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계절의 여왕 5월이 하순을 지나며 끝자락이 벌써 보이기 시작하네요 따스한 햇살이 창틈을 비추며 하루의 시작을 살프시 알려줍니다 금년 길고 긴 여름은 무더위와 폭염의 기승을 예보 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대비와 준비해 건강관리에 각별히 조심하시고 유의 하셔야할것 같습니다 아래글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60대를 지나70대에서 90대를 살아가고 계신 어르신들의 생생한 한국의 70년간 경제의 발자취를 정교하고 간략하게 정리한 역사의 일부 같아 함께 공유할까 전해 드립니다 1953년 육이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을의 모습들, 국민소득 67달러의 최빈국, 가난한 나라에서 오늘날 국민 소득 37,000 달러로 600배가 증가되고 세계 10대 경제 대국으로 우뚝선 작금의 대한민국, 서울인구 100만에서 930만으로 증가하고 60년대 평균수명이 55.6세에서 83.7세로 70년간의 눈부신 성장은 오늘을 살아가고 계신 어르신들의 고귀한 피와 땀방울이 만들어준 기적같은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해주신 주인공이라 생각합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국민적 단합이 우리들만 할수 있는 유일한 자산 으로도 생각합니다. Al 반도체,전기차 조선업,KㅡPOP등 대한민국을 세계속에서 우뚝 세운 대단한 자랑 거리 이기도 합니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살기좋은 금수강산이 우리 후손에 그대로 잘 물려 주기를 마지막 5월 휴일 맞아 잠시 묵상에 젖어보며 커피 한잔을 적셔 봅니다 줄겁고 행복한 연휴 잘 보내시고 시간이 허락 하실때 끝까지 아래글을 읽어 보시면 많은 공감이 갈것 같습니다 (사랑)~대한민국(大韓民國)의 史記列傳~(사랑) 황의순 소장(서울대법대 68학번 졸업) 한국이 선진(先進)강국이 된 기적! (우리의 60,70,80대가 살아온 삶 자체가 기적(奇蹟)). 후손(後孫)들에게 들려 줄 이야기
1, 1950년부터 3년간의 전쟁이 한반도에 남긴 것은 거의 없었어요. 건물은 무너졌고, 다리는 끊어졌으며, 사람들은 집을 잃었습니다. 2, 1953년 10월! 영국 가디언지의 특파원 제임스 카메론이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을 기사로 썼어요. 거리마다 무너진 건물들 뿐이다.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사람들은 판잣집과 천막에서 살고 있다. 아이들은 맨발로 돌아다닌다. 겨울이 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어 죽을지 상상조차 끔찍하다.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그랬어요. 서울 인구 100만명 중 60만명이 판자집에서 태어났습니다. 상수도가 없었고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3 1953년 11월! 프랑스 르몽드지가 더 직설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한국은 국가라고 부를 수 없다. 이건 그냥 폐허다. 원조로 연명하는 거대한 난민촌일 뿐이다.
숫자로 보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1953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7달러였어요. 당시 세계최빈국으로 꼽혔습니다. 에티오피아가 70달러였습니다. 한국이 에티오피아보다 가난했던 겁니다.
산업시설은 거의 다 파괴됐어요. 전쟁 전에 있던 공장 600개 중 500개가 폭격으로 망가졌습니다. 남은 공장도 돌아갈 전기가 없었고,전기가 있어도 돌릴 기술자가 없었어요.
4 1954년 3월 미국 타임지 Times가 한국 특집 기사를 냈습니다. 제목이 충격적이었어요. 인류역사상 가장 완벽하게 파괴된 나라.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았던 거예요. 전쟁 전 남한인구는 약 2천만 명이었는데 북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까지 합치니 2500만 명이 넘었습니다. 좁은 땅에 먹을 것도 없는데 사람만 넘쳐났어요.
5 1955년 1월 세계은행(世界銀行)이 한국에 조사단을 보냈습니다. 6개월간의 조사를 마쳤습니다. 마치고 그들이 낸 보고서의 결론은 냉정했어요. 이 나라가 자립경제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소 30년간은 지속적인 국제원조가 필요하며 그마저도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30년간 원조를 받아도 성공을 장담 못 한다는 겁니다. 당시 국제사회의 시각은 명확했어요. 한국은 영구적인 원조 대상국이 될 거라는 거였죠.
6 1957년 4월 일본의 한 경제학자(經濟學者)가 도쿄대학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국이 일본수준의 경제를 이루려면 최소 100년은 걸릴 것이다. 당시 한국인들조차 이 말에 반박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나 명백한 현실이었으니까요. 먹을 것도 없고 일할 곳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절망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세계가 주목하지 않은 곳에서요.
1955년 9월 한국정부가 이상한 결정을 하나 내립니다. 초등학교 의무교육을 시작한 겁니다. 나라에 돈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학교부터 짓기 시작했어요.
1956년부터 1960년 사이 한국에 세워진 학교수가 무려 3,247개였습니다. 하루에 2개씩 학교가 생긴 셈이에요. 판자집 마을에도 학교가 들어섰고 산골 마을에도 학교가 세워졌습니다.
1957년 8월 영국 이코노미스트지 특파원이 경기도 한 시골학교를 방문했습니다. 그가 쓴 기사가 흥미로웠어요. 한국정부는 우선순위를 잘못 잡은 것 같다. 배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건 책이 아니라 빵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짓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맞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데 교육이 무슨 소용이냐는거죠. 하지만 한국은 멈추지 않았어요.
7 1958년 서울청계천 판자집마을에 야학이 생겼습니다. 낮에 일하느라 학교에 못 간 어른들을 위한 학교였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밤 9시에 일을 마치고 야학에 모였습니다. 뉴욕타임스 특파원이 1958년 11월에 이 야학을 취재했습니다. 그가 본 광경은 이랬어요. 40대 노동자가 10대 학생 옆에 앉아 한글을 배운다. 전구 하나 아래서 30명이 공책에 글씨를 쓴다. 이들의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놀랐다. 왜 이렇게까지 배우려 했을까요? 당시 사람들은 알았던 겁니다. 배워야 먹고 산다는 걸요. 글을 읽어야 기술을 배울 수 있고, 기술을 배워야 더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8 1959년 놀라운 통계가 나왔습니다. 한국의 문맹률이 78%에서 22%로 떨어진 겁니다. 불과 6년 만에요.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40% 가까이 늘어난 거예요. 유네스코가 한국의 교육현황을 조사 했습니다. 보고서에 이런 문장이 있었어요. 한국만큼 짧은 시간에 문맹률을 낮춘 나라는 전례가 없다. 국민의 교육열이 경제수준을 훨씬 초과한다. 경제수준을 초과하는 교육열은 정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가난했지만 배우는 건 멈추지 않았어요. 굶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습니다. 1960년 3월 한국의 초등학교 취학률이 96%를 돌파했습니다. 같은 시기 인도는 61%, 필리핀은 72%였어요. 한국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들이었는데도 취학률은 한국이 더 높았던 겁니다.
9 하지만 1960년 국제언론의 평가는 여전히 냉정했습니다. 1960년1월 뉴욕타임스 헤드라인이에요. 한국 7년째 원조의존! 자립경제는 여전히 어렵습니다. 설계는 여전히 한국을 끝난 나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아무리 많이 지어봤자 경제가 나아지지 않으면 소용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들은 몰랐습니다. 1950년대에 학교를 다닌 그 아이들이 1960년대에 공장으로 들어갈 거라는걸요. 그리고 그들이 한국을 완전히 바꿔 놓을 거라는 걸요. 1960년이 끝날 무렵 한국은 여전히 가난했습니다. 여전히 원조에 의존했고 여전히 희망이 보이지 않았어요. 하지만 씨앗은 뿌려져 있었습니다. 교육이라는 씨앗이오. 그리고 바로 다음에 한국은 세계를 놀라게 할 도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10 1961년 1월 1일 한국의 수출액(輸出額)은 3,290만 달러였습니다. 수입액은 3억 4,300만 달러였어요. 10배 이상 차이가 났죠. 한국이 수출하던 것들은 뭐였는지 아세요? 텅스텐 원석 생선 김 그리고 가발이었습니다.
1961년 1월 13일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충격적인 선언이 나왔어요. 10년 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겠다.
계산기를 두드려 볼까요? 3,290만 달러에서 10억 달러면 30배를 늘리겠다는 겁니다. 10년 만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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