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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속죄에 관한 옹졸한 사상은 뒤늦게 시정되었다
Ⅰ. 속죄의 이중적 이해가 불가피함
1. “행위”와 적용은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우리는 수십년간 우리를 귀찮게 하던 속죄의 초기의 옹졸한 사상에 관하여 좀 더 상세하게 기록해야겠다. 이것은 이 시점에까지 미루어왔다. 왜냐하면 그것은 1894년(1888년 총회 6년 후)까지 의미 있는 인쇄 형태로서 사실상 교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대다수의 전체적인 강조로 “대속죄일”과 거기에 포함된 일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속죄의 탁월한 행위에 비하면 모두 부수적이었다. 대속죄일 사업은 그의 승천 후에 항상 계속된 그리스도의 하늘 중보의 봉사의 “첫째 국면”에 뒤따라 온 것이다. 그는 그가 십자가 위에서 우리 죄를 위하여 행하신 속죄의 희생적 행위의 은사를 회개한 자들에게 계속 적용하고 계신다. 두 사상, 즉 “행위”와 “적용”사이에 정당한 논쟁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혼돈이 있어서도 안 된다. “심판의 시간”은 하늘에서의 우리 주님의 중보의 봉사의 마지막 혹은 “두번째 측면”이요, 갈바리의 속죄의 행위와 그 공덕의 계속적인 적용의 결과요, 완성이다. 우리는 정당한 관계에 있어서 이 두 국면을 이해하고, 명백히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첫째 것 근본적 행위와 준비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땅히 00하게 그리고 참으로 최고로 인정하고 강조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 영적 선조들 중의 어떤 이들이 실패한 것이었다. 저들은 근본적인 핵심, 속죄의 첫째 국면, 골고다의 사건을 무시했다. 물론 두가지 국면의 모두 모든 것을 포함하는 속죄의 큰 범위 내에 들어왔고 우리 구원에 필수적이다.
2. 종교계에 유감스런 인상을 남김
우리의 초기 재림 교회 목사들 중에 대부분이 수십년간 마지막 혹은 심판의 시간에 대한 속죄에 관하여 은혜스럽게 저들의 강조를 제한한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 결과로서 재림 신도들은 기독교계에 의하여 슬프게도 회피할 수 없이 오해를 받았다. 즉 전체적인 강조를 유감스럽게도 단순히 첫째 국면 십자가에 죽으심에만 두고 있던 기독교계에 오해를 받았다. 이같이 재림 교회밖에 있는 무리들은 이 마지막 시대에 강조하도록 되어있는 큰 심판의 시간의 클라이막스를 인식하지 못했다. 누리 교회의 초기 수십년간에 다른 교회들에서 일찍이 이것을 생략한 결과로서 재림 교인들은 십자가의 행위로서의 속죄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들에게는 그것은 무서운 이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도교 신자의 울타리 안에 우리를 넣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다. 저들에게는 그것은 무서운 이단이었다.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의 울타리 안에 우리를 넣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저들은 우리를 적그리스도적 교파로서 그언 유로 우리를 보았다. 그러나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하나의 중대한 보충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교회의 가장 권위 있는 문서인 예언의 신서적들 전체로의 속죄의 두 국면들 혹은 특성들의 참된 관계에 관한 균형진 강조를 유지해 왔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 어떻게 재림 교회가 이 근본적인 진리에 관한 여러 가지 견해에서 최후 일치된 견해에 이르게 되었는가 그리고 언제 어떻게 이 초기의 제한된 속죄관이 조만간 교정되었는가의 이야기를 탐구해 보자. 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1844년과 그 이전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Ⅱ. 1844년 기대는 땅에서 하늘로 높혀 짐
1. 기대의 초점이 옮겨짐
우리 조상들 중에서 갖게 된 속죄문제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1844년 이전의 성소관의 변경된 배경을 회상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Millerite 운동의 두 주요 시대는 1843년고 1844년이 있었다. 두 번째 국면에서 기대의 초점은 1843년 유대력1844년 재림을 위한 특별한 날을 정하지 않았다. 다만 밀러 자신의 술어대로 1843년 내에 그 때에 하는 말로 사용했다. 반면 1844년 동안에 그리스도께서 지성소 혹은 하늘들의 하늘에서 그 예표상의 대속죄인에 기다리고 있는 당신의 백성들을 축복하시려고 오실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기대였다. 저들은 이것이 7월 10일의 24시간에 일어날 것으로 믿었다. 즉 참 유대인의 시간, 1844의 양력 10월 22일에 일어날 것으로 믿었다. 저들은 이것이 고대하는 재림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2. 1843년 불로 땅의 멸망을 예상한
1843년 국면에서 2300년 끝에 성소의 정결은 홍수 전 지상이 물로 멸망한 것과 같이 주로 불로 인한 땅의 멸망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저들이 믿기는 성소의 정결은 모든 죄와 더러움에서 교회를 정결케 함도 포함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1843국면의 주 강조점은 지상과 그곳을 중심으로 한 사건에 집중되었다.
3. 1844년 하늘 성소에서 제사장의 출현
그러나 1844 국면에서 한 새로운 허실이 맨 앞에 나타났다. Millerite 학자들에 의한 모세의 상소와 그 봉사에 관한 광범위하고 강렬한 연구의 결과로서 그 일년간의 봉사들은 큰 복음의 예표적인 실제들의 한 상징인 것이 드러났다. 1844년에 칠월 운동에 있어서 Samuel Snow와 Charles Fitch뿐만 아니라, George Stores와 12명의 지도자들 Pearcey, Southeard, Himes, Hutchinson, Litch, Hale, Miller까지 포함하여 논문들과 공중 설교를 통하여 Millerite 무리들의 관심은 하늘에 있는 성소와 그 곳에서 진행 중인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이끌렸다. 저들은 처음에는 단지 하나의 단순한 봉사만을 알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들은 그의 재강림으로 당신이 기다리는 백성을 축복하시려고 놀라운 대속죄인의 24시간 동안에 하늘들의 하늘 혹은 지성소에서 주께서 강림을 기대했다. 저들은 열열하고 엄숙한 기대 속에 이 놀라운 사건을 기다렸다. 저들의 희망은 모두 좌절되어 버렸다. 미래는 황량하고 캄캄하고 번잡스러웠다.
4. 지성소에서 나오시는 대신 들어가심
마음을 찢는 그 큰 실망 후에 N.Y.주 Port Gibson에 있는 Edson의 헛간에서의 끈덕진 기도 후 23일 다른 아침 시간에 하나님께서 저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확실히 응답하실 것이라는 깊은 확신이 왔다. Hiram, Edson, O.R.L.Crosier, Dr. F. B. Hahn는 그 다음에 10월22일의 기대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뒤따른다. 열렬한 남자 트리오 저들은 이전보다 더욱더 그 성서가 정결케 되는 것은 이 땅이 아니요, 하늘 성소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성소의 정결은 이 땅에서 진행되지 않고 하늘에서 처리되었다. 그 결과적인 확신은 하늘에서 온 확신과 같았다. 그리고 열심히 연구하여서 그것이 알려졌을 때 이전의 혼돈되고 모순 된 묘사를 명백히 하게 되었다. 하늘에서 그리스도의 제사장 봉사는 더 넓은 의미로 명료해졌다. 엣 모세의 상징의 2번째 국면의 예표는 실지로 성취의 진행 중에 있었다.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께서는 저들이 종전에 기대했던 것같이 지성소에서 나오는 대신 들어가셨다. 이 결론은 저들은 예언의 신이 1844, 12월에 나타나기 시작하기 전에 성경으로서만 도달했던 것이다. 영감의 승인은 그 후에 1846년에 왔다.
5. 그리스도의 이중 봉사는 명백해졌다
그리스도의 봉사는 이중 봉사였다. 그것은 이제 수정처럼 명료해졌다. 하늘 성소의 정결은 참으로 시작되어 그 당시 진행 중이었다. 저들은 그것이 그 예표 중에 실지로 지시된 것임을 깨달았다. 저들의 종전의 지상에 그리스도의 재림의 기대는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성소 진리는 그 때 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했다. 그것은 이해 할 수 없었던 실망의 비밀을 푸는 열쇠였다. 그것은 단 8:14의 2300년의 문제에 대한 해답이었다. 그것은 뒤따르기로 된 세째 천사의 기별의 선포와 첫째 천사의 기별을 함께 묶는 고리였다. 그것은 심판시간 선포의 뗄 수 없는 결과였다. 그것은 이해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해했을 때 그것은 인류 앞에 저들의 미래 증거의 전체 코스를 형성했다. 결과적으로 그것을 이해함은 필수적이었다. 그러므로 저들은 빛과 이해력을 의심 없이 일년 중에 포함된 특별한 행사인 예표적인 대속죄일의 끝이 아니요 다만 시작이었다. 그 혁신적인 사상은 저들의 실망에 분명한 빛을 던졌고 미래는 희망으로 가득 찼다. 그리스도는 실제로 예표가 요구한 것을 참으로 성취하고 계셨던 것이다. 저들이 확신한 것은 주께서 하늘 성소의 정결을 완성하기 전에 상당한 기간이 요한다고 믿었다. 그 때까지는 주께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재강림하시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개략이었다. 그것은 새 빛이었다. 성소와 그 정결은 하늘에서 있다는 것, 이것은 예표적인 대속죄일에 지금 실제로 진행되고 있다. 그 귀한 최초에 쓴 32쪽의 Hiram Edson의 원고에 그 이야기가 있다. 거기에 기록하기를 하늘 성소에 관한 강조는 칠월 운동을 통하여 줄 곳 뛰어난 것이었다. 칠월 운동으로 돌아가서 불로 땅이 동시에 정결케 된다는 사상을 어떤 이들이 1843년 밀러 사상에서 시작된 것의 잔류 자들로서 아직도 지속되었다. 그러므로 칠월 운동관은 둘을 혼합한 일종이었다. 빛은 밝아오고 있었다. 고로 칠월의 이해는 전후 사상 사이에 있는 변천 단계의 일종이었다. 그것은 절망 전과 실망 후의 것이다.
6. 결론이 1846년의 “샛별”에 인쇄 출판됨
Port Gibson이나 Canandaigua에서의 수 주간 혹은 수 개월간의 히브리서 특히 8장, 9장의 열렬한 연구에서 옥수수 밭에서 Edson에게 왔던 빛과 확신을 강화시키고 명료케 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늘 성소의 지성소에 정결케 하기 위하여 들어가셨다. 저들의 연합 일치된 결론은 Crasier등 일단에 의해 기록된 논문 형식으로 구체화되어 1845년 뉴욕 주 Canandaig에서 샛별지네 처음 나타나고 Chia주 Cincinnati에서 그 후에 1846년 2월 이 특별 호 샛별지에 나타났는데 이것이 광범위한 유포와 우수함 때문에 더욱 유명했다.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새로운 사상 그리스도께서 하늘 지성소에서 나오는 대신 들어가셨다는 그리스도 제자들이 십자가시와 그 후에 실망 후에 메시야 초림의 실제 사명과 목적에 관한 사상의 변리가 있었던 것 같은 혁명적인 발견이었다. 이같이 두 개의 역사적인 실망 1844년에서는 물론 기독교 시대의 싹트는 시기에 있었다. 이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후자는 전자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지성소에서 나오시는 대신 들어가심에 관한 Crosier개인적인 깊은 감명은 그로 하여금 이렇게 기록하도록 했다. 성소 정결의 의미가 무엇임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O. R. L. Crosier, The Daily Messenger, 11, 22, 1923. p. 22).
Ⅲ. 옹졸한 속죄관이 1846년에 고안되었다
1. 속죄와 신성에 관한 논쟁
자주 언급한 바와 같이 초기 안식일 재림 신도 중에서 발전된 신성에 관한 삼위일체의 초월적인 진리와 더불어 행위에 대한 속죄의 관계에 대한 관계로서 이 두 논쟁들은 서로 묶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기억하시겠지만 그 당시 이들은 피차 상대편 견해에 낙인을 찍지 않고 자유 임의대로 믿는 분야로서 취급되었다. 그 당시에 연합 강조점은 세째 천사의 교리적인 특수성이었다. 첫째 범주에서 반 아리안의 오해로 그리스도는 시작이 있고 고로 피상적인 생명이요, 영원한 선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Christian Connection에서부터 왔고 그 중에 소수가 이전에 밀러 운동에 가담 했었고 이리하여 1844년 전까지 또한 그 당시 이 아리안 사상을 가진 여러 종교 단체에서 부활된 것에서부터 왔다. 이것은 여러 단체에서 아주 널리 퍼져 있었다. 어떤 이들만이 이 그릇된 경해를 강조했다. 그러나 조만간 저들은 상당히 소란스럽게 되었다.
2. 지성소에 들어갔고: 사단은 도망간 양
속죄에 관한 두 번째 오해(우리가 여기서 좀 더 충분히 묘사해야 할)가 1844년 이후 성소와 그 봉사에 관한 새로 발견된 빛과 관련해서 생겼다. 이것은 본질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는 두 개의 큰 구분이 있다는 것이었다. 저들은 그리스도께서 1844. 10. 22에 그의 하늘 봉사의 둘째 국면에 들어가서 이같이 그 때 지성소에 들어가서 인류 은혜의 시간이 끝나기 전에 거기서 속죄 사업을 이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재강림하시지 않는다. 그것이 이제 명백하다.
성소진리를 공개함에 있어서 다른 주요점은 당시 일반적 사상이었던 도망간 양을 그리스도에 관한 또 다른 상징이라고 하는 대신 사단으로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죄를 최후로 근절시킴에 대한 명백한 죄의 책임과 징벌에 관한 확실한 상징이었다. 물론 거기에도 어떤 모호한 점도 있고 처음에는 아무도 정확히 말하지 못했다.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서는 시간이 요했다.
3. 발견한 것을 책 형태로 출판함
그러므로 성소에 포함된 문제는 Edson, Crosier, Hahn의 열렬한 연구의 주제였다. 그리고 본바와 같이 이 연구는 10월 22일 대실망 직후에 뒤따랐다. 저들이 발견한 것은 이미 본바와 같이 출판물 형태로 출판되어 실망한 형제들에게 그 결과를 증거 하기 위하여 먼저 뉴욕 주 Canandaigua의 “새벽”에 그리고 그 후에 Cincinnati, Ohio에서 “샛별”에 출판되어 더 멀리 전파되었다. 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아직 분명치 않고, 확립되지 않은 여러 가지 세목들이 있었다. 이와 관련한 점들에 관하여 완전한 연구를 위한 충분한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이들에 관하여 통일된 일치가 없었다. 그것이 주로 고려를 위하여 제시되었다. 그리고 Crasier의 속죄를 제사장만의 사업이라는 제한된 사상은 이 미결정한 점 가운데 하나였다.
4. 최후 속죄를 제사장의 봉사에 제한함
이 점에 관해서 Crosier가 말한 견해는 유대인을 위한 예표적인 00의 국가적인 속죄할 죄를 도말하기 위한 것이었고 0년 일치 그 특별한 대속죄일에 대제사장에 의해서만 행해졌다. 그리고 이 행사는 지성소에서만 대제사장의 기능에만 제한되었다. 그것을 개인을 위하여 개인적으로 죄를 사하는 0일의 속죄와는 다르다고 그는 확증했다. 그릇되게 주장하기를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동안 그가 우리 죄를 위한 제물로서 갈바리에서 대신 죽으실 때 거기서는 제사장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Crosier는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 후에만 그의 제사장직에 들어가셨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때에도 그는 1844년 10월 22일 후까지는 소죄의 그리스도의 특별한 사업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그는 바늘에서의 대속죄일을 지상에 계실 동안 십자가에서 죽으심, 혹은 속죄의 사업의 행위와 완전히 분리시켰다. 여기에서 그 강조점은 첫째 것에 두었다.
5. 출판물은 그 후에 도전을 받았다
이 모호한 견해는 James White이 1850년 Advent Review 9월 호에 정보를 제공하여 더 깊이 연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1846년 Crosier의 Day Star 논문 “성소”를 부분적으로 다시 인쇄하여 포함시켰다. 사람들은 그 당시에 빛을 위하여 아직 연구하고 있었다. 요약하면 이상이 한때 유행했고 60년대, 70년대, 80년대 초에 우리 교회 서적 중에 어떤 것에 기어들어 왔던 이 이론의 기원이다. 그러나 또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책들을 저자들의 개인적 견해를 제시한 것이지 교회에서 채택한 견해가 아니었다. 교회는 아직 이 점에 관한 합의를 보지 못했다. 그룹 코의도 그것에 관해 채택한 일치된 속죄를 부인한다는 것을 증거 하는 재료로 사용되었다.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이것은 두가지 이유 중의 하나였다. 뒤에 우리를 적그리스도의 단체로서 분류하게 된 이유 - 다른 하나는 그리스는 영원한 신성을 부인하는 아리안 사상이다. 이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어떤 부수적인 특징들에 관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이제 주목해 보자.
Ⅳ. Crosier의 글을 재판한 화잇의 목적
1. 성소 문제가 아직도 검토 중이었다
1853년에 한 인쇄된 조각이 1850년 제임스 화잇의 Advent Review 중 팔다 남은 것들을 팁으로 주었던 것으로 다행스럽고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 “주의”가 적혀 있다.
O.R.L. Croseir가 쓴 성소에 관한 논문은 우수하다. 성소문제는 주의 깊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과 희망의 기초를 놓는다. 제임스 화잇은 이것은 분명히 계속적인 연구를 위한 도전으로서 그렇게 많이 부탁한 것이다. Croseir의 제시의 주요점은 건전하지만 성소 문제의 어떤 다른 점들 특히 속죄의 더 넓은 관계들은 아직도 검토 중이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마지막 말은 아직 하지 않았다고 인정되었다. 저들은 아직도 빛을 바르게 찾고 있었다.
2. 전진하는 빛 가운데 걸어가라고 권면했다
제임스 화잇은 그의 “A Word to the Little Flock(1847)”에서 이 인도하는 원칙을 건전하게 제시했다.
“우리가 거룩한 도성을 향하여 앞으로 여행할 때 우리의 타고 있는 등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번에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우리가 만일 한번에 모든 것을 명백히 볼 수 없기 때문에 한 적은 빛을 거절한다면 그것을 우리 하늘 지도자를 불쾌하시게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흑암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빛을 사랑한다면 그것을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것이 주님의 뜻일 때에 즉시 그는 빛을 증가시켜 주실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복된 성서의 열려진 진리 위에서 잔치할 것이다.” 그것이 화잇 목사와 그의 동료 기초를 놓은 선조들이 전진하는 빛 가운데 걸어가려고 애쓸 때의 훌륭한 열린 마음의 태도였다. 그 기별은 명백했다. 빛은 조금씩 점진적으로 밝아온다. 주께서는 반드시 저들을 앞으로 인도하신다. 이것을 우리 개척자들은 인식했다. 그리고 이것을 저들이 느끼지는 모든 진리, 속죄에 관한 저들의 이해를 포함하여 이 적용시키려 했다.
3. 리뷰지에 재판한 목적
Advent Review의 5논제에 있는 출판 조항에 수록한 그의 목적에 대하여 제임스 화잇은 말하기를 “우리는 재림 사업의 지도자들의 저서에서부터 많이 인용하겠다. 그리고 저들(제 일일 재림 신도들)이 담대히 선언하고 세상에 출판했던 것을 보여주겠다. 우리 과거 경험 중에 큰 지도적 재림 운동에 예언적 성취와의 관계, 같은 견해를 보여 주겠다”(Advent Review 1권 8월 1850년 p. 1).
이 목적을 위하여 그는 진리의 소리에서 9번을 인용하고 Advent Herald에서 일곱 번 재림 증언과 샛별에서 각각 2 번 Hope Israel에서 2번 “재림 거울” “4째 천사의 소리” “재림 방패”에서 각각 1번씩 인용했다. 이것들에 대한 최후의 견해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4. Croseir 성소관의 배경
Advent Reveiw에 인용한 항목들은 안식일에 관한 J.B.Cook에 의한 논제뿐 아니라 닫힌 문에 대한 6 의미 있는 참고 절(그것을 이해하면 그 때 변천 단계에 있었던 것 같다 포함했다. 이 모든 것 중에 Crosier가 쓴 두 개의 논제가 성소에 나타나 있다. 1846년 “새벽별” 특별 호에 발췌한 것) 인쇄된 Crosier의 두 번째 논제일 예리한 구분이 개인적인 00속죄와 죄를 도말하기 위한 국가적 속죄에 예리한 구분이 있다(O.R.L. Croseir op. cit. 1권. No. 3 9월 1850년 p. 45-47). 그것이 뒤에 오는 모든 것의 기초이다.
5. 갈바리에서만 속죄 이론을 대항하기 위해 마련함
두 번째 Crosiera의 논문의 이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의 목적은 하나님의 어린양이 숨을 거두실 때 속죄는 갈바리에서 이루어졌고 완성되었다는 보편적으로 주장해오던 교회들과 세상의 신조를 반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Crosier가 완강히 주장한 이 견해는 하나님의 권위에 의하여 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옳지 않았다. 그리고 이 논리 6가지 미숙한 제의의 연속을 통하여 전복시키려고 애썼다. (1) 속죄는 갈보리에서 이루지 않았다. 그것을 제사장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나 그것은 제사장이 피를 드릴 로마 군인들이었다. (2)희생을 죽이는 것은 속죄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죄인이 희생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속죄를 향한 후에야만 된다. (3)그리스도께서 속죄를 행하기 위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확실히 부활하신 후까지는 이것을 하실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4)그의 부활 후에 속죄라고 부를 수 있는 아무것도 지상에서 행하신 기록이 없다. (5)그리스도는 땅에 계신 동안에 속죄를 하실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땅에 계셨지만 제사장이 되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6)그러므로 그는 그가 승천해서 자기 피를 가지고 우리를 위하여 하늘 성소에 들어가실 때까지는 속죄할 수 있는 본질과 범위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았다.
Ⅴ. Crosier의 논문은 진리를 찾기 위한 계속적인 연구의 일부가 됨
1. 시간과 이유가 설명했다
이 잘못된 이유를 검토함에 있어서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이 말은 일요일 재림교 기관지 “샛별”에서 발췌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처음으로 우리 교회 밖에서 출판되었다. 상당수의 시험하는 진리에 합치된 견해를 갖게 된 1848년 안식일 회의보다 2년 전에 출판되었다. 그 성소 연구 중 이 속죄부분은 그러므로 그 범위 내에 들지 않았다. 둘째 그것은 최초로 출판 된지 4년 9개월 후에 재판에 대한 제임스 화잇의 특별한 추천이나 특별 승인 없이 “샛별”에서부터 재판으로서 화잇 목사에 의하여 재판되었다는 것. 그것은 그 시대의 모형으로서 기록한 일부였다.
2. 두 개의 중대한 진리가 Crosier에 의하여 선언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주요한 Crosier의 공헌은(성소진리에 관한) 첫째, 승천 후에 하늘 성소에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관하여 두 국면 혹은 연속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을 “성소”와 “지성소” 혹은 국변들 각각 연속적으로 있다.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먼저 1844.10.22에 둘째 국면, 지성소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두번째 중요한 진리는 대중의 신조와는 달리 “( )양”은 단지 또 다른 그리스도의 상징이 아니라 Asasel, “마귀”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것 또한 건전한 최종적인 결론의 기초이다. 이 진리의 원칙들은 그러므로 기초적이요 영원히 보존된다. 어떤 세부적인 면은 부정확하고 더욱 주의 깊이 넓은 연구와 검토를 해야 할 분야로 남겨두었다. 결론에 도달하기 전에 항상 상당한 토론이 있었고 있다.
3. 속죄의 “행위”대 “날”
역시 강조해야 할 것은 대중적인 제한된 속죄관-항상 십자가의 행위(사건)에만 제한해 왔다-에 반격을 가하기 위한 고심하에 이 초기 새빛을 위한 연구자들은 예표적인 속죄일에 하늘성소에서 대제사장만의 임무를 확립하려는 노력 중에 그 추세와 반대편 ( )에 기울어졌다- 이리하여 십자가에서의 속죄의 최초의 행위를 간과하고 제외하여 (승천하여 그리스도께서 봉사할 은공, 재고 예표적인 속죄일에 장면 심판시에 절정에 달할 속죄행위를 간과하고
4. 정화하고 완성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결론적으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초기의 부정확함-어떤 명백한 엘렌 화잇의 선언과 직접 반대되는- 진리 탐구의 일부분이었고 비방할 수 없는 진리를 형성한 이 견해를 발견하고 확립하는 과정이었다. 놀라운 것은 우리 교회 형성기에 새 진리를 발견하고 확립하는데 내버려야할 단점이 매우 적다(거의 적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간과하지 않아야 할 것은 성소진리-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율법의 신성성이 중심된-우리가 종전의 기독교 단체들에서 받지 않은 분명한 하나의 교리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망 후에 탐구적인 성경연구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그것은 조직신학에 대한 우리 교회의 특별한 공헌을 구성한 것이었다. 그것은 건전하게 확립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338 모든 교리적인 발견과 발전에 있어서 고백하고 연합된 과정에는 그러므로 완성하고 균형을 잡고 다듬는 데에 시간이 요했다. 세부적인 오류를 삭제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필연적이며 으레 있었다. 십자가에 대한 속죄와 관계에 관한 이 오해는 초기의 제한된 오해 중에 하나다.
Ⅵ. 논쟁이 1872년에 일어나서 1894년에 끝났다
1. 그릇된 견해는 1894년에 교정되었다
Crosier가 세운 가정은 하늘에서 속죄가-죄를 도말하기 위하여 하늘 성소의 둘째 칸에서-저들이 단지 ( )죄사함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십자가 위에서의 속죄와(희생) 구별되고 아주 별개의 것으로 한 것이다. 이 논쟁은 Uriah Smith의 1872년에 쓴 원리들에 관한 언급의 기초가 되었고 문제가 생겼다. -그 책 제2항에 말하기를 -“희생의 제물에 불과한 십자가에서 향한 것과 매우 거리가 먼, 속죄는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사업의 맨 마지막 부분이다” -S.DA.에서 기초되고 실천한 기본원칙들의 선언(1872, 제2항 p.5. -그러나 이 그릇된 견해는 1521명 신자의 Battle Creek 교회의 1894년 신앙 고백에서 삭제했다.- 본부 교회 회중에는 대총회 직원들 R&H 직원들, Battle Dreek대한 직원들, 병원 직원들도 포함됨- 모든 평신도들도 포함하여 이들은 재림교회 지도력의 핵심을 형성했다. 그리고 이 운동의 장래 지도자들도 그 당시 북한에 몰려있는 우리 교인들의 대다수와 함께 그 교회교인명단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 그러므로 1894년까지는 지상에서의 십자가의 속죄의 행위와 1844ㅓ년 이후 하늘에서 그의 심판사업에 있어서 우리 대제사장에 의해서 행해지는 속죄의 날과의 관계의 정화가 있었다. 그러나 옛 견해는 메아리로 남아 있어서(머뭇거리고)보류 되었다 (잠시얼마동안). 그것 역시 발행(급변)의 특성이다. 항상 어떤 이들은 그릇된 견해를 애착심을 가지고 매달려 있는 법이다. 상당한 양의 논쟁도 생긴다.
2. 제한된 견해는 1894년 이후도 고집함
예컨데 3년 후 1897년에 Smith의 1872년 “기초원칙들”의 수정판이 있었다(나왔다). 제2항에서 성구의 도전 받은 표현을 삭제했지만 옛 견해를 옹호하는 확대된 난외주가 있었는데 노골적으로 말하기를 -“우리는 속죄가 십자가에서 이루었다는 견해와 이의를 제기 한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속죄가 이루어졌다는 견해를 반대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년성소봉사의 시작에 있지 않고 끝에 있는 예표와 다르기 때문이다.(반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세상을 위한 신령한 선행을 준비한 것이었다. -속죄는 이 죄를 도말하는 일이 있기까지는 완성되지 않는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값없는 희생을 준비하셨다” “S.D.A 초기 원리들”-진리의 말씀(No.5) 7월 1897, pp. 2,3-이 재판에서 그 본문에 말하기를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생으로 죽으셨다”-그리고 제사장으로서 그의 사업의 마지막부분으로서-그는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한 큰 속죄를 이루실 것이며 저들의 죄는 도말 될 것이다“(상동p.2)-옛날 골자는 남아있지만 약간 발전을 보인 것은 수정한 말이다.
3. 다른 혼돈 된 사상이 앞선 문에 포함되었다
주목해야 할 것은 White목사가 인용한, 1850년에 재판한 Drosier의 말은 어떤 시험하는 진리들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정화하고 합의하기 위해서 모였던 1848년 안식일회의가 있은 후 2년 후에 나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점에 있어서 1848년의 주요 “시험하는 진리‘의 결론 외에 다른 많은 분야같이 우리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림(특별진리)들에 관해서는 도리어 일반적인 일치에 도달했고 그 후로 아주 연합된 채고 남아있게 되었다. -다른 혼돈 된 시간들, “닫힌 문” 같은 것들은 Advent Review의 이 같은 논제에서 아직 토론 중에 있었다. 대부분 Advent Herald와 Advent Testimony들과 같은 일요일 재림교회 기관지들에서 인용한 말에 의하여 대부분 자극을 받아서-(Advent Review 1권 No.1 p.8, 1권 No. 3 p38 Advent Testimony, p42에서)- 그것은 참으로 1856년 ( )지는 “닫힌 문”문제가 진정으로 정화(명백히)되지 못했다. 우리 선조들이 세상을 위한 저들의 할 일을 명백히 보게되고 그 문제를 해결한 “접근의 문”이 열린 것을 볼 때까지는-(James White)
4. 재림신앙의 음성이 1894년에 말하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땅의 행위에 관련된 하늘의“속죄일‘의 문제가 1850년까지는 확립되지 못했다. 사실상, 그것은 1888년 대총회가 지난 후 수년까지도 기록상에도 없다. 1894년에 우리 교회 지도적인 1521명의 신자의 베틀크릭 교회의 기록된 견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베틀 크릭, 미시간, SDA교회 교인, 직원들 명단 위원회, 평 위원, 규칙적인 집회들, 베틀크릭은 집중적인 재림신앙의 본보였다. 속죄에 관한 종전의 오해가 분명하게 되고 기록에 남게 된 것은 그 때 이 문서에서였다. 이 발전의 의미는 사람이 베틀크릭에 있는 우리 교회와 지도적인 교회의 비범하게 대표적인 점과 포괄적인 특성을 이해 할 때에만 보일 수 있다. 다음에 오는 것은 한번 훑어보면 쓸데없이 상세하고 전문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매우 감명 깊은 것은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이렇게 매우 세부적이요 그 후회의 행동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Ⅶ. 1894년에 베틀크릭 교회의 대표적인 성격
1. 9개의 의미있는 열거
①1894년에 베틀크릭 교회의 유독한 구성 요소 당시 우리 교파 교인 전체가 37,404명에 불과할 때 1521명 교인 아래 사실들에게 그 해의 신앙의 선언의 무게를 가장 잘 알 수 있다. 9가지 특성들을 주목하라. 베틀크릭의 교회 직원 19명 중 3명 외에는 모두 대총회, R&H 출판소, 베틀크릭 대학 및 위생 병원(관련된 일반적인 기관들이 모두 베틀크릭에 집중되어 있었다)에 있는 탁월한 지도자들이었다. 베틀크릭 교회 직원들은 대총회의 지도적인 직책들이 포함되었다. 총회장, 기록 서기, 회계, 외방 선교 서기 등 기타 그 같은 압도적인 수지가 장로들, 집사들, 여집사, 서기, 회계, 평의원, 십일금 수금 책임자, 찬양 대원, 안교 교장, 안내원들. 교회 직원에 출판소의 모든 직원 등이 포함되었다. 소장, 부소장, 총무, 재무, 서기, 감사, 편집국장, R&H의 2명의 보조 편집자, Youth Instructor 편집자와 다른 3 잡지의 편집자들. 베틀크릭 학장과 4 작원 전원, 6명의 평의원, 9명의 다른 직원들. 우리 본부 교회의 1521명 교인 전부는 파워 지도적인 목사들, 교사들, 편집자들, 의사들, 과학자들, 사업가들, 문서 전도 지도자들, 예술가들의 현저한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그것은 가장 저명한 최고로 훈련받은 1894년에 재림교회에 있는 대표적인 그룹이었다. 이 사람들 중 아수는 그 당시에 혹은 그 후에 연관된 일반적 기관들의 구성원이었다. 외방 선교단, 서적 위원, 국제 안교 위원, 의료 선교 및 자선 위원, 대총회 위원, 국제 소책자회, 모두 연관된 기관들은 베틀크릭에 있었다. 교인 명단 중 다음과 같은 다른 목사들도 포함되었다. 의사들, 평신도들. 이들 중 놀라운 숫자가 얼마 안되어 교수ㅡ 목사, 의사, 행정가, 기관사였다. 유명한 대회 사역자들이 되었다. 저들은 모두 합하여 가장 구별된 무리를 이루었다. 그런고로 1894년 베틀크릭의 대표적 성격의 신앙 고백을 저들은 서명했던 것이다. 이것은 권위와 수효의 무게 있는 종이에 의하여 1872년의 가명의 소책자들 완전히 압도한다. 그리고 물론 이 모든 것은 속죄의 행위를 십자가의 사건으로서 언급한 것이다. 이 베틀 크릭 교인 명부는 분명히 재림교회의 신앙을 형성했고 모본을 제시한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 운동의 고동치는 심장이었다. 1894년에 자격을 갖춘 재림교 신조의 더 나은 대표적이며 중대한 부분을 그러므로 찾을 수 없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임명한 지도자들이요, 대변자들이며, 가장 넓고 가장 참된 의미에서 대표적인 재림신앙 이였다. 이들은 이들의 담임목사와 1521명 SDA가 믿는 것들의 기록된 선언의 바로 밑에 5쪽에 기록된 이름들이었다. 저들의 소리는 재림교회의 가장 권위 있는 음성이었다. 그 다음, 이것은 시대적인 선언이었다. 그 당시 본 교회 역사 중 가장 대표적이며 잘 알려진 권위 있는 기본 신조의 선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대적인 1888년 대총회 등 6년 후에 이어서 그 발전의 결과로서 나타났던 것이다. 속죄에 관하여 그 선언의 의미는 그 후에 당시 1894년에 베틀크릭 교회의 활동적인 교인이며 전0한 명단에도 있는 나의 친부 Dr. John E. Froom께서 나에게 상세히 말씀하셨다.
2. 생략으로 부인됨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십자가의 사건을 속죄의 행위라 분리시키는 오류가 1872년의 인쇄된 표현에 섞였던 해에 우리교회 전체 재림 교회 교인 수는 4801명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온전히 삭제해 버리고 그 유감스런 구절은 1894년의 선언은 결론적으로 속죄에 관한 이전의 제한된 견해의 양상의 교정에 있어서 전환점이었다. 권위도 없었다. 그러나 생략함으로 말미암아 일반적인 거절은 1894년에 기록에 나타났다. 그것은 권위 있는 1894년 베틀크릭 교회 신앙 선언의 진정한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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