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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시키셨도다
이사야 53:1-6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우리가 들은 소식을 아무나 믿겠느냐? 여호와의 권능과 승리가 그토록 비천하고 멸시받는 사람에게서 나타난다는 것을 도대체 믿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그러나 여호와의 종이 실제로 마른 땅에서 돋아난 연한 순같이 형편없는 모양으로 자라났다. 여호와께서 그토록 기막힌 꼴이 되게 하셨다. 그의 모양은 아름답지도 않고 장엄한 것도 없었다. 도대체 우리가 부러워하고 매력을 느낄 만한 것이 그에게 하나도 없었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모든 사람이 그를 깔보고 피하였다. 그는 중병에 걸려 온갖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모두 그를 미워하며 기피하였다. 우리는 더 이상 그를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그러나 사실은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가 천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그러나 그는 우리의 죄악 때문에 고통을 당하고 우리가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가 무서운 채찍에 맞아 살이 찢어진 것이다. 우리가 범죄하고서도 무사하게 넘긴 것은 그가 대신 형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대신에 채찍을 맞아 우리 몸이 성하게 되었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우리는 모두 목자를 떠난 양들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 돌아다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모두 그에게 지워 놓으셨다.)
예수님은 온 우주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화려한 왕의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루기 위해 고난의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메시아의 모습과 멸시당하심(1-3) 본문의 말씀은 52:13-15과 연결되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 위해 고난의 종으로 오신 메시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1-3절은 종으로 오신 메시아의 모습과 그를 대하는 인류의 태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통상적인 평가 기준에 의하면 아름다움, 위엄, 외모 등 모든 면에서 실패자처럼 보였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와 같이 살아 있어도 별 희망이 없는 것처럼 여김 받았습니다. 그는 수 많은 멸시를 받았고,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마음은 갈기갈기 찢기었습니다. 간고(거절과 거부로 인한 고통)를 수없이 경험했고, 질고(질병으로 인한 고통)를 아시는 분이십니다.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3). 이 말은 회계학 용어로서 인생의 가치를 계산할 때 무가치한 존재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전 모든 사람들은 예수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처럼 여겨집니다. 아니, 세상 뿐 아니라 우리도 그를 무가치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가 찔림은, 그가 상함은(4-6) 그러나 예수님의 인생이 이처럼 실패한 인생처럼 여김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인류의 대속제물로 내어 주기 위하여 그 수치와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겁니다. 그의 찔림으로 우리의 허물이, 그의 상함으로 우리의 죄악이 평화와 나음으로 치유되게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는 말씀은 아사셀을 떠오르게 합니다(레16:8). 이스라엘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 죽음을 당했던 아사셀의 염소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 속에는 흠모할만한 그 어떤 것도 없었지만 그의 삶 속에는 온 인류를 위한 위대한 구원의 능력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외모를 가꾸기에 온갖 것을 투자하는 작금의 시대에 예수님의 모습과 사역을 위한 희생은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게 해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실패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놀라게 할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적 용 : 2016년 내가 닮아가야 할 예수님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외모가 능력이 된 시대에, 우리의 구원을 위해 버림과 멸시를 스스로 당하신 주님의 사랑을 심령에 채우길 기도합시다.
이런 말 들어 보셨을 겁니다. ‘무엇보다 외모가 잘 생겨야 해’ 세상에 나가보면 현실입니다. 잘 나지 못한 나로서는 예수님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으셨다는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에 그릇을 비유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보세요. 땅과 같아서 광맥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품성은 외모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는 뭘 하는 사람인지가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는 세상 죄를 지고가신 하나님의 어린 양 이셨습니다. 만인이 그를 찬양합니다.
< 설 교 >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마태복음 16:21-25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신앙고백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어서 제자들에게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권능으로 이제 로마로부터 독립해서 잘 살 수 있는 것으로 기대를 했는데 왜,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고 죽으시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다혈질이고 성질 급한 베드로가 즉시 예수님의 말씀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런 일이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무섭게 베드로를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인간 편에서만 생각하는구나.” 방금 전에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칭찬하시면서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고 하시던 예수님이 베드로를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에는 타협할 수 없는 긴장이 돕니다. 예수님은 고난 받고 죽어야 한다고 하시고, 베드로는 절대 그런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십자가 사건을 두고 세상 사람과 신자들 사이에는 이해할 수 없는 간격이 있습니다. 신자들 사이에도 십자가를 아는 신자와 그렇지 않은 신자는 너무 멀리 있습니다. 신앙고백과 더불어 십자가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편이 되어 예수님을 뒤를 따르든지, 아니면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데마(딤후 4:10)처럼 끝내 세상으로 돌아가든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1. 십자가를 모르는 자들
베드로는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으신다는 말씀을 하실 때 펄쩍 뛰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22).” 여기서 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방금 하신 말씀을 가로막고 그 말씀을 돌이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이 말과 행동에는 예수님을 위한 인간적인 열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제자로서 스승의 안위에 대해 이 정도 열정을 갖는 것은 당연하였는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왜 십자가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합니까? 유대인의 메시야관을 버리지 못한 때문입니다. 유대인이 바라고 기대하는 메시야는 로마로부터 이스라엘을 정치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독립된 유대인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백성은 유대인입니다. 그 나라의 법은 율법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자기중심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것입니다.
▶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왕의 왕으로 모든 민족과 열방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혈통적 유대인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온 인류를 구원하고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방 족속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기 위해 오셨습니다. 율법으로 다스리고 율법으로 의를 얻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은혜로 다스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통치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물질적이지 않고 영적입니다. 현세적이지 않고 현세와 함께 내세를 포함합니다. 이기적이지 않고 이타적(利他的)입니다. 이런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고 고난 받고 죽으셔야 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죄 사함을 받고 모든 이방인이 구원을 받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나라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 십자가 없는 복음은 가짜입니다. 예수 믿고 잘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믿고 윤리적,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은 근본 구원이 아니라 하나의 열매입니다. 예수 없이도 잘 살 수 있고 윤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인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가서 영생 복락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천둥번개를 무서워하고 간밤의 악몽을 무서워한다면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무엇으로 감당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마귀의 자녀이고 지옥 백성입니다. 이것을 무엇으로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해야 합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하고 영생을 줍니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해서 고난 받고 죽으심으로 인하여 모든 죄인들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믿는 우리들이 십자가를 져야하는 것은 의무입니다. 이러한 성도가 것이 수준 높은 성도입니다. 참 성도요 신령한 성도입니다.
2. 자기를 부인하라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당하심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4).”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며 삶입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내 것을 내 것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를 베풀 때에 먼저 부모에게 묻습니다. “이 아이는 하나님이 맡기신 선물로 알고 신앙으로 키우겠습니까?”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자녀가 우리 것이 아니라고 지금도 부인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마음이 변해서 나의 소유로 알지 않습니까?
자식도 그러하지만 우리의 육신과 생명도 우리 것이 아닙니다. 각종 질병 사스(최근에 유행하는 중증 호흡기 전염병)를 비롯하여 작년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메르스 … . 올해는 또 무슨 질병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는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깨어 기도합시다.
영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하여 육신을 함부로 관리하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육신의 생명도 잘 간수합시다. 생명의 소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꼭 기억하십시다. 건강을 위해 노력하고 장수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보다는 먼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우리 일생을 맡기십시다.
욥은 갑자기 찾아온 시험으로 자녀와 재산을 일시에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찡하게 하는 고백을 합니다.
욥 1:20-22 / 그 말을 듣자 욥은 자리에서 일어나 슬픔에 못 이겨 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얼굴을 묻으며 21) 이렇게 말하였다. `어머니 뱃속에서 빈 몸으로 나온 이 몸 다시 빈 몸으로 돌아갈지라. 여호와께서 주셨으니 가져가지는 분도 여호와시라. 오직 여호와만이 찬양받으실지라.' 22) 이렇게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도 욥은 그릇된 일을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욥은 분명 자기를 부인할 줄 아는 성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 역시 내 모든 것을 내 것이라 하지 말고, 다 하나님께서 잠시 맡긴 것으로 믿으십시오. 그래야 시험과 환란 중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가 있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험을 잘 치려 만점(滿點)을 맞을 수 있습니다.
2.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자아를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세에 고통 중에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큰 고통입니다.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자기 좋으면 다 좋고, 자기 나쁘면 다 나쁩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남이 나를 알아주면 우쭐댑니다. 남이 조금이라도 몰라주면 섭섭해 하고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사람의 몸무게는 100kg이 안 됩니다. 그런데 그 안에 들어있는 이기심(利己心 -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남을 돌보지 아니하는 마음)과 자기애(自己愛 - 자기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자기에 대한 사랑)는 얼마나 무거운지 이 땅덩어리보다 더 할 겁니다. 모든 것이 자기만족이라는 도장이 찍혀야 통과합니다. 죽을 때까지 못 버리는 병을 앓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자기를 주장하다 보니까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내가 불편한 것은 예민합니다. 그러나 남이 불편한 것은 둔합니다. 승강기에서 내리지도 않았는데 밀고 들어옵니다. 옆에 사람이 지나가는데 침을 “퇴” 하고 뱉습니다. 전철 안에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핸드폰을 받고 큰 소리로 할 말 다 합니다. 이웃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 없습니다. 아니 이해를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남이 나에게 싫은 소리 한 마디 하거나 조금이라도 손해를 입히면 마음으로 살인한 적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요... 겉으로는 양반 같은데 실상은 정말 무섭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를 부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성경에 이미 예언되어 있습니다.
딤후 3:1-7 / 디모데여, 그대는 다음에 적는 사항을 잘 분별해 두시오. 마지막 때가 이르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바르게 사는 일이 매우 어려워질 것입니다. 2) 사람들은 이기심에 빠지고, 돈이면 전부라는 풍조가 범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교만과 과장을 일삼고 하나님을 비웃으며 부모를 거역하고 감사할 줄 모르는 나쁜 인간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3) 또 그들은 완고하고 절대로 남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문제만을 일으키고 부도덕한 생각으로 가득찬 인간이 될 것입니다. 그들은 난폭하고 잔인한 행동을 하며 착하게 살려는 사람들을 비웃을 것입니다. 4) 그들은 친구를 배반하고 화를 잘 내며 허풍을 떨어대기 일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보다는 오히려 쾌락을 즐기는 데 시간을 보내려 하고, 5) 교회에는 나가지만 자기들이 들은 것 가운데 어느 하나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가까이하지 마시오. 6) 그들 가운데는 또 교묘하게 남의 집에 파고 들어가서 지각없이 죄의 정욕에 불타는 여자들을 꼬여 자기들의 새 교리를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7) 이런 따위의 여자들은 언제나 새로운 교사들을 찾아 매달리지만 언제까지나 진리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얻고자 하는 율법학자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눅 10:25-29 / [선한 사마리아 사람] 하루는 율법학자가 예수를 떠보려고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26) 예수께서 되물으셨다. “모세의 율법에는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느냐?” 2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자 28)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그렇게 행하라, 그러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29) 그러자 율법학자는 짐짓 자기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누가 내 이웃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눅 10:30-37 / 예수께서는 비유를 들어 대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 강도들이 그의 옷을 벗기고 돈을 빼앗고는 그를 때려서 거의 죽게 만들어 길에다 버려두고 달아났다. 31) 마침 한 유대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자 피해서 다른 길로 지나갔다. 32) 또 한 레위 사람 역시 지나가다가 그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지만 그도 피해서 그대로 가버렸다. 33) 그러나 유대 사람에게 멸시를 받는 한 사마리아 사람은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 사람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34) 그 곁에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에 자기가 타고 온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가서 밤을 새워 그를 간호하여 주었다. 35) 다음날이 되자 그는 두 데나리온을 여관 주인에게 주며 ‘이 사람을 잘 돌보아주시오. 만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갚겠소.’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었다고 생각하느냐?” 37) 그 율법학자가 대답하였다.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옳다. 너도 이제 가서 그와 같이 실천하라.”
누가 제사장과 레위사람을 정죄할 수 있습니까? 그보다 우리 모두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을 진정 사랑하며 살아가십시다.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3. 하나님에 대해서는 더욱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하루살이와 같고 지렁이(밟혀 죽는 벌레처럼)같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못할 것이 없고, 모르는 것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있느니 없으니?’하면서 하나님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판단합니다. 하나님을 호기심이나 논쟁거리로 삼아서 안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가져야지 불평하거나 거역하면 안 됩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기도하라는 뜻으로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쁜 일을 주셨으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힘으로 어려워하고 우울하게 지내는 형제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으로 알고,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께 맡기며 신뢰해야 합니다.
사 41:14 / [비천한 백성의 하나님]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힘없는 포로민들에게 말씀하셨다. `너 이스라엘, 야곱의 후손아, 너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마라! 네가 비록 밟혀 죽는 벌레처럼 힘도 없고 비천하기도 하지만 어떤 어려움도 다 이길 수 있는 나 여호와가 직접 너를 도와주겠다. 내가 이스라엘의 거룩한 하나님으로서 너를 해방시켜 시온성으로 데려다 놓겠다.
무슨 선한 일을 하고, 교회 일을 봉사하더라도 하나님 앞에 “나는 무익할 종일뿐입니다”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움직입니다. 내가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에게 없는 무엇을 내가 보태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일부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영광을 받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영광과 존귀는 다 하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고도 “다만 무익한 종입니다” 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말 충성과 겸손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일도 내 맘대로 하지 않습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잘못이라고 비난하지 않습니까?
롬 11:36 /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분의 능력에 의해서 살고 모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모든 영광을 영원토록 하나님께 바칩니다. 아멘.
4.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도 부인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 충만이나 기도, 전도 같은 활동적인데 전심전력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주목할 것입니다. 이전 것을 부인하지 않으면 새 것은 임하지 않습니다. 내가 부인하면 하나님의 비전이 보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리를 떠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재산도 친구도 친척도 지금까지 살아온 문화도 버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할 때 가나안 복지가 그 앞에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강하고 담대히 하나님을 따를 수 있으나 믿음이 식어지거나 차가울 때에는 매사에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세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계 3:15-16 /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 나는 네가 차든지 덥든지 어느 한쪽이면 좋겠다. 16) 그러나 너는 미지근하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너를 내 입에서 토해 내겠다.
3.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자기를 부인하면 다음 단계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죄수들이 처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피를 흘리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십자가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각자의 십자가를 지라고 하십니까? 즐겁지도, 기쁘지도 않은 십자가를 왜 지라고 하십니까?
십자가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습니다. 십자가가 없으면 조심하고 인내하지 않습니다. 온전치 못하고 속 썩이는 자녀가 있습니까? 십자가입니다. 그 자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도 합니다. 물질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잘못도 없고 게으르지도 않는데 물질에 곤고할 수 있습니다. 물질이 십자가가 될 때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십자가도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바울은 몸에 병(病)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병도 있었지만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의 질병의 십자가도 져야 합니다. 바울 역시 세 번이나 그 여러 가지 십자가에서 벗어나기를 기도하였지만, 하나님은 네 은혜가 족하다고 하시면서 그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여러 십자가를 짐으로 하나님의 능력안에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져야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물질, 질병, 명예의 손상, 중상모략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에 이어서 우리들에게도 남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교회를 섬기도록 부탁하신 직분들입니다.
▶ 저도 목사이기에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목사이기에 져야 할 십자가도 많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주일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바쁜 일이 생겨도 예외 없이 성령충만한 주일이 되도록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합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일에 아파도 안 됩니다.
한 걸음 나아가 영육 간에 강건한 모습으로 강단에 서야 합니다. 기도회나 예배 전에 더욱 긴장케 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가로막는 사단의 훼방입니다. 마음이 상하면 말씀을 제대로 전하고 기도할 수 없습니다. 마귀의 역사가 얼마나 강한지 모릅니다. 주일을 비롯하여 공예배에 나와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모든 분들을 위해 직분자들은 함께 기도하고 예배 준비도 철저히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처럼 돈 받고 고용된 직분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부탁하신 일입니다.
▶ 아울러 개인적으로 경건을 유지하기 위하여,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기도함으로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함으로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주신 십자가를 감당하기 위하여 기도함으로 영혼을 사랑하고 전도할 마음이 불같이 일어나야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하나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하여 열심히 전도도 하고 묵묵히 기도도 해야 합니다. 이런 일들은 언제나, 누구를 막론하고 크리스천이라면 해야 할 의무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땅에서의 남은 마지막 시간에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십니다.
마 28:19-20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들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사도 바울 역시 순교를 앞두고 이 땅에서의 얼마 남지 않은 삶 속에서도 후배들에게 끝까지 복음전파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딤후 4:2-6 / 언제 어느 때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으로 전파하시오. 기회를 얻든지 얻지 못하든지, 또 그 시기가 좋든지 나쁘든지 열과 성을 다해 가르치시오. 신도들의 허물을 바로잡고 책망해야할 때는 책망을 하시오. 옳은 일을 행하도록 격려하고 꾸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키우시오. 3) 사람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기보다는 오직 자신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는 교사들을 찾아다니는 때가 올 것입니다. 4) 그들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사상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따라갑니다. 5) 그러나 그대는 굳건히 서서 주님을 위해 고난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대가 맡은 사명을 다하시오. 6) 내가 이렇게 당부하는 것은 그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우리들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입니다.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는 분들이 어찌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전도하지 않는 분들이 이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일들은 오늘날 영생을 얻기 위하여 달려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사명인 것입니다.
요즘 인기 있는 신자는 자기 십자가 벗어 던진 신자요, 인기 있는 교회는 십자가를 벗어 던진 교회라고 하는데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바울의 권면을 늘 마음에 담고 2016년 12월 31일을 향해 달려갑시다.
갈 5:16 /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오직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르십시오. 성령께서는 여러분이 어디로 가야 할지, 또 무엇을 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 인도하는 대로만 따라 살면 여러분은 육체의 욕망에 끌려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갈 5:22-25 / … 성령께서 우리 생활을 지배하실 때 그분은 우리 속에서 다음과 같은 열매를 맺게 해주십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의, 진실, 23) 온유, 그리고 절제입니다. 여기에는 율법에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24)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악한 욕망의 본성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25) 만일 우리가 지금 성령의 능력으로 살고 있다면 모든 생활 역시 성령의 인도를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멍에는 벗어 던지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이 지라고 하신 십자가는 지십시다. 힘이 부족하면 힘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단회적인 것이었지만, 우리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는 말씀은 현재진행형입니다. 날마다 십자가 지고 예수님을 따릅시다.
끝으로 이 찬송을 2016년 첫 주일에 드립니다.
♬ 오 주님 나를 붙드시면 /
1. 오 주님 나를 붙드시면 내 영이 소생하리 그 크고 귀한 사랑의 품 갈 길을 일러주네
주님이 가신 골고다의 언덕에 내가 서서 주님 하신 행적 따라서 그 뒤를 이으리라
후렴 : 가다가 지쳐 쓰러지면 주 이름 부르겠네 여호와 나의 하나님 응답해 주시리라
2. 여호와 의지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밝고도 오묘한 그 말씀에 내 영혼 편히 쉬리
달려가 달려갈지라도 세상 길 가지 말고 그 하늘 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 품을 향해
3. 오 주님 자비하신 모습 나의 얼굴되어 주님의 품성 닮아서 그 향기 발하겠네
오 주님 나를 택하소서 이 땅에 횃불되게 구령의 횃불 높이 들고 사마리아 땅 끝까지
4. 새 힘을 주신 그 은혜를 나 이제 깨달아서 십자가 보혈의 공로를 널리 전파하리
달려가 달려갈지라도 세상 길 가지 말고 그 하늘 비밀 내게 주신 아버지 품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