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비인간이 갈리는 지점이 있다. 말이 통하니까 인간이다. 인간에게는 말을 해야 하는 사정이 있다. 약속된 변화가 없다면 언어는 필요없다. 변화가 약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약속을 어떻게 알아내는가다. 자연의 약속은 관성력이다. 사회의 약속은 권력이다. 인간의 약속은 신이다.
에너지 입력 대 출력
인간 대 유인원
음악 대 뽕짝
미술 대 이발소 그림
근대소설 대 천일야화
시 대 지하철 시
영화의 서스펜스, 스릴러, 서프라이즈, 스펙타클 대 주제의식, 감동, 교훈, 성찰, 진정성, 신파
이들은 한번 갈리면 영원히 다시 만나지 않는다. 신중하게 길을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관성력이 걸려 있으므로 궤도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관성력은 톱니가 맞물려 돌아간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한 방향으로 계속 가게 된다.
인간은 문명의 진보라는 형태로 관성력이 걸려 있고 유인원은 그냥 머물러 있다. 관성력이 걸려 있으므로 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게 된다. 입구에서 출구를 예상할 수 있다. 그것이 약속이다.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것.
뭔가 주려고 하면 인간이고 받으려고 하면 유인원이다. 문명은 관성력을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전달하려면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강해야 한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진보할 수 밖에 없다. 다음 세대에 전달하여 주는 것이 없이 받기만 하면 에너지가 단절된다.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없고 연결할 수 없다. 관성력은 소멸한다.
권력을 행사할 것인가 이득을 챙길 것인가. 만나려고 할 것인가 보호받으려고 할 것인가? 주는 자는 받는 자를 이겨야 한다. 높은 위치에서 낮은 위치로 줄 수 있다. 관성력 때문에 역방향 전달은 불가능하다. 줄 수 있는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이 군자다. 받을 수 있는 위치에 가 있는 사람이 소인이다.
방향전환이 안 된다. 그것이 우주의 본질이다. 관성력이 걸린 궤도 안에서 포지션을 바꿀 수 없다.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변신할 수 없다. 그 반대는 가능하다. 군자의 길을 가다가 소인으로 떨어지는 수는 있어도 소인의 길을 가다가 군자의 길로 올라서는 수는 없다.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막혀 있다.
세상은 깔때기다. 입구로 들어가면 출구로 나온다. 깔때기 내부에는 관성이라는 이름의 압력이 걸려 있다. 깔때기 안에서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들어간 문으로 돌아나오지 못한다. 애초에 올바른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떻게 들어가는 입구를 찾을 것인가? 그것은 만남의 형태로만 가능하다.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안과 밖의 차이다. 안에는 관성력이 걸려 있다. 에너지에 의해 지배된다. 미끄러져 들어갈 뿐 의사결정이 없다. 발견될 뿐 조립되지 않는다.
영화의 서스펜스, 스릴러, 서프라이즈, 스펙타클은 이미지 안에서 나온다. 주제의식, 감동, 교훈, 성찰, 진정성, 신파 따위는 감독의 의도에 의해 외부에서 주입되는 것이다. 안으로 가면 진리의 길이요, 밖으로 가면 엔트로피 증가다. 구조는 용감하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발소그림은 행복감을 준다. 무언가를 받아서 티켓값을 보상받으려고 하는 관객들의 기호에 영합한다. 영화가 감동과 교훈을 주려고 하면 예술이 아니다. 진짜는 안에서 발견한다. 경험한 적 없는 새로운 각도, 새로운 느낌, 새로운 충격에 전율하게 된다. 거기에 권력이 있다.
새로운 것은 모방되고 복제되기 때문이다. 모방되어야 진짜다. 홍상수는 장뤽 고다르를 베끼고 김기덕은 히치코크를 베낀다. 타란티노는 둘 다 베낀다. 하나의 복제가 또다른 복제를 낳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결하여 긴 맥놀이를 만들어가는 그것이 예술이다. 그 안에 관성력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안에서 답이 나와야 한다.
좌파와 우파의 밥통들은 외부에서 무언가를 주입한다. 좌파는 환경, 소수자, PC정책 따위 정치적 이슈를 영화에 주입한다. 우파는 감동, 눈물, 신파로 티켓값을 건지려고 한다. 영화 외부의 요소를 끌고 들어가는 것이다. 똥이다. 이들 쓰레기와 결별하고 진리의 길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건 안에서 방향전환이 안 되므로 만날 것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므로 만나지 못하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음에도 때와 장소를 가리므로 만나게 된다. 만날 수 있는 위치에 가서 타이밍을 재고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신이다
본질을 보려면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냥 아무말 대잔치는 의미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로또 1등 당첨시켜 주겠다는 말처럼 하나마나한 말이 된다. 짐 캐리 영화에 나오지만. 브루스 올마이티. 인간에게는 듣기 좋은 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진실이 필요하다.
본질은 권력이다. 구조론으로는 이기는 힘이다. 인류가 처음 권력을 발명하고 거기에 붙일 이름이 없어서 신이라고 둘러댄 것이다. 권력은 힘이 있지만 그 힘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후 보이지 않는 힘을 신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게 궁극적으로는 관성력이다.
권력은 부족의 결속에 의해 탄생한다. 부족을 결속시키는 구심점을 할배로 정하고 신이라고 명명한게 이 논의의 시작이다. 모계사회는 신이 없다. 씨족단위로 생활하고 부족이 결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계사회로 와서 사촌이 한집에 살면서 게임은 시작된다.
신 = 권력과 동의어
유일신 = 절대권력과 동의어
어느 시점에 왕이 등장하고 권력이 점점 강해져서 기어코 왕중왕까지 가버리더니 유일신이 탄생한다. 유일신은 왕중왕의 절대권력을 설명하는 언술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끌려가서 키루스 2세를 만나고 메시아, 예언자, 절대자 개념을 수입한 것이다.
아이는 권력이 없으므로 신이 아니고 어른은 권력을 사용하면 권력이 소멸하므로 내가 신이라고 말하는 순간 신이 아니게 된다. 권력은 족장에게 의사결정을 위임한 것이다. 투자자의 돈을 오너가 횡령하는 것과 같다. 오너가 회사를 사유화한다 배임의 범죄다.
권력은 사회의 공적자산이므로 사유화할 수 없다. 내가 신이라는 말은 권력을 사유화하겠다는 말이다. 인간이 권력을 인식할 수는 있어도 휘두를 수는 없다. 인간이 신일 수는 있으나 신 노릇을 할 수는 없다. 권력의 형성에 참여할 수 있으나 행사할 수는 없다.
투자자가 자본을 경영인에게 위탁할 수 있으나 경영에 간섭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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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는 집단 속에서 성립하는 개념이다. 집단의 대표성이 있다. 자유의지는 권력과 이익 중에서 이익을 포기하고 권력을 지키는 것이다. 이익에 충실하면 자유의지가 없다. 권력을 위해 이익을 양보할 수 있으므로 자유의지가 있다. 권력을 사용할 수 없다.
엄마가 아기에게 이익을 양보하므로 엄마에게 권력이 있다. 엄마가 권력을 휘둘러 아기의 몫을 빼앗는 순간 아기는 독립한다. 엄마의 권력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권력은 그냥 있기만 해도 이익이다. 권력자가 있으면 사회에 질서가 생기고 범죄가 사라진다.
은행이 신용을 그냥 갖고 있는 것과 같다. 은행에 신용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인에게 이익이 된다. 신용을 빼돌려서 딴짓을 하면 시스템은 붕괴한다. 도로가 있으므로 차가 다닌다. 도로를 막고 돈을 받으면 차가 오지 않는다. 이익을 탐하지 않으므로 이익이다.
틀린 자유의지 - 인간이 맘(동물적 본능)대로 한다.
바른 자유의지 - 인간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다르마를 따른다.
인간이 맘대로 하는 것은 동물적 반응이지 자유의지가 아니고 맘대로 할 수 있지만 맘대로 하지 않는 게 자유의지다. 자유의지란 인간이 동물적 본능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약속을 지키고 참는 것이 자유의지다. 그러려면 더 큰 게임과 계획이 있어야만 한다.
1. 신 = 권력 = 이기는 힘에 의한 만유의 연결과 복제는 우주의 탄생원리이자 인간사회의 작동원리다.
2. 인간이 권력을 인식하고 권력의 형성에 기여할 수는 있으나 권력을 사적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3. 자유의지는 맘대로 한다는 뜻이지만 맘대로 하는 것은 본능에 의한 기계적 반응이고 다르마를 따르는 것이 자유의지다.
권력은 이기는 힘이다. 이기려면 게임이 붙어야 한다. 게임을 개설하는 것이 자유의지다. 역사의 편, 진리의 편, 문명의 편, 진보의 편에 서는 것이 자유의지다. 존재는 깔때기다. 내가 들어갈 깔때기를 선택하는 것이 자유의지다. 깔때기 속으로 들어가면 끝이다.
우리가 신이다 = 우리가 권력 형성에 기여한다.
내가 신이다 = 내가 대표하여 의사결정할 찬스가 올 가능성이 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이러한 연결원리, 복제원리, 위임원리에 의해 일원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다.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쉽게 말하면 신은 공이다. 사는 공의 형성에 기여할 수 있으나 공을 침범할 수 없다. 누구든 공적 대표가 될 수는 있다.
그러려면 타이밍을 맞추어 그 위치에 가 있어야 한다. 그 게임에 가담해야 한다. 인간은 게임을 개설할 수 있다. 위임받은 에너지의 흐름을 컨트롤하여 능동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