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시간과 사물의 좋은 만남
이 탄
( 시인.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김송배 시인의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를 거듭 읽어 보았다. 처음에는 제목이 말하고 있듯 양심적이고 밝은 시간이니까 그저 좋은 시집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다시 읽으니 건강한 시간이 되기 위한 지성의 몸부림이 여기저기에 있었다.
늦은 밤, 참으로 섭세의 아픔이다
어제는 불혹이었다가 오늘은 지천명일지라도
지금, 누군가 이렇게 일러준 만큼
시간의 무게는 지독히도 주름살로만 쌓였다
― 형체없는 그림자, 우리는 부재를 향한 우수에 떨고 있다.
― 「시간에 대하여․2」 에서
‘부재를 향한 우수에 떨고 있다’는 사실은 먼 태초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부재’는 문학적 공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떨고 있다’는 현실의 시간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간을 두 갈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다음 시를 읽어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1998년 7월 29일 새벽
가슴 철렁한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고
시간은 먼동으로 둥둥 떠 있었다.
죽음의 순간
그래도 시간은
멈춘 시계를 멀리 피해 가고 있었다
― 「시간에 대하여․4」 에서
형님의 부음이 알려진 시간은 이제 가는 시간도 오는 시간도 아닌 둥둥 떠있는 시간이다. 움직임이란 인간이 무엇을 하는 시간이다. 그렇건만 둥둥 떠 있는 시간은 멈춘 시계를 연상시킨다. 어떤 경험에 의해 형님의 시간이 문학적 시간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도 현실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시간과 흐르지 않는 시간을 김송배 시인은 이와 같이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은 한 가지 시간 속에서도 희로애락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시작(詩作)할 때 시인의 이중고가 잘 드러나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시계의 노예가 되었다고도 한다. 이때 시계는 시간을 가르치는 것이 된다. 서구에서는 ‘시간은 무엇이냐’는 질문 아래 많은 학자가 매달려 있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문학과 시간 또 시간성에 대해서도 많은 질의와 답을 내놓기도 했다. 오늘날은 시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무게는 지독하고 주름살로 쌓였다’와 같은 표현을 해도 독자들은 쉽게 그 뜻을 헤아릴 수 있다. 하루는 24시간이지만 누구에게나 똑같은 길이와 무게가 될 수 없다. 시간을 소화시키지 못한 사람에는 시간이 재미있게 흐르는 것이 아니고 주름살로 쌓이는 것이다. 이것은 시간의 감각이다. 경험이나 느낌 같은 것을 표현할 때 이와 같이 변이된 상태의 표현을 쓸 수 있다. 그러나 왜 이런 상태의 표현이 되었는지 쉽게 말하기는 어렵다. 즉 정보 또는 구성적 사고를 말하기에는 어려운 것이다. 궁색하지만 그저 시간이 생리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앞에서 시간을 공간성과 현실성으로 나누어 보았는데 그 즉각적인 판단에 따른 대답으로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한 가지를 더 첨부함으로써 시간에 대한 답이 나오리라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진화성’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느 학자들이 말하는 시간의 진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보다 미래로 탈바꿈되는 인간자체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
순종과 반항 사이
전쟁과 평화 사이
신의와 배신 사이
사랑과 별리 사이
혼돈과 정돈 사이
과거, 현재, 미래 그 사이에서 그렇게
―나는 비로소 말문을 닫았다.
― 「시간에 대하여․12」 에서
말문을 닫았으므로 그 이상을 꼼꼼히 알기는 어려우나 과거, 현재, 미래를 놓고 분석해보면 어렴풋이 전해오는 것이 있다. 여기 열거된 명사들을 점검해 보고 그것들의 상황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확인해 보면 진한 낱말들이라는 것이다. 현재까지 그렇게 독한 냄새를 피운 낱말들이 당장 순해지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것은 분명 밝음을 찾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앞에서 보면 ‘달무리 속에 감춰진 별’ 또 ‘유형(流刑)을 잘도 참아’ 내는 것이며 인류의 혼돈 속에 살아가는 유형과 자연을 그려내고 있다. 그 뒤가 바로 인용한 구절인데 독한 명사를 나열한 뒤 ‘미래’를 ‘그렇게’ 되기 바라는 것이다. 태양과 시간을 내일까지 어둡게 놓아 둘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송배 시인의 시는 ‘시간’을 놓고 그 아래서 판단을 계속한다. 시간은 그에게 인격이며 삶의 터전이다. 그러므로 그는 완전히 성숙한 모더니즘(3기)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시간에 쫓기고 또 시간에 늦으면서도 시간의 갈기를 잡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김송배 시인은 파보면 파내려 갈수록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을 분석함으로써 시를 높은 경지에 올려놓은 셈이다. 즉 공간성․현실성․진화성의 3가지로 보면서 시작을 튼튼히 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에 대하여」와 함께 볼 수 있는 시가 ‘억새꽃 따라’ 편에 나오는 「응시」라는 10편의 시다.
시간을 굳건히 하고 「응시」를 쓴 것인지 「응시」를 쓰고 「시간에 대하여」를 쓴 것인지 그 선후를 모른다. 그러나 앞에 썼든 뒤에 썼든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응시․1」 전부를 실어서 음미하도록 하자.
무심코
바라보았던 그 눈동자
불현듯
내게 으스러지도록 안겨
이 세상 가장 향기 짙은 꽃이 되고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이 되고
그러다가 밤이슬길로
다시 찾아와
내 가슴 어느 곳에 가득 머물렀다
결 고운 선율
영혼의 교감이
더러는
아픔이 무엇인지도 귀뜸해 주고
요즘 같은 이상기온에도 적응하며
살아가는 방법도 일러 주었다
지금까지 그냥 바라보았던 너
이만큼 낡아 버린 내 심연
어디쯤
그래도 소록소록 숨소리 더욱 정겨운데
온 천지 가득 영롱한 무지개
그가 일러 준 詩 한 구절
결코 지울 수 없는 사랑의 노래.
― 「응시․1」 전문
‘내게 으스러지도록 안겨’에서 ‘내게’는 의미가 없던지 시간성을 말해주는 것으로 보았다. 어떤 행위가 일어날 때 은연히 시간이 관계되기 때문이다. 눈 한번 깜빡하는 것 1초가 지나간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행해진다. ‘향기 짙은 꽃’, ‘산들바람에 일렁이는 물결’은 으스러지게 안겨 ‘내 가슴’에 선율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가슴 속에 안겼으니 할 일은 뻔하다. 살아가는 방법을 이야기해주고, 시를 쓰는 방법을 이야기해 준다. 정겨운 일이다. 시간 속에서 피어나는 꽃은 한 시인의 가슴 속에서 가장 귀한 시를 빚어주는 것이다. 거듭 이야기했지만 시간과 사물의 좋은 만남이다. 사실은 이러한 만남을 위하여 오랫동안 기다리고 쓰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혼의 교감이 / 더러는’ 같은 구절은 단순히 시간의 현실감만 가지고 설명하기는 좀 부족하다. 왜냐하면 영혼이 지닌 뜻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 때문이다. 영혼이란 낱말은 다음과 같이 이희승 국어사전에 나타나 있다.
영혼(英魂) ①훌륭한 사람의 혼 ②죽은 이의 혼의 경칭
영혼(靈魂) ①죽은 사람의 넋. 정혼(精魂). 혼령(魂靈) ②[불교] 사람의 모든 정신적 활동의 본원이 되는 실체(實體). 영가(靈駕). 영각(靈覺) ③[천주교] 신령하여 불사불멸 하는 정신. 영신(靈神). ①②:↔육체
여기서 어느 항목의 영혼을 썼는가 하는 것이 궁금하게 된다. ②나 ③을 썼음직하다. 그런데 ①,②의 반대되는 말이 곧 육체이다. 이렇게 되니 더 아리송해진다. 모르긴 해도 ②,③을 썼고 육체의 반대되는 말인 ②를 썼음직하다. 그런데 ③에 해당되는 반대말이 없다. 그러므로 무시간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무시간, 또는 비시간은 무엇인가. 물리학이 아닌 민간에서는 종교성을 띈 것이기도 하다. 앞에서 ‘부재’를 넣은 시구가 있었는데 질서의 부재 같은 것이 무시간의 시작이라면 좋을 것이다. “종교적 명상이나 춤, 약물적 도취와 결합되는 황홀상태를 의미한다. 무시간적 경험들의 여러 모습들은 상대적으로 개별적 동일성의 상실과 전능(omnipotence)감각에 의하여 현실되는 ‘무분별적인 자아’로의 퇴각을 의미한다.”(이승훈, 『문학과 시간』 이우출판사, p. 44) 잠자다 꾸는 꿈속에서 무시간 또는 비시간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무시간을 ‘영혼’에 쓴 것이며 영혼은 살아있는 영혼을 쓴 것이다.
시간과 결부되는 부분부분을 이야기했다. 시를 이야기하는 자리인 만큼 이 정도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시가 어떻게 시간과 관계가 있는가 하는 점은 시가 무엇을 하려하는가와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김송배 시인은 이점을 분명히 아는 시인이다.
어느 날 그는 조용한 별빛이었다
겨우 부지한 산골 초가의 생명
―쟁기 써레 괭이 수군포 호미 낫 쇠스랑 삼태기 지게
한 떼의 구름을 갈아엎는 한 소절
밤이면 한으로 풀어지는 농군의 타령조
―결국 그는 한 점 바람이었다가
밤하늘 홀로 몸서리치는 작은 별빛이었다.
― 「각인(刻印)」 에서
아, 언제쯤 지혜의 영원을 찾을 것인가
산문(山門) 밖 개울물 속
야윈 육신 다 녹아 흘러 버린 채
어인 까닭이냐, 제 영혼만 건져 다시
아제아제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내 걸어야 할 겨울길 아직도 멀다.
―「겨울 詩 몇 편(11)-한행(寒行)」 에서
김송배 시인이 걸어간 겨울은 아직도 멀다고 했다. 마음속에 「각인」을 하고 초가의 생명을 기억하면서 걸어갈 것이다. (’99. 9.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