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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신사동(전 신사리)에서 무의촌 진료 사업에 뚜여든 것도, 내가 선린형제단의 막내로 입당을 고 강원용 목사님께 종용 받고 간부당원이신 선배 신영희 의사님(김재준 목사님 큰사위)의 지시로 이루워진 것 이지만, 당시 서울대부속병원에서 근무중인 나로서 졸업반에서 공부하던 병아리 예비의사 때 부터의 진료소의 소장 이신 신 장로님 조수로서 형제단 사업의 중요성을 잘 알고있고, 상급학년에 올라가면서 더욱 예수님을 알게된 연유로서 분연히 토요일과 주일에만(예베는 신사리교회에서<당시 담임목사 조향록 간부당원님> 신 소장님과 교대근무 하면서 소장님의 처방에 의거한 혹은 내 스스로의 실력?으로 주말봉사 하던 때라 리민들의 강력한 소망도 있어, 더욱 효과적인 형제단 첫 사업인 농촌 진흥의 대사명 위해, 부득 대학병원 재직 일 년여만에 휴직계 내고 무의촌 진료소의 전임 의사로 일하게 됐지요,
근무중 여러가지 난점이 생기기 시작. 젊은 의사가 혼자 산다는 것도 생활에도 무리요, 동네 처녀들의 자진 방문이 던지는 헛소문의의 우려,세탁,식사, 그외 직접 환자 진료하면서 교회일(성가대 지휘) 보고, 환자 보고 생활하는 그 호래비 모습이 애쳐로워서? 보기가 안 돼서? 인지 담임목사이시고 우리 형제단 간부 이신 조향록 목사님은 형제단 사업상의 광주군 일대의 농민 보건에 차질을 염녀하는 견지에서 사모님과 함께, 한편 청년회 주관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교회편에서도, 교인들의 입장에서도, 50 넘으신 여자 전도사님과 교회 올간 반주자이신 그의 따님과 남산 고려신학대학에서 신학공부하는 사위 등, 이 무의촌 의료 사업의 육성 벌전 위해 저의 결혼을 성사 시켜 들어야 하는(중이 제머리 못 깎는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의 발동이라 하겠지만, 아직 결혼할 나이도 생각도 꿈에도 없는 듯한(27세에 할 계획이던), 그것도 아무 연고자도 없는 샛파란 총각, 뭐 그것도 OO두쪽 밖에 없는 빈털털이를 농촌 부흥상?에 결혼이 불가피하다 생각하고 나선 이 몸들?! 조향록 목사님은 당시 유명하신 정일형 박사님의 법율사무소의 여비서를 매져 주려고 그 쪽과 합의하에 선보기를 저도 모르게 약속 했고, 연로하신 여전도사님과 그의 딸 부부는, 사위는 저의 아내와 한 고향사람으로, 먼 사돈벌(평북 의주)도 되는, 같은 학교서 교편도 잡았던 이 신사리교회 전도사 격인 분이고, 딸은 고향 손꼽친구인오선생(당시 전 신사리 국교 교사로 근무)에 의하여 의논한바, 딸이 서울 사는 저의 아내 집에 찾아가 자기 딸의 돐이니 같이 가자고 거짓말하여 신사리로 유인?, 한남동 한강을 나룻배에 태워서 결국 어두워진 시간에 마침 신사리교회에서 주로 고교생으로 구성된 성가대원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지휘하고 있는 저를 보여주기 위해, 초롱불에 어두컴컴한 교회에 두 여인은 찾아와, 아무것도 므르는 저,(당시 저는 안경테가 깨져서 실 로 임시 귀거리 만들어 사용 중인 초라한 모습에, 옷은 날씨가 차서 하숙집 주인의 백색 합바지 를 빌려입고, 상의는 내 재산 목록 2번인<1번은 헌 이불**>흑색 헌 양복으로 한미 합동 차림, 당시 열심이 헨델의"메시야(촌교회 청년들 이라고 깔 보지는 마세요!)를 코-라스로 열을 올리던 때라, 비록 잘 하지는 못 하지만 나름대로 지휘봉을 신나게 휘들던 젊은 의사인 농촌 교회 봉사자의 웃기는 모양세에 (처음만나는 [상록수] 흉내 내는 청년?)감동?과 신기함?에 어리둥절 했을 내 아내의 그 표정은?
성가연습 끝내기 전에 일단 예비 선보기 를 마친 오선생이라는 친구 중매쟁이는, 다음날 아침에 일직 나를 찾아와 아무 이유도 대지않고 그냥 조반을 자기집에 와서 함께 하자고만 전하고, 이유 묻는 저의 말도 듣은 등 마는 등, 쏜 살 같이 사라진 그의 뒷모습에, 어제 교회 두분이서 왔던 그 한 여인은 누구고, 오늘은 오선생댁에 무슨 날?
여하간 아침 한끼 벌었다고 좋아라 여전도사님을 찾았는데, 좁은 안방에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에,.. 체격도 괜찬는 인상이 퍽으나 좋게 느껴지는 여인이, 그집 아기 돐 이라는(거짓인 것도 모르고)그 주인공 어린이를 앞에 두고, 앉자서 율동 하면서 동요를 아름다운? 목소리로 생끗~~우스면서 불으는 것을 보고는, 처음 대하는 여인 이라 머리인사만 하고는, 점잔케 식탁앞에 앉자 정면으로 다시 그 여인을 볼 수 있는 순간을 가졌는데, "첫 인상이 괜치않는 여성 인데" 하고 느끼면서 그때 그곳에 들어 온 어머니 전도사님과, 오선생부부의 반가워하는 인사와 자기 친구인 그녀가 장차 내 아내 될 운명?에 놓인 그 여인에 대한 소개를 받고, 나는 바로 어제 말하던 그 선 보일 친구임을 짐작하고는 웬지 좀 어색함을 느끼면서, 반면 그 분도 식사하면서 자기 친구가 선 보여 주기 위해 완전 속임수 쓴것에 빠젔던 것을 알게 되고서 인지? 남 모르게 나를 힐긋~~올려 처다 봄을 수상하게 느낀 나도, 무엇인가 짚이는데가 있어, 식사하면서 설마 결혼 생각 없다고 분명히 말 한 바 있는데, 아무 양해없이 서로 선 보게 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은 결코 아니겠지만, 어제 오선생이 내 집에 와서 좋은 색씨감이 자기 친구중에 있는데 볼래요?하기에 장가 같은 것 생각할 수 도 없는 처지에 왜 자꾸? 결혼 하라고 하시냐고 사양 하니까, 하여간 선 보던 안 보던 간에 내 친구 중에 괜치 않는 신부깜 세분이 있는데, 두 분은 대졸이고 한 분은 고졸이지만, 가정 형편도 만석꾼 인데 공부도 우등생, 그야말로 마지멧 쨩(착한 애 ) 이라는 고교생 때 별명 가질 정도의 진실한 처녀요, 고향서 소학교 교사에, 바스켓 선수?에 예수 잘 믿고 건강하고,,,^^
이건 중매쟁이의 말이니 믿거나 말거나 지만, 자기가 추천해 들인다면 고교출신이라는 것과 한 살 영상의 분 이라는 것 내 놓고는 나무랄데 없는 친구를 추천한다는 말에 힘을 주고 열변을 토하는바, 나는 연상이면 어떻고 대학 않 나왔다고 문제 별로 않 돼고 단지 인성의 됨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는데요!? 그렇나 지금 결혼 생각 없다고 잘라 말씀 올렸는데?..하고 말하니 알았다고 그냥 총총히 뛰다 싶이 나가신 오 선생을 물그럼이 뒷 모습 바라보던 일이 머리에 생생!! 바로 이렇게 내 결혼관 부터 떠 본 이유를 이제 알게되고는 초라한 내 모습에 부끄럼도 가중했으나, 입에 춤이 마르도록 내 선전?을 했을 일에 실물 보고 내 아내의 실망이 컸으리라 하고 걱정도 해 보았다. 결혼 생각 없다면서 말이다.
결국 결혼한 후에 안 일이지만, 자기도 이 결혼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선 보기전에 집에 간다고 어제 저녁에 나섰는데, 자기 신고 온 구두가 올데 간데 없어져(오선생이 친구 못가게 감춘 것 모르고) 한 바탕 날리나, 오선생의 아무 신이나 걸치고 도망하다 싶이 나왔다가, 나루배 탈 때, 장충당 고개를 캄캄한 밤에 넘다가 군인 한사람이 나타나 계속 따라왔을 때 인기척 이라고는 없는 산중같은 곳 울(당시 서울교외는 이렇게 살벌)간 이 콩알 만큼 되어, 마침 어떤 노파를 만나 그의 치마짜락 붙잡고 겨우 시내까지 나와 전차 탄 이야기 등, 그는 두고두고 간 떠러질번한 그 때 이야기를 꺼내지요만, 집으로 구사일생?으로 들어간 집안 식구들은 밤중에 돌아온 딸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면서 자초지중을 듣고는, 그의 아버지는 고향을 지주 라는 신분으로 24간내에 철거하라는 명령으로 쫓겨난 김에, 아무것도 못 가지고 월남한 처지에서 잠시동안 생활 할 정도의 재물 밖에 없는 처지에 무슨 놈의 결혼이냐고, 그것도 홀홀 단신의 빈 털털이에게,,,하고는 반대하는 반면, 어머니는 총각 임에는 틀림 없고 홀로 고학으로 그어려운 의학공부를 한 장한 예수 믿는 사람, 지금은 가난 하지만 의사인 그는 틀림없이 앞으로 성공하여 너를 굶기기야하겠느냐하면서, 나이 하나 아래인 연하남 이라고 꺼리낀다면, 엄마는 16세된 연하의 철없는 총각과 혼인하여 이렇게 잘 살았는데, 너의 이 혼담은 좋은 혼처니, 추진 하는 것도 나쁘지 않 다고 찬성하는 등, 의견 분분 하다가 얼마 안 되서 오선생 모친이신 전도사님이 돌연 나타나셔서 이들을 설득 후 약혼식 날짜까지 정하고 돌아와서, 나에게 알려주었으니 절대절명의 이 순간에 나 하고는 아무런 말 없이 인간의 일대사를 마음대로? 처리하신 (지금 생각하면 이것 모두가 하나님의 뜻으로 주님사랑으로 이루워진 것 알 수 있지만)것이, 당시로는 아연실색의 돌발사건으로, 몹시나 저를 당활케 했음은 말할 나이도 없었습니다. 불가 약혼식을 3주간 쯤 날겨 논 어느날, 내 생활의 전부라 할 선린형제단에서는 약혼식에 참석하실 우리 신랑편의 명단이 발표 됬지요. 그날의 주례 이신 김 재준 목사님, 단장 이신 강 원용 목사님을 위시해서 조향록 신사교회 목사님 부부, 깅 영규 장로님, 신 영희 장로님 등 ,1950년 3월6일은 저의 운명을 결정 짓는, 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의미 깊은 날인 동시에, 이를 기뻐해야할 부모님도 하늘에서 지켜보셔야 하는 단장의 하루였습니다. 약혼식 얼마전에 선 보고는 처음으로 신사리를 방문한 김 볻실씨를 내 숙소로 영접 후에, 저는 안 하기로 했던 결혼이라는 인생일대의 대사건을? 앞두고, 하나님 앞에서서로가 참된 마음으로 우리 문제를 결정 짓기위한 성서식?을 갖기위한 신부될 분에게 선서를 바라는 면담이 시작 되었지요. "저 와 만일 한 가정을 이루신다면 김선생님도 제가 질머질 십자가를 무조건 영원히 함께 지실 각오가 있는지요?" "네. 그렇게 하는데 전력을 다 할 각오 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약혼식을 할 수 있는 마음의 각오를 확인 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각각 헤여지고, 3월6일에 신부의 원효로 댁에서
김재준 목사님의 주례로 약혼식은 무사히 끝 마치고 신부측에서 준비하신 간단한 식사로 성스러운 이 시간을 하나님께 감사올리면서 우리 두 젊은 이는 약혼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남산 근처 어느 사진관에 가서 사진 촬영을 했는데, 2층인 그 사진관 계단을 올라 가다가 처음으로 신부될 여인의 손을 슬며시 잡으려니까 놀랜 이 노쳐녀는(24세로서 당시로는 만혼에 속하는)놀래 내 손을 뿌리치던 순정의 한 추억이 지금도 내 가슴을 고동치게 하지요.^^
약혼 후 우리의 두 번째의 만남은 결혼반지 사기위해 만난 3월 어느 꽤청한 봄날의 오후였습니다. 돈 없는 저는 당시 5.000원(지금이면 5만 원 정도)이면 살 수 있는 프른 빛 나는 비취 반지 였답니다. 다이야몬드라는 낫말은 저에게는 하늘의 별이 었고 금반지조차 그림의 떡이 었음을 지금 생각해도 처가집에 대한 자존심의 손상이란 저로서는 별로 부담이 안 되는 당연한 일이고, 세상사람이 다 아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이렇게 하루 하루 날은 활과 같이 날아 가면서 드디어 그날, 저에게 잊을 수 없는 귀중한 기억들을 남겨준 결혼식 그 날이, 다가 오고 말았지요. 약혼식 날에 양쪽 어르신들이 의논 결정된 바로 1950년 4월10일이 내일로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식에 입을 양복은 교우의 것을 빌려입고, 구두는 마침 그 때 가정교사로 있던 교인 집에서 한 컬레 마추워주셨고, 시내 드라이부 할 승용차는 일본에서 사업하는 앞에서 말씀 올린 가정교사집 큰 언니가 일본에서 가지고 들어온 자가용을 손수 운전하여 시내 좀 돌고는, 신사리 우리 보금자리로 들어갈 나루터까지 모셔다 주신 권사님 등, 여러모로 도와주신 교우들을 잊을 길이 없고 이 은혜를 저는 화천에서 군대에서 농촌 진료소에서 갚아 나갔던 것이지요. 결혼식 당일에 김재준 목사님의 주례로 성가대의 축가와 교인 자녀들의 둘러리에 장로님들의 축사 등,부족한 이사람에 대한 주님의 사랑의 만발은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는 내 일생의 가장 행복한 하루 였습니다. 크리스챤된 기쁨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날의 하객은 교회 식구 빼고는 저의 측하객 이라고는 서울대학병원 의국원들과 저와 열락이 닿았던 할빈 사람들 몇 분이었지요, 부모 친척이라곤 한 분도 없이, 생각도 못했던 엄친의 친구분 한분이(차씨 성의 저도 할빈 집에서 갓끔 뵌일 있던 반가운 분) 저의 친척대표를 자청한 비롯 초라하지만 뜻 깊은 역사적인? 결혼식으로 장식해주신 그 분이 너무 고마웠지요. 식이 끝나고 피로연은 경동교회 제직분들이 혹은 반찬을, 혹은 떡을 서로가 각각 분담하여 차려주쎴던 그 사랑!! 그 고마음!!, 바쁜 대학병원의 엄무도 잠시 선배님들에게 마끼고 찾아 온 동기 의사들이, 피로연 장에서 축사를 해주고 우정을 돈독히 해준 것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지요. 내일 제 2편에서 만나자구요!! 별 재미도 없지만요!!샬롬 !!
첫댓글 일공 chul장로님~
글을 읽을 때마다 감탄~~~~ 합니다.
장로님의 인생을 통해 이야기되어지는 것도 감동이지만
우선은 이렇게 긴 글을 타이핑 하신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3월 첫주일에 아버지 모시고 한소망교회 출석할 예정입니다. 그때 장로님을 뵙겠습니다.
더욱 강건하시고 장로님의 기도로 한소망교회가 더욱 발전 부흥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도 더욱 강건하시고 기쁨 가득하시기를 빕니다!
존경하는 thankee목사님!! 우라 나라 글에 어두운 부끄러운 Korean!! 항상 과찬의 격려 말씀 고맙습니다.
자난 주일의 불경을 용서하십시오, 이제 준 치매환자 등록 된 것 같네요, 갈 길을 밝게 해주시는 고마운신 이세진
원로 목사님의 목사님들의 가정이 너무 부럽습니다, 노회를 만드셔도? 목사님의 건강과 죄인들의 인도하심이 영원하시기를 빕면서,샬롬!!
장로님,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장로님의 결혼 이야길 읽다보니 그시대의 풍경들이 영화처럼 들어오네요.
더구나 6.25전쟁 불과 몇달 전에 행복한 결혼식... 무슨 드라마같아요.
인생이란 짧지만, 꿈결같지만, 그래서 더욱 꿈같이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더구나 지나간 추억은요.
장로님, 오늘도 건강하셔요~
항상 저의 글을 읽어주시고 사랑과 격려와 가르침 주시는 까페지기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염녀하는 것은 목사님의 건강입니다. 코감기는 좀 가라
앉으셨는지요? 하나님의 따뜻하신 손길이 그냥 두시지는 절대 아님을 믿사오나, 못난
사람 마음 아시지요?ㅋㅋㅋ, 샬롬!!
장로님의 기억력에 찬탄을 금할길 없습니다!!
65년이 흐른 지금도~~
정말 디테일하게도 어제일처럼 생생하게 지난 일들을 기억에 담고 계셨는지요~~??
놀랍고 감동스럽고 존경스럽습니다^^
장로님과 권사님의 지인분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사랑으로 두분의 순애보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그시절 배경,지인분들의 소개, 사실적으로 잘 표현해주시고,한미합동차림으로 케럴을 지휘하셨던 모습을 수줍게 지켜보셨던 김선생님등 장면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흥미진진하게 잘 읽었습니다^^
어렵게 고학하셔서 선망의 스카이의대를 나오셨고,의료봉사로 사랑나누시며,삶의가치를
더 해주신 명철하신 한소망의 귀감!!
장로님은 진정한 청춘이십니다,
부끄럽습니다. 안 그래도 이런글이 도리여 자기선전 기사 같이 된다면 하고 걱정 안 한 것 아닙니다만, 저의 인생사가 조금이라도 힘드시는 분들에게 도움과 용길 준다면 하고,,, 문학소녀 같은 옛분 글을 읽을 때 마다 왜 나는 우리말 공부를 열심이 않 했을까 후회 막심!! 옛날 기억은 잘 안 사라지는데 근래일은 방금 듣고도 캉캄, 아이그 놁으면 XX야 해!! 온! 자기멋대로? 사이버 청춘자 일공아 ! 믿음으로 살자! 지금 아래층서 공사 진행으로 정신 혼란. 이만 집사님과 신랑님의 행복을 중보 기도합니다. 건강제일! 믿음 만이 우리들을 구원하심을 명심!!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