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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1)/ 아브라함과 롯 : 지체하다 망한 자
눅17:28-30절에서 예수님은 “마찬가지로 롯의 날들에도 그와 같았으니 그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건축하였으되, 롯이 소돔에서 나간 바로 그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내려 그들을 다 멸하였느니라. 사람의 아들이 나타나는 날에도 그와 같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마지막 시대는 롯이 살았던 고대 도시 소돔의 특성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소돔과 같은 특성이 나타날 마지막 시대에는 소돔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살았던 아브라함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날 것이다. 또한 소돔의 시대를 실패하며 살았던 롯과 같은 그리스도인도 있을 것이다.
고대 도시 소돔은 어떤 특성이 있었을까? 아브라함과 롯은 어떻게 달랐을까? 아브람과 조카 롯은 같이 고향을 떠나왔지만, 삶의 결과는 너무 달랐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곧, “열국의 아버지”로 바꿔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가족도 구원을 받았다.
롯도 한 때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소돔에서 잃어버린 사람이 되었다. 그 둘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을까? 그들은 소돔을 어떻게 대했을까? 기준에 차이가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타락한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더라”(창12:4).
성경은 아브람과 롯이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다고 기록하지 않는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은 아브람과 함께 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롯은 바로 사람을 좇아갔다. 무엇을 좇느냐가 삶의 선택들과 맞물려 인생에서 차이점을 만들어 놓는다. 아브람과 롯, 둘 다 실수가 많은 연약한 인간이었지만, 마음에 누구를 두느냐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점을 만들어 놓는다.
아브람과 롯이 고향을 떠난 창세기 12장부터 롯이 살았던 소돔의 멸망을 기록한 창세기 19장까지를 천천히 읽어보라. 아브람과 롯의 기준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아브람은 떠나온 곳마다, 새로 정착하는 곳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다”(창 12:8; 13:4, 8). 아브람은 삶의 기준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하나님이 기준이었다. 반면에 롯은 그가 거주하던 소돔이 유황불로 완전히 멸망을 당할 때까지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무하다. 기도했다는 기록도 없다. 롯은 사람이 기준이었다. 그는 아브람을 따라 나왔고, 하나님의 뜻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의 뜻을 우선시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전적인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기준이 하나님이 아니고 사람이었다. 세상이 기준이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인본주의가 세상을 뒤덮고 있다. 각자가 다 기준이 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만연하여 참된 기준이 없어진 세상이 되고 말았다. 소돔과 같은 오늘날에는 기준이 있는 사람과 기준이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기준 삼아 사는 그리스도인과 롯처럼 하나님을 기준 삼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소돔과 같은 마지막 시대에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될 때에만 이 혼돈의 마지막 시대에 길을 잃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승리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돌아가야 함을 가르쳐 준다. 그것이 회개의 핵심에 자리해 있다.
1. 결단과 지체함에서 차이가 있었다
롯은 소돔에 정착하여 살았지만 처음부터 소돔에 거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브람과 롯의 양들이 많아지자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생겼다. 그래서 서로 떨어져 살기로 했다. 롯은 소돔 쪽을 선택했다.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13:10)고 말한다.
롯이 눈을 들어 보았는데 그의 눈은 하나님이 기준이 되는 눈이 아니다. 자신이 기준이 되는 눈이다. 욕망의 눈이다. 탐욕의 눈이다. 요단 계곡의 마을들과 도시들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소돔이었다. 여호와의 동산 같은 곳이었다. 많이 일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풍요로운 도시가 소돔이었다.
그 한가함과 여유로움을 잘못 활용했을 때 소돔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헌신한 것이 아니라, 마귀를 닮은 일에 열중하게 되었다. 소돔은 결국 타락한 도시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돔은 어떤 특성을 지니게 되었을까? 소돔은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성경의 원칙을 반대하며, 반기독교적이고, 반윤리적이며 반도덕적인 도시가 되었다.
그렇게 되면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 있다. 성적 타락이다. 무너진 사회, 멸망한 나라의 최종의 모습은 성적 방종과 성적 타락을 반드시 동반한다. 소돔은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없어지고, 아이를 성적 대상으로 삼으며, 심지어는 짐승과도 성관계를 하는 타락한 도시가 되어 버렸다. 그것이 소돔이다.
오늘날의 세상이 소돔이 되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고대의 소돔이 죽지 않고 우리 곁에 와있다. 소돔의 끈질김은 포기를 모른다. 예전에는 ‘소돔 같은 세상이 올까?’라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고대에서나 있는 일이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가까이에 소돔이 있다. 아니 소돔에 포위되어 있다. 드러내놓고 소돔을 주장한다.
온 세상이 그렇다. 참으로 충격적인 사실이다. 성경은 “소돔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창13:13)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 도시인 줄을 알면서도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창13:12). 롯은 점점 소돔을 향했다. 그가 소돔을 사랑하지는 않았겠지만 죄에 대한 민감성이 약하고 영적 눈이 어두우므로 소돔의 쾌락과 부요함을 은근히 바랐다.
무뎌진 마음은 롯의 손과 발이 소돔을 흠모하는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었다. 그는 점점 소돔을 향해서 갔고, 소돔에 정착했다. 소돔은 자녀들과 가족들을 오염시켰다. 롯은 소돔에 영향을 끼치고 산 것이 아니라 영향을 받으면서 안주하였다. 롯이 철저히 하나님을 기준으로 살았더라면, 죄에 민감했더라면, 죄의 파급성에 경각심을 가졌더라면, 그는 소돔의 정신을 증오하고, 소돔을 서둘러 탈출했을 것이다.
소돔의 죄가 깊어지면 하나님의 심판이 올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었음에도 소돔이 그 심판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처럼, 롯 또한 하나님의 심판이 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소돔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가? 소돔은 영원해서도 안 되고 영원할 수도 없다. 소돔이 영원하다면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셔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실 수는 없으므로 소돔은 영원할 수가 없다. 오늘날의 세상은 소돔과 꼭 같다. 예수님의 말씀과 같다. 소돔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의 세계는 하나님의 자비와 심판의 한계점을 넘어가고 있다. 언제, 어떻게 소돔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곁에 이렇게 가까이 오게 되었을까? 단지 도덕적으로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는 없다. 어떤 세력이 뒤에 있는 것일까? 소돔을 타락시킨 마귀의 세력이 오늘날까지 그 마수를 뻗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날이 소돔이 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을까? 마르크스는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유럽 각국의 노동자들이 합심하여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유럽의 노동자들은 계급으로 연대하지 않고 자기 나라를 위해서 싸웠다. 1917년 러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일어났지만,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가 아니라 지식인들과 전문적인 혁명가들이었다. 서유럽으로 마르크스주의가 확산하지도 못했다.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혁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인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깨닫게 되었다. ‘서구 문명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서구문명의 근간은 무엇이냐? 기독교이다. 기독교의 가치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부가 아니라 상부구조를 공격함으로써 상부로부터 하부로 혁명을 확산시켜야 한다.’
그들은 언론, 예술, 할리우드, 교육기관, 공직 등의 상부구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와 성경의 원칙들을 철저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1919년 헝가리의 문화 담당관 기외르기 루카치(György Lukács)는 “누가 우리를 서구 문명으로부터 구원해줄 것인가?”라는 질문을 갖고 급진적인 성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해서 도덕적 가치관을 파괴하는 일에 착수했다.
충격적인 일이다. 학교에 자유연애와 성관계에 대한 강의를 만들고 성행위를 묘사한 안내책자를 만들었다. 기독교 윤리관, 일부일처제, 부모와 교회의 권위를 거부하고 조롱하라고 부추겼다. 실제로 오늘날을 보는 것 같다. 그는 분노한 국민들에게 쫓겨났지만 문화를 공격하고 타락시켜야 한다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도덕성이 무너지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며 성경을 증오하는 효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서구 문명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음을 그들은 보았다. 1930년대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총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는 말했다. “우리는 총으로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다. 차츰차츰 한 해, 두 해, 세대에서 세대를 거쳐 점진적으로 교육기관, 공공조직에 침투해 그들을 마르크스주의자로 만들어 보편적인 평등주의로 나아가게 만들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경제 용어’에서 ‘문화 용어’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과 기독교를 대항할 연대 세력을 고심했다. 그 답은 1930년대의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제시했다. 마르쿠제는 서구 문명의 근간을 이루는 기독교, 가족제도, 가부장제, 자본주의, 권위, 도덕, 애국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연대 세력을 구축한다.
그것이 피해자 집단이라고 그들이 불순하게 정의한 학생, 여성, 흑인, 성소수자, 이민자, 이슬람 등이다. 여성과 남성이 대립하고, 유색인종과 백인 남성을 분리하며, 성소수자가 대다수의 전통적인 성 개념을 가진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이민자들과 본토인들의 갈등을 부추기고, 이슬람에는 관용을 베풀지만 기독교에는 핍박을 가하는 이면에는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소돔의 이데올로기가 웅크리고 독을 내뿜고 있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많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은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으로 옮겨 미국 대학을 점령해 나갔다. 영향을 받은 학생들은 세대를 거듭하며 미국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이 성공했는가? 크게 성공했다.
그렇게 유럽의 기독교를 무너뜨리고, 미국대학을 점령하고, 미국을 반기독교적으로 만들며, 공공기관을 장악하고, 문화계를 오염시키면서 그 쓰나미는 현재 대한민국을 휩쓸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초유의 위기에 처해 있다. 대통령이 탄핵소추 되어있고, 세계적인 현상인 부정투표의 숙주로 지목받고 있는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비상계엄령인데, 마르크스, 김일성주의자들은 국회와 사법부 기타 정부의 중요한 부서를 장악함으로써 대통령과 우파를 위협하고 있다. 마르크스, 김일성주의자는 하나님과 원수다. 그들이 세상을 장악하면 교회가 사라진다.
특이한 현상은 대부분의 한국교회가 이에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무지 이들은 영적 전쟁의 시기도 의미도 모른다. 세상 역사는 하나님의 도도한 역사이다. 영이 예민한 사람은 이 세상의 흐름을 누구에게 배워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바로 알게 될 터이다. 교회가 세상을 꾸짖고, 아이들을 지키며 선지자의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 교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므로 세상이 어지러운 것이다. 빨리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소돔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얼굴을 바꾸며 시대마다 하나님을 공격했던 그 소돔의 세력이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소돔이 지금 Anti-God(하나님을 적대함), Anti-Bible principles(성경의 원칙을 반대함), Anti-Christianity(반기독교), Antimorality(반도덕적)의 이데올로기의 기치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은밀하게 조용하게, 점차적으로 그러나 치명적으로 소돔이 우리와 가족과 자녀들을 오염시켜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려고 하고 있다.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돔은 포기하지 않고 그 끈질긴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소돔을 멸하실 때까지 소돔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늦었지만 우리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해야 할까?
아브람은 결단적인 사람이었지만, 롯은 지체하는 사람이었다. 이 시대는 아브라함과 같이 결단을 요구하는 시대다. 롯과 같은 지체함과 우유부단함으로 이 시대를 살면 소돔이 뱀처럼 스며들어오고, 죄악의 독을 소리도 없이 깊고도 넓게 퍼트린다. 소돔을 멸망시키실 때에 하나님은 롯을 재촉하신다.
“천사들이… 롯을 재촉하여… 속히 도망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피하라”(창19:15,17). 하나님은 마음이 급하시지만, 롯과 가족들은 늘 지체하고 우유부단하다. “그러나 롯이 지체하매…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아내는 뒤를 돌아보고”(창19:14,16,26).
가족들의 지체와 우유부단함은 롯의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그 지체함을 통하여 죄의 세력이 마음을 은밀하게 정복하고 롯과 그의 가족들을 소돔으로 유혹해 온 것이다. 죄는 그 은밀함과 끈질김의 유혹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롯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를 지체하고, 성경의 원칙에 우유부단하면, 롯의 운명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소돔시대에 살았던 아브라함은 그 시대를 어떻게 승리했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을 하셨을까?
할렐루야! 아멘!
첫댓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에 대한 기준으로
예배를 중심으로
지체치않고 선을 선택하며 살게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