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선 시인
2016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집으로 『목력』, 『개가 물어뜯은 시집』이 있다.
<김만중문학사> 신인상, <정음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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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지 않을수록 아픈그리움“
2016년 <매일신문>으로 등단한 조경선 시인의 세 번째 시집『어때요 이런 고요』가 시인수첩 시인선 88번째로 출간되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처럼, 시인은 나무로 향하고 나무로 기울어지며 또한 나무와 함께 삶을 나누는 ‘목수시인’이다. “지금도 시를 쓰듯 나무를 앞에 놓고 대패질을 한다. 껍질을 벗겨내고 기둥을 골라낸다. 한나절의 무릎들이 쉼터에서 내뱉는 말은 모두 한결같다”는 시인의 말처럼, 그의 문장은 나무들의 싱그럽고 부드러운 살랑거림과 무척 닮아 있다.
목수로서의 그의 이력이 증명하는 바와 같이, 그의 시는 장인(匠人)의 섬세하고 정교하며 투박한 결을 내장하고 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의 모국어는 ‘짓다’라는 동사의 파생어로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문학이 ‘상상하다’를 언어로 구현하고 있듯이, 조경선 시인에게 시는 한 채의 ‘집’을 짓는 과정으로서 충분히 대칭된다.
상당히 매혹적인 작품, 「손 타는 것이 좋다」는 이러한 사태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잊히는 목문(木門)에도 / 안부가 묻었는지 // 사람들 손 높이에 얼룩이 모여 있다 // 고택의 무거움일까/ 과거를 붙잡는 걸까 // 바람을 잡느라 / 햇살에 닳고 닳은 문 // 손때는 앞을 몰라 끝과 시작을 삭일 때 // 흔적은 끌 손잡이와 / 망치 자루 추궁한다 // 나도 모르게 붙잡는 / 오래된 나무 기둥 // 산 자와 죽은 자가 한 겹씩 옷을 벗는다 // 맨 처음 손을 탄 목문이 / 경첩을 슬쩍 당긴다(「손 타는 것이 좋다」). 때문에 대상과의 밀착과 소통을 위한 집중과 거리두기ㅡ이것이 우리가 시인에게서 느낄 수 있는 최초의 공감각이다. 그의 생활과 실존에 박혀 있는 대상을 바라보고 촉감하며 냄새 맡고 그 은밀한 울림을 듣는 태도는 시가 설계되고 지어지며 완성되는 모든 과정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시인은 “조심스러운 네 앞에서 / 매번 주춤거렸다 // 안쪽과 바깥쪽은 / 뒤꿈치가 우글거렸고 // 분명히 열려 있는데 닫혀 있는 이승처럼 // 돌고 도는 미래는 / 잡아 봐도 미끄러져 // 수많은 발자국이 / 쉴 새 없이 돋아났다 // 투명을 앞에 놓고서 쩔쩔매는 종종걸음 // 네 중심은 확고한데 / 나는 자꾸 튕겨 나가 // 발 빠른 아침이 / 우리를 잡아둘 때 //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방식이 무서웠다”(「회전문」)라고 노래하는데, 집 짓는 일이 그러한 것처럼 시를 짓는 일도 마찬가지임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아울러 조경선 시인의 모국어는 드물게도 ‘구성’이라는 방법으로 직조되고 있다. 이것이 흔치 않은 것은, 우선 언어가 한 인간의 의식을 통할(統轄)하는 것처럼 보여도 종국에는 수면 아래 잠겨 천천히 유동하는 빙하의 생존 그대로 주체의 무의식이 ‘언어’를 밀어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에서 문장이 생산되는 방식은 자동 기술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조경선 시인은 이 ‘보이지 않는 손’을 자아의 등고선에 두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그 성공 여부와 관계 없이 그에게 자주 보이는 2행-문장의 안정적 형식미의 근거로 작용한다. 이를 테면,
숨구멍 손 뗄 때마다
쏟아내는 울음들
한 번 품은 생각은 물결 따라 퍼져나가
갇혔던 감정을 풀어 몸 낮춰 번집니다
ㅡ「연적」부분
대부분의 삽들은 걸려 있거나 세워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허리를 잡는 사이
내 속을 밀고 들어와
꽂혀 있는 아버지
ㅡ「삽의 근거」부분
와 같은 시들이 그 좋은 예다. 이들 시는 나무들이 집의 바탕이 되고, 그 살과 뼈로 고양되는 순간의 정형성을 띠고 있는데, 시인은 이를 변주하면서 나름대로 독특한 설계를 완성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2행의 문장을 반복하다가 그 규칙을 위반하며 1행을 한 연으로 만들기도 한다. “돌아온 먼 길을 / 타면 탈수록 제자리 // 재가 된 몸이 뒤틀려 의자에 있는 나처럼 // 바닥에 떨어진 너는 / 고스란히 나를 닮았다”(「타면 탈수록」) 이러한 형식은 묘하게도 시집 전체를 안정시키는 동시에 일종의 파격으로서 리듬을 돌출시킨다. 물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대상에 대한 ‘집중’과 ‘거리두기’ 때문이다.
조경선 시집을 읽으면 알게 되겠지만, 그의 모국어가 향한 우리의 내면과 그 까마득한 무의식에 다가가게 된다. 그는 이러한 순간을, 한 채의 집이 완성되어 세계 속에 또 하나의 세계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발견한다. “외딴집에 홀로 앉아 / 아궁이에 불을 넣는다 / 낯익은 발자국보다 먼 소리가 먼저 들려 / 일몰은 남아 있는데 / 고요만 타들어 간다”(「어때요 이런 고요」)라는, 생활과 실존의 가장 가깝고도 먼 ‘헤테로토피아’의 시간과 장소들이다. 요컨대 우리가 우리 삶에서 가장 환하게 밝혀지는 모국어의 별빛이다.
보도 자료 미니 인터뷰 / 조경선
1, 주제와 이야기의 방향은?
도시를 벗어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담을 것도 꺼낼 것도 없는 시간이어서 있는 그대로를 쓰기로 했다. 목소리는 낮추고 내 몸을 꾹 눌러 내 주변이 펴진다면 좋겠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 마을입구에 쓰러져 썩어가는 장승을 본다. 몸은 문드러졌는데 웃음은 그대로다. 저렇게 웃음을 짓기 위해 얼마나 속을 비웠을까? 나직한 몸짓으로 기다렸을 저 나무처럼 안목을 쓰기로 했다. 많은 다짐들이 버려지고 또 생겨났다. 시골이 그렇다. 혼자서 걷는 길은 발맞춤이 필요 없지만 늘 먼 길을 시간과 맞춰 돌아간다. 의지와 몸이 따로 노는 밭농사가 그렇다. 요즘 자고 나면 풀이 자란다. 풀의 생존 방법은 제 몸을 끊어내는 일이다. 그들은 피를 흘렸고, 나는 풀물이 들었다. 그렇게 가장 먼저 내 몸에 와 있는 것부터 썼다. 내 안의 사물과도 호흡 못하면서 무슨 바깥을 쓸 것인가. 고민스러웠다. 안목을 손끝에 맡겨 보기로 했다. 나만 즐거운 글은 뒤로 밀려났다. 독자를 위한 짧은 글을 4음보로 읽기 좋게 정리했다.
2,이번 시집의 특징은?
마당 의자에 사람보다 새가 먼저 와 앉는다. 빈 의자에 오래된 생각을 쓴다. 이번 시집은 <어때요 이런 고요>를 차분히 정리한 시집이다. 여기부터 시작이라고 마음먹고 써도 자연을 벗어나지 못했다. 고요 속에서 발견한 생활이 담긴 서정시다. 대문 앞에 장화가 졸고 있고 먹다 버린 음식을 한 곳에 놔두면 새들은 잔치집이 된다. 눈이 오면 길이 막혀 눈사람과 이야기한다. 쓸쓸한 곳 들춰낼 때 나를 제일 먼저 훔쳐보는 건 산고양이다. 그 흔한 이별도 없다. 돌아오는 발자국은 겨우 내 발자국이다. 이번 시집은 한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쓴 시집이다. 손을 많이 탄 흔적들이 쓰여 졌고, 잘난 사람 못난 사람도 흙을 짓다 흙에게 돌아간다는 걸 몸소 체험한다. 아픔마저 정갈한 곳, 대답은 허공에 걸려 외딴집이 웃고 있는 곳에서 고요를 놀이터 삼아 쓴 시집이다. 흩어져 있는 제목들이 흉터로 남아도 어쩔 수 없다. 한 줄로 줄이지 못한 말들이 아쉬울 뿐이다.
3. 나는 어떤 시인인가?
나무를 사랑하다보니 목수가 되어 집을 짓다가 목수 시인이 되었다.
남들보다 다소 늦은 나이에 시를 썼다. <어때요 이런 고요>는 3번째 시집이다.
나무를 다루다보면 불가능과 가능을 쉴 새 없이 다듬는다. 하루를 살기위해 비 오는 날을 싫어한 적도 있다. 나이를 불러놓고 가능을 태우다가 자주 넘어지기도 했다. 지금도 시를 쓰듯 나무를 앞에 놓고 대패질을 한다. 껍질을 벗겨내고 기둥을 골라낸다. 한나절의 무릎들이 쉼터에서 내뱉는 말은 모두 한결같다. "자! 시작하자" 였다. 아련한 얼굴이다. 별반 다를 게 없는 시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다. 잘라내고 한 줄을 쓰듯 먹줄을 넣는다. 집 한 채 지어져도 비수가 되어 돌아오는 문장이 많았다. 하루를 어루만져 창문을 단다. 뒤틀리고 틀어진 생각을 짜 맞춘다. 문이 편안이 열리고 편안히 닫힐 때 바람이 얼굴에 닿는다.
나는 어떤 시인인가? 대문의 빗장을 열어 놓는다. 독자가 올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