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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성당 아름다운 역사가 있습니다
용산성당은 1백여 년 전 삼호정 공소 신자들이 스스로 복음의 터전을 일궈 지금까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1920년경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의 공소(삼호정 공소)로 출발하였다.
1942년, 노기남 주교의 인정 하에 용산본당은 약현본당으로부터 분리되어 초대 주임으로 라리보 신부가 부임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용산 산마루에 훼손된 성당을 복원하였고, 5대 주임 조창희 신부 때인 1954년 12월 5일 성당을 완공하여 노기남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여러 신부들의 노력으로 성당을 가꾸거나 성당 건물을 신-개축하고 교세를 불려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넓은 마당과 녹지를 가지고 있어, 공원과 같은 환경으로 사람들에게 좋은 휴식처 구실을 해주기도 한다. 특히, 초기 사제들과 무명 치명자 등 70여 기의 유해가 안장된 교구 성직자 묘지가 있어서 전국의 성직-수도자들과 신자들이 찾아오는 준성지와도 같은 곳이다.
묘지에는 우리 나라 초대 교구장 소 브뤼기에르 주교의 묘도 모셔져 있다.
또한, 2010년 이탈리아 로마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과 '특별한 영적 유대'로 결합된 성모 순례지 전대사 특전을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성모 공경을 위해 용산성당을 순례하는 이들에게는 로마 리베리오 교황 성모 대성전을 순례한 것과 동일한 전대사가 수여된다.
1. 용산, 고려-조선시대를 거슬러 오르다
‘용산’이라 하면 지금의 보통 용산역-삼각지를 중심으로 한 신용산 일대로 알고 있지만, 원래 현재 용산성당이 있는 용산이란 산 남쪽 한강을 낀 일대를 말한다. ‘용산’이라는 지명은 한강변을 향하여 구불구불 뻗어나간 한양 우백호의 산줄기가 용이 몸을 비틀어 나가 머리를 쳐든 형상과 같다고 하여 붙여졌다고 전한다.
이곳은 고려 초기에 과주(지금의 경기도 과천시)에 속했으나 지금의 용산구 일대가 부원현으로 떨어져 나갔고 후에 남경에 편입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성저십리 용산방(원효로, 용문동, 효창동 등 서부지역 여기에 지금의 마포구 도화동, 염리동, 용강동, 대흥동 등도 포함된다.
, 한강방(한남동 등 동부지역), 둔지방(한강로, 이촌동, 용산 미군기지 등 중부지역) 지역으로, 1914년에는 서울역 주변 및 한강대로(경부선) 주변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한강방의 '한'과 둔지방의 '지'를 따서 지은 이름.
, 용강면 용산방의 '용'과 서강방의 '강'을 따서 지은 이름.
으로 편입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로 재편입되었다.
조선시대 용산은 수운의 거점으로서 활용되었지만,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강에 면한 절경으로 도성 밖 경승지로 꼽혔다.
교통의 요지였기에 용산은 개항기에 우리나라 근대화의 중심공간이 되었다. 1884년(고종 21)에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허용하는 개시장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선교사의 자유가 인정되자 원효로를 중심으로 프랑스인, 중국인, 일본인 등이 들어와 종교와 상업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 용산성당의 출발은 이 일대에서 단순히 신앙적 의미의 차원을 넘는 지역민의 중요한 공간이 마련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
2. 경치 좋은 한강가, 용산팔경이 나오다
한강으로 불쑥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산의 산 모습은 멀리서 보면 정말 그 이름대로 한강의 물을 먹는 모습으로 보인다.
『증보문헌비고』에서는 이 지역의 언덕을 가리켜 '용이 나타났고 해서 용산(龍山)이라 했다'고 되어 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화나루 동쪽 언덕의 산모습이 용이 있는 형국이라 생긴 이름'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 충숙왕은 왕비와 함께 경치 좋은 이 용산에서 머물러 아들을 낳아 이를 ‘용산원자’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용산’이란 지명이 있었던 것이 확실하다.
고려시대에는 용산 지역에 별로 사람들이 그리 많이 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로 들어와 용산 남쪽 산비탈 아래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강변쪽부터 마을들이 들어서고, 조선 후기에는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이곳저곳 경치 좋은 자리에 정자나 별가(別家)를 지어 여생을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용산'은 지금은 하나의 서울의 구(區)이름으로 자리잡아 광역지명으로 정착돼 있지만, 옛날에는 '절두산', '남산', '계룡산' 등과 같은 하나의 산(山) 이름이었다.
조선의 이태조가 도읍을 한양으로 정한 데는 이곳이 위치, 지리, 교통, 방어 등 여러 면에서 그입지적 조건이 그 어느 곳보다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풍수적인 면을 매우 좋게 보았다.
뒤로 북악(北岳)과 삼각산(三角山)이 든든히 울타리를 쳐 주고 있고, 주산(主山)인 북악에서 뻗어나온 맥이 양쪽으로 감싸고 흘러나온 데다가 앞에는 남산이 안산(案山) 으로 자리잡고 있는 땅. 어느 누가 보아도 길지(吉地) 중의 길지임에 틀림이 없는 곳이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北岳)에서 흘러 내린 서쪽의 맥이 우백호(右白虎)이고, 동쪽의 맥이 좌청룡(左靑龍)이다. 좌청룡은 동쪽의 성북동 방면으로 해서 낙산(駱山)까지 그리 길게 뻗지 못했으나, 우백호는 마포쪽의 한강까지 매우 길게 뻗어 있다.
북악산 옆 인왕산의 산세를 무악재를 통해 이어받은 길마재[鞍山=안산]는 그 줄기를 계속 남쪽으로 뻗쳐 '둥그재'[圓峴=원현], '애오개'[阿峴=아현], '큰고개[大峴=대현, 만리재] 등을 만들어 놓고, 한강 앞으로 다가와 용머리 모양의 등성이를 솟군 후, 강물 앞에서 멈춘다. 이 우백호 줄기의 끝 부분이 용의 머리를 닮아 지금의 '용산(龍山)'이란 산이름을 낳았다.
한강이 휘어돌아 경치가 좋았던 용산은 고려시대에도 시인 묵객들이 정자를 지어 경치를 즐겼다.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이인로(李仁老: 1152∼1220)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은대집(銀臺集)』, 『쌍명재집』, 『파한집』 등의 저술서가 있다
이곳의 정자에 묵으면서 지은 시 한 편을 보자.
두 물줄기 질펀히 흘러
갈라진 제비 꼬리 같고,
세 봉우리 산 아득히 서서
자라 머리에 탔네.
만약에 다른 날
비둘기 단장을 모시게 된다면
함께 저 푸른 물결 찾아
백구(白鷗)를 벗하리.
고려 말의 목은 이색도 용산을 지나다가 그 경치에 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지어 읊었다.
용산이 반쯤
한강물을 베개삼았는데,
소나무 사이 저 집에
묵어 못 감이 아쉽구나.…
절벽 아래로 푸른 강물이 흐르고, 그 건너로 너벌섬 잉화도(仍火島), 나의주(羅衣州) 등으로 불린 섬으로, 지금의 여의도]
과 밤섬 섬 모양이 밤을 닮아 ‘밤섬’이고 한자로는 ‘율도(栗島)’리 했다.
이 보이고, 강 건너 멀리 관악산, 청계산 등이 보이는 산마루. 이 용산 마루에서 바라보는 멋진 경치는 ‘용산팔경(龍山八景)’으로 전해져 왔다.
1경 청계조운(淸溪朝雲)-청계산의 아침 구름
2경 관악만하(冠岳晩霞)-관악산의 저녁 안개
3경 만천해화(蔓川蟹火)-만천의 게잡이 불빛
4경 동작귀범(銅雀歸帆)-동작나루의 돌아오는 돛배
5경 율도낙조(栗島落照)-밤섬의 지는 해
6경 흑석귀승(黑石歸僧)-흑석동의 돌아오는 스님
7경 노량행인(露梁行人)-노량진의 길손
8경 사촌모경(沙村暮景)-새남터의 저녁 경치
3. 삼호정에서 여류 시인들 모여 시를 읊다
용산 강변에는 일찍부터 정자가 많았다. 지금의 청암동 언저리에 택한정이 있었고, 지금의 원효로4가 성심여고 자리에는 함벽정(涵碧亭) 지금의 성심여고 안에 있었던 정자로, 신학교 시절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서쪽 작은 언덕에는 심원정(心遠亭)이 있었다.
심원정은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영 남공철 영의정의 별장이기도 하여서 영의정 경산 정원용, 우의정 죽리 김이요, 홍문관 대제학 죽파 서준보 등 5, 6명의 원로 문사들이 내왕하면서 술 마시고 시를 읊곤 하였다.
심원정에서 원로 문신들이 청유하던 무렵, 용산 남쪽 산비탈 삼호정(三湖亭) 삼호정은 조선시대 후기부터 있어 온 정자로, 이곳에서는 김금원(金錦園) 등의 여류 시인들이 모여 한강쪽의 경치를 바라보며 시(詩)를 지으며 즐기던 곳이다. 여기서 지은 시들이 여러 편 전해 온다.
에서는 금원, 운초, 죽서, 경산, 경춘 등 여류시인들이 용산강을 바라보며 한시 문학을 꽃피웠다. 아마도 이들 여류 시인의 동인활동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처음일 것이다.
그들이 태어난 고향이 각기 다르면서 수시로 삼호정에서 만나 시 읊기에 몰두하였다는 것은 그 시대로서는 엄두도 못낼 만한 일이었다. 그들 동인 가운데 경산 경춘의 시문만이 거의 전하지 않고 금원 운초 죽서의 시문은 각각 시집으로 엮어져서 오늘날까지 전한다.
원주 태생인 김금원은 1830년 27세에 남자 복장을 하고 고향을 떠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금수강산을 구경하였다. 서울에 와서 규장각 학사 김덕희(金德喜) 규당학사(奎堂學士)로 여행에서 돌아온 김덕희(金德熙)를 소실이 맞아들였다. 1845년에 의주 부윤으로 부임할 때 함께 관서 지방을 유람하며 시문을 지었다.
김덕희와 인연을 맺어 소실살이를 하면서 남편이 1845년에 용만군수가 되어 임지로 가는 계제에 관서지방의 풍경도 두루 구경하였다. 1847년에 다시 서울로 돌아온 후 김덕희도 벼슬길을 단념하고 용산 강가 이곳에 삼호정을 마련, 함께 강산 풍경을 즐기며 세속을 초월한 삶을 살았다.
용산 산비탈에 삼호정 정자가 지어진 것은 1850년경으로 보인다.
삼호정은 일제강점기까지는 거의 그 원모습을 간직해 온 것 같다. 오랫동안 한자리에 있어 온 정자였기에 근처의 마을 이름까지 ‘삼호정마을’이었고, 마포로 넘어가는 근처 고개 이름도 ‘삼호정고개’였다.
4.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다
한국 교회에서 언제 용산 남쪽 산비탈에 성직자 묘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887년에 신학교 부지를 매입한 직후인 것 같다.
1890년 2월 21일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J.Blance) 주교가 선종하면서 와서 왜고개 용산구 한강로3가 65-1 용산고등학교 부근에 있던 고개로서,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는 업무를 관장하는 관아인 와서(瓦署)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 이곳의 토질은 벽돌을 만들기에 좋았디.
에서 구운 벽돌을 가져다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들면서 성직자묘지가 조성되었다.
당시 삼호정(三湖亭) 너머 도화동 쪽은 모두 공동묘지 자리로 민가가 없어 그 인근 남쪽 산비탈은 묘역 조성지로 최적지였다. 더구나 묘역 아래에 옛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있고, 남쪽 한강가로는 유서깊은 새남터성지, 동쪽으로는 당고개성지까지 바라볼 수 있어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했다.
특히 조선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의 유해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1931년 10월 10일 이곳으로 이장되어 성직자 묘지로써의 뜻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용산 성직자 묘역에 이장됐다.
묘역 조성 초기에는 이곳에 성당이 없었고, 다만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 소속된 삼호정 공소가 있었을 뿐이었다. 삼호정은 조선시대 여류 시인들이 모여 풍류를 읊었던 정자로, 이 지역에 오랜동안 지명으로 사용해 왔기에 공소 이름이 처음엔 ‘삼호정 공소’였다. 묘역이 조성된 후 삼호정 공소 신자들은 내 부모 묘처럼 정성껏 돌보았다.
1942년 삼호정 공소가 용산성당으로 승격된 후에는 부임하는 사제마다 묘역 관리 보존에 힘을 기울였다.
현재 여기에는 4위의 주교, 64위의 신부,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1위가 안장되어 있다.
5. 삼호정 공소에서 신앙의 꽃을 피우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 이후, 조선 대목구는 1887년 용산 함벽정과 삼호정 일대 현 성심여고가 있는 함벽정과 용산 산마루쪽의 삼호정 일대는 당시는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한 필지로 된 용산 산비탈 지역이었다.
의 임야를 매입하여 강원도 원주 부흥골(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의 예수성심신학교를 함벽정으로 옮기고 삼호정 언덕 비탈을 성직자 묘지로 정하였다.
이 일대의 삼호정마을(현 산천동), 샌창마을(현 신창동), 복사골(현 도화동)의 신자들은 1920년경 약현본당 소속 공소 공동체를 발족시켜 김윤근(金允根, 요셉) 신부 김윤근(요셉) 신부는 1909년생으로, 강원도 풍수원 성당 출신 사제이다.
의 방문과 지도로 교세를 증가시켰다.
1924년 이후 신자수가 300명 이상으로 증가하자, 1926년에 ‘약현본당 청년회 용산지부’를 창립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고, 그 해 7월 25일에 대지 60평, 건평 30평 규모의 공소 건물을 완성하였다. 원래는 삼호정의 안채 자리에 공소를 마련했다고 전한다.
당시 이 공소에는 주위의 여러 마을에서 많은 신자들이 예절에 참여하였다. 바로 공소 앞의 삼호정마을은 거의 모두가 이 공소 신자였다. 산비탈 아래 샌창마을, 성지물(형제우물) 현재 원효로4가 성심여고 아랫마을. 우물이 둘 있어 ‘형제우물’이던 것이 변하여 ‘성지물’이 되었다.
, 한강면의 용머리, 효창원 방면의 새창고개, 복삿골, 삼개(마포) 사람들 중에도 이 공소를 찾아 신앙 생활을 했다.
약현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본 사람들도 많았다. 당시 이 용산 일대에는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 하나뿐이어서 신자들은 용산 언덕을 내려와 청패(청파동)쪽을 거쳐 2km 이상 되는 길을 걸어 미사를 보았다.
6. 성직자 묘지를 조성하다
한국 교회에서 언제 용산 남쪽 산비탈에 성직자 묘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1887년에 신학교 부지를 매입한 직후인 것 같다.
천주교회측에서 이곳에 성직자 묘지를 마련하기로 결정한 것은 현재 정확한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1887년 신학교 부지가 매입된 직후인 것 같다.
성직자 묘지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890년 2월 21일 블랑주교가 서거하면서 새푸리 한자로는 신초리(新草里)라 하는데, 풀이 많아 붙은 이름. 현재 한강로3가 근처.
근처 와서 기와나 벽돌을 구웠던 곳이어서 와서(瓦署)라 하고, 이 일대를 ‘왜고개(와고개)’라 부른다. 현 용산우체국 뒤편이다.
에서 구운 벽돌을 가져다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든 때부터였다. 당시 삼호정 너머 도화동 쪽은 모두 공동묘지 자리였으며, 조선교구에서 성직자 묘지를 이곳에 매입한 이유 중의 하나도 이러한 점과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당시 용산 산마루 기슭으로는 공동묘지 자리로 민가가 없었어 남쪽 산비탈 양지바른 곳은 묘역 조성지로 최적지였다. 더구나 묘역 아래에 옛 용산 예수성심신학교가 있고, 남쪽 한강가로는 유서깊은 새남터성지, 동쪽으로는 당고개성지까지 바라볼 수 있어 의미가 깊은 곳이기도 했다.
1890년 2월 21일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J.Blance) 주교가 선종하면서 와서 왜고개 용산구 한강로3가 65-1 용산고등학교 부근에 있던 고개로서, 조선시대 기와와 벽돌을 구워내는 업무를 관장하는 관아인 와서(瓦署)가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 이곳의 토질은 벽돌을 만들기에 좋았디.
에서 구운 벽돌을 가져다 담을 쌓고 경계를 만들면서 성직자묘지가 조성된 것이다.
특히 조선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에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 땅에서 병사한 브뤼기에르(Bruguiere) 주교의 유해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하여 1931년 10월 10일 이곳으로 이장되어 성직자 묘지로써의 뜻이 더 깊어지게 되었다. 브뤼기에르 주교의 유해는 1931년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용산 성직자 묘역에 이장됐다.
묘역 조성 초기에는 이곳에 성당이 없었고, 다만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에 소속된 삼호정 공소가 있었을 뿐이었다. 삼호정은 조선시대 여류 시인들이 모여 풍류를 읊었던 정자로, 이 지역에 오랜동안 지명으로 사용해 왔기에 공소 이름이 처음엔 ‘삼호정 공소’ 용산 지역에는 당시에 다른 공소가 없었기에 이를 일명 ‘용산 공소’라고도 했다.
였다. 묘역이 조성된 후 삼호정 공소 신자들은 내 부모 묘처럼 정성껏 돌보았다.
옛 삼호정 정자 자리 옆에 1889년 9월 8일(성모 성탄축일)에 강복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보육원(수녀원 용산 분원)이 있었고, 삼호정 안채가 공소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공소와 보육원 바로 위쪽에 성직자 묘지를 조성함으로써 현재 이 묘지가 용산성당 구내로 위치하게 되었다. 이 성직자 묘지 아래에 있었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묘지의 수녀 무덤들은 훗날 이장하여 현재는 그 흔적만이 남아 있다.
제6대 주임 김윤상(베네딕도) 신부는 1961년부터 이곳 성직자 묘지에서 ‘성직자 추도 연미사’를 개최했다. 이 연미사는 한동안 연례 행사처럼 되어 왔다.
묘역은 처음부터 완벽하게 조성된 것이 아니었기에 자주 훼손되곤 했다. 장마 때면 흙물이 흘러 비석을 덮어 버리거나 돌들이 무너져 내리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다시 정비하여 묘지로서의 품격을 갖추어 갔다.
현재 여기에는 4위의 주교, 64위의 신부, 2위의 신학생, 1위의 치명자 등 모두 71위가 안장되어 있다.
7. 대지를 매입하고 신앙의 터를 일구다
조선교구에서 용산 삼호정 일대의 대지를 매입한 것은 1887년으로, 이는 교구 성직자 묘지의 마련을 위해서였다. 그리고 정지 작업을 하여 전국에 흩어져 있는 선종 사제들을 하나하나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그 해 3월 교구에서는 삼호정 아래쪽 용산 함벽정 일대 부지와 가옥도 매입하고, 여주 부엉골의 예수성심신학교를 이전해 왔다.
1889년에는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용산 분원과 보육원 축복식이 있었다.
그 다음해인 1890년에 삼호정 공소가 설립된다. 공소 건물은 옛 삼호정 정자 안채를 이용했는데, 이 때의 신자 수는 약 150명이었다고 한다.
1891년 5월에 뮈텔(G. Mutel, 閔德孝) 주교가 삼호정 공소에서 첫 견진성사 집전했고, 그 해 11월에는 약현본당(현 중림동 본당) 설립, 초대 주임으로 두세(C. Doucet, 丁加彌) 신부가 부임했다. 삼호정 공소는 약현본당 소속이 되었다.
1892년 1월에 삼호정 안채를 공소 경당으로 개조하고(12칸), 뮈텔 주교 집전으로 축복 미사를 봉헌했다.
1902년 4월에는 신학교 내의 ‘예수성심성당’ 봉헌식이 있었다. 공소의 신자 수는 꾸준히 늘어나 1904년 5월에는 신자 수가 434명까지 늘어났다.
1926년 2월에 약현성당 청년회 용산지부가 창립되었는데, 건물은 삼호정 사랑채를 이용하였다.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인 해이던 1931년 10월 초대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 Bruguiere, 蘇) 주교 유해가 성직자 묘지로 이장됨으로써 이곳 묘지로서의 중요성이 크게 증대되었다.
1937년 청년회 용산지부에서는 삼호정 사랑채가 낡아 이를 헐어 버리고 청년회관를 신축하였다.
8. 삼호정 공소가 용산본당으로 승격하다
1942년 1월, 삼호정 공소는 드디어 용산성당으로 승격된다. 그리고 초대 주임으로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주교가 부임하였다.
본당 성전은 당분간 공소 경당을 사용하고, 사제관은 예수성심학교 신자들은 대부분 용산쪽에 거주하였으므로 성당 왕래에는 그리 큰 지장은 없었다.
내의 건물을 사용했다.
용산 공소가 본당으로 승격하게 된 것은 당시의 정세와 깊은 연관이 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전후 일제는 한국 교회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여 외국인 성직자들을 구금하였으며, 몇몇 교구의 교구장에 일본인 주교를 앉히려고 하였다.
이를 사전에 감지한 제9대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의 노력으로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신부가 제10대 서울 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일제 당국이 용산성당과 그 일대를 징발하여 대공포 진지로 사용하였으므로, 용산본당의 신자들은 신학교 안에 있는 예수성심성당에서 주일 미사를 봉헌해야 했다. 이는 ‘용산본당’이 약현본당으로부터 분리·설립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당시 노기남 주교도 이를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다.
9. 초대 사제로 원 라리보 주교가 부임하다
1942년 본당 승격 후 용산성당에는 초대 사제로 원 라리보 주교가 부임하였다.
원 주교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제9대 교구장으로, 용산성당 사목 후에는 대전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한국식 이름은 원형근(元亨根)이다.
프랑스의 라로뮤(La Romieu)에서 태어나 1904년 파리 외방전교회 17세기 중반 주로 아시아 지역의 가톨릭 포교를 위해 프랑스에 설립된 해외 전도단체다. 아시아 각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했는데, 선교사들은 파견 지역에서 현지인들과 어울리며 평생토록 선교에 종사하는 방식을 취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천주교 조선교구가 설립된 1831년에 브뤼기에르(Bruguiére) 주교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사망하면서 모방(Maubant)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 샤스탕(Chastan) 신부가 1836년과 1837년에 입국했다. 이들 중 모방 신부는 김대건(金大建), 최양업(崔良業), 최방제(崔方濟)를 마카오의 신학교에 보내서 신학공부를 하게 해 첫 한국인 사제 배출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제국주의 침략기에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군사적 침공 이전에 이 전교회가 먼저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에 입회해 1907년 3월 10일에 사제서품을 받고 바로 임지인 한국을 향해 고국을 떠나 1907년 5월 21일 서울에 도착했다.
1908년에 만주 간도로 파견되어 삼원봉(三元峰)에서 첫 전교 활동을 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젊은 선교사들이 군 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가자, 한국 천주교는 일손이 달려 더욱 바빠지게 되었는데, 라리보 신부는 이때 충청도 지방을 맡아 40여개의 공소를 돌아다녀야 하는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하였다.
1916년에는 서울대교구의 당가신부가 되어 교구 살림을 맡아 보았고, 1926년에 보좌주교인 드브레 주교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계승권을 가진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 그 해 5월 1일 성성식을 갖고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의 위임으로 실질적으로 서울대교구를 다스렸다.
1933년에 뮈텔 주교가 선종하자 자동적으로 그의 뒤를 이어받아 서울대교구장으로 취임, 1942년 1월 5일 교구장에서 물러나 일제하의 어려운 시기에 열심히 사목하였다.
그러나 소위 일본이 더욱 교회를 탄압하여 외국인 성직자를 구금 추방하는 조치를 취하자, 라리보 주교는 사임할 것을 결심하는 동시에, 한국 천주교의 보존을 위해 한국인 성직자를 주교로 임명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기남 바오로 신부가 방인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주교로 서품되어 서울대교구를 다스리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교구장직을 노 주교에게 넘긴 뒤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은거, 1942년부터 용산성당에서 주임 사제로 사목하였고, 8·15 광복이 될 때까지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들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하였다.
10. 초창기, 사목의 토대를 세워 나가다
일제 강점기 말에 탄생한 용산성당은 광복 직후까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원 라리보 초대 사제는 용산성당의 일보다는 당시의 급박한 사정으로 인해 교구를 위해 할 일이 많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용산성당의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사목을 펴 나가야 했다.
본당 승격 후 1942년 1월 말 초대 본당 회장으로 박성춘(요셉)이 임명되었다.
이 해 5월 5일 우리 본당으로는 첫 견진성사가 있었다. 6월에는 본당 첫 유아 세례. 7월에는 첫 혼인성사를 치르는 등 본격적인 본당 사목이 이어져 갔다. 10월 31일에는 용산본당으로는 첫 성인 영세자가 나왔다. 첫 성인 영세자는 김동근 가롤로였다.
1944년인 일제강점기 말, 용산성당 터는 일본군 막사와 대공포 진지로 사용키 위해 징발되었다. 일제는 용산 산마루 능선을 따라 몇 개의 포 진지를 마련하고 미 공군의 공습에 대비하여 수시로 공중으로 포를 쏘아대곤 했다. 그리고 그 일대 도화동 산비탈쪽의 집들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성당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자 본당 신자들은 성당 아래에 있는 신학교의 예수성심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
11. 한국전쟁 중에도 사목활동이 활발히 계속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우리는 광복을 맞았다.
성당 신자들은 광복 다음 해인 1946년 일제 때 훼손된 성당을 되찾아 수리하고, 미사 봉헌을 다시 시작하였다.
이 해에 본당 초대회장 박성춘이 선종하고, 박부성(시몬). 장석환(베드로) 등이 회장격이 되어 성당을 이끌어 갔다.
1946년 7월에 원 라리보 주교가 초대 대전교구장으로 임명되어 떠나고, 2대 본당 주임으로 정규량(鄭圭良, 레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8월에는 수녀원 옆 공터에 약 40평 규모의 사제관 지금이 주차장 북서쪽 담 바로 앞이 그 자리이다. 교육관이 지어지면서 철거하였다.
을 완공하였다.
1948년 8월에는 사제관 겸 강당을 완공하였다. 같은 달, 중림동 본당으로부터 마포구 일대를 관할 구역으로 인계 받아 사목 지역이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1950년 6월, 한국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으로 인해 성당도 큰 피해를 입었다. 미군 폭격에 의해 7월에 성당이 크게 파손되고 정규량 신부가 파편을 맞아 입원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한국전쟁이 한창일 무렵인 1951년 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의 임선영(도로테아) 수녀가 초대 분원장으로 부임하여 다음 해 11월 19일까지 재임하였다.
입원 치료를 받던 정규량 신부는 1952년 10월 7일 향년 70세로 선종하고, 후임 3대 본당 주임으로 샤보(J.Chabot, 車麗松) 신부가 부임하였다.
전쟁 중에도 우리 성당의 사목 활동은 잘 이어져 갔다.
1952년 12월에 용산본당 4H클럽이 구성되고, 임시 성가대, 학생회도 구성되었다. 성모상 봉헌식이 있던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 때의 신자수는 701명, 영세자수 27명, 예비자수 100명으로 나타난다.
한국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6월 샤보 신부가 향년 67세로 서거하고, 그 뒤로 4대 본당 주임으로 박희봉(朴喜奉, 이시도르) 신부가 8월에 부임하였다.
12. 시멘트 건물의 성당과 종탑이 들어서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우선 성당 건물부터 지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신자들간에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1954년 3월부터 정지 작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약 9개월 동안에 걸친 공사 끝에 12월 5일 노기남 주교 집전으로 새 성당 봉헌식을 거행하였다. 건물은 시멘트 벽돌조 95평이었고, 건물 앞쪽 출입문 옆으로 종탑을 세운 것이 특징적이었다. 공사비는 당시 돈으로 317만 2천원이 소요되었다.
종탑에는 종을 설치하고 타종을 시작하였다. 당시 종탑과 성전 건물은 인천 답동성당의 것을 모방해 건축하였다. 종탑은 높이 22.5m로, 종탑 하부는 천장아치(pointed arch)의 형태인데, 최상부에 이 종을 달고 줄을 이어내려 아래쪽 종탑 공간에서 치게 되어 있었다.
비록 그리 크지는 않지만 종이 갖는 의미는 매우 컸다.
한국전쟁 후에 어려웠던 시절, 아침 저녁 6시, 낮 12시면 종이 울려 용산 산비탈 아래쪽은 물론, 마포의 도화동, 공덕동까지 소리가 퍼져 나가 이 일대 주민에게 시간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종의 울림이 약하고 그리 웅장하지 못하다 하여 1970년 임화길 신부 당시 어느 신자의 도움으로 새 종을 주문 제작하여 종탑에 달게 되었는데, 이 종이 바로 그것이다. 울림이 은은하면서도 소리가 맑아 뭇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종탑에 관한 내용은 교육관 지하 출입문 바깥쪽에 종과 함게 게시되어 있다.
또한, 이 종을 단 종탑은 용산 산마루에서 가장 높이 솟아 있어 주위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까지는 인근의 용산과 마포 지역 어디서나 볼 수 있어 용산성당의 위치를 알려 주는 표지와 상징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종탑이 훼손되어 1983년, 1987, 1992년 등 몇 차례 보수를 했다. 한때는 위험이 따른다 하여 보존이냐 존속이냐를 두고 갈등도 겪었다.
2002년 교육관 건축 당시에 구성전만 헐고 종탑은 그대로 남겨 두었으나, 얼마 후 붕괴의 우려와 주차장 확장을 위해 종탑을 철거하면서 종만 따로 보존해 왔었다.
13. 새 단체들이 속속 탄생하다
1954년 12월 말에 회장단을 처음 구성하고, 구역장 제도를 신설하였다.
다음 해 1월에는 성당 안에 14처상을 안치하고, 사제관을 새로 건립하였다. 9월에는 성모상을 안치하고 축복식도 거행하였다.
1958년에 우리 본당에 연령회가 구성되었다.
1959년 1월에는 총회장 제도를 두어 초대 총회장으로 최한희(崔漢熙, 바오로)가 임명되고, 총회장·구역장·단체장 등으로 회장단 구성하였다.
이해 11월에 강당을 신축하고 신축 강복식을 하였다. 이 건물은 나중에 사무실, 사목지원실로 사용되었다.
1960년에 청년 성가대가 구성되고, 학생회와 4H 클럽을 개편하여 청년회를 발족하였다.
급격한 신자 증가로 인해 1963년 1월 초에 성당을 증축하고 개조하였다. 건물 제대 뒤편으로 확장을 하여 전체 모양을 위에서 보면 T자 형식이 된다.
1963년 1월에는 수녀원도 지었다. 지금의 수녀원 자리
1963년 우리 성당으로서는 처음 성당을 분가시켰다. 8월 28일 청파동 본당 설립으로 제1차 분할을 한 것인데, 효창동, 신공덕1·2동의 신자 1,050명을 이관하였다. 이후 1969년 8월 공덕동 본당 설립으로 제2차 분할, 1971년 9월 신수동 본당 설립으로 제3차 분할(용강동과 도화동 일부의 신자 이관) 등 연속으로 본당 분할이 이루어졌다.
이후, 성당에 많은 단체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3년 11월 청년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이 창립을 시작으로 본당 첫 레지오 마리애 ‘바다의 별 쁘레시디움’이 설립되어 본격적인 레지오 활동이 시작되었다. 1973년 3월 ‘평화의 모후 쁘레시디움’, 1973년 5월 ‘자비하신 모후 쁘레시디움’ 설립, 1976년 2월 ‘의덕의 거울 쁘레시디움’ 설립 등
1964년 7월 연령회에서 본당 묘지(청계 묘지)터 매입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경기도 시흥군 의왕면 학의리 산 12, 13번지. 이범이(베드로)가 첫 관리인이다.
8월에는 묘지터를 추가로 매입하였다. 총 28,940평, 관리자 : 이범이 베드로
1966년 4월에 사목위원회를 구성하면서 4대 총회장으로 이계우(李桂雨, 바오로)를 임명하였는데, 그는 총회장을 13년간이나 지속하여 우리 성당 역대 총회장 중 가장 오래 한 사람으로 기록된다.
1967년 8월에 울뜨레야가 창립되고, 1968년 1월 초에 사목위원회를 '천주교 용산교회 자치회'로 변경하였으며, 회장제를 신설하였다.
1970년 5월에는 용산본당 주보 창간호 발행되었다. 크기 35×12.5㎝, 8면 접지
그 동안은 교구에서 나오는 주보를 이용하였는데, 용산성당에서 독자적으로 매주 주보를 발행하게 된 것이다.
1973년 1월부터 1년간은 교구 성직자 묘지 조경 사업을 하였다. 성 요셉상, 예수 성심상,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상, 동굴 성모상, 묘지 제대 등 설치
다음해에는 서제관을 신축하였다. 2층 양옥, 건평 61평) 및 성당 앞마당 콘크리트 포장
1980년에는 본당 최초로 〈사목 계획서〉 발간되었다. 편집 책임은 배우리 프란치스코
1984년에는 교구 방침에 따라 본당에 성체 분배단이 처음 창설되어 신부 외의 신자가 성체를 분배하는 권리가 부여되었고, 1985년 6월에는 본당으로서는 처음으로 야외 미사를 하였다. 장소 : 태릉 푸른 동산
1985년 6월에 본당 주보를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으로 변경하였다.
14. 새 건물을 짓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다
용산성당은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신자가 크게 증가하여 새 성전을 지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따라서 성당에서는 우선 토지를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 준비를 해 나갔다.
1986년 5월 토지 매입위원회를 구성하여 성당 구내의 시유지 매입 계획을 수립하고, 토지 봉헌 사업을 전개하였다. 그해 9월에는 토지 봉헌 바자회를 기금 마련을 위해 성심여고 운동장에서 여러 날 개최하였다. 1987년 12월, 시유지를 매입하여 본당 소유로 등기 이전(425.4평, 매입가 약 1억 6,400만 원). 1988.1월 초 성당 건립위원회를 구성하고, 1988년 3얼 13일부터 새 성당 기공 미사를 매일 봉헌하였다.
이후부터 용산성당의 전 신자들은 주일마다 서울의 각 성당을 돌며 모금 활동을 벌였으며, 여기에 신자들의 성금 등이 모아져 어느 정도의 기금이 마련되었다. 이 때의 신자들이 구역별로 또는 분과별로 각 성당을 돌며 모금을 열심히 한 사실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고들 했다. 신자들의 합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고 모두들 입을 모았다.
1986년 12월에는 노인대학 설립 위해 사목회에 노인분과를 신설하고, 다음 해 1월 용산 노인대학을 설립, 3월 11일 제1기 용산 노인대학을 개강하였다. 학생 수 45명. 초대 학장 배우리(프란치스코)
순조롭게 마련된 기금은 성당 건축을 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그렇게 되어 1989년 8월 13일, 건물이 완성되어 새 성당 봉헌식을 가졌다.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501평, 공사비 5억 1,600여 만원
15. 5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르다
1991년 1월 새 수녀원 건립 및 옹벽 공사 기공식 거행하였다.
1991년 4월 28일 제1회 '본당의 날’을 개최함으로써 이 때부터 해마다 이 무렵에 같은 행사를 벌였다. 그러나 본당이 창설된 것은 1942년 1월이다. 이 때가 너무 추운 기간이라 본당의 날 행사 날짜를 옮긴 것이다.
우리 성당에서는 성체 거동을 처음 실시했다. 1991년 6월 2일 제1회 성체 거동을 하고 표어 : 그리스도 우리의 길. 헌혈 행사. 거동행사의 각본은 배우리. 지휘보조 이창백. 방송멘트는 정광열이 맡았다. 기 거동 행사에 대한 김용태 신부의 열의가 대단했다.
1991년 10월 13일 새 수녀원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강우일 주교 집전.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47.1평, 공사비 8,630만 원
시멘트 건물로 지은 용산성당 건물은 오래 되어 너무 낡아 있었다. 그래서 1992년 3월 25일 드디어 옛 성당 건물을 철거하였다. 더불어 마당 조경 공사와 종탑 보수 공사를 착수하였다.
김용태 신부는 용산성당 설립 50주년인 해인 1992년을 매우 의미있는 해로 보았다. 그래서 이를 대대적으로 기념하기 위해 행사를 1주일간 하기로 결정하였다.
행사는 5월 24일부터 31일까지 6일간 행사를 치렀다. 50주년 기념 행사 표어 : 아낌없이 주리라·사랑 하나 은총 둘
또 50년사 발간을 결정하였다. 《용산 본당 50년사》 는 김 신부가 성당을 떠난 1992년 11월 13일에야 발간되었다.
김용태 신부는 입기를 마치고, 그 후임으로 우리 본당에는 학자 신부가 부임하였다. 손희송(孫凞松, 베네딕도) 신부가 1992년 10월 8일 우리 성당의 13대 주임으로 온 것이다. 손 신부는 유럽 인스부르크에서 교의신학을 전공하고 막 귀국한 직후 용산성당으로 발령을 받아 성당으로는 첫 사목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손 신부는 신학교 교수로 일해 달라는 교구의 요청을 받아 짧은 2년간의 사목으로 용산성당을 떠나 신자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현재 서울대교구 총대리 주교
16. 성당
2000년도에 들어와서도 성당 발전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2002년 봄에는 설립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당 구내 성직자 묘역을 단장하고 생명의 길(Via Vitae)을 조성하고, 5월에는 옛 사제관을 철거하여 주차 면적을 넓혔다.
이 해 11월, 본당 설립 60주년 기념으로 교육관이 완성되어 축복식을 치르고 60주년 기념 한마음 잔치와 본당의 날 행사를 했으며, ‘청소년을 위한 밤’, ‘온 가족을 위한 밤’ 행사 등을 하였다.
베다니아 집도 완성되어 10월 13일 축성식을 가졌다.
2003년 본당 홈페이지 새로 개편하고 분야별로 담당자를 관리 지정하였다.
11월부터 이후 몇 년간은 사회사목 차언으로 무료 법률 상담을 실시하였다. 상담은 안정환 변호사가 맡아 했고, 주일 오전 10~12시에 사랑의 중계실에서 실시하였다.
2003년 11월 16일 새 성찬봉사단이 구성되었다. 단장 배우리, 고재천, 권귀옥, 김동우, 김만옥 김성태, 김옥배, 김춘섭, 박명일, 박종훈, 송오섭, 오용덕, 윤흥중, 이보영, 이세은, 이승국, 이춘열, 전일곤, 정경우, 정행기, 한근수, 허훈, 홍두표, 황근오
2005년 10월 20일 소주교(부뤼기에르) 주교 현양 대미사가 오후 2시부터 성직자 묘지에서 외부 신자 등 2천여 명이 모인 가운데 봉헌되었다.
2006년 11월 16일부터 5일간 본당 일치의 달 행사를 하였다. 첫날 말씀의 날, 둘쨋날 부부축복의 날, 셋째날 작은 음악회, 넷쨋날 잔치 국수 나눔, 다섯쨋날 연도 경연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