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4년 2월 26일 목요일
괴테와 함께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운 후 괴테는 슈타델만에게 동판화를 정리해 둔 커다란 화집을 가져오게 했다. 화집 위에는 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는데, 그것을 닦아낼 적당한 천이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괴테는 언짢아져서 하인을 나무랐다.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주의를 주겠네.” 하고 괴테가 말했다. “필요한 천을 사다 놓으라고 여러 번 말하지 않았던가. 오늘 중에 사다 놓지 않으면 내일은 내가 직접 갈 거야. 이제 내가 허튼 소리 하지 않는다는 걸 자네도 알 테지.”
슈타델만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이전에 배우인 베커와도 비슷한 경우를 겪은 적이 있었지.”하고 괴테가 유쾌하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사람이「발렌슈타인」에서 기사의 역을 맡기를 거부하더군. 그래서 그 역을 맡지 않으면 내가 직접 그 역을 맡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효과가 있더군. 그들은 연극에 임하는 나의 자세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네. 또 내가 그런 경우 농담을 하지 않을뿐더러, 약속을 곧이곧대로 지키면서 미친 짓이라도 할 만큼 광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세.”
“정말 그 역을 맡으실 생각이었습니까?” 하고 내가 물었다.
괴테가 대답했다. “그렇네. 그 역을 맡아서 베케를 압도할 생각이었어. 그 역을 내가 더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 말이야.”
그러고 나서 우리는 화집을 펼쳐 동판화와 그림을 관찰했다. 괴테의 아주 세심한 지도로 나는 예술작품의 관찰에 있어서 보다 높은 안목을 얻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는 해당 계통에 있어서 완성도가 가장 뛰어난 것만을 보여주면서 예술가의 의도와 그 장점을 분명히 알도록 했는데 나로 하여금 가장 뛰어난 자들의 생각을 깊이 숙고하면서 그들과 같이 느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괴테가 말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미감이라고 부르는 게 형성된다네. 왜냐면 미감은 평범한 작품이 아니라 가장 뛰어난 작품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기 때문이지. 그래서 자네에게 가장 뛰어난 것들만을 보여주고 있는거네. 그리고 자네가 거기서 확고하게 발판을 굳힌다면 여타의 것들을 과대평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평가할 수 있는 척도를 가지게 되는 셈이지. 또한 자네에게 여려가지 종류들마다의 가장 뛰어난 것을 보여주는 이유는 어떠한 종류도 소홀히 보아서는 안되며, 위대한 재능이 정점에 도달한 것이라면 종류에 상관없이 모든 것이 만족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이네. 예턴대 한 프랑스 예술가가 그린 이 작품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호색적이며 그 종류에서는 모범이 되는 걸세”
괴테가 건네주는 그 그림을 나는 기쁜 마음으로 감상하였다. 여름 궁전의 한 매혹적인 방 안. 열린 창과 문을 통해 정원의 풍경이 내다보이는 가운데 한 무리의 아주 우아한 인물들이 자리 잡고 있다. 서른 살 가량의 한 아름다운 여인이 앉은 채로 악보 한 권을 들고 있는데, 방금 그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른 것 같았다. 약간 더 안쪽, 그녀의 옆에는 열다섯 살 가량의 한 소녀가 앉아 있다. 그리고 뒤쪽의 열려진 창가에는 다른 젊은 아가씨가 만돌린을 들고 선 채로 여전히 곡을 연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순간 한 젊은 남자가 들어오고, 여자들의 시선은 그를 향한다. 그의 출현으로 음악에 관한 대화가 중단된 것 같다. 그래서 그 남자는 몸을 앞으로 살짝 구부려 예를 갖춘다. 용서의 말을 건네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자 여인들은 그의 말을 흡족해하며 받아들인다.
괴테가 말했다. “이 그림을 보면 칼대론의 그 어떤 작품과도 같이 호색적이라는 느낌이 드네. 자네는 이것으로써 이러한 종류의 그림 중 가장 뛰어난 것을 본 셈일세. 그러니 무슨 할 말이라도 더 있으면 해보게.”
이 말과 함께 그는 이름난 동물 화가인 로스의 동판화 몇 장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가지각색의 자세와 상태를 보이고 있는 양들로 가득한 그림들이었다. 골상의 단순함. 추함, 더부룩한 모발, 이 모든 것이 극히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마치 자연 그 자체와도 같았다.
“나는 이 동물들의 그림을 볼 때면 불안한 마음이 드네”하고 괴테가 말했다. “그들 상태의 우매함, 둔감함, 몽상적이며 하품 나는 분위기를 접하면 나 자신도 그것들과 같은 느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하네. 내가 동물로 변해 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드는 한편, 그것을 그린 예술가 자신이 한 마리의 동물이었다고 믿을 지경이야.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네. 이 화가가 동물들의 영혼 속으로 들어가 생각하고 느끼면서 그것들의 내면적 특성을 외적인 형상을 통해 그렇게 진실하게 드러낼 수 있다니 말일세. 어쨌거나 우리가 여기서 거듭 확인하는 바는 자신의 본성과 유사한 대상을 다루는 경우에 위대한 재능이 제대로 발휘될 수 있다는 점이네.”
내가 물었다. “그런데 이 예술가는 개나 고양이나 다른 육식 동물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방식으로 그리지 않았던가요? 아니, 위대한 재능을 발휘하여 낯선 상황을 깊숙이 느끼면서 인간적 특성 또한 마찬가지로 충실하게 다룬 적은 없어던 것인지요?”
괴테가 답했다. “그렇지 않아. 그것들은 모두 그의 영역 밖이야. 반면에 그는 양이나 염소나 암소, 그리고 그와 비슷한 유순한 초식동물을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그렸네. 이런 것들이 그의 재능의 본래 영역이었어므로 평생동안 거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거지. 그리고 그 점에서 그는 행복했네. 이러한 동물들의 상태에 대한 깊은 공감과 그것들의 심리에 대한 지식은 타고난 것이었어. 그리고 그러한 동물들의 육체적인 면을 포착하는 훌륭한 눈도 가지고 있었네. 반면에 다른 동물들의 본성에 대해서는 그렇게 꿰뚫어 보지 못했던 것 같아. 그에게는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는 천분도 결여되어 있었던 거지.”
괴테에게서 이런 말을 듣자 내 머릿속에 여러 유사한 것들이 자극을 받으면서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얼마 전에도 그는 나에게 순수한 시인에게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타고나면서부터 갖추어져 있으며 세계를 표현하는데 있어서는 많은 경험이라든지 커다란 경험적 지식은 결코 필요치 않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괴츠 폰 베를리힝겐>을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썼다네.”하고 그가 말했다. “그런데 십년이 지난 후 그 묘사의 진실성을 보고는 깜짝 놀랐지 뭔가.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그러한 것을 체험하거나 본 적이 없었네. 그러니 그렇게 다양한 인간의 상태에 대한 지식은 예감에 의해 얻었던 것임에 틀림없겠지. 나는 외부세계를 알기 전에 자신의 내부세계를 묘사하는데서만 기쁨을 느끼고 있었네, 그리고 그 뒤에 세계란 것이 내가 생각한 그대로라는 걸 현실에서 확인하고는 진절머기가 나서 세계를 묘사하고 싶은 생각이 더 이상 들지 않더군. 아니, 이렇게 말하고 싶네. 만일 내가 오래 기다렸다가 세계를 알고 나서 묘사했더라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조롱이 되어버렸을 것이라고 말일세.“
그가 언젠가 말했다. “개개의 성격속에는 그 어떤 필연성이라든지 그 어떤 일관성이 놓여 있다네. 그리고 그 때문에 한 성격이 지닌 이러저러한 기본적 트것에 다른 특성들이 부가되어 그 어떤 종류의 제2차적인 특징이 생겨나는 거지. 이것은 경험에 의해서도 충분히 배울 수 있지만 개인에 따라서는 그러한 것들에 대한 지식을 타고날 수도 이는지 어떤지 확인해 보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이것만은 알고 있네. 즉 내가 누군가에게 십오 분간 이야기함으로써 그 상대로 하여금 두 시간 동안 말하도록 만들어 보이겠네.”
또한 괴테는 바이런 경에 대해서도, 그가 세계를 훤하게 꿰뚫어 보고 있으며 그 묘사는 예감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몇가지 의문을 제기했다. 예컨대 바이런이 하등 동물의 본성을 성공적으로 묘사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의 개성이 너무나 강렬한 터에 그러한 대상에 애정을 가지고 헌신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었다. 괴테는 이 말에 수긍하면서 예감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 그 대상이 예술가의 재능과 유사한 한도 내에서만 영향을 미친다고 대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견해의 일치를 보았다. 즉 예감의 범위가 제한적인가 아니면 광범위한가의 정도에 따라 묘사의 재능 자체도 제한적이 되거나 아니면 광범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내가 말했다. “시인에게 있어서 세계는 원래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이라고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는 내부 세계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현상이라든지관습 같은 경험적인 세계는 의미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이 경험적 세계의 묘사에 성공하려면 또한 현실에 대한 탐구가 뒤따라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렇네.” 하고 괴테가 대답했다. “사랑과 증오, 희망과 절망이라든지 영혼의 갖가지 상태나 열정의 영역은 시인에게 타고난 것이므로 그것들을 성공적으로 묘사할 수 있지. 하지만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니면 의회에서나 대관식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등에 대해서는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을 수가 없네. 그러므로 그러한 일들의 진실성과 위배되지 않으려면 시인은 경험이나 전통으로부터 그것들을 받아들여야만 하네. 그래서 나는 <파우스트>에서 주인공의 삶에 지친 음울한 정신 상태라든가, 그레트헨의 사랑의 감정을 예감에 의해서 어느 정도 잘 묘사 할 수가 있었지. 하지만 예를 들어서
깊은 밤 조각달 그 얼마나 처량하게
눅눅한 광채로 떠오르는가.
라는 묘사를 하기에는 어느 정도 자연에 대한 관찰이 필요했던 것이지.”
내가 이어서 말했다. “그러나 파우스트 전체에서 단 한 줄도 세계와 인생에 대한 세심한 탐구의 자취가 생생하게 남아있지 않은 것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이 세상에서의 풍성한 경험도 거치지 않고 바로 선생님에게 주어졌다는 건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
괴테가 대답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이 세계를 예감에 의해서 미리 알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눈 뜬 장님이었을 것이고 그 어떤 탐구나 경험도 전혀 쓸모없는 헛된 노력에 지나지 않았을 거야. 물론 빛은 존재하고 색채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네, 하지만 자신의 눈 속에 빛과 색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외부세계의 빛과 색채도 알아보지 못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