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차 답사 (2009.2.14)
익산의 성[城]
5) 익산 낭산산성[益山郎山山城] 전북기념물 제13호
오후 3시 20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 48번지. 상낭마을에 있는 백제시대 산성이다. 익산 지역은 5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지방 중심세력이었고, 7세기를 전후하여 금강변의 웅포 지역보다 내륙에 위치한 금마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문화의 꽃을 피웠다.
미륵산에서 북으로 약 4km 쯤 떨어진 낭산리 상낭마을 뒷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산에서는 서쪽으로 약 5km쯤 떨어져 있다. 낭산 산의 높이는 약 162m정도라 한다, 낭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인 선인봉을 돌로 두른 산성으로 전체 길이는 약 870m 정도이다. 산은 완만해서 누구나 오르기에 참 좋았다.
이 산성은 일명 구성, 마한성. 북성 으로도 불리는데 마한성이라고 하는 것은 고조선의 기준왕이 내려와서 쌓았다는 전설에 의해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지금까지 마한시대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서 마한시대에 만들었다는 근거는 없다.
다만 성 안에서 백제 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어(흙으로 빚은 그릇 조각),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고, 후세에 와서 익산 일대가 마한의 옛 도읍지였다는 점에서 마한성이라 부르게 된 것으로 추정 된다
산성의 북쪽 성곽은 2중으로 쌓은듯하며, 남쪽의 골짜기 성곽은 서천 건지산성과 같은 식으로 가운데 흙산을 두고 밖으로 석축을 쌓아 성벽을 만들었다. 산성의 북쪽은 거의 정상부에 성벽이 있고, 남쪽은 일부 골짜기를 감싸고 있다. 낭산 산성은 테뫼식 산성인데, 《익산구지(益山舊誌)》에는 석축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남쪽 부분은 석축의 흔적이 완연하게 드러나 있으나, 북쪽과 북동쪽 및 북서쪽은 이러한 석축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남쪽에 남아 있는 석축의 높이는 약 2.8m 가량이며, 대부분이 붕괴되었고, 이곳에서 2곳의 수구가 확인되었다. 성의 남동부에 50m ~ 60m 정도의 평탄대지에서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들이 있다. 이로써 이곳이 유물 지였음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문주석(門柱石) 문설주(門楔柱)를 세우기위한 문기둥 주춧돌.
이렇게 훌륭한 역사를 방치하여 흔적 마져 사라질까 두렵다. 우리 익산시가 조금만 더
관심을 갖이고 더 이상 훼손 되지 않게 관리 했으면 한다.
이곳이 상낭마을인데 저 뒤쪽으로 보이는 빨간 지붕집 앞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 정상에서 산성을 만날수 있다.
6) 금마 도토성(金馬 都土城) 기념물 제70호로 지정.
오후 4시 20분, 익산시 금마면 서고도리 상제마을. 1984년 9월 20일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이 토성은 익산시 금마면에 있으며, 익산I,C에서 시내쪽으로 들어오다 금마 검문소사거리에서 북쪽으로 약 3Km 정도에 자리하며 굿대숲 위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굿대숲토성 이라고도 한다. 이 봉우리 서쪽으로는 오금산(익산토성), 동쪽으로는
금마산이 있고, 북쪽에는 미륵산(미륵산성), 용화산(용화산성)의 줄기가 이어져 있다.
이 성은 능선으로 이어진 안부(鞍部)를, 공호(空壕)로 파서 절단하여 독립된 산봉우리에
대머리와 같이 토루(土壘)와 토단(土段)을 쌓아올린 성이다. 성의 주위는
원형에 가까운 평면인데, 남쪽 성벽 중앙부는 돌출되어 있어 이 자리에는
우루(隅壘)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이곳에 묘를 써서 원형을
알아 볼 수 없다. 동쪽 성벽은 산허리의 경사면을 파서 외루(外壘)를 쌓아 올리고,
내부에도 토루를 쌓은 흔적이 있다. 이 토성에 관한 기록으로 『익산지(益山誌)에는
저토성(猪土城)으로 나타나 있고, 강후진의 『와유기(臥遊記)』에 의하면 서쪽의
두 토성 중 하나를 이 도토성으로 보고 있다.
우린 대밭을 헤치고 겨우겨우 산성에 올랐다. 이때의 심정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성 안에서는 왕궁평성 토성내 출토와 같이 상부대관(上部大官)명의 평기와쪽과
미륵산성 내 출토와 같은 금마저성(金馬猪城)명의 기와쪽이 출토되어 미륵산성,
왕궁평성 그리고 오금산성(익산토성)과 같은 때에 이룩되었던 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제시대의 미륵사가 익산지역에 창건되었다고 하는 사실은 분명히 어떤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이 틀림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제시대의 대가람(大伽濫)의 경영은 공주(公州), 부여(夫餘)등의
수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수도권 이외에도 서산지방(瑞山地方)과 예산지방(禮山地方)에 백제시대의
불적이 발견되고 있으나 이들 유적은 규모가 큰 것이 아니라 기도처(祈禱處),
혹은 수도처(修道處)로서의 규모 가람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비하여 익산지방의
미륵사는 동양 최대의 석탑(石塔)을 자랑하는 거대한 가람을 조영하고 있다는데
주목의 대상이 되고 있다.
즉 익산지방에 그처럼 거대한 가람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익산지방을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로 삼으려한 어떤 의지가 엿보인다. 익산지역은 마한의 고도(古都)란
설(說)이 있는가하면,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亂)을 피하여 남천(南遷)한곳,
혹은 백제가 일시 천도(遷都)한 곳 등 여러 시대에 걸쳐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번 미륵사지에서 발굴된 사리장엄을 보면서 한층 더 믿음이 간다.
백제시대의 유적과 유물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으니 우선 백제 무왕의 익산천도설과
관련하여 궁성(宮城)이라 할 수 있는 성곽(城郭)이 익산 왕궁리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부 문헌자료에 마한시대의 성곽이었다고 밝히고 있고
발굴조사 결과 백제시대 궁성임이 확인되었다.
우린 오늘 아직도 산재해있는 기와 조각들을 만났다. 총무님께서 줄무늬기와
문양이 찍힌 기와들을 찾으셨다. 이런 모습들이 더욱 익산을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잘 보존해야 할 것 같다.
이 성곽 안에 오층석탑과 함께 사지(寺址)가 확인 되었는데 이 역사 발굴조사 결과
석탑의 하부에서는 목탑지로 판단되는 판축층(版築層)이 발견되었으며
관궁사(官宮寺)명의 명문와(銘紋瓦)도 출토된 바 있다.
다음으로 익산지역에서 주목되는 유적으로는 백제시대의 여러 사찰지를 들 수 있다.
미륵사지를 비롯하여 미륵사지, 사자사지, 오금사지가 백제 사찰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 외에도 삼기면 연동리 석불좌상과 태봉사(胎封寺) 석불좌상이 백제시대의
불상으로 밝혀져이곳에 백제시대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익산지역에는 여러 백제시대의 성곽들이 산재해 있는데 기준성(箕準城)으로
불려지는 미륵산성과 보덕국이 있었다고 하는 오금산성, 마한성으로 전해지는
낭산성(浪山城), 그리고 최근에 발굴조사된 저토성(猪土城)등은 대표적인 백제시대의
성곽이라고 할 수 있다.
무구한 역사가 깃든 이곳의 이끼 낀 계단과 관리가 허술한 주변환경을 보면서
조금은 씁쓸하였다.
7) 국보 11호가 있는 미륵사지에 전시된 국보급 사리장엄
오후 5시 30분, 우린 이곳에서 사리장엄 발굴에 대해 배홍선선생님의 설명을 듣고 꽉 짜여진
일정을 사고 없이 모두가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답사를 마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나누었다. 선생님들 건강한 모습으로 다음 답사때 만나요.
참고문헌
˚ 전북문화재연구원 . 익산시 . 2008년《익산 낭산산성 남문지 발굴조사 보고서》
˚ 원광대학교마한.백제문화연구소, 2001년 《익산 저토성 시굴조사 보고서》
˚ 전라북도.한서고대연구소, 2003년 《전북 고대 산성조사 보고서》
˚ 손영식, 1987년 《한국성곽의 연구》, 문화공보부 . 문화재관리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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