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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혼의 새벽을 향하여(태을금화종지) 3/4
올빼미들에게는 고니가 완전히 미쳐 보일 것이다. 사람들이 바로 그런 식이다. 석가도 미쳤고 모하메드도 미쳤으며 짜라투스트라도 미쳤다.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올빼미들이 고니를 내쫓고 추방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만약 그 고니가 나무에 함께 살게 된다면 그는 그들의 전통과 그들의 삶의 방식을 파괴하고 말 것이다.
그들은 항상 어둠 속에 살면서 어둠을 믿어왔다. 어둠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고 모든 의식들은 어둠으로부터 생겨났다. 그들의 성직자들은 어둠을 찬양하였고 그들의 학자, 현인들은 어둠에 관해서 위대한 저서들을 남겼다. 그들의 모든 철학은 어둠이라고 하는 기본 주제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철학 속에는 태양이라든가, 빛이라든가, 낮이라고 하는 주제가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 미친 고니가 나타나서는 그들의 세계에 어떤 낯선 사상을 침투시키고 오염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모든 조직이 붕괴될 판이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것은 그 때문이며 사람들이 그토록 나를 반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그대들에게 새로운 형식, 새로운 꼴, 새로운 삶의 방식, 그리고 진리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주려는 것이다. 나는 존재에 이르는 새로운 문을 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의 생활방식에 많은 것을 투자했던 사람들은 자연히 나에게 화를 내게 되어 있다. 그것도 거의 미칠 정도로 말이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세계로부터 없애버리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하고 있는 짓이다. 그것은 아주 당연하고도 단순한 일이다.
그대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폭소가 터질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있는가? 왜? 그리고 어떻게 영혼의 존재를 믿으며 왜 믿는가? 이유는 똑같다. "우리의 조상 대대로, 그리고 사실은 우리 사회의 어느 누구도 태양은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태양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에게 속지말라. 그는 사기치고 있다. 그는 우리의 종교를 타락시킬 것이다."
그대는 부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도만의 하나님이다." 라든가 또는 "하나님은 힌두교도만의 하나님이다."
이런 소리는 조상 대대로 들어왔다. 온갖 소문과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을 말이다. 사실 그대의 부모도 모르고 그대도 알지 못한다. 이제 용기를 가지고 그대 자신의 지식이 아닌 모든 것들을 털어버려라. 이것이 산야신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이것이 진리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다. 모든 선입관을 떨쳐버리고 모든 선험적(a priori) 관념들을 던져버려라. 기초부터 시작하라. 마치 아담과 이브라도 된 것처럼, 그래서 어떠한 전통이나 경전도 없는 것처럼 ABC 부터 출발하라.
로렌스(D.H. Lawrence)가 언젠가 했던 말. 나는 그가 한 말에 동의한다. "세상의 모든 경전들이 없어지고 나면 그때에야 사람들은 종교적이 될 것이다."
모든 전통들이 간단히 제거될 때, 그때에야 약간의 희망이 있게 될 것이다. 전통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누가 애써 탐구하겠는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전통이 모든 것을 제공해 주는데 무엇 때문에 신경을 쓰겠는가? 그러나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들은 실제를 알게 되고 그대는 단순히 믿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은 정반대이다. 믿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안다는 것은 바뀌고, 탈바꿈되고, 빛나고 영원한 다른 차원으로 인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문들은 믿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실험되어져야 한다. 이 경문들은 그대의 존재를 가지고 실험해 볼 수 있는 간단한 실마리들이다. 그대가 공부해 보지 않으면 그대는 계속해서 요점을 놓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몸을 위대한 실험실로 보고, 그대의 삶을 실재에 이르는 위대한 모험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는 매우 주의 깊고 예민해져야 한다.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서 말이다.
이 경문들이 열쇠가 된다. 그대가 실제로 자신에게 실험을 해 보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존재 속에 위대한 보물과 바닥나지 않는 보화를 가진 황제이다. 그러면서도 거지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여조사께서 말씀하셨다. 혼침과 산란의 두 가지 병증은 매일 끊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성공이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는 없다.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면 그것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다.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지 말라.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면 그대가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수행에 전념할 수 없게 된다. 그대의 마음은 미래에 가있다. 어떻게 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성공한 나이 모습은 어떤 것일까? 붓다가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떤 아름다움과 축복과 환희가 함께 될까? 이런 꿈들을 이미 꾸고 있는 것이다.
그대의 마음은 탐욕과 야망과 사욕의 게임에 놀아나고 있다. 결코 성공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말라. 성공이란 자연적인 부산물이다. 그대가 진실로 수행에 임한다면 성공은 마치 그림자가 몸을 따르듯 그대를 따를 것이다. 성공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조사깨서는 성공이나 실패 따위에 연연해하지 말고 고요히 수행에 임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명심하라. 그대가 지나치게 성공에 대해 신경을 쓰면 그만큼 실패에 대해서도 신경을 쓸 것이다. 그들은 한패가 되어 나란히 있게 될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서로 나누어질 수가 없다. 성공에 대해 마음을 쓰면 어느 한구석에는 두려움이 있을 것이다. 누가 아는가? 혹시 그대가 실수하게 될지.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공은 그대를 미래로 데려가고 탐욕과 사욕과 야망의 게임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두려움 또한 그대를 떨게 하고 흔들리게 한다. 그대는 실패할 수도 있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대를 방황하게 한다. 그리고 그 방황과 탐욕과 야망으로 그대의 공부는 고요할 날이 없을 것이다. 그대의 공부는 혼란의 도가니가 될 것이다. 그대는 여기저기를 기웃거릴 것이다. 길을 걸으면서도 눈은 다른데 먼 곳에 가 있을 것이다.
천문(天文)을 공부하던 그리스의 한 점성가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별이 초롱초롱한 어느 날 밤 그는 우물에 빠졌다. 별을 쳐다보면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별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다가 정작 우물 곁으로 다가가더니 기어이 퐁당하고 만 것이다.
그 때 근처에서 살던 어떤 부인이 그 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그녀는 우물 안을 들여다보고는 밧줄을 갖다 그 유명한 점성가를 꺼내 주었다. 점성가는 아주 감사해 하였다.
그는 그녀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를 모를 터이지만 나는 특별히 국왕께서 임명한 왕실 점성가라오. 나는 보수가 아주 많고 갑부들만이 내게 와서 점을 칠 수 있소. 그러나 내 목숨을 구해준 그대인고로 내일 오면 내가 점을 봐 주겠소. 별자리와 손금과 사주팔자를 보면 그대의 미래가 훤할 것이오"
그러자 그 부인은 웃기 시작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잊어 줘요. 바로 한 발자국 앞에 우물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주제에 어떻게 내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거예요? 개똥 같으니라구."
너무 앞만 내다보지 말라. 그러면 지금 디뎌야 할 발걸음을 놓치게 된다. 조사께서 말씀하셨듯이 성공은 저절로 온다. 맡겨 놔버려라.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무위로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인도의 카르마(Karma) 철학의 전체이다. 응답받지 못하거나 처벌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잘못을 저지르면 벌은 그림자처럼 따른다. 선한 일을 하면 거기에 대한 보응이 뒤따른다. 거기에 대해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생각할 필요도 전혀 없고, 티끌만큼도 의식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다가오는 것은 자동적이다.
길을 걸을 때 그대는 그림자를 계속해서 바라보는가? 그것이 따라오는가 그렇지 않은가 해서 말이다. 만약 누군가가 계속해서 그림자를 바라보며 걷는다면 그대는 그를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림자는 따라 오게 마련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그와 같이 그대의 공부가 올바르면 그 올바른 노력과 그대의 존재 전체로 인하여 보답은 저절로 따라오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공부인가? 첫째,
혼침과 산란의 두 가지 병증은 매일 끊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혼침이란 게으름과 타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그대 내면의 여성적인 면에 기인한다. 여성적인 면은 그 수동성으로 인하여 게으르다. 다른 하나는 산란이다. 그것은 남성적인 면에 기인한다. 남성적인 마음은 쉴 새 없이 움직이려고 한다. 그것은 한꺼번에 수천 가지의 일을 하려고 한다.
까뮈의 작품에 나오는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한 명, 몇 명 혹은 여러 명에도 만족할 수 없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인 남성의 마음이다. 여자는 한 명의 남자로 만족 . 하지만 남자는 여러 명이 되어도 만족하지 못한다. 여자의 만족과 남자의 불만족은 당연한 일이다.
양쪽 다 긍정적이고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만약 여자가 자신의 수동성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것은 무기력한 상태를 가져올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여자들의 창조물이 많지 않고 또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대는 위대한 여자 화가나 시인, 또는 과학자들을 발견하기가 힘들 것이다. 이것은 남자들이 가로막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지만 자유가 주어지고 여성들이 해방되어진다 하더라도 무기력은 이미 여성 존재의 일부이다.
여자는 행위보다는 존재하는 모습에 더 관심을 쏟는다. 이러한 관심은 축복일 수도 있고 저주일 수도 있다. 그것은 하기 나름이다. 이 안정 상태가 명상적인 것이 될 때, 그리하여 존재에 대한 조화와 만족을 느낄 때, 그것은 축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열이면 열, 백이면 백이 무기력으로 떨어지고 만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을 어떻게 누려야 할지 모른다. 그래서 그 축복이 가혹한 저주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남성적인 마음은 휴식을 모른다. 그것은 매우 창조적이어서 거기에 축복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게 되지 못했다. 창조적이 되기보다는 파괴적이 되어온 것이다. 축복이 저주로 변했다. 남성의 쉴 줄 모르는 마음은 그를 매우 안절부절 못하고 불안해하며 긴장하게 만들어 왔다. 마음은 끊임없이 들끓고 거의 미칠 지경에 처해 있어 왔다. 어떻게 해서 자신을 계속 억제하고는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라도 폭발할 태세이다. 그래서 조그만 구실만 있어도 그것은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휴식을 모르는 마음으로 인하여 남자는 자신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잃어버렸다. 여자는 우아하고 아름답다. 여자를 지켜보라. 그 걷고 앉는 모습을 지켜보라. 거기에는 우아함이 있다. 그녀의 존재 가운데는 미묘한 침묵과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그녀의 파장에서 그것이 느껴진다. 여자가 없는 집안은 혼란스럽다. 홀아비가 혼자 살고 있는 집에 들어서면 금방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요, 제자리에 놓여 있는 물건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질서한 모습이 드러난다.
물건들이 제자리에 있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로 그 집에 여자가 사는지 안사는지를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여자가 사는 집에는 어떤 우아하고 정교한 멋과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문학적인 색깔과 음악적인 분위기가 있다. 그러나 남자 혼자 살고 있는 집에는 신경질적인 기운이 집을 감싸고 있다. 올바로 쓰여지기만 한다면 이 두 가지는 매우 아름답다. 여성적인 면은 우아함을 주고 남성적인 면은 창조적인 태도를 줄 것이다. 그 우아함과 창조성이 녹아 없어지는 곳에 그대의 진정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러나 붓다, 미라(Meera), 테레사(Teresa), 예수, 그리고 막달라 (Magdalence)의 경우처럼 그것은 아주 드물게 일어난다. 보통은 그 반대의 경우가 일어난다. 두 개의 부정적인 면, 즉 남성의 쉴 줄 모르는 신경증과 여성의 무기력증, 이렇게 둘이 만나 가장 추악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 말을 염두에 두어라. 내가 남자와 여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때 그것은 생물학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각각의 남자는 내면에 남성만큼이나 여성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모든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단순히 남자만이 아니며 여자도 단순히 여자만은 아닌 것이다. 거기서 한쪽 면이 더 우세한 것뿐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생겨나는 것이다. 남성적인 면이 두드러질 때, 혼(animus)이 의식이 되고 넋(anima)이 무의식에 머물때, 그대는 남성이다. 그대가 여자라면 그것은 넋이 의식이 되어 여성적인 면이 두드러지고 남성적인 부분, 즉 혼은 무의식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양면은 항상 같이 존재한다. 전기가 양극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듯 모든 존재도 양극을 필요로 한다. 남자와 여자, 음과 양, 양극과 음극, 쉬바와 사크티 등 그대는 거기에 대한 이름들을 나름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혼침과 산란의 두 가지 병증은 매일 끊이지 않는
고요한 정진에 의해 극복되어져야 한다.
그러면 자연히 성과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고요한 정진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정좌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산란한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그대는 경험했을 것이다. 내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고 있다. 그들은 호소해 온다. 명상을 시작하는 사람은 명상을 할 때 오히려 마음이 더 불안정해지는 이상한 현상을 체험한다. 명상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겪는다. 그래서 당황하게 된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오히려 마음이 고요해지기를 바라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 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마음은 더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일상적인 삶에서 보다 더 많은 사념들이 떠오른다. 가게에서나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할 때 사념들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절이나 사원 또는 교회당에서 명상을 하기 위해 몇 분 동안 앉아 있노라면 갑자기 사념의 먹구름이 와 하고 몰려와 가엾은 그대를 온통 휘저어 놓는다. 명상을 하는 사람은 마음이 잠잠하고 고요해지기를 바라며 하기 때문에 혼란스럽고 미칠 지경이 된다. 실제로 기대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이렇다. 그대는 항상 이러한 사념들 속에서 살아왔다. 가게나 사무실이나 공장에서 일할 때도 사념들은 거기에 있어왔다. 거기에 너무 깊이 빠져서 그대가 보지 못했을 뿐이다. 새로운 것은 사념의 구름이 아니다. 사념들은 그대가 교회나 사원이나 수도원등 어디에 앉아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제 명상을 하면서 앉아 있노라면 마음이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게 되어 그대의 전 마음이 내부에서 들끓고 있던 모든 것을 알아차리게 되는 것이다.
명상으로 인해 더 많은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못보던 것들을 보게 되는 것 뿐이다. 그들은 항상 그곳에 있어 왔다. 이제 그들을 더 많이 알아차리게 된 것 뿐이다.
만일 정좌수련을 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산란한 상태에 빠져 버릴 것이다.
마음의 산란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을 제거하는 기회가 된다.
그대는 적어도 하루 한두 시간씩 정좌하고 앉아 마음이 외부의 일들에 사로 잡히지 않도록, 완전히 벗어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대의 모든 관심이 내면세계에 쏟아지도록 해야 한다. 처음에는 그대가 판도라의 상자(Pandora's Box)를 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마치 정신병원에 들어간 것같이 생각되어 그것에서 뛰쳐나와 다시 세상일에 얽매이기를 원할 것이다.
그 유혹들을 뿌리쳐야 한다.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면 그대는 절대로 명상을 할 수 없다. 그러한 내면의 혼란들을 회피하기 위해 많은 속임수들이 고안되어 왔다.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은 명상의 테크닉이 아니라 내면의 진실을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하나의 주문(mantra)이 그대에게 주어지고 그대는 그것을 되풀이해서 암송하게 되어있다.
그것은 명상이 일어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속박하는 것 뿐이다. 그대는 무언가를 외쳐댄다. 람(Ram), 람, 람, 람..... 또는 코카콜라(Coca-Cola), 코카콜라, 코카콜라..... 그것이 어떤 말이든, 그대의 이름이든, 전혀 엉뚱한 소리이든 상관이 없다. 그것을 계속해서 되풀이하고 반복함으로써 그대는 거기에 사로잡히게 되고 그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잠시동안 내면의 혼돈을 잊는 것 뿐이다.
예전에 그대는 사무실에서 일에 몰두하거나 영화, 라디오, 신문같은 것에 빠졌었다. 이제 그대는 이 만트라에 빠지는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대상이 달라진 것 뿐이다. 이것은 초월은 커녕 명상도 아니다. 내면의 정신병동을 회피하지 말라. 그 속으로 들어가서 그 안에 있는 것을 만나고 직시하라. 지켜보라. 극복하는 길은 지켜보는데 있다. 이것들이 점점 커져온 것은 그대가 회피해 왔기 때문이다. 이제 만트라 따위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단지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라.
이것이 바로 진정한 명상이다. 선(禪)은 명상의 정수이다. 아무것도 하지않고 단지 고요히 앉아 있는 것, 사실 가장 어려운 것은 아무것도 하지않고 단지 고요히 앉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게 와서 이야기한다. "우리에게 무언가를 주십시요 어떤 만트라라도 주시면 도움이 되겠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아니 미칠 지경입니다."
수많은 일들이 그대에게 일어난다. 몸이 근질근질해지는가 하면 머리는 쑤시기 시작한다. 갑자기 개미들이 몸을 기어다니는 것 같다. 물론 진짜 개미가 기어가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렇게 느낄 뿐이다. 몸이 갖은 수를 써 그대의 마음을 흐트러 놓으려 하는 것이다. 다리가 저려 와서 자세를 고치고 싶어지는 등, 몸은 그야말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대를 사념의 포로로 만들려 하는 것이다.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라. 몇 분 동안만이라도 아무런 얽매임이 없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지켜보라. 그러면 그대는 놀라게 될 것이다. 그렇다.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지켜보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사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고요히 앉아 있노라면
봄이 오고 들풀은 저절로 푸르도다‥‥
이것이 명상의 가장 순수 형태이다. 이것이 진정한 초월명상이다. 그러나 마하리쉬 마헤쉬 요기(Maharishi mahesh Yogi)가 그것을 상표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어느 누구도 초월명상이라는 말을 쓸 수가 없게 되었다. 초월명상은 이제 등록 상표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만약 그대가 자신의 명상을 초월명상이라고 부른다면 법정에 설 수도 있다. 특허권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어리석음을 보라. 명상이 시장에서 사고 파는 상품처럼 되어버리다니.
이런 일이 되풀이해서 일어나고 있다. 소위 인도의 구루(Guru)라는 작자들이 미국에 간다. 그들은 결코 누구도 변화시키지 못했지만 미국은 그들을 크게 변화시켰다. 그들은 모두 사업가가 되어 미국식으로 일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변화를 줄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그들이 만약 누군가를 변화시킬 수 있었다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변화를 원하는 사람들이 그들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옮겨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목마른 사람은 물을 찾아 나서게 되어있다. 샘이 목마른 사람을 위해 옮겨다녀야 하는가? 목마른 사람이 샘으로 가지 않는가? 샘은 결코 옮겨다니지 않는다. 그러므로 옮겨 다니는 샘물이 있거든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마음의 산란을 알아차리는 것이 그것을 제거하는 기회가 된다.
엄청난 의미를 지니고 있는 문구이다. 마음의 산란을 제거하는 유일한 길은 마음의 끝없는 산란을 지켜보는 것이다. 단지 지켜보기만 하라. 자꾸 그대는 망각해 버릴 것이다. 마음은 교활하고 영리하며 아주 간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외교적 술책들을 알고 있다. 마음은 기본적으로 정치가와 같다. 그것은 그대를 미혹시키기 위해 갖은 계교를 다 부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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