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글은 너무나 친절합니다. 그러나 지두의 글을 올리게 되면 언제나 주석을 달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려서는 단전호흡을 하다가 명상쪽으로 돌아선 것이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의 책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라는 책을 읽고 나서였습니다. 제가 당시 지두의 글을 읽으면서 받았던 충격을 당신도 받을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현존체험(experiencing)...J.크리슈나무르티
계곡은 그늘 속에 잠겨 있었으며, 지는 태양이 먼 산꼭대기들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산꼭대기의 타오르는 빛깔은 산의 내부로부터 오는 듯 했다. 긴 도로의 북쪽으로는 산들이 벌거벗고 황폐화되어 있었으며, 화재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내고 있었고, 남쪽의 언덕들은 관목과 나무들로 푸르고 울창했다. 길은 똑바로 뻗어 있었으며, 길고 우아한 계곡을 가르며 뻗어 있었다. 이 특별한 저녁에 산들은 가깝고, 비실제적이며, 밝고 부드러워 보였다.
큰 새들이 하늘 높이 힘들이지 않고 선회하고 있었다. 땅 다람쥐들이 게으르게 길을 가로질러 가고 멀리서 윙윙거리는 비행기 소음이 들렸다. 길 양쪽에는 잘 정돈되어 관리되고 있는 오렌지 농장들이 있었다. 뜨거운 한낮이 지나면, 자주색 세이지 향료 냄새가 매우 강하게 났으며, 태양에 그을린 대지와 건초 냄새가 났다. 오렌지 나무는 밝은 과실로 인해 어둡게 보였다. 메추라기가 서로를 부르고, 로드러너-뻐꾸기의 일종-가 숲 속으로 사라졌다. 개로 인해 방해를 받은 기다란 도마뱀이 마른 잡초더미 속으로 꿈틀거리며 사라져 갔다. 저녁의 적막함이 땅 위를 기어가고 있었다.
'경험(experience)'과 '현존체험-경험하고 있음(experiencing)'은 전혀 다른 것이다. 경험은 현존체험 상태에 대한 장벽이다. 그러나 경험이 유쾌하던 고통스럽던 그 경험은 현존체험의 꽃 피어남을 방해한다. 경험은 이미 시간의 그물에 있으며, 이미 과거이고 현재에 반응함으로써만 삶이 되는 기억이다, 삶은 현재이지 경험이 아니다. 경험의 무게와 힘은 현재에 그늘을 드리우고, 그래서 현존체험은 지나간 경험이 되는 것이다. 마음은 지나간 경험, 알려진 것으로서 결코 현존체험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경험하는 것은 경험의 연속성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연속성만을 알며, 그 연속성이 존재하는 한 마음은 결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계속되는 것은 결코 진행중인 현존체험의 상태에 있을 수 없다. 경험은 현존체험의 수단이 아니다. 그것은 경험이 없는 상태이다. 경험은 현존체험을 위해 멈춰져야 한다.
마음은 자기투사와 알려진 것만을 불러올 수 있다. 마음이 경험을 멈출 때까지 미지에 대한 경험은 있을 수 없다. 생각은 경험의 표현이다. 생각은 기억의 반응이다. 그러므로 생각이 개입하는 한 현존체험은 없다. 경험을 종식시키는 수단도 없으며, 방법도 없다. 왜냐하면, 바로 그 수단이 현존체험의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결말을 안다는 것은 연속성을 안다는 것이며, 결말을 향한 수단을 가진다는 것은 알려진 것을 유지하는 것이다. 성취를 위한 욕망은 사라져야 한다. 수단과 결말을 창조하는 것이 이 욕망이다. 겸손은 현존체험에 필수적이다. 그러나 마음은 현존체험을 경험 속으로 흡수하기를 얼마나 갈망하는가 ! 마음은 새로운 것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드는데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가 ! 그래서 마음은 경험하는 자와 경험 대상을 만들어 내고, 이중성의 충돌을 만들어 낸다.
현존체험(experiencing)에는 경험자도 경험대상도 없다. 나무, 개, 저녁별은 경험자에 의해 경험되지 않는다. 그들은 바로 현존체험의 운동이다.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의 갭은 없다. 생각이 자신을 확인하는 시간도 공간상의 간격도 없다. 생각은 전혀 부재하며, 존재만이 있을 뿐이다. 이 존재의 상태는 생각되거나 명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성취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경험자는 경험을 멈추어야만 하며, 그때만이 존재가 있다. 존재의 운동의 고요 속에 영원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