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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과의 동행을 회고하며
이청규 (고고학)
사제 동행이라 함은 문자 그대로 스승과 제자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 한마음으로 같은 분야를 연구하여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령으로 보나 사회 경험으로 보나, 더 나아가 가르치고 배운다는 점에 스승과 제자가 동등하지 않은 수직관계에 있어서 언뜻 와 닿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스승이라 하더라도 제자를 권위로만 다스리지 않으며, 제자라 하더라도 스승을 숭배하여 거리를 두지만 않는다면 가능한 표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사제동행을 이야기하고자 할 때, 화자는 스승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으며. 다루고자 하는 이야기는 교육과 연구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시간적으로는 초중고 시절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다른 정년 교수가 그러하듯이 나는 대학 이후에 제자로서 스승과 함께 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대학에서 첫 스승은 삼불(三佛) 김원용 교수이시다.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1947년부터 1961년까지 국립박물관 학예연구관과 관장으로 활동하셨다. 미국 뉴욕대학에서 <신라토기 연구 논문>으로 학위를 하시고, 1961년에 개설된 고고인류학과의 초대 교수로 부임하셨다. 처음으로 <한국고고학개설>, <한국미술사>라는 정식 개론서를 펴내시는 등 고고학, 미술사, 역사학 분야 두루 걸쳐 학계를 주도하신 분이다.
당연히 처음 선생님을 뵙던 것은 1973년 대학 입시 면접 때이다. 김 교수님은 영어로 고고학을 무어라 하는지 질문을 하셨는데, 나는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변명이지만, 당시 고등학교 수업 때 고고학이라는 분야에 대해서 제대로 들은 바 없었다. 다만 국사를 가르치시던 이존희 선생님(후에 서울시립대 교수)이 당시에는 어렵지만, 앞으로 각광을 받을 분야라는 막연한 말씀을 듣고 나의 성적을 감안해서 지원하였을 뿐이다. 정작 지원을 한 전공분야의 영어 명칭 archaeology를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여 지금도 이에 대해서는 자괴심이 막심하다.
1975년 서울 종로구 동숭동에서 관악구 신림동으로 대학캠퍼스가 이전하고, 문리대 고고인류학과는 인문대 고고학과와 사회과학대 인류학과로 분리되었다, 10명 채 안되는 동학년생 대부분은 인류학과로 가고, 그리고 전통문화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동기 김재열과 나는 고고학과에 잔류하였다. 대학에 입학한 후 강의실과 유적 발굴 답사현장에서 선생님과 접하는 기회가 많았지만, 선생님으로부터 본격적인 지도를 받게 된 것은 학부 졸업논문을 작성할 때이다.
당시 선생님은 한반도 구석기에 대하여 관심이 많으셨다. 이미 1960년대 초에 연세대 손보기 교수께서 공주 석장리 유적을 발굴하여 남한에서 구석기문화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하였는데, 고고학과의 교수로서 구석기 연구 성과를 내지 못했던 선생님은 그 아쉬움이 컸던 것 같았다. 그런 상황에서 내게 주신 학부 졸업논문의 과제로 일본 구석기 연구의 성과를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당시 이에 대하여 학계에서 정리 발표한 글이 없어 아쉬웠던 차에 그러한 제의를 하셨던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 학부생으로서 내가 찾을 수 있는 자료가 절대 부족하여, 선생님께서 갖고 계신 관련 자료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손수 자료를 찾으시고, 확보되면 학과 연구실에 있던 나에게 전화로 연락을 주셨다. 선생님 연구실은 다른 건물 4층에 있었는데, 걸어 올라오지 말고 연구실 건물 1층 바깥에 오면 자료를 던져 주겠다 하시고, 실제로 그렇게 자료를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나름대로 논문 형식을 갖추어 원고를 작성하였는데, 선생님게서 내용을 친히 교정을 봐주시고, 학회지에 제출해도 좋겠다는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학부생의 졸업논문이라는 점에서 나로서는 계면쩍어 그렇게 하지 못하였는데, 결국은 그 논문은 원고지 상태로 아직 내가 갖고 있다.
집안 형편도 그러했지만 순진하게 고고학은 유적 현장과 박물관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한 분야로만 생각하여 외국 유학은 생각도 못하였다. 단순하고 편하게 고고학을 하는 길을 택한 셈으로 대학교수로서 재직할 때는 물론 정년을 한 지금도 유학에 대한 아쉬움이 무겁게 남아 있다. 여하튼 유학 생각을 못한 나의 2-30대의 행로는 선생님께서 결정하여 주신 것이나 다름 없었다. 대학원 2년차 때에 대학박물관 기성회직 직원으로 직업으로서 고고학을 시작하였다. 당시 서울 동숭동에서 관악 신림동으로 캠퍼스가 이전하면서 대학박물관은 단독 건물을 갖추지 못하고 도서관 6층 일부를 점유하던 상태이었다.
관장이신 선생님의 명을 받아 책임지었던 업무는 신석기시대 안산 별망패총 발굴조사이었다. 처음으로 조사용역의 실무 책임을 맡았는데 그 당시 조사원으로 함께 참여하였던 노혁진, 이선복, 이남규 등 여러 후배들은 훗날 한림대, 서울대, 한신대 교수로 임용되었다. 외딴 서해안 포구의 구멍가게 살림집에 숙소를 정하고 2주 정도 발굴하다가 마무리가 가까운 어느날 서로 어울려 저녁 때 술자리를 같이하였다. 나는 잔뜩 취해서 화장실 간다고 나아가다 문지방에 걸려 엎어지는 바람에 얼굴에 큰 상처가 나고 말았다. 선생님께 작업 보고차 학교 연구실로 상처난 얼굴로 뵈올 때 꾸중을 각오했지만 아무 말씀 없으셨다.
같은 해 10월 선생님은 사립미술관 연구원으로 가지 않겠느냐고 물으셨다. 선생님은 고고학 뿐만 아니라 미술사에도 깊은 이해가 있으셔서 규모가 큰 사립 미술관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계셨다. 많은 사람이 아는 일이지만, 고고학과 미술사는 작품이나 유물 실물에 대한 이해를 절대로 요구하는 분야이다. 이론만으로 부족하고 실물을 많이 접해서 익혀야 되는데, 진열장에 전시된 상태로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은 물론이다. 선생님은 대학박물관에 있어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보다 많은 미술작품을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으셨던 것이다. 추천하신 미술관은 국립박물관도 소장하지 못한 귀중한 고고유물, 고미술 뿐만 아니라 국내외 현대미술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이미 고고학과 6년 위이고 관악캠퍼스 초대 학과 조교이었던 이종선 선배가 1년 전부터 근무하면서 개관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부담도 적어 흔쾌히 선생님 말씀에 따랐다. 그로부터 6년간 소장품 수집, 관리, 그리고 평가에 이르기까지 미술관이 있는 용인과 재단 사무실이 있는 서울을 오가며 일을 하였다. 업무량이 적지 않아 야간 근무한 적도 적지 않아 힘들어 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상당히 귀중한 고미술품을 관찰 실견하는 귀중한 기간이기도 하였다.
미술관에 근무하면서 1981년 석사과정 4년차에 학위논문을 부랴부랴 제출하였다. 논문 주제는 <세형동검 시기 유적유물에 대한 고찰>로 동 미술관에 소장하고 있던 대구 비산동 출토 청동기가 단서가 되었다. 학위논문을 마친 후 1982년부터 학계의 인적 관계를 폭 넓게 갖고 계신 선생님은 서울대, 서강대, 인하대, 한신대 등 여러 대학의 강사 자리를 추천해주셨다. 담당한 강의는 한국 고고학과 미술사이었는데, 서강대의 경우 수강학생이 4학년이어서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아 수업 끝나고 신촌 맥주집에서 허물없이 자주 함께 자리를 같이했던 기억이 난다.
선생님은 또 한번 나의 행로에 큰 변화를 주신다. 미술관의 연구원으로 자리 잡아갈 무렵인 1984년 1월에 또다시 새로운 직장을 주선하여 주셨다. 제주대학교 전임강사 자리로, 나로서는 연고가 없는 전혀 새로운 곳의 직장이었지만, 이번에도 선생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야말로 고고학을 원초적으로 다시 시작하는 셈이 되었다. 고고학 연구는 유적에 대한 지표조사와 발굴조사의 성과를 토대로 하지만, 연고가 없는 지역 전역에 대해서 그러한 1차 조사를 수행하고, 그 성과를 토대로 논문을 쓰고 발표하는 사례는 그렇게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당시 제주도는 고고학 조사 연구의 불모지나 다름이 없었다. 12년 선배이신 우리 영남대 정영화 교수께서 1970년대에 구석기시대 동굴 유적과 지석묘에 대한 지표 조사를 단기간 실시한 것 말고는 고고학자가 제주도 전역에 걸쳐 장기간 지표조사와 발굴을 실시한 적이 없으므로 학자로서 능력을 발휘할 더없이 좋은 기회인 셈이었다. 1984년 3월에 제주대 사학과에 임용되면서 1995년 9월 영남대학교로 자리를 바꾸기까지 11년 6개월은 그야말로 고고학 조사 현장에 있는 형국이었다.
제주도 전역의 지표조사부터, 신석기시대 고산리와 북촌리 유적, 청동기시대 상모리 유적, 탐라시대 용담동 고분과 곽지리 패총, 고내리 토기공방 유적, 용담동 제사 유적, 그리고 고려시대 법화사지, 조선시대 제주목 관아터 등 전 시대에 걸쳐 직접 발굴한 성과가 있었다. 그러한 조사에서는 당연히 제주대학교 사학과 제자들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았는데, 특히 현 제주고고학연구소 강창화 이사장, 제주문화재연구원 고재원 이사장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그 조사 성과를 토대로 1995년에 나는 <제주도 고고학 연구>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을 작성하여 제출할 수가 있었다.
선생님께서는 당연히 1961년도 학과 창설 때부터 제자를 육성하셨으므로 나와 같은 73학번 어린 제자에게까지 관심을 보여주시기 쉽지 않은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은 남다른 표현 방식으로 애정 어린 관심을 보여주셨다. 정년 1년 앞서 1986년에 저술하신 <한국고고학 개설> 제3판을 보내주셨는데, 책의 뒷페이지 판권 란에 도장을 찍은 대신, 당신 얼굴 모습을 그려 넣으신 자상함과 재치를 보여주셨다.
서울대에서 정년을 맞이하신 1987년에는 청화채로 친히 그림과 글을 쓰시고 가마에서 구워낸 백자 필통을 제자들에게 선물하셨다. 공직을 관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신다는 뜻의 <歸去來>라는 짤막한 글과 함께, 뒷짐을 지고는 걸으시는 거사의 모습으로 당신 자신의 그림을 그리셨다.
또한 다른 대학에 석좌교수로 계시면서 1991년 30주년 학과 개설을 기념하는 청화백자 필통을 손수 제작하시고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셨는데, 겉면에 쓰신 글은 < 도약을 위해서>이고 그린 그림은 개구리 한 마리이었다.
1992년 설에 제주도산 옥돔 건어물을 보내드렸더니 바로 역시 손수 글과 그림을 그리신 엽서를 보내주셨다. 글은 <遠送歲珍 感慰無極 祝願 李敎授 新歲 大吉 壬申 一日 三佛庵>, 그림은 소나무 한 그루이었다.
선생님은 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몇차례의 작품전을 개최한 문인화가, 여러편의 수필집을 출간하신 수필가로서 명성이 높으셨는데 그러한 재능을 제자 사랑에 활용하셨던 것이다. 그렇게 바삐 사시면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고 연구실 책상머리에 유서 봉투를 붙여 놓고 계신 일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그만큼 건강을 돌보지 않고 열심히 사시다가 급기야는 1993년 고희를 갓 넘기시자마자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선생님은 당신께서 돌아가시면 화장을 해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강물에 뿌려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의논 끝에 구석기 유적으로 유명한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들판에 화장한 선생님의 유해를 산골하였다. 그리고 수년이 지나 그 자리에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적극 주도해서 연천군의 협조를 받아 유적 공원 내에 선생님 흉상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생전의 선생님 의지에 반하는 것이지만 제자들은 선생님을 오래 추모하기를 원했던 바에 비롯된 것이다.
선배이자 박사과정 지도교수인 두 번째 스승은 희정(希正) 최몽룡 선생이시다. 1946년생이시니까 나보다 8살 위이시므로 형님과 같은 분이다. 선생은 1972년에 전남대학교 전임강사로 임용되어, 하바드 대학에서 학위를 마치신 후 1981년까지 근무하시다가 서울대로 자리 옮기셨다. 나는 선생님 권유로 1977년 대학원 1학년 때에 활동하고 계신 전남 지역의 여러 유적, 청동기시대 나주 보산리 지석묘 유적, 삼국시대 나주 대안리 석실분, 조선시대 고흥의 발포진 유적 현장의 발굴에 참여하였다.
그중에 나주 대안리 석실분은 판석조로서 당시 전남지방에서 발견 사례가 많지 않은 백제 사비시대 7세기 고분이다. 나주 지역은 백제에 병합된 마한의 대형 옹관묘군이 집중 분포하는 곳으로, 그런 곳에 확인된 부여 지역의 백제계 석실분에 대해서 묻힌 사람이 토착세력인지 백제 중앙에서 파견된 엘리트인지 논란이 될 수 있었다. 1978년 미국 하바드 대학에 학위과정 하시러 부랴부랴 떠나시면서 발굴보고서 원고를 내게 맡기셨는데, 선생님이 말씀한 의견과 달리 묻힌 사람을 외지에서 온 지방관일 가능성이 많다고 보고문 결론을 작성하여 제출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나이에 무모한 반론이었는데, 선생님은 화가 나셨을 법하지만 내내 전혀 내색을 하시지 않으셨다.
선생님께서는 슬하에 3형제를 두시고 사모님과 함께 당시 광주 산수동 공무원의 소형 아파트에 거주하셨다. 어느 날 광주 시내에서 저녁 늦게 회식을 마친 후 댁에서 자게 되었는데, 자제분과 사모님은 건너방에서 자고, 나를 선생님과 함께 안방에서 자게 배려하셨다. 워낙 후배 제자를 친구처럼 스스럼 없이 대해 주시면서도 존중해주는 깊은 마음의 발로로 생각되었지만 사모님에게는 더 없이 송구스러운 상황이었다. 과연 나는 대학의 제자들을 어떻게 대하였는지, 아끼는 마음이 제대로 있기나 하였는지 반추하게 되는 일화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선생님은 전남대학교에 재직하신 동안 전남 전역에 대한 지표조사를 통해서 문화재 지명표를 작성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여 지역고고학 연구를 몸소 실천하셨다. 내가 제주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제주도 전역의 지표조사부터 시작한 것은 선생님의 선례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한 선생님은 지역 현지의 발굴조사 성과를 토대로 학위논문을 작성 제출하셨는데, 나도 은연 중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같은 방식으로 학위논문을 완성하였다. 물론 서구 이론을 숙지하시고, 본격적으로 한국 고고학에 적용해서 설명하신 점은 내가 도저히 따르지 못한 차원이었다.
선생님은 호남지역의 지석묘를 조사성과를 토대로 하바드대에서 <영산강 유역의 지석묘 사회>라는 제목의 학위논문을 제출하셨다. 서구의 신진화론의 관점에서 한반도 지석묘 사회를 취프덤(chiefdoms) 사회 혹은 족장사회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셨는데. 1990년대 중반까지 고대사학계는 물론 고고학계의 상당수 연구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2천년 이후 지석묘의 새로 구조와 형식의 사례가 발표되면서, 선생님의 족장사회론은에 대해서 상당부분 동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나의 경우 제주도의 지석묘 조사는 물론 선생님 추천으로 1986년 1987년에 전남 지역의 보성강댐 수몰지역 지석묘 발굴을 할 수 있었다. 또한 2000년대 이후 영남 지역의 새로운 발굴성과에 힘입어 같은 취프덤 사회에 속하면서 청동기시대 지석묘는 족장사회, 초기 철기시대 청동기 부장묘는 군장사회라는 관점을 갖게 되었다.
선생님은 서구 고고학의 이론을 소개하기 위해서 번역에도 힘을 기울이셨다. 대표적인 역서로 브라이언 페이건의 <인류의 선사시대>(1987), 조나단 하스의 <원시국가의 진화>(1989), 그리고 찰스 레드만의 <문명의 발생>(1995) 등이 있다. 유학 경험 없이 1년 단기간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연수에 그친 나로서는 정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이 관심을 가지신 서구의 현대고고학에 대해서 충분히 숙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있다. 뒤늦게나마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렌프류와 스카레의 <고대문명의 이해>, 리펑의 <중국 고대사>를 번역 출간하고, 부르드뱅크의 <지중해문명의 형성>을 번역 작업을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1987년 선생님은 한국상고사학회를 창립하여, 1995년까지 회장으로 역임하셨다. 고고학과 역사학의 학제간 연구가 절실하다고 생각하셨던 터에 특유의 추진력으로 이루어 내신 것이다. 학회 창간호는 1988년에 발간되었는데, 나는 <남한지방 무문토기문화의 전개와 공렬토기문화의 위치>라는 논문을 게재하였다. 이 논문은 제주도 최남단 대정읍 상모리 유적의 발굴성과를 토대로 그동안 남한 전지역에 걸쳐 다루지 못했던 청동기시대 무문토기문화의 전개과정을 살피는 논문이었다.
상고사학회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한국고고학사전을 편찬하는 일이었다. 한국고고학회에서도 엄두를 못 낸 작업을 추진한 것인데, 사전 편찬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것은 물론 그 이후 각 시대별, 분야별로 고고학사전이 지속적으로 편찬하게 된 계기를 선생님게서 만드신 것이다. 내가 동 학회 부회장과 회장을 맡았던 기간에 한국 고고학 사전(2001년)과 청동기시대 고고학 사전(2004년)이 발간되었다.
직접 지도하신 교수는 아니지만, 1995년 이후 영남대에서 25년을 봉직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스승과 같은 선배로서 석심(石心) 정영화 선생님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 유학하시고 1972년 귀국해서 영남대에서 1973년부터 재직하셨는데,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서울대로 출강한 1974년 2년차에 서양고고학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선생님께서 영남대박물관 건립에 애쓰신 일, 그리고 영남대 앞 임당동 고분의 발굴에 주력하시던 일을 통하여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위상을 전국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리셨다. 특히 대학박물관이 최상위 활동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신 것은 선생님의 뚝심과 에너지가 발현된 결과이다. 그 결과 내가 후임 박물관장으로 일하던 2002년에 대한민국 최우수 박물관으로 선정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술을 좋아하셔서 밤새 술자리를 같이 하신 적이 많은데, 그럴 때마다 격의 없이 대하여 주신 턱에 어렵지 않게 12년 오랜 기간을 모실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억나는 것은 BK사업 일환으로 고대도시 경주의 보존과 활용이라는 주제 연구차, 2000년 12월에 이탈리아 로마 답사를 대학원생들과 함께 선생님 모시고 10여일 답사를 간 기억이 또렷하다. 로마 전역을 대중교통과 도보로 다니면서 보는 것도 많았지만, 밤낮할 것 없이 선생님과 동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기억이다.
정년한 후 지금 새삼스럽게 세 분 선생님께서 나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셨던 것을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된다. 김원용 선생님께서는 귀중한 가르침도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직업으로서 고고학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시고, 최몽룡 선생님은 고고학을 하는 방식을 몸소 알려 주셨다. 그리고 정영화 선생님은 수준 높은 박물관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신 잊지 못할 스승이신 것이다. 세분이 베풀어 주신 것을 비교해서 나는 정작 제자들에게 해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할 때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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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수님, 귀한 글 고맙습니다. 학문의 출발부터 오늘에 오기까지를 차분히 그려주신 덕분에 교수님의 세계도 함께 보게 됩니다. 다른 이에게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더욱이 저는 전공이 인접 학문이라 말씀하시는 분들을 선명히 그려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습니다. 삼불 선생님의 수필집, 시묵화집을 보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삼불 선생님께서 소설도 쓰시고 싶어하셨던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정영화 교수님께는 얼마전에 전화드렸었습니다. 복된 스승님 밑에서 복된 제자가 나타났으니..... 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오랜 부담에서 벗어나심도 함께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사진 골고루 챙겨 주셔서 더욱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