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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주의 전을 찾아서
묵호 교인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상업차 혹은 가정 일 때문에 부산을 많이 왕래하였다. 나는 교인들이 묵호를 떠나 부산이나 타지방에 갈 때에는 안식일에 꼭 예배당을 찾아가도록 부탁하곤 하였다.
그런데 부산을 다녀오는 교인마다 갔다 와서는 하는 말이, 예배당을 찾아도 없다든가 혹은 찾아는 갔어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고 두세 사람 모일 뿐이라는 말을 자주 하였다.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팠다.
“부산은 한국의 제2도시인데 이토록 교인이 없단 말인가!” 하나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시면 부산에 내려가서 개척해야지 하는 마음이 늘 있었다. 그러나 대회가 다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부산은 영남대회요, 묵호는 중한대회에 속해 있어서 행정적으로 구별되어 있었으므로, 특별한 여건이나 기회가 아니면 부산에 전도를 가기란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나는 궁리 끝에 한 계책을 세웠다. 묵호교회에 국민학교도 세웠고 아이들이 여기서 성경도 배우고 지리, 역사 등을 배우는데, 특히 과학이나 지리 등 눈으로 실제를 보면서 배우는 실물 교훈은 매우 중요하고 유익한 것이며 머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이라 생각되었다.
나는 교장으로 시무하는 한기종 선생에게 이런 나의 교육 철학을 이야기하고, 학생들을 데리고 한번 부산으로 수학 여행을 가는 것이 어떤가 하고 내 의견을 제시하였다. 땅에서는 보통 찬물이 나오는 법인데 더운물이 나오는 것을 실물 교육을 통해서 보여 주기 위해 동래 온천으로 수학 여행을 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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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겠다는 내 의견을 말하였다. 한기종 씨도 결국 그것 참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하였다.
나는 아이들에게 미리 이런 말을 해서 내년 3월 “사꾸라”(벚꽃) 필 때쯤 온천도 구경시키고 도시 구경도 시키도록 교장에게 설득하였다. 나는 이 기회를 타서 아이들 인솔자로 따라가 부산에서 전도회를 열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1948년, 기도 주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나는 교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입을 열었다.
“1948년도에 우리는 한국 역사상 크나큰 일을 해냈습니다. 외부의 도움없이 자력으로 튼튼하고 견고한 45평짜리 예배당을 지었습니다. 우리의 피땀어린 노력과 기도의 결과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변두리 어촌인 이 묵호 땅에 수백 명이 모이는 교회가 설 뿐 아니라 해방 후 최초로 국민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큰 일을 하도록 도와 주신 결과입니다.
1948년이 저물어 가는 이 연말에, 저는 여기 모인 여러분들에게 새해인 1949년도를 위한 목표를 세우라고 권하고자 합니다. 올해에 이룬 눈부신 성과에서 그치지 말고 새해에도 계속 밀고 나갑시다. 자, 여러분의 생각에 새해엔 어떤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까?”
설교를 잠시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면서 대답을 기다렸지만 교인들은 큰 관심을 가지고 들을 뿐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새해에 우리가 해야 할 당면한 과제는 외방 선교라고 생각합니다. 외방 선교란 먼 외국에 가서 복음 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복음의 빛이 희미한 외지에 가서 전도회를 개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어떤 도시가 적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말을 멈추고 청중을 살피니 어떤 사람은 대구가 좋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강릉으로 가자고 하고, 또 몇 사람은 서울로 가자고 하면서 저마다 열의와 관심을 표명했다.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제 생각에는 부산이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남한 제2의 도시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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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문인데 서너 사람의 교인들밖에 없다니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 교인 중 몇 사람이 그 곳에 가서 본 것을 전해 준 바로는 실로 딱한 처지입니다. 부산의 복음의 등대가 튼튼해야 남한 일대의 복음 사업에 효과가 있습니다. 항도 부산에서 우리 힘으로 전도회를 개최하여 교회를 세우도록 합시다. 주님 오실 날이 심히 가까운 이 때에 큰 도시가 죽어 있다니 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 협력하여 부산으로 내려가서 이 진리의 빛을 그 곳에도 전하는 또 하나의 큰 일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호소를 끝마치고 나니 모든 교인들이 찬동하며 기뻐하였다. 곧이어 세부적인 일정과 방법을 알렸는데, 부산에는 3월 20일경에 가서 1주일간 전도회를 하기로 하고, 회비는 각자 어른 3,000원, 학생은 1,600원으로 하되, 떠나기 1주일 전, 즉 3월 5일까지 선납하라고 했다. 교인들 중 70명 가량이 여기에 지원하였다.
이렇게 작전을 세워서 부산 전도회가 추진되었다. 그 당시 국민학교 5, 6학년이 16명이었는데, 그들의 수학 여행은 부산으로 정하고, 나는 인솔자로 명목을 세우고 교인들은 학부형의 명목으로 함께 가는 것으로 하였다. 날짜가 점점 다가오면서 내 가슴은 설렜다. 하나님께서 또 하나의 큰 역사를 이루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하며 준비했다.
이 때, 조광숙(주상규 목사 부인) 씨가 묵호삼육국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부산에 사는 오빠 조광은 씨가 동생을 보러 들렀다가 부산 전도회 계획과 진행 과정을 듣고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며칠 만에 다시 와서 이런 얘기를 했다. 즉 부산교회는 적산 가옥인데, 현재 양재학원이 들어와서 예배당을 강제로 점거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빨리 내려가 찾지 아니하면 전도회가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다급하게 일러주었다. 조광은 씨가 경찰서에 가서 얘기를 하니 그들이 하는 말이, 힘이 있으면 밀고 들어가서 차지하는 수밖에 없다면서 방관하는 태도였다고 했다.
나는 이 사실을 교회 앞에 알렸다. 시간을 짜서 갈 준비를 천천히 하고 있던 차에 나는 3월 7일 설교 시간에 이 다급한 소식을 교회에 전하고, 일요일까지 각자의 회비를 완납하여 떠날 준비를 끝내자고 전달했더니, 55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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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들과 학생들이 돈을 준비하여 왔다. 우리는 수학 여행 및 전도대원과 함께 3월 8일 오후 5시에 묵호 항구를 출발했다.
그 날은 군정청에 의하여 묵호 항구에 새 여객선이 첫 취항하는 날이었다. 우리가 전도하러 간다고 하니 당국에서는 우리 배삯을 반으로 할인해 주었다. 배에 오르니, 우리 일행이 흡연의 피해를 받지 않도록 방 한 간을 따로 떼어주었다.
모든 교인들이 항구에 나와서 떠나가는 우리 일행을 배웅했다. 원래 함께 가려다가 미처 경비를 마련하지 못한 교인들은 동행 못하는 것이 서러워 눈물을 펑펑흘렸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하나님이 함께 계셔….” 배에 탄 우리나 배웅하는 교인들이 하나가 되어 찬미를 부를 때의 그 감동! 참으로 성령께서 거기 하감하시는 듯했다.
묵호에서 부산까지는 물길로 천리 길이었다. 영일만을 돌아서 가는 여객선은 그 긴 밤을 쉬지 않고 달려 다음날 3월 9일 새벽 4시에 부산 부두에 도착했다.
6시 통행 금지가 해제되자 나는 대원들을 이끌고 양총일 목사에게 갔다. 이른 새벽에 갑자기 들이닥친 사람들을 보면서 양 목사는 어리둥절 해했다.
나는 양 목사를 보자 다짜고짜 예배당으로 가자고 졸랐다. 나는 양 목사에게 말했다. “목사님, 다름이 아니라 예배당을 빼앗겼다 해서 예배당 찾으러 왔습니다. 교인이 없어 빼앗기셨다는데 교인만 있고 밀고 들어가면 된다지요?”
“그렇긴 하오마는…”
“그러면 목사님이 앞서십시오. 묵호에서 교인들이 많이 왔으니 이번 기회에 건물을 찾읍시다.”
양 목사가 앞장 서고 우리 일행은 그 뒤를 따랐다. 예배당 앞에 가서 양재학교 교장을 찾으니, 젊은 여성이 밥을 짓다가 나왔다. 교장을 찾으니 예감이 다른지 교장이 없다고 했다. 내가 앞으로 다가서며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먼 곳에서 전도회를 하려고 왔는데, 예배당을 보니 웬 책상이 이렇게 가득한가요? 이 책상들을 곧장 치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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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치우겠어요.”
“못 치우면 우리가 치우지요.”
나는 대원들을 향해서 소리쳤다. “여러분, 들어와서 이 책상들을 예배당 뒤 강단이 비었으니 그리로 치우시오!”
“와아!”
모두들 대들어 책상들을 치우는데 35, 6세 가량 보이는 젊은 사람이 나타나더니 몽둥이를 들고 책상 치우는 대원들을 치려 했다. 나는 당시 39세였는데 힘깨나 쓸 때였다. 나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사람의 뒤로 돌아가서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꽉 휘감았다. 그 허리는 가늘어 빠진 것이었다. 그렇게 꽉 쥐고 있으니 제가 아무리 창해 역사라도 꼼짝 못했다. 이윽고 책상을 다 치우고 난 뒤에 그의 허리를 놓았더니 마당에 벌떡 나가 자빠졌다. 때마침 우리들은 부산 경찰서에 가서 수사 주임을 불러왔다. 양재학교 측에서는 의사를 불러왔다. 알고 보니, 내게 허리를 붙잡힌 그 젊은이는 없다고 하던 양재학원 원장이었다.
아마 양재학원 원장 부인인 것 같은 젊은 부인이 “살인 났다”고 하면서 고함을 고래고래 질렀다. 수사 주임에게도 같이 동행한 안용준 씨가 미리 만나서 사정 얘기를 하여 경찰의 도움을 요청한 후였다.
수사 주임은 구경꾼들에게, “안식일교 목사가 고치문(원장 이름)이를 때리는 것을 본 사람 있는가?”라고 물으니 모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보았다고 나섰다. 주임은 그에게 다가가서, 어떻게 때렸느냐고 물으니, 그가 뒤에서 허리를 꽉 잡고 덜렁 들어서 땅으로 내렸다고 하니, 주임이 그 사람의 뺨을 한 대 때리면서, 그것이 어떻게 때린 것이냐고 야단을 쳤다. 이 때 한 사람이 나서더니 주임에게 자초 지종을 설명했다. 그는 교회당 옆에서 자동차 부속품을 파는 사람인데 처음부터 사건을 보았던 사람이었다.
이 사람의 증언을 듣고 나자 주임은 누워 있는 원장과 그 부인에게 야단을 치면서, 신성한 예배당을 빼앗아 사리 사욕을 채우려는 개만도 못한 나쁜 놈들이라고 소리쳤다. 그러고는 하는 말이, “목사님, 이 놈을 죽지 않을 만큼 실컷 패서 보내십시오. 이 놈은 나쁜 놈입니다. 그 동안 경찰국장 배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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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온갖 나쁜 일 했지만 그 경찰국장도 부정을 하다가 유치장에 갔으니 저 놈은 이제 기댈 데가 없는 놈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의사에게 “공정하게 진찰을 하시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의사가 “구타 진찰이니까 맞은 데를 보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고 하면서 옷을 벗기려 하니까, 그는 수족을 오그리면서 보지 못하게 했다. 맞은 데가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사가 청진기를 들고 일어서면서 왕진비를 요청하니, 원장 부인이 억울한 듯 왕진비를 건네 주었다.
경찰이 그 의사에게, 죽지 않을는지 물으니 의사가 씨익 웃으면서“내일은 몰라도 오늘은 죽지 않을 겁니다”라고 농담조로 얘기를 하고는 왕진 가방을 들고 가 버렸다. 누워 있던 원장도 멋적은 얼굴로 부시시 일어나더니 도망치듯 어디로 가 버렸다.
우리는 예배당 안에서 찬미를 열심히 불렀다. 오후가 되니까 양재학교 교장이 부산의 유명 깡패들을 몰고 와서 나를 나오란다.
“왜 나오라는 거요. 할 말 있으면 여기서 하시오.”
“왜 원장을 다다미 속에 넣고 팼는가?” 그들이 온갖 위협과 으름장을 놓았으나 우리 대원 수가 워낙 많은 것을 보고 그냥 가고 말았다. 그 후 관재청 직원들이 양재학교에 매수되어 그쪽 편을 들어 어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거기서 사무원으로 일하는 이종호라는 사람이 늘 우리를 동정하였는데, 10일 후에 관재청에 들어서니까 그 사무원이 나를 붙들고 반색을 하면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공산주의자들인 것이 발각되어 일망 타진 됐습니다”라고 얘기하였다.
부산 예배당을 우리가 완전히 인수하는데 꼭 열흘이 걸렸다. 그 역사를 다 쓰자면 너무도 길다. 열흘 만에 예배당을 찾은 후 전도회를 하는데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도회에서 주상규, 이상록, 김원필, 장상관, 허술련(조정완 목사 부인) 씨, 그리고 그 후에 안을득 씨 가족이 나와서 이들이 영남대회 안에서 끼친 영향과 활동은 참으로 큰 것이었다. 안을득 씨 가정은 후에 안철주, 안삼주 등 활약하는 안수 목사들을 배출한 훌륭한 그리스도인 가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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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회가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데 중선대회장 김명길 목사에게서 전보가 날아왔다. “영남대회 일은 영남대회에 맡기고 전보 받는 즉시 묵호로 가시오.” 전보를 받고 나는 홀로 생각했다. “중한대회에서 나를 파면하면 부산 부두에서 노동하며 부산교회를 지키리라.” 이런 각오를 가지고 나는 전도회를 계속했다. 이 소문이 연합회에 들어가고 회기동교회에 퍼지니, 서울에서 응원대가 여러 명 왔고, 연합회장 배의덕 목사, 이여식 목사 등이 내려왔다.
김명길 목사는 연합회 행정위원회에서 “불법을 행하는 사역자니 파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대회장 말도 안 들으니 대회장으로서 의당 할 만한 말이다. 이 말을 듣고 연합회장 배의덕 목사(미국인 선교사)가 “좀 불법 같으나 죄는 아니오. 다 하나님의 사업이요, 교회 빼앗긴 것 찾았으니 잘 된 일이오”라고 대답하더라고 한다. 영남대회장 정동심 목사가 곁에 있다가 “파면시킬 사역자 내게 주시오” 하고 나서니 김 목사는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사역자만 빼앗긴 결과가 됐다고 한다.
내가 아직 부산에서 전도회를 하고 있을 동안에, 부산으로 부임하라는 발령이 도착하였다. 정든 묵호! 사역자로서 나의 첫 열정을 쏟아 모든 것이 순조롭게 발전되어 자라난 묵호를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으나 여기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역사하신 것으로 믿고 묵묵히 순종하기로 했다.
근 1개월간의 투쟁을 끝내고, 잃었던 교회를 찾은 후, 묵호에서 내려온 대원들이 떠나기 전날 저녁에는 그 동안의 생활을 이야기하면서 석별의 정을 나누는 송별회가 있었다. 1주일 예상하고 내려왔지만 생각보다는 교회 찾기가 어려워서, 가족과 직장을 두고 온 사람들과 학생들이 막심한 고생을 하면서도 열심히 전도회를 돕고 노방 전도에 주력하여 믿음에 큰 담력들을 얻었다.
이날 송별회가 무르익어 갈 무렵에 낯선 할머니 한 분이 와서 양 목사와 둘이서 무엇인가 소근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 대화 내용이 몹시 알고 싶었다. 그래서 양 목사에게 물어 보았다. 양 목사는, 그 할머니에게 아들이 있는데 병이 들어 앓아 누웠으니 내일 와 달라는 부탁이었다고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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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하였다.
나는 갑자기 그 집을 방문하고 싶었다. 그래서 양 목사에게 말하였다. “왜 내일 오랍니까? 오늘 나와 함께 갑시다.”
“내일 오라는데 오늘 가면 됩니까? 내일 갑시다.”
이 말을 듣고도 내 마음은 가고 싶어 못 견디었다. 나는 그가 누군지, 어디 사는지, 또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 곳에 가고 싶었다. 양 목사는 내가 힘있는 어조로 재촉하는 바람에 송별회 중간에 따라 일어나 나를 데리고 그 노인 집으로 갔다. 약 3킬로미터쯤 걸었을까? 우리는 큰 대궐문 앞에 섰다.
안에서는 굿하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니 이것 보게. 굿을 하네. 갑시다” 하며 양 목사가 돌아섰다. “목사님, 안 됩니다. 들어갑시다. 문을 두드리십시오.”
“안 됩니다. 굿하는 데 들어갈 필요 없습니다.”
“아니오, 들어갑시다.”
할수없이 내가 문을 두드렸다. 한 젊은 부인이 나오더니 우리를 보고 놀란 채 서 있다. 들어오시라고도, 가라고도 못하고 주춤하고 서 있다. 내가 대문 안으로 바싹 들어서며 들어갈 것같이 하니 어쩌는 수 없이 들어오란다. 그는 우리를 식모방같이 보이는 제일 작은 방으로 인도했다. 방에 들어가니 한 50되어 보이는 부인이 앉아 있는데, 알아보니 환자의 누님이라고 했다. 내가 “환자를 좀 만나 보십시다” 했더니 그 누님 말이 “지금 잠이 들어 자고 있습니다” 했다. “가서 깨우시오. 우리가 환자 보러 왔으니 환자를 데려오십시오”하고 나는 재촉했다.
지금 무당의 굿은 절정에 달한 듯 징소리,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여 온 집안이 떠나갈 ㄴ것만 같았다. 좀 있으니까 어떤 사람이 환자를 데리고 내 앞에 섰는데 그 키가 6척이나 되는 거인이었다. 그가 와서 내 앞에 말 없이 앉았다. 나도 잠시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다. 앞방에서 북 치는 소리, 징 소리, 진언하는 소리가 우리의 귀를 따갑게 때렸다. 나는 마치 갈멜산에서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치했을 때처럼 마음이 숙연해졌다. 나는 속으로, 이 싸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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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과 사단 사이의 대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환자를 앞에 앉히고 찬미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기도하였다.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니 6척 거인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놀라서 바라보고 있는데, 그는 어디서 몽둥이를 구하여 손에 쥐고 무당들에게 쫓아들어가서 그 몽둥이로 북과 징과 그 밖에 푸닥거리 재료들을 밖으로 후려치면서 내동댕이쳤다.
무당들은 굿하다 말고 날벼락을 맞은 듯 “사람 살려!” 소리를 외치면서 달아났다. 그 다음에는 차려 놓은 음식들을 때려 부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해서 서 있는데, 환자가 갑자기 손에 부엌칼을 들고 나와 사람을 찌를 듯 무섭게 서 있었다. 사람들이 슬슬 피하고 벌벌 떠는데 나도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앞에 다가가서 칼을 빼앗고 방안에 앉혀놓으니, 이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내 손을 꼭 잡고 하는 말이 “선생님,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저는 이제 선생님을 따라가서 선생님과 함께 살겠습니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는 일어나 자기 필요한 짐을 챙기더니 나와 함께 교회로 왔다.
이 환자의 이름은 이기석 씨인데, 알고 보니 옛날 의명학교 2학년을 중퇴한 사람이요, 일제 말엽 교회가 해산되면서 본인의 신앙도 식어져서 세상에서 영화를 찾다가 해방이 되면서 이승만 박사의 눈에 들어 경남 지구 감찰위원으로 임명을 받았다. 옛날로 말하자면 왕의 직속 신하인 암행어사격이었다.
이 사람의 세도가 얼마나 당당했던지 그 당시 경남 경찰국장 박 모 씨의 목을 뗄 정도였고, 그리하여 이기석이라면 경남 일대에서 누구나가 두려워하던 존재였다. 그런데 이런 당당하던 사람이 정신이상에 걸려 드러눕게 되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부인과 누님이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하였다. 푸닥거리가 시작된 후에 이를 막고 싶었으나 그런 용기가 나질 않아 그냥 누워 있던 차에 우리가 찾아간 것이다. 우리가 찬미를 부르고 기도를 하매 용기가 나서 일어나 그들을 쫓아 보냈노라고 술회하였다.
이 저녁에 그는 새로운 정신을 가지게 되었고, 잃어버린 신앙을 되찾아서 믿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그를 따라 교회에 출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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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감회 깊은 송별회 밤에 성령께서 내 마음을 강하게 감동시켜 죽어가는 한 영혼을 살리시고자 하신 이 사실은 또 하나의 위대한 이적이 아닐 수 없었다.
주께 모든 것을 맡긴 사람에게 주께서는 때와 시간과 상황에 관계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종들을 도구로 삼으시어 적합한 시기에 영혼을 만나게 인도하시고 구원의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