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工夫)라는 글자는 선진 문헌에는 나타나지 않으며 당나라 때 고승들의 어록에 처음 등장하는데, 당대에 이미 구어로서 정착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工”은 “功”의 약자이고, “夫”는 “扶”의 약자이다. “工夫”는 “功扶”를 의미한다. 무엇인가를 열심히 도와서(扶) 공(功)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성공 한다”는 말도 단순히 “출세한다.”는 뜻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공을 성취한다.”는 뜻이다.
공부는 몸(Mom)을 전제로 한다. 몸이란 정신(Mind)과 육체(Body)의 이분법적 분할을 거부하는 인격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공부란 몸, 그 인격 전체를 닦는 것이니, 그것이 곧 “수신”(修身)이다. 공부는 몸의 훈련을 의미하는 것이다. 몸의 단련이란 몸의 다양한 기능의 민주적 균형을 말하는 것이며, 또한 어느 부분의 기능도 그 탁월함(아레떼)에 도달했을 때 가치상의 서열을 부여할 수 없다. 개념들의 연역적 조작에 영민한 학생이 수학을 탁월하게 잘하는 것이나 운동선수가 탁월한 신체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나 음악성이 뛰어난 학생이 악기를 다루는 뛰어난 솜씨를 발휘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을 동일한 가치의 “공부”로서 인정해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몸”이라는 우주의 총체적인 조화로운 관리를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된다. 일어나고, 세수하고, 밥 먹고, 걷고, 생활하고, 독서하고, 놀이하고, 쉬고, 잠자는 모든 일상적 행위가 경(敬)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그 진지함 속에 개인과 사회와 우주의 도덕성이 내재한다는 것을 교육의 원리로서 자각해야 한다. 자녀에게 성 도덕을 가르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 방을 깔끔하게 정돈하고 매사에 질서를 유지시키는 것을 스스로 공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정한 몸의 도덕을 깨닫게 하는 더 유용한 도리가 될 것이다. 우리는 서구적 자유주의의 파탄을 넘어서서 우리 민족의 유구한 일상적 규율의 원리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