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뒤란 갈레/이재갑
초가집 뒤란
흙담 등진 너른 장독대
올망졸망 항아리들
정갈한 품으로 줄 지어 앉아
햇살의 숨결을 받는다
담장 아래 앵두와 구기자나무
돌 틈 비집고 핀 늦잠 채송화는
어머니의 하루를 무심히 들여다보며
잔잔한 행복을 피워내었지
비 한 방울, 먼지 한 톨 앉을세라
새하얀 행주로 항아리를 쓸어내던
허리 굽은 어머니의 굵은 손마디
만수무강,
닳고 닳도록 되뇌이며
샘물 길어 정갈한 치성을 드리던 그 새벽
세월의 손끝에 배어든 손맛 잊을까
사시사철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들던 그 곳은
살아생전 누구도 넘보지 못할
집안의 가장 신성하고 은밀한 경지境地었네
아 !
이제는 간장 된장 고추장
익어 가는지 그 손맛으로 가늠하던
고집스런 어머니의 눈빛은 온데간데없고
젖줄 끊긴 천덕꾸러기 항아리들만
빈 배를 드러낸 채 애물단지 신세라
간장종지 사라진 밥상머리
말 한마디 없이 스러져갔으니
손맛의 기억만 가슴 먹먹하게 저며 든다
그 꿀맛 같은 종갓집 어머니의 깊은 손맛
그 침묵의 예술은
어느 시절에 다시 피어날까.
타작의 향기 갈레/이재갑
이슬 걷힌 아침나절
타아 탁- 들깨 터는 소리
알알이 쏟아지는 들깨들
푸르른 포장 위로 금빛 파도처럼 쌓인다
바람까지 품앗이 하듯
껍데기 한 톨 없이 언덕을 짓는다
이리도 넉넉한 가을걷이다
볕이 깊게 내려앉은 논두렁엔
쟁쟁한 메뚜기 울음과
저 만치서 도랑물도 즐겁게 흥얼흥얼
노래로 맞장구친다
이만하면 올 가을엔
손주들 용돈에다
겨울 패딩 하나씩 얹어주면 그만이다
두 사돈집에도
들기름 서너 병쯤 건넬만하겠다
덤으로 사나흘 멀지 않고
막걸리 친구 만나는 날,
두어 병 챙겨가
웃음 짓는 그이의 낯꽃을 떠올리면
애잔했던 정이 벌써 강물처럼 잔잔해진다
고단함도 바람에 실려 멀어지고
들깨 향기만 코끝을 스쳐간다
그 향기 따라 기억의 길을 건너면
어머니가 서 있을 터이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채전밭가에서
막대기를 들고 볕을 쬐던 굵은 손
그 손등의 주름마다에
햇살이 들기름처럼 반짝이던 날들
그 옆에 엎어져
도란도란 땅뺏기 놀이에
푹 빠진 어린 자식들
지금 나는 그 가을 한 모퉁이에 서서
타작을 한다
사라진 손길, 흙냄새,
그리고 들깨 터지는 소리 속에서
어머니의 숨결이 다시금 피어난다.
신호등 선생 갈레/이재갑
하늘을 받드는 빛기둥 위에 의젓이 앉아
말없이 세상을 밝히는
세 선생
강산이 몇 번 변하는 동안
늘 우리 곁을 지키며
하루에도 수천 번
빛이라는 교과서를 펼쳐 들고
수많은 발걸음 오가는 삶의 길목
꼭 그 자리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바람 불어도
한결같은 가르침으로
꼭 그 빛기둥 위에 앉아
우리에게 삶의 이치를 건넨다
빨강 선생은
멈춤의 지혜를 고요히 일깨우고
파랑 선생은
서로 살피고 나아갈 배려를 속삭이며
노랑 선생은
잠시 숨 고르는 기다림 속에서
사랑의 의미를 새기게 한다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먼 훗날에도
꼭 그 자리에서
세 선생은 변함없이
삼색의 빛으로 우리 눈빛과 정을 나누며
모두의 발걸음을 따스이 보듬어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