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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교회관은 가톨릭 교회와 재세례파의 오류를 비판하고 논쟁하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는 교황이나 주교 중심의 오류에 빠진 교회라고 비판하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 그리스도의 견지에서 규정된 교회여야 할 것을 강조하였다. 츠빙글리는 재세례파가 믿음과 교회의 거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인주의에서 분열 성향이 있음을 보고 교회에서 전체 회중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보편교회인 불가시적 교회와 달리 지역교회에는 불신자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도 포함될 수 있는 혼합 공동체라는 것이 츠빙글리의 인식이었다. 구분선 아래에서 세부 내용을 확인해보자.
그리스도와 복음에 대한 츠빙글리의 이해가 변화함에 따라 교회에 대한 그의 이해도 변화하였다.(중략) 교회는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술되고 규정되었다. 이 단계에서 츠빙글리는 가톨릭 적대자들에 반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폈지만, 불과 몇 달 되지 않아 그는 자신의 교회관을 보다 급진적으로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로부터 도전을 받게 되었다.
1. 그리스도와 교회
이미 1522년 4월의 한 편지와 1522년 7월의 『탄원』(The Petition)에서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견지에서 교회를 이야기했었다. 여기에서 그는 교회를 위계질서로 보려는 견해에 반대하고 있는데, 1523년 1월의 1차 토론회에서는 노골적으로 반대하게 된다. 제8항에서 츠빙글리는 "그래서 무엇보다 머리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에 속한 그 자녀들이 되는데, 이것이 교회 혹은 성도의 교제, 그리스도의 신부, 보편적 교회이다."(Z I 459.3-5)
이 정의는 교회의 머리와 교회의 거룩성과 보편성을 언급함으로써 가톨릭 반대자들과의 중요한 차이점들을 반영하고 있다.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교회 수장으로서의 교황에 반대하여 확립된다.(Z II 54.12-23) 따라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머리 안에 거하는 모든 사람들"이지, 로마 주교와 교제를 갖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주교들 간의 대조는 여러 가지 점에서 그리스도와 교황 사이의 대조와 유사하다. 교회의 존재는 결코 주교들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주교이다. 이미 콘스탄츠 주교에게서 취리히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셨듯이, 그분은 사실상 사람들을 주교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분이다.(Z V 79.3-9)
그리스도의 견지에서 규정된 교회와는 달리, 교황이나 주교들의 견지에서 규정된 교회는 오류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종종 잘못되거나 정도에서 벗어났다."(Z I 537.9; Selected Works 85) 사실 주교들도 다른 누구나 그렇듯이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머리로 삼을 때에만 교회의 구성원들이다. 교회가 오류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성령과 관련된 표현이다.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교회가 자동적으로 성령을 소유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공의회나 대표 교회가 모이는 곳에 단순히 임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주인이 되는 곳에만 임재한다. 그래도 츠빙글리는 교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으며, 1526년에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내버려두지 않고, 비록 외적인 것들에서는 실수를 하더라도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들에서는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신다고 기록하였다.
2. 교회: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교회의 전통적 표지들(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은 모두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초기 츠빙글리에게는 그것들 모두가 중요하지만, 1차 토론회에서 주된 관심은 보편성이었다. 츠빙글리는 성서에서 교회라는 단어의 두 가지 의미를 받아들였는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교제라는 것과 특정한 회중들 혹은 교인들이라는 것이다. 교회는 포괄적 혹은 보편적이면서 동시에 지역적이다.
츠빙글리는 67개 조항들을 설명하면서, 1523년 『미사의 규범』(The Canon of the Mass)과 1524년 『엠저에게 보내는 답변』(A Reply to Emser)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논의하였다. 그는 로마교회로부터 보편교회를 구별하였다. 로마교회는 지역교회이지 보편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교회는 온 세계에 흩어져 있으면서 동시에 성령을 통해 하나의 몸으로 연합된다. 여기 이 땅 위에서 가시적으로 연합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 끝 날에는 그렇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처럼, 츠빙글리도 교회가 그리스도에게는 드러나지만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분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자기의 모든 신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에게 둔다면, 자신이 교회에 속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다.(Z II 59.1-64.20, 570.19-572.31; Z III 252.23-269.6과 비교)
지역교회는 회중들이고, 이런 모든 지역교회들이 모여 보편교회가 된다. 교회는 말씀으로 먹여지고, 성례로 양육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쫓아내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는 것은 지역교회이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자칭 신자와 실제 신자를 구별하였다. '교회'라는 말을 악한 자들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츠빙글리는 악한 자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는 악한 자들이란 실수를 범한 신자라기보다는 불신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역교회는 치리를 시행하고, 목회자와 교리에 대한 결정을 한다. 그 예가 고린도 교회인데, 고린도전서 14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Z II 572.20-31; III 261.18-264.4)
'교회'라는 단어의 성서적인 의미 두 가지 중 첫 번째 의미에서(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교제), 교회는 또한 거룩하다.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교회가 본래적인 거룩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사제들과 경건한 자들의 덕택으로 그 구성원들이 거룩하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거룩하다는 것이다. 1524년 『엠저에게 보내는 답변』에서 츠빙글리는 거룩성이나 순수성은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흠 없는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난에 대응하였다. 그리스도에게 의지하는 사람들은 흠이 없는데, 그것은 그분이 아무런 흠도 없기 때문이다.(Z III 254,25-256.23)
츠빙글리는 교회가 거룩하다는 생각과 함께 교회가 혼합된 공동체라는 생각을 지녔다. 비록 츠빙글리가 재세례파와의 갈등 이전에 교회의 거룩성을 논하기는 했지만, 재세례파는 그에게 보다 심각하게 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재세례파들은 교회는 거룩하고, 따라서 믿는 자들만 교회에 속하게 함으로써 교회를 거룩하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회의 입회 의식인 세례는 믿는 자들에게만 베풀어져야 하고 아이들은 제외되어야 한다. 더욱이 성찬은 믿는 자들과 거룩한 삶을 살고자 하는 자들에 의해서만 거행되어야 한다. 삶이 거룩하지 못한 자들은 출교함으로써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해야 한다.
거룩하지 못한 교회 구성원들의 문제와 씨름하면서 츠빙글리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의지하였다. 성서에서 교회라는 단어는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이 함께 구성한 공동체에 사용되었다. 비록 믿지 않는 자들의 일부 행동이 그들이 흠 없는 교회에 속하지 않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긴 했지만 말이다. 일찍이 1520년 7월 24일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에게 보낸 편지에서 츠빙글리는 교회에 대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사용했다. 『엠저에게 보내는 답변』에서 그는 이 비유와 함께 그물의 비유와 열 처녀의 비유도 사용하였고, 유다, 아나니아와 삽비라(행 5장),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딤후 4:14)의 예들도 인용하였다. 재세례파에 대항하여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인용하면서 츠빙글리는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내버려두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는 제세례파처럼 교회에서 이탈하여 순수한 교회를 형성함으로써가 아니라 말씀 설교로써 교회를 정화하고자 하였다.
재세례파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거룩성은 교회의 통일성과 연관되었다. 거룩하지 못한 사람들을 쫓아냄으로써 교회를 거룩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것은 교회의 일치를 깨는 것이다. 더욱이 믿는 자들로만 구성된 교회를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배제시킴으로써 교회에서 어린이와 어른들의 일치를 깬다. 츠빙글리는 논쟁이 벌어지기 이전인 1522년 5월에 『엄중한 권고』(Solemn Exhortation)에서 일치에 대한 관심을 피력했었다.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서는 일치를 위해 모든 사람들이 한 아버지에게서 나오도록 하시는 분이시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시는 분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되어야 한다.(Z I 167.14-169.4)
츠빙글리는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치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켰다. 『엄중한 권고』에서 츠빙글리의 일치 논의는 연맹의 상황과 관련이 있었지만, 10여 년의 대부분 기간 동안은 재세례파 논쟁과 관련되었다. 츠빙글리는 다양한 방식으로, 즉 신학적으로, 예배학적으로, 실천적으로 자신의 관심을 표명하였다.
하나의 중요한 신학적이고 예배학적인 표현이 언약 교리에 들어있다. 이 표현이 처음 사용된 것은 재세례파와의 논쟁 바깥에서였지만, 점차로 그 논쟁에 개입되어 사용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은 아이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과 맺어진 것이며, 이들을 통해 언약은 모든 민족에게로 확장되었다. 1525년부터 츠빙글리는 구약과 신약성서에는 오직 한 언약과 한 하나님의 백성만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였다. 이 점에서 그는 신약성서에 나오는 어린이들도 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람들만큼이나 교회에 속하는 것이며, 따라서 어린이들에게도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유아세례는 일치의 원천이었던 반면, 교회와 세례에 대한 재세례파의 접근은 분열을 낳았다.(Z IV 637.27-638.1, 641.1-3; VI i. 155.22-172.5; S VI i. 461.40-7; Z IV 641.19-26) 세례와 마찬가지로 성찬도 교회의 일치와 연결된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하나 됨을 위해 설립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또 우리 서로 간에도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다.(Z III 227.11-228.6)
교회의 일치는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성령과도 연관되는데, 성령은 분리하거나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성령은 함께 묶어주고 일치로 이끄신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죄인들을 경멸하지 않으며 죄인들에게서 분리되지 않는다. 오히려 죄인들을 그들의 악에서 불러내어 자신들에게 연합시킨다.(S VI i. 211.23-212.9)
츠빙글리가 볼 때 재세례파는 교회에 대해 근본적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거룩한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고, 재세례파를 포함하여 아무도 누가 진실한 신자인지 알지 못한다. 더욱이 그리스도인들은 연약한 자들과 관계를 끊을 것이 아니라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가르친 것처럼 그들을 받아주어야 한다. 연약한 자들에 대한 바울의 관심은 종종 츠빙글리로 하여금 재세례파와 달리 변화에 보다 신중하게 접근하도록 하였다.
츠빙글리는 재세례파가 교회 구성원들의 믿음과 거룩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데서뿐만 아니라 그들의 개인주의에서 그들의 분열적인 성향을 보았다. 이로 인해 츠빙글리는 회중들 중 한 사람 혹은 몇 사람의 견해가 아니라 전체 회중의 역할을 강조하게 되었다.
어떻게 당신이 감히 교회와 의논 없이 당신 자신의 권위에만 의지하여 교회에 새로운 것들을 도입한단 말인가? 나는 하나님의 말씀이 공개적으로 충실하게 설교되고 있는 교회들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다. 만일 새롭고 이상한 견해를 가진 모든 얼간이들이 분파를 모우는 것이 허용된다면, 분열과 분파가 너무 많아져서 우리가 지금 어렵게 세우려고 하는 그리스도의 몸이 산산조각이 나 제각각 개별 회중들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한 사람이 아니라 교회 전체의 동의가 없는 한 새로운 것들이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성서에 대해서는 나나 당신이 아니라 교회가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이다.(고린도전서 14)(Z IV 254.24-255.3; LCC xxiv. 158)
1520년대 중반과 후반에 선택의 교리가 츠빙글리 신학에 등장하기 시작했을 때, 그 교리는 또한 그의 교회론에서도 두드러진 특징이 되기 시작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에서도 교회는 여전히 믿음의 견지에서 기술되었지만, 동시에 믿음의 기초가 되는 선택에 근거한 기술도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교회를 묘사하거나 정의하면서 선택을 언급하는 것은 교회가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포함한다는 사실과 교회의 기원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사실 모두를 보장해 준다.
『신앙에 대한 설명』(An Account of the Faith)은 선택받은 자의 견지에서 교회를 정의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믿음을 지닌 자들이고, 따라서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지닌 자들만이 자신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안다.”고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츠빙글리는 우리가 감각으로 알 수 있는 교회와 하나님만이 아시는 선택된 자들의 교회를 구별하였다. 가시적 교회의 구성원들도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성례에 참여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거스르거나 그분에 대해 무지하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이 실제로 믿는 자들인지 아닌지 사도들이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은 세례를 받고 교회의 구성원이 된다. 베드로전서에서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는 선택받은 자들이라는 용어를 이 교회(가시적 교회)에 적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달리 우리는 사람들의 고백에 근거해 그들을 판단하기 때문이다.(Z Vl ⅱ 800. 16-801.30; Jackson 464; Works ⅱ, 44)
<약어표>
LCC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London, 1953-70).
S M. Schuler and J. Schulthess, Huldreich Zwingli's Werke (Aurich, 1828-42).
Selected Works S. M Jackson, The Selected Works of Huldreich Zwingli (Philadelpia, 1901; repr., 1972).
Works ii W. j. Hinke, The Latin Works of Huldreich Zwingli, ii (Philadelphia, 1922; repr as Zwingli on Prividence and Other Essays, Durham, NC, 1983).
Z Huldreich Zwinglis Sämtliche Werke (Berlin, Leipzig, Zurich, 1905- ).
W. P. 스티븐스 지음, 박경수 옮김, 『츠빙글리의 생애와 사상』(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7), pp. 179-186.
첫댓글 좋은 내용입니다.
천주교와 재세례파는 하나의 보편적 교회가 불가시적 교회인 것을 간과하고 지역의 유형교회인 것에만 착시하는 오류가 있습니다. 지역의 유형교회에는 참 신자 외에 위선자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단들도 침투를 시도하지요. 천주교와 재세례파는 교회의 개념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공감합니다.
공감합니다22
"가시적 교회의 구성원들도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성례에 참여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거스르거나 그분에 대해 무지하다.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자들이 실제로 믿는 자들인지 아닌지 사도들이 알 수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알 수 없다." -->
재세례파, 극단적 침례교화와 현대의 형제교회들은 교회 앞에서의 신앙고백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교회 심사에 의한 구원을 주장합니다. 이는 심각한 병폐이며 오류입니다.
실제로 믿는자인 지의 여부는 성령 충만한 교회 지도자조차도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아래 구절이 그 예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행8:9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12.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그들이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13.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노베 네, 잘 어울리는 성경구절이네요.
@노베 공감합니다.
가시적 교회와 불가시적 교회는 분리되지는 않지만 구분은 되며, 불가시적 교회에만 오류와 위선자들이 없고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츠빙글리도 이러한 사상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루터가 천주교회에 상대적으로 더 근접하고 칼빈은 중간 쯤 되는데 비하여 츠빙글리는 천주교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교회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재세례파는 천주교회와 대립적 관계에 있는 듯 하지만 지역의 유형교회를 절대시하는 측면에서는 천주교와 공통된 모습을 보입니다.
잘 보셨네요. 공감합니다. 재세례파가 가톨릭을 가장 증오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가장 멀어지려고 했던 것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결과는 가톨릭과 유사한 모양새가 된 측면이 있죠.
지상의 교회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해한 순진함과 신학적 미숙함이 그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봅니다. 정통신학을 모르거나 무시하면 종파, 이단, 사이비로 빠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야릇한 종파들이나 이단 사이비들을 보면 하나같이 다 정통신학에 무지했던 자들입니다.
그런 면에서 종교개혁 신학자들의 우수한 면모가 더 돋보이네요. 이들은 성경은 물론 교부들의 신학과 주장을 섭렵했고 중세신학까지도 착실히 공부해서 가톨릭의 약점들을 파악하고 있었죠.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지속가능한 신학으로 교회를 지탱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 같습니다.
@코람데오 풍성하고 예리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코람데오 공감합니다22
가시적 교회 --- 불가시적 교회=보편적 불가시적 교회
https://cafe.daum.net/1107/arVI/8
우르시누스의 원문을 통한 분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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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 교회에는
영생에 이르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된 자들(//불가시적 교회의 회원+가시적 교회의 회원 겸함//)과
또한 외식자들과 중생하지 않았으면서도 교리에 동의하고 교회의 외형적인 예식들을 따르는 많은 자들(//가시적 교회에만 소속, 불가시적 교회에는 소속하지 못함//)이 함께 섞여 있다.
혹은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교리에 동의하는 자들의 집회인데, 그들 중에는 죽은 교회원들이나 중생하지 않은 교회원들이 ///많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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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 7:21) 하신 겁니다.
@장코뱅 우르시누스나 츠빙글리나 비슷한 마인드를 가지고 있어 보이네요. 그래서 개혁주의라고 할 때 츠빙글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장코뱅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