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을 먼저 보내고 올레 걷기를 이어간다.
오늘은 19코스.
조천만세동산에서 김녕서포구까지 19.4km.
모처럼 햇님이 고개를 내밀고 바람도 잦아 들었다.
날씨의 컨디션은 최상.
조천 만세동산의 추모탑을 바라보며 걷는다.
바닷가에 이르기까지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는 쉽지 않은 길이다.
조심스럽게 흙길을 밟으려 애쓰며 걷지만 시멘트의 방어벽은 철통같다.
덕분에 파아란 바다를 만나게 되는 순간 기쁨이 배가 된다.
바다에는 어제까지 강한 바람으로 묶여 있던 배들이 출항하고 있다.
제주의 울돌목이라는 관곶을 지나 바당길을 걷다 보면 적의 침입을 막 위해 쌓아놓은 환해장성이 보인다.
신흥리 백사장에서 바라보니 열 명 남짓의 해녀들이 물질을 하고 있다.
신흥리 마을에는 재미난 곳이 많다.
볼레낭 할망당은 남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여신당이고,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바닷가 양쪽에 세워놓은 양탑과 음탑의 방사탑도 보인다.
용천수에서 물을 받아 올리고 있는 청소 차량이 보여 들어가 봤더니 손바닥만한 물고기 여러 마리가 헤엄을 치고 있다.
숭어가 대부분이고 우럭도 있다. 용천수가 바다로 흘러 가는데 그 길을 따라 물고기들이 들고 난단다.
옆에 놓인 뜰채를 들어 고기를 낚는 남편.
아슬아슬 잡는가 싶더니 물고기가 폴짝 뛰어 올라 도망친다.
무척이나 재미난 풍경이다.
농로를 지나다 보니 뼈대만 세워 놓은 하우스에 집게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밭이 보인다.
농부님께 물어 보니 단호박 잎들이 자라면 썩지 않게 하기 위해 집게로 잡아 주어야 한단다.
농사를 짓는 일에는 꽤나 섬세한 손길들이 필요하지 싶다.
함덕해수욕장이 보인다.
한적한 길을 걷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을 만나니 얼른 건너 뛰고 싶은가 보다. 남편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사람들 발길이 뜸하던 서우봉 자락에도 꽤 많은 이들이 보인다. 올라가 보니 제대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오르는 길을 편하게 닦아 놓고 둘레길, 숲길, 올레길도 반듯하게 정비해 놓았다.
서우봉에서 바라보는 물빛은 아름답기 그지 없다. 조금은 힘겹더라도 이런 풍경은 올라서 마주해야 한다.
서우봉에는 일본 놈들이 남기고 간 깊은 상흔이 남아 있다.
제주도민에게 강제 노역을 시켜가며 전쟁을 대비해 만든 동굴진지들이 해변에 8기가 놓여져 있단다.
북촌리 사람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너븐숭이를 만난다.
기념관에 들어가 둘러보니 기막힌 역사가 펼쳐져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토벌대의 총탄에 목숨을 잃고 북촌리는 남자를 찾아볼 수 없는 무남촌이 되었단다.
대체로 총살당한 곳이 북촌리 근처 밭이다.
얼마나 황망했을거나. 밭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했다니.
뼈가 시리도록 깊은 아픔이 내내 남아있을 수밖에 없겠구나.
너분숭이에는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유족들을 위로한 비가 세워져 있고, 순이삼촌을 쓴 현기영작가의 문학비들이 즐비하게 놓여 있다.
그 중 하나, 남편이 2004년 종교인들과 함께 스러져간 이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을 위로해 세운 추모비도 있다. 그 당시에는 버려진 땅처럼 아무것도 없이 허허로웠단다.
뒤늦게나마 그들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지고 진실들이 밝혀지고 있으니 정말 다행스런 일이다.
북촌포구 등명대 옆에 있는 식당에서 출출해진 배를 채운다.
해물뚝배기와 회덮밥에 먹을거리가 풍성하게 얹어져 있다. 방어 좋아하는 남편 위해 만 원하는 방어 튀김도 시켰는데 먹지 아니함만 못하다. 방어가 모두 통하는 건 아닌가 봐.
바다를 벗어나 마을길을 돌아 도로변을 걷는다. 에공, 차들 씽씽 달리며 발걸음을 고달프게 하던 산티아고 길자락이 생각난다. 이건 아닌데...
한참을 도로변과 시멘트길을 걷다 지루해질 쯤 솔숲을 지나고 벌러진 동산길을 만난다.
아하, 여기를 걷게 하기 위한 인내의 시간이었구나.
두 마을이 갈라지는 곳, 넓은 바위가 번개에 맞아 벌어진 곳이라 하여 벌러진 동산이라 한단다.
다양한 종들의 나무들이 심어져 있고 나무들 사이로 커다란 풍차들이 보인다. 알고 보니 풍력 발전 단지가 주변에 함께 위치해 있다.
13호기는 길 가운데 턱하니 놓여 있다. 옛길이 남아있는 참 아름다운 길이다.
좌우로 밭들이 돌담으로 경계를 이루는 김녕 농로를 지나면 어느새 마을이 보이고 올레의 끝지점이 나타난다.
시멘트와 도로변의 차들로 잠시 고달팠지만 제주 4.3의 아픔을 돌아보고 죽은 자는 산 자를 구한다는 한강 작가의 말처럼 각성의 시간을 갖게 되었던 의미있는 길이었다.
첫댓글 남편이 2004년 종교인들과 함께 스러져간 이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을 위로해 세운 추모비가
왜 저렇게 바닥에 널부러져 있나요. 당초부터 뉘어 놓은 추모비인가요.
K자를 닮은 자주색 표식과 K자를 뒤집어 놓은 하늘색 표식은 무엇인가요.
뉘어있는 비는 현기영 작가의 문학비이고 끝쪽 네모난 검은 비석이에요.
올레 화살표 표시를 멋스럽게 하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