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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비스님 서장 대강좌 제 2-4 강
선재동자는 미륵보살이 한 번 손가락을 퉁기는 사이에 오히려 선지식으로부터 증득한 三昧(삼매)도 한순간에 잊어버렸는데 하물며 오랜 세월의 虛僞(허위)와 惡業(악업)과 習氣(습기)이겠습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삼매도 악업도 실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덕도 업장도 실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체가 다 無常(무상)이고 無我(무아)고 空(공)이고 虛無(허무)입니다.
그대로가 허무다 이겁니다. 어제 있었던 일. 지금 이 순간에 뭐가 있습니까?
어제 나의 인생은 참 소중했고, 그 나름대로 진지했고, 그 나름대로 안달하면서 살았는데 이 순간 뭐가 있습니까?
안달하던 어제 일이 뭐가 손에 잡힙니까?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의 지경. 선의 안목이라고 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만약 앞에 지은 바 잘못을 실제로 여긴다면 2-3에서 세속 생활이 “잘못 살았다.” 이렇게 표현 했는데 그것을 실제 하는 것이라고 여긴다면 지금 제가 다 이야기 해 버렸기 때문에 어제 내가 나쁜 짓 한 것이, 아니면 좋은 일 한 것이 지금 이 순간에 무엇이 손에 잡히느냐?
이것으로 이야기 다 끝났습니다만,
지금의 눈앞의 경계도 다 실제로 여길 것이며, 관직과 부귀와 恩愛(은애)도 다 실제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이미 이것들을 실제로 여긴다면, 지옥과 천당도 또한 실제이며, 번뇌와 무명도 실제이며, 업을 짓는 것도 실제이며, 果報(과보) 받는 것도 또한 실제이며, 깨달은 법문도 실제가 될 것입니다.
만약 이 같은 견해를 갖는다면 미래를 다하더라도 다시 어떤 사람도 부처님 가르침에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삼세의 모든 부처님과 모든 조사들의 갖가지 방편이 도리어 妄語(망어)가 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중요한 문제이고,또 불교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중요한 문제이고, 선불교와 간화 참선을 하는 입장에서 이런 것들이 왜 증시랑에게만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도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 하는 것이 아니다.어떻게 보면 공허하다. 무상이다. 무아다. 허무다. 전부 없는 것이다.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 無眼界乃至(무안계내지) 이런 식으로 일변도로만 이렇게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야기는 일단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른 소견을 하나 세워야 됩니다.
그런데 모든 존재는 우리 마음. 우리 육신. 이 마이크. 우리의 법회. 제일 이해하기 쉬운 것이 법회입니다.
이것도 하나의 존재 원리가 있어요.
무엇이 존재하든 존재하는 데는 그 나름의 원리가 있고 규칙이 있고, 법도가 있어요. 다 있어요. 그것이 道입니다.
똑 같다고요. 법회라고 하는 사실이나, 마이크라고 하는 사실이나, 우리 육신이라고 하는 사실이나, 부처라고 하는 사실이나, 마음이라고 하는 사실이나, 이 모든 것이 중생이라고 부르든, 부처라고 부르든, 이 모든 것이 다 有相無相(유상무상).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보시를 한다. 지계를 한다. 인욕을 한다. 육바라밀을 닦는다. 불사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전부가 하나의 통일된 원리가 있어요. 법칙이 있다고요.
이것을 존재의 원리라고 하는데, 이것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겠나?
통일된 원리가 있어요. 그것은 어떤 원리인가?
이렇게 법회가 잘 이뤄지고 있지요? 그런데 시간 전에는 없었어요.
또 시간 이 후에도 없어요.
이것을 우리 보통 불교적인 표현으로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어요. 아시겠지요? 간단하지요.
우리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도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어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 우주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이 마음인데,
정작 찾아보면 없지요.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어요. 일체가 다 그렇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맞게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거기에 맞게 수행을 해야 됩니다. 거기에 맞게 봐야 됩니다. 거기에 맞게 보면 세상 제대로 알고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막연하게 그렇게만 설명하지 말고, 한 마디로 무슨 말을 지어서 얼른 그 말 한 마디면 딱 그냥 그 원리가 머리에 떠오르게 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이 없을까? 있어요. 그
것이 중론 이라고 하는 데서, 中道(중도)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中論(중론)! 그것이 중도 본입니다.
그래서 중도라는 말이 세상에 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이 중도의 원리라고요.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는 이것으로 말을 한 마디 지어야 되겠는데 말을 짓다 보니까 제일 근사한 말이 중도입니다.
중도라는 말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이런 모든 의미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을 중도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중도적으로 되었으니까 중도적으로 봐야 됩니다.
이것은 보는 견해예요. 뭐가 아닙니다. 불성이 아닙니다. 마음도 아닙니다. 마음도 중도적으로 되었고, 불성도 중도적으로 되었고, 육신도 중도적으로 되었고, 일체가 어떤 공식이 있고, 원칙이 있는데 그 원칙 공식을 중도라고 합니다.
제발 중도라는 뜻을 잘 알아야 됩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중도가 불성이 있듯이 있고, 육신이 있듯이 있고, 마음이 있듯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이 존재하는 어떤 일관된 원칙이 있어요.
그것이 통일이 됐더라고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똑 같아요.
그것을 뭐라고 한 마디로 표현 하려다 보니까 중도라는 말이 생겼는데,
그것이 제일 근사해요. 꼭 맞는 말은 아닌데 근사하다고요. 그러니까 우리가 거기에 맞게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 맞게 수행을 하는데, 모든 수행을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말고 하라는 말이 나온 겁니다.
중도적으로 하라. 만선동귀 중도송이라는 제가 억지로 붙였는데요.
치우치거나 집착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남자가 여자 노릇도 할 수가 있고, 여자가 남자 노릇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쭉 보리심의 문제. 불도의 문제. 아름다운 행동의 문제. 참다운 지혜의 문제. 연민심을 일으키는 문제. 자비를 행하는 문제. 보시. 지계. 정진. 인욕. 반야. 선정. 다 있습니다. 육바라밀 다 있지요?
몸이 없음을 보되 모양을 잘 갖추고,鑒無身而具相(감무신이구상)이라.
관세음보살이 제일 진주 영락을 많이 건 분이고, 치장하는데 돈을 제일 많이 들었어요. 수 십 억원어치의 치장을 하고 다녀요.
그 분이 쓰는 화장품은 천상에서 구해온 화장품입니다.
그런데 그 분이 뭐라고요? 五蘊皆空 度一切苦厄(오온개공 도일체고액)하는 분입니다.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 無色聲香(무색성향)하는 분입니다. 감무신이구상이라.
몸이 없는 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아요.
누구보다도 더 잘 알지만 모양을 멋들어지게 내고 있잖아요. 그
렇게 해야지 불교 어줍잖게 해서 배워서 절에 갈 때, 후줄근하게 화장도 다 지우고 먹물 옷 척 걸치고 절순이가 되고서 다니니까 우리는 천하 못 봐줍니다.
절에 오는데 화장 좀 하고 이쁜 옷 입고, 멋들어지게 하고 오지...
관세음보살한테 예배를 할 줄 알면서 관세음보살의 치장한 것은 왜 못 배워요? 감무신이구상입니다.
몸이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우리 반야심경 잘 알 잖아요?
그러면서도 누구보다도 화장 잘 하고, 누구보다도 온갖 진주 영락 수 백 원어치 몸에 걸고 다니는 겁니다.
그렇다고 거기 집착하는 분이 아닙니다.
몸뚱이도 없는 줄 누구보다도 잘 아는데, 그 까짓 것 몸에 딸린 부속품에 대해서 뭐 그렇게 집착이 있는 분이겠어요? 아니잖아요.
말 할 것이 없는 이치를 알고 설법한다.
이것은 제가 알아야 될 일이네요.
물에 비친 달그림자의 도량을 건립하고, 建立水月道場(건립수월도량)이라.
우리 축원할 때 스님들은 그래요.
‘수월도량’이라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도량이라.
그렇게 알면 뭐 도량 건립할 것이 있겠나?
그렇게 알고 열심히 도량 건립해야 돼요. 도량을 건립하되 그렇게 알고 건립해야 그것은, 절을 천 곳에 만 곳에 지어서 주지를 천개 만개를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그렇게 알지를 못하고, 물에 비친 달그림자와 같은 있는 듯 없는 듯.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앞에서 중도 이야기 다 했지요?
그렇게 알고 건립을 해야 된다. 그래서 본색이 텅 빈 세상을 장엄하라.
환상과 같은 공양꺼리를 많이 장만하여,
아! 근사합니다.
‘그림자와 같은 여래에게 공양을 올리라.’
오늘 좋은 것 너무 가르치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요.
우리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지요?
올리면서 이것이 환화와 같은 공양구라고 생각하고 많이 올려요.
그렇게 해야지, 그것 부처님한테 올리는 거라고 손을 대면되느니,
꼭 마스크를 해서 마지를 올려야 되느니, 그래서 거기에 혹시 조금이라도 침이 튀면, 밥을 새로 지어서 올리느니.
옛날 노장님들 그랬어요. 그랬다고요. 그것이 집착입니다.
여기에 뭐라고요?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말고 하라.”
모든 것이 몸뚱이부터 우리 마음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에 맞게 살자 이것이지요.
남자라고 꼭 계속 남자가 어떻게? 또 여자라고 계속 여자가 어떻게? (그 집 참 살림 잘 되겠다. 그래 가지고...)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고요.
구성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참회는 죄가 본래 없는 줄을 알고한다.
죄가 본래 없는데 무슨 참회를 합니까?
죄가 본래 없는 줄 알고 참회를 하는 이것이 진짜 참회입니다.
이것은 천수경 수준입니다.
지금 서장 수준이 아니라고요.
罪無自性從心起(죄무자성종심기) 心若滅時罪亦亡(심약멸시죄역망) 천수경 있잖아요?
법신은 항상 하지만 오래 머물기를 권청하라.
회향은 얻을 것이 없는 줄을 알고 한다.
우리가 회향을 하면 자기에게 뭔가 돌아올 줄 알고 하는 회향이 많지요.
누구나 복은 진여와 같지만 따라서 기뻐하라.
다 부처입니다. 다 부처님인데 달리 누구 부러워할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지만 隨喜(수희). 따라서 기뻐하라 이겁니다. 다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따로 기뻐하고 말고 할 것이 없잖아요.
다 똑 같은데... 그렇게 알고 기뻐하는 것이 진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 수준에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지만, 건성건성 넘어가는 것이 사실은 좀 사실은 아깝기도 합니다.
남을 찬탄하나 너도 나도 텅 비어 없는 것.
부처님과 같기를 발원하지만 실은 평등하다.
야~ 근사하네요. 우리가 발원할 때 항상 부처님하고 같기를 발원 하지요.
궁극에 [皆共成佛道(개공성불도)] 그러지요. 실은 평등해요. 이미 평등해요. 이미 똑 같아요. 그렇게 알고 개공성불도를 발원하는 것이죠.
그림자와 같은 법회에 예배하고 동참하여,
그림자지 뭐예요.
금방 조금 있으면 흩어질 시간이 다 돼가요. 그 전에는 없었어요.
그림자 인줄 예배하고 동참하고,
도량을 거닐되 발은 늘 허공을 밟으며...
향을 사르되 생멸이 없는 이치를 잘 알고,
경전을 읽되 존재의 실상을 깊이 통달하라.
꽃을 뿌리는 것은 집착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은 집착이 없는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요.
요즘 散華(산화)하지 않고, 꽃을 그냥 올리지요?
손가락을 퉁기는 것은 번뇌를 버리는 것을 표현한 것.
메아리와 같은 육바라밀을 행하고,
허공 꽃과 같은 만 가지 덕목을 닦아라
인연으로 생기는 성품 바다에 깊이 들어가
환상과 같은 법문에서 항상 노닐라.
본래 물들지 않는 번뇌를 맹세코 끊고,
번뇌에 물들지 않아요.
그러면서 맹세코 끊는다. 끊는 것이 뭐예요? 끊어지지도 않고요.
우리 생각하듯이 하나하나 번뇌 제거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물건 들어내듯이 한 개 들어내고, 한 개 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불을 탁 켜는 순간 캄캄한 것이 밝음이더라고요.
번뇌가 그대로 지혜라고 아는 것이 번뇌를 끊는 것입니다.
유심정토에 태어나기를 발원하라.
유심정토인데 어디 태어나요? 태어날 것이 어디 있어요?
내 마음이 정토인데요. 그렇게 알고 태어나기를 발원하고요.
실제적인 이치의 땅을 밟고,
얻을 것이 없는 관법의 문에 출입하라.
거울에 비친 그림자의 마군을 항복받으며,
마군이라고 하는 것도 환상입니다. 환영이라고요.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겁니다.
꿈속의 불사를 크게 지으라. 大作夢中佛事(대작몽중불사)하라.
꿈꾸듯 하는 것이 우리 불사입니다. 그러나 크게 해야 돼요.
이 [총무원 청사] 얼마나 근사하게 지었습니까?
여러분 모두 [국제 회의장]에서 이렇게 최고의 시설.
최고 환경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것이 다 몽중불사입니다.
몽중공부라고요. 꿈속에서 하는 공부라고요. 그
렇게 알아야지 하~ 무비 스님 서장강의 어쩌고저쩌고...
일어나는 순간 다 잊어버리세요. 그냥 꿈 깨듯이...
어릴 때는 꿈도 잘 기억이 나더니만 나이 드니까 기억을 아무리 하려고 해도 깨면서 그만 어디로 가버리고 없네요.
불법 공부를 해서 그런지 어쩐지 하여튼 깨면서 다 사라져 버려요.
다시 기억하려고 그 꿈 기억을 쫓아서 추적해도 도대체 손에 잡히지가 않아요. 어릴 때는 기억이 생생 하더라고요.
어릴 때라고 해서 꼭 좋은 시절이 아니에요.
우리 현실도 꿈이라는데, 꿈 자꾸 기억해서 뭐합니까?
꿈속의 불사를 크게 지으라.
우리가 어떤 훌륭한 불사를 하더라도 꿈속 불사인줄 알고 짓고...
짓되 꿈속 불사인줄 알아야 돼요.
그러면 불사도 설렁설렁 잘 되어요.
어떤 스님들은 불사하다가 너무 무리하게 해서 자살하고,
절이 다른 사람 손으로 넘어가고 감당도 못하고, 일찍이 와서 이런 것 공부 했으면 그렇게 안 할 텐데...
환상과 같은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적멸한 보리를 다 함께 증득하라.
텅 빈 보리라면 증득할 것이 뭐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알고 다 함께 증득하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 분은 永明延壽禪師(영명연수선사)라고
萬善同歸集(만선동귀집)에 나와 있는 글입니다.
이것은 제 소리가 아니고 아미타불 後身(후신)이라고 까지 추앙 받는 아주 천하의 대선지식!
念佛宗(염불종)의 宗主(종주)이고,
법안 禪宗(선종)의 대를 이은 대단히 뛰어난 분입니다.
이 분의 글 속에 당신의 깨달음과 불교적 이론을 이 게송으로서 다 정리한 겁니다.
이것이면 다예요. 어떤 의미에서 보면 불교. 이것이면 다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오신 분들은 아주 복 받았습니다.
이것 하나만 제대로 터득하고, 납득이 돼도 이것은 큰 수확입니다.
보통 수확이 아니에요.
아주 뛰어나신 분의 평생 공부가 이 게송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마흔 두 구절의 이 게송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된다.
대혜 스님이 인생사 모두 허망하다. 무아다. 공이다. 무상이다. 허무하다.
이렇게만 전부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을 제가 보완하느라고 그렇게만 알면 이것은 너무 재미없고, 너무 허전하고, 어깨가 너무 쓰리잖아요.
허리에 바람이 들어와요. 이렇게 알고 살아야 그것이 제대로 된 중도적 실천 수행이고, 중도적 실천 수행이란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않는 것. 수행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 사회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전부 이렇게 사는 것. 그것입니다.
그래야지 너무 치우친 마음으로 사는 것은 서로가 아프고, 다치는 일이지요.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하고, 말씀드린 대로 질문이 있으면 한 30분 질문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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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성철 종정 스님께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하셨습니다.
지난주 강의 시간에 스님께서 “자연” 이라고 설명 하셨는데 자연을 그대로 보라고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답: 지난 시간에 제가 선의정신 중에 자연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뜻입니다.
거기서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저절로 그러함” 지금 거사님이 질문 하시면 제가 대답하고, 제가 소리를 낮춰서 이야기 하면 조금 들리고,
크게 하면 크게 들리고, 이런 것이 전부 “저절로 그러함”입니다.
그런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 그 법문은 이 자리에서 질문을 받고 보니까, 감회가 아주 새롭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존재 하는가?
하는 것과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보는가? 라고 하는 것.
요는 관점의 문제에 달렸거든요. 우리가 사람의 삶이 어떻게 존재 하는가?
이것 보다는 내가 어떻게 보고 내 인생을 살아가는가?
사람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내가 이해를 하고 살아가는가?
여기에 달렸다고요. 그러기 때문에 다 가치관이 다르고, 인생관이 다 달라요.
그런데 불교적인 안목에서,
세상과 인생을 보는데 五時敎(오시교)라고 하면 다섯 가지로 보는 것이고,
三時敎(삼시교)라고 하면 세 가지로 보는 것인데,
크게 나누면 세 가지로 보는 것이 대다수입니다.
그것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고.
그 다음에 두 번째 단계가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랬어요.
처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한 것은,
오늘 공부에다가 연관 시켜서 생각하면 증시랑. 이 분이 자신의 삶에 대해서 보통 우리들의 관점대로 대혜 스님에게 피력한 그것입니다.
벼슬하고 혼인하고, 집안일 꾸려가고 하는 그것을 우리 상식대로 보는 그대로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고 하는 거예요.
대혜 스님이 그것을 뭐라고 했지요?
“그것은 다 허망한 것이야.” “허상이야” “환영이야” 이렇게 말씀하시죠.
그것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그랬어요.
그 다음에 오늘 영명연수선사의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집착하지 말고 수행하라”는 이야기로서 “중도적으로 보라.” 왜냐?
전부 중도적으로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다. 중도적으로 존재하니까,
우리도 중도적으로 보고, 중도적으로 실천 수행을 하면 탈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그것이 곧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마이크가 산 정상이라면,
이 바닥에 처음에 올라가지도 않고 있을 때가 처음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라는 증시랑의 입장이고,
대혜 스님이 “그것은 다 허망한 것이야.” 라고 하신 것은 산 정상에 올라와서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고 일체사를 다 부정한 것.
부정한 면이 있으니까요.
오온개공이고, 무안의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이니까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무안의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반야심경이 270자인가인데 저는 그것을 넉자로, 우리말로 넉자로 제가 요약을 했어요.
앞으로 그것을 외울까요?
간단한데...
“나는 없다.” 나는 없다더라고요.
제가 반야심경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몰라요.
관세음보살 기도보다도 더 많이 했을 거예요.
한 번 나오더라고요.
“나는 없다.”라고...
그런데 “나는 없다.”인데,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말하고, 질문하고 대답하고, 기분이 나쁜 것도 있고, 또 환희심도 있을 수가 있고, 온갖 것이 다 있습니다.
있는 것이 더 많아요. 없는 것보다도...
이걸 어떻게 하라고? 이것이 현실이잖아요?
없는 줄 알고, 다시 현실로 내려 왔을 때, 산은 다만 산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것이 세 가지 견해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볼 때, 세속적인 관점과, 그 모든 것을 부정한 관점과, 다시 본래의 자리로 내려 왔지만, 올라가기 이전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자리인 것이 중도적인 관점에서 인생을 사는 것이지요.
이것이 “相(상)은 다만 상이고, 물은 다만 물이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의 原題(원제)는 중국 고대 선사 스님들이 즐겨 쓰던 표현입니다.
그것을 교학적인 용어로는 相(상) · 空(공) · 性(성). 이래요.
상 ·공 · 성. 삼종이라고 강원에 다녀보면 귀에 못이 박히도록도서,
절요(都序, 節要)에서 수천 번 듣는 말이거든요.
성도 세 가지로 분류가 되고, 교학도 아무리 복잡하게 8만 대장경 펼쳐져 있어도 세 가지 견해로서 분류합니다.
그래서 그 세 가지로 정리하면,
“간단하고 제일 명료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말한 자연
저절로 그러함이라고 하는 것 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질문 하셔서 아주 멋진 이야기 들었네요.
질문 하실 분 있으면 하세요.
차타고 돌아가다가 ‘아이 이것 질문 할 걸’ 한 생각 떠오르면, 잠도 잘 안 옵니다.
‘이것 질문 할 걸’ 하고요. 아무 것이라도 관계없습니다.
서장하고 관계없는...
제가 불법의 고수. 인생의 고수라고 해 놓으니까 하수라는 소리 들을까 겁이 나서 질문 못 할 것 없이...
하수니까 질문 하지요. 하세요.
총무원 기획실 하고 우리 신도회 인재 개발원에서, 이런 기회를 만들어서 정말 불교 일 번지, 조계사하고도 총무원. 그리고 국제 회의장에서 우리가 이렇게 고급스러운 공부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멋지고, 건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렇게 이런 좋은 강당에서 강의 했겠어요?
달마 스님도 못 했을 겁니다.
임제 황벽도 못 했을 겁니다.
이런 좋은 기회에 이런 환경에서 우리가 삽니다.
진시황이 아무리 복을 누렸다 해도요.
한 달에 기껏 100만원 남짓한 월급 받는 사람보다도 복이 적습니다.
그 사람 이런 아스팔트 길 구경도 못 했습니다.
버스 얼마나 근사한데...
요즘엔 에어콘 척 나온 버스 타고 다니지...
진시황이 그런 복 못 누렸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인생의 차원을 좀 달리해서 출세간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이 참으로 홍복 중에 큰 홍복이라고 생각 하시고,
저도 이런 이야기를 여러 신심 있는 불자 분들과 함께 하게 된 것은 더 할 수 없는 큰 복입니다.
제가 어찌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저는 공부할 때, 그저 내 궁금해서 공부하고, 내 답답해서 공부했을 뿐인데, 이렇게 여러분들과 부족한 강의지만, 함께하고 같이 웃어주시고, 기뻐해 주시니까 너무 좋습니다.
가능하면 이런 시간이 오래 지속 되고, 또 널리 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 되어서, 다음 시간에는 이 복도에 꽉 차게 앉았으면 더욱 좋겠네요.
고맙습니다. 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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