칼국수가 입맛을 당긴다. 윗도리 흠뻑 젖도록 땀 뻘뻘 흘리며 칼국수 한 그릇 비우고 나면, 한여름 더위가 땀과 함께 모두 씻겨 나간 것처럼 몸과 마음이 한껏 개운해지는데, 왜 하필 뜨거운 여름날 먹는 칼국수가 더 맛있을까?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에 먹는 칼국수도 맛있지만 사실, 칼국수는 여름에 먹는 별미다. 여름에 뜨거운 칼국수를 먹는 것은, 더위는 뜨거운 음식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이열치열의 전통도 작용했겠지만 칼국수가 밀가루 음식인 것도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름이면 별식으로 밀가루 음식을 먹었다. 우리는 여름철에 칼국수, 수제비를 먹었고 특히 비 오는 날에는 기름에 지진 밀가루 부침개가 별미였다. 중국도 마찬가지여서 속담에 ‘여름에는 국수, 겨울에는 만두’라고 했는데 쌀밥인 입식보다 밀가루인 분식을 주식으로 삼는 중국 북방에서도, 여름이면 특히 더 국수를 즐겨 먹었다.
사람들은 여름에 왜 칼국수를 찾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전통 의학에서도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동의보감》을 비롯해 동양의 의학서들은 하나같이 밀은 성질이 차가운 곡식으로 번열(煩熱), 그러니까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운 신열, 무더위 때문에 생기는 열기를 없애준다고 했다. 동시에 조갈(燥渴), 즉 입 안이 몹시 마르는 갈증을 해소해주고, 위와 장뿐만 아니라 오장을 튼튼하게 해준다고 했다. 더위를 식혀주고 갈증을 없애주는 데다 소화에도 좋다니 더운 여름날 먹기에 딱 좋은 음식이다.
밀은 또 가을에 심고 겨울에 자라서 봄에 이삭이 패고 여름에 추수를 하는 곡물이므로 밀가루 음식은 갓 추수한 여름이 제일 맛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밀보다는 보리를 주로 심은 까닭에 밀가루를 ‘진(眞)가루’라고 부를 정도로 밀이 귀했으니 오랜 세월 여름에 어쩌다 먹는 칼국수나 수제비는 여름철 진미로 한국인의 유전자 속에 깊숙이 자리매김했을 듯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칼국수를 언제부터 먹었을까? 우리 조상들이 국수를 먹은 것은 12세기 이전으로 추정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 국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 무렵, 어떤 형태로든 칼국수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시 문헌에는 어떤 형태의 국수였는지 자세한 묘사가 없으니 정확한 실상을 알 수는 없다. 칼국수라는 명칭은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부터 보인다. 옥담 이응희의 〈국수〉라는 시에 “어느 누가 국수를 만들었나/ 그 맛이 무엇보다도 좋네/ 반죽을 눌러 천 가락을 뽑고/ 칼로 썰어 만 가락을 만든다/ 손님 대접해 배를 실컷 채우니/ 능히 군자의 배를 헤아릴 수 있어라”라는 구절이 있다.
반죽을 눌러 천 가락을 뽑는 것은 메밀국수를 뽑는 방식이고, 칼로 썰어 만 가락을 만들었다는 것은 바로 칼국수인데 당시에는 밀가루보다는 주로 메밀가루로 칼국수를 만들었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에도 칼국수가 보이는데 메밀가루를 국수틀에 눌러 만들어도 좋고 메밀가루를 내어 물에 반죽해 칼로 썰어 국수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으니 이응희의 노래에 나오는 국수와 비슷하다. 조선 중기에 최소한 양반 사회에서만큼은 칼국수가 대중화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칼로 국수를 썰었을까? 사실 칼국수가 맛있는 것은 칼로 썰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국수는 대부분 수제 국수인데, 국수가 발달한 동양에서 손을 써서 밀반죽을 음식으로 만드는 방법은 여러 가지로 발달했다. 예컨대 수타면처럼 반죽 덩어리를 바닥에 때리며 늘리는 방법[抻], 중국의 라몐처럼 공중에 던져서 길게 늘이는 방법[拉], 도삭면처럼 칼로 깎는 방법[削], 우리처럼 손으로 뜯는 수제비[扯], 수저로 떼어내는 발어[撥], 손으로 눌러 펴는 추면[揪], 칼로 자르는 칼국수 절면[切], 메밀국수처럼 구멍에 반죽을 밀어넣는 압면[壓] 등이 있다. 밀가루를 어떻게 반죽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뽑는지에 따라 면발이 세밀하거나 거칠어지고, 길거나 짧아지며, 얇거나 두꺼워지는데 그 형태에 따라 당연히 맛에도 차이가 생긴다. 대충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칼국수 역시 정교한 국수 만드는 방법 중 하나인 것이다.
#음식#역사일반
글 윤덕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