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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의 숨은 업적을 발굴하고 조사하여 사회일반에 널리 알리는 것은 후손된 자의 책임이며 또한 사명이라 여겨 우리의 시조이신 형양공 정습명 선생의 실기요지 및 말미에는 약간의 저의 사견을 가미하여 사단법인 창작문학예술인협의회 계간지인 대한문학세계 겨울호에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국회도서관에 200 년간 보존되며 여타 단체 또는 회원 및 일반인에게 보급 전파되기에 그것이 가지는 의미 및 대외적 홍보효과는 크다고 봅니다. 다만, 이 사람의 붓끝이 짧아 제한된 지면에 제대로 선생의 업적을 알렸 는지 그것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고독천년, 그 마음 길을 걸으며.
烏川人 仁守/ 정 용하
주인공은 고려 예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인종 때 여러 차례 승진을 하여 국자사업(국자감 소속 종4품)을 지내셨고 다음에는 지제고(왕에게 교서 등 작성 올림)를 하시다가 예부시랑(현 교육부 차관 해당)에 오르셨다. 의종이 즉위하고서는 곧 한림학사(왕의 고문으로 조칙 등 작성)에 제수되시더니 다시 추밀원지주사(왕의 경호, 군사기밀 업무를 소관 하는 정3품)를 지내신 형양공(滎陽公) 정습명(鄭襲明:1096?~1151)선생이시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선생은 영일 현(迎日縣) 사람으로서 인물이 초탈하여 작은 일에 구속당하지 않는 활달한 인품 소유자이며 남달리 큰 기량을 지녔으며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통하였다. 오랫동안 간 직(諫: 職:임금의 잘못을 간하고, 백관의 비행을 규탄하는 직책)에 있으시면서 직언, 직간, 진충보국하는 충신의 기풍이 있었다. 인종께서는 이러한 그의 인품과 큰 그릇다운 인물됨을 총애하고 발탁, 중용하여 승선(조선조 승지 해당)이라는 벼슬에 임명하시고 또한 태자의 시독(侍讀:스승)으로 삼았다.
선생께서 지으신 한시3수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소개해 보고자한다.
石竹花(석죽화: 패랭이꽃)
世愛牧丹紅(세애 목단홍)
사람들은 붉은 목단을 사랑해
栽培蒲院中(재배 포원중)
집집마다 뜰 안 가득 가꾸네.
誰知荒草野(수지 황초야)
누가 알랴? 풀무성한 들판에도
亦有好花叢(역유 호화총)
한 떨기 어여쁜 꽃 있음을
色透村塘月(색투 촌당월)
미색은 마을연못 달그림자에 어리고
香傳隴樹風(향전 농수풍)
향기는 바람 따라 언덕 숲에 흐르네.
地偏公子少(지편 공자소)
외진 곳이라 귀공자들 뜸하니
嬌態屬田翁(교태 속전옹)
교태는 시골 늙은이의 몫이런가.
조선의 문인이며 관리였던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자신의 문학 집「청구풍아」에서 이 시는 형양선생께서 자신을 패랭이꽃에 비유하고 40자의 짧은 글자이면서도 그 표현이 잘되어 있다고 평하신 뒤 다시 말씀하시기를 형양공께서 밤에 촛불을 상대하여 옛 운자에 의하여 시를 지으시고 대궐문지기가 이 시를 읊으니 예종임금께서 들으시고 이르시기를 “옛날 중국의 사마상여(司馬尙如)와 같은 사람만이 이 같이 좋은 시를 짓는 줄 알았는데 경(卿)은 구감(狗監)이 아닌데도 어찌 이런 훌륭한 시를 지을 수 있는가. 상여와 같은 이가 아직도 있는 줄 어찌 알 수 있었으랴!”라고 하시며 그 자리에서 형양선생을 옥당(홍문관) 부제학에 임명하셨다.
파한집에서 이인로 선생이 말씀하시길 홍문관은 산에 비유하면 봉래산과 같고 옥당은 그 별명인데, 신선 같은 직책이라 했다. 비록 천자라 하더라도 홍문관 사람에 대하여는 그 벼슬을 승급 또는 면직시키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결원이 있을 때는 반드시 대궐의 여러 부서에서 선비들의 추천을 받은 후 비로소 등용할 수 있었다한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삼다의 예(글 짓는 공부의 3가지 방법 즉 많이 읽고, 쓰고 ,생각함을 즐김)와 칠보의 재주(일곱 걸음 내에 시를 짓는 재주)가 없으면 홍문관 벼슬을 못한다고 하며 또한 등용되어도 혈지한안(血指汗顔: 손가락에 피멍이 들고 얼굴에 땀이 흐름)의 책임이 뒤따랐다한다. 계속하여 말씀하시기를 예종시절 강남의 청빈한 선비인 정습명은 뛰어난 재주와 기량이 타고나 처세함에 막힘이 없었다. 간관 직을 수행하면서 직언을 서슴지 않는 등 신하의 도리를 다했다. 풍운을 만나 포부를 다 펴지 못하였어도 수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오늘 공(公)을 보게 됨이(글로써 접한다는 의미) 어찌 쉬운 일이랴.
오직 이 한편의 석죽화로써 그 정신이 번거롭거나 허황되지 아니하고 자연에 부합하여 밝으니 양상(어진재상; 파한집의 저자인 이인로 선생은 형양공을 재상의 재목으로 봄)이 우뚝함이 어찌 우연이라 할 수 있으리오.(註 파한집)
*목단의 붉은빛은 옛 부터 중국에선 부의 상징인데, 이 시는 부귀의 상대적 제한가치에 예외적 상황(패랭이꽃)을 등장시켜 하나의 갈등을 조정할 준비를 갖추고 있어 풍자기법의 수준이 높은 작품으로 현대국문학자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음.
贈妓(증기: 기녀에게 주다.)
白花叢裏淡毛容(백화총리 담모용)
외모는 한 떨기 흰 꽃처럼 맑았는데
忽被狂風減却紅(홀피광풍 감각홍)
홀연 광풍으로 홍안이 퇴색해버렸구나.
獺髓未能醫玉頰(달수미능 의옥협)
달수로도 옥 같은 뺨을 고칠 수 없으니
五陵公子恨無窮(오릉공자 한무궁)
오릉공자(오손화)탄식소리 끝이 없어라.
청구풍아에 이르기를 오 손화 라는 사람이 기녀인 등 부인을 몹시 사랑했는데, 등 부인의 왼쪽 볼에 사마귀 같은 붉은 점이 있어 등 부인이 술에 취하여 춤을 출 때면 양 볼을 희게 하려고 달수, 잡 옥, 호박 등을 약방문하여 볼에 바르니 다시 아름답게 회복 되었으므로 등 부인에게는 오손화로부터 받은 백금, 호박 등이 많았다한다.
이인로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남주(南州)에 한 기녀가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과 재주가 뛰어났었다. 그 고을에 부임한 어느 군수가 기녀에게 혹하여 신분마저 잊어버리고 마음을 온통 기녀에게 빼앗겨버렸는데 임기가 만료되어 본청으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문득 크게 술에 취하여 좌우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만약 내가 이 고을을 떠나 몇 발자국 못가서 이 여자는 타인의 소유가 되리라 생각하고 곧 여자의 얼굴을 촛불로 태워 살점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한다.
그 후 형양선생께서 사절로 이 고을을 지나게 되었을 때 그 기녀의 꼴사나운 몰골을 보고 측은한 생각에 운람(雲藍) 한 폭과 시 한수를 써주면서 이르시기를 만약 화려한 행인이 여기를 지나가거든 마땅히 나와서 이 시를 보여주라고 당부하였다.
기녀는 시키는 대로 하였는데 보는 사람들이 모두 측은하고 딱해서 주휼을 더 주었던 관계로 그 기녀의 부(富)는 처음보다 갑절이 되었다.(註:파한집)
十日欲招咸尙書飮聞其仙去有感 (십일욕초 함상서 음문기선 거유감)
*십일 날, 함 상서를 불러 함께 술 한잔하려했는데 그 신선 같은 분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느낀 것이 있다(상서: 현 장관급 해당).
十日秋香未必衰(십일추향 미필쇠)
초열흘 가을향기 아직 삽상한데
登高意欲共傾巵(등고의욕 공경치)
높은 곳 함께 올라 술잔 나누려했건만
舊遊伴侶今無在(구유반려 금무재)
옛 부터 함께해온 짝, 이제 가고 없어
獨有黃花尙滿籬(독유황화 상만리)
울타리 가득찬 국화만 홀로 남아있네.
謝左正言知製誥箋(사좌정언지제고전)
*좌정언, 지제고를 제수 받고 임금께 사례한 글.
(중서문하성 소속 좌정언직을 수행하면서 지제고업무를 겸함)
오랫동안 조정에 몸을 담았으나 지금껏 사소한 도움을 드리지 못하였음에도 간원(諫院)에 발탁하여 주시어 천은을 베푸시니 그 은영 비길 데 없이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아뢰옵건대 성상의 총명하심은 신하의 충성을 받아들이는데 있고, 나라의 안위가 정승(정치적 도움)에 관계되는 까닭에 음양(옳고 그름)을 선택하고 현부(어짊과 그렇지 못함)를 가려서 백관으로 하여금 그 직을 완수하게 하여 세상을 편하게 하는 일이 신하된 자의 할 일이며, 군왕의 잘못을 직접 간(諫)하여 옳은 일은 행하게 하고 굽은 일은 폐하게 함으로써 간사한 무리로 하여금 겁을 내게 하여 정당한 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뜻을 펴게 하는 것이 간관의 할 일이니, 관직에 참된 사람을 얻는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신(臣)은 초야에 일어나 좋은 때를 만났으며 박봉이나마 양친하게 되어 옛 회지(남송의 정치가)의 뜻을 생각하고 한때는 군(郡)을 다스려 외직에 봉사하였으나 임기만료로 학록(국자감 벼슬)을 제수하시고 다시 1년이 못되어 승차(승진)에 오르게 되니 옛 맹자의 시를 풍자하여 정사를 깨우치게 하고 동호(董狐)와 같이 곧은 사필(史筆:역사의 기록)을 잡아 아첨하는 무리의 주벌(죄인을 꾸짖어 물리침)에 어찌 목숨을 바쳐 직필(直筆)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성상을 해와 달처럼 비춰드리지 못해 기이한 충절 없음이 부끄럽습니다.
매양 돌아보심을 받잡고 지척에서 알현치 못하고 험로와 평원을 가림 없이 오직 명대로 동서를 왕림하였으며 신의 고칠 수 없는 성질로 말미암아 꾸중을 받아 쫓겨나야 함에도 감히 빛난 조칙을 내리시어 문득 초야의 미천한 몸에 은혜를 입히시나이까. 그 뒤로 상위에 있게 하여 낮은 신분으로 하여금 높은 신분으로 넘게 하시고 급암(전한의 관리)과 주창 같은 직신(直臣)을 밝은 조정에서 본받게 하여 쓴 약 마시듯 훈도하시고, 아형(은나라 관리)과 전설의 현신(요순시대 관리)같이 밀실에 대하여 국솥에 조미(調味)하듯 정사를 조리케 하시니 스스로 생각건대 신(臣)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같이 총애하시나이까.
이는 대저 천지의 변화를 판단하시고 나면서부터 신(神)같이 밝아서입니까? 인(仁)을 행하는 일은 넓게 베푸는 일에 방해되지 아니하게 하시고, 지자(智者)를 등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성실한 이를 구할 것이며 나쁜 무리들이 왕실을 파손할 것을 생각하여 정치와 형벌을 밝게 닦으시며 오랑캐에게 순종치 않음을 관용하여 문덕(文德)을 펴시되, 사설(邪說)을 펴고 백성을 속이는 이는 삼족을 멸하여 용서치 말 것이며 정성껏 나라를 위하는 사람은 다소 어리석음이 있어도 반드시 등용하시고 외롭고 가난한 신하(청빈한 신하)를 기록하여 맑은 요직에 참여하게 하소서.
거듭 생각하옵건대 신은 세상과 화합치 못하고 불우하여 40이 되어도 이름이 없으며 그저 시서(詩書)를 익혀 자못 고금의 치란(治亂)을 알고 있사오니 상주(상나라, 주나라)의 흥성은 선을 행함에 있고 그 망함은 허물을 듣기 싫어해서이며, 진한(진나라, 한나라)의 성함은 현인을 얻어서이고 그 쇠함은 참소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신(臣)은 일찍이 과거를 미루어 미래를 알게 되자 마음이 상하여 눈물을 흘리곤 하였나이다.
이제 명군께서 힘써 이치를 구하시고 여러 관리가 합심하여 공경하나니 그런데도 태평에 이르지 않아 여러 폐단이 한데모여 재화의 징조가 천상에 나타나고 도적이 평양에 일어나니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화변이 발생함은 장차 번창한 북조(국가의 분열을 의미)를 열어주는 징조라 하나이다.
신(臣)같이 완고하고 둔한 이에게 과한 품계를 내리시어 그 영화 또한 심상치 아니하여 보은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오직 마음껏 바른 일을 간할 따름이오며 단지 성상을 위하여 죽음 또한 사양치 않을 뿐입니다. 폐하께서 만약 재리(財利)에 힘쓰시고 충실치 않으신다면 신(臣)은 영화에 처한다 해도 부끄러울 것이며, 상벌을 살피시고 척출과 중용을 밝게 펴시면 신(臣)은 산림에 쫓겨나도 마침내 영화로 삼겠나이다. 감히 말을 꾸민 것이 아니오라 맹세코 정성을 다하여 고합니다.(註:동문선)
謝賜物箋(사사물전)
*임금이 내려주신 물건에 대한 사례의 글
성은에 복몽(伏蒙:엎드림에 주저함이 없음)하여 신이 서북면병마부사로 차출됨으로 인하여 신에게 굵은 명주와 광 넓은 흰 모시 각10필과 가는 명주5필, 흰 솜10근, 내장 미 50곡(斛,500말)을 특별히 하사하시어 곤궁한 자를 구휼하신 일에 대하여 관리들의 논의가 바야흐로 일어나 삭탈관직이 깊이 우려되었는데 성상의 결단으로 죄과가 용서되는 홍은을 입게 되니 생각하옵건대 분수에 넘치는 일이옵니다.
참으로 떨리는 두려움이 더할 따름이옵니다. 황공히 바라옵건대 신은 초야에 일어나 행실에 방정함이 없으며 좌우에 선용(先容:인맥)마저 없는 터에 다행히 좋은 때를 만나 한번 사도(仕道:봉사)에 참여하게 되어 영화가 안팎에 이르고 총애가 반열에서 뛰어나지만 스스로 사람됨이 졸렬하여 반려자가 적고 고한(孤寒)하여 어려움이 많사오며 소년시절에 인격수양과 학덕의 연마를 게을리 한 탓에 유속의 시류와 풍파에 휩쓸리다보니 지금에 와서도 사람들의 입에 근거 없는 말이 오르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초나라 사람이 송나라 구슬의 단점을 말하는 것과 같아 사람들이 남의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화변은 뜻밖에 생겨, 노나라 한단(하북성의 지명)의 주반위(중국고사의 인명)가 피해를 당하게 되는 것이오며 함정에 빠져듦을 곁에서 보면서도 구제하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성상의 동조(洞照: 뛰어난 밝음)가 아니라면 그 누가 이런 뭇 의혹을 분별하겠사옵니까. 성상의 보살핌에 힘입어 생을 보전하였으며 금일에 이르러 재생의 큰 은혜를 받잡고도 일할의 보답조차 못하였사온데 하물며 거기에 다시 물품까지 나누어 내려주시니 실로 드문 일이라 하겠습니다. 온 나라 백성이 기쁘게 옷을 지어 입을 수 있으며 양식이 있어 배불리 먹어서 궁항과 기한에 고생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시는 성상의 선정에 작은 공이라도 보태려고 힘썼으나 성상께서 먼저 흡족한 혜택을 내리셨사옵니다.
성상께서 재빠르게 슬기를 발휘하시어 시시비비를 판정하시니 임금을 받드는 신하가운데 굽실거리며 아첨하는 무리가 한꺼번에 사라짐으로써 마치 다 꺼진 재에서 불이 붙어 일어나는듯함을 깨달았사오며 마른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는 듯 놀라움을 보겠나이다. 이리하여 성상의 은혜가 아래로는 온 백성에 미치니 이는 성상의 거동이 상제(上帝)와 같으시고 그 총명하심이 하늘에서 왔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즐거움만 탐하고 녹봉만 받아 속임수를 쓰지 않음은 물론 이옵고, 진실로 국리를 위하여 마땅히 남이 하나를 하면 그 백배 노력을 할 것이오며 또한 창을 들고 변방에 싸워도 무릇 시름을 성상께 끼쳐드리지 않을 것을 바야흐로 솟아오르는 밝은 해를 두고 맹세하옵니다.(註: 동문선)
敎書(교서: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글)
*고려 제17대 인종 때에 형양공께서 밀서소감, 동궁시독, 학사지제고 등 관직을 사임하고자하였으나 임금께서 허락지 않은 교서임( 臣 최유청이 작성한 후 임금께 올려 하사된 글임).
대저 어려서 학문을 배우는 것은 장차 장성하여 배운 대로 행하고자함이다.
진실로 학문은 자기를 위한 것이지만 자기를 위하여 남음이 있으면 경우에 따라서는 그대의 훌륭한 학식과 문장을 남을 위하여 유용하게 쓰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하노라.
나라에 이바지한 공로와 그 높은 도덕과 충절 있는 지조를 세상에 드러내어 중용하기를 여러 번한 것으로 인하여, 지금의 중론이 그대의 직책과 관직을 거둔다면 경(卿)과 가장 가까운 짝이 되어있는 나의 마음은 어린아이의 발목을 자르는 것보다 더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은 스스로 분명한 사실이며 어찌 추호도 거짓이 있겠는가.
왕개미의 언덕을 보건대 저들은 제 왕궁 속에 중요한 물건을 비장하여두는 창고로 옮기나니 경(卿)도 이와 같이 동료들을 데리고 옛 묵은 사물을 아울러, 밝고 새롭게 함에 있어서 은혜롭게 더욱 힘써 주기를 바라노라. 그리하여 마땅히 다시 전보다 더욱 튼튼하게 직책을 수행하여 나의 이러한 마음에 부응함으로써 작은 청렴에 머무르지 말고 각기 분담하여 사명을 완수하여주기를 당부하노라(註:동문선).
事實摭遺(사실척유)
*형양선생과 관계되는 사실들을 여러 문헌에서 발췌.
인종12년 갑인(1134)년 가을에 내시(승지) 정습명을 보내어 홍주의 소대현(현 태안군)에 있는 강바닥을 파게하였다(인류최초의 운하공사). 안흥정(安興亭) 아래쪽은 뱃길에 물이 격류를 이루고 또한 물속에 바위가 있어서 지나가는 배들이 자주 물살에 휩쓸리고 암초에 부딪쳐 배가 침몰되는 사고가 일어나니 소대현 경계구역의 강바닥을 파내면 뱃길이 순탄할 것이라는 진정에 따라 정습명을 파견하여 이 고을 인부 수천 명을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워낙 어려운 일이라 끝내 목적을 달성치 못하다.
인종13년 을묘(1135)년에 묘청 등이 서경(평양)에서 조정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인종께서는 문무에 능한 내시지후 정습명으로 하여금 서경의 서남쪽에 있는 섬으로 가서 궁수와 수병을 모아서 전함을 순화현(順和縣:평양 순안구역) 남강에 정박하여 반란군의 배를 막게 하였다.
또한 상장군 이록천을 파견하여 수병을 이끌고 서해에서 작전하는 정습명을 돕게 하였다.
이록천이 철도(섬의 명칭)에 이르러, 서경에 가서 적과 싸울 것을 급히 재촉하였으나 날은 이미 저물었고 바닷물이 썰물이 되어 배를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형편이었다. 정습명이 말하기를 “뱃길이 좁고 썰물이라 물이 얕아서 어려우니 서두르지 말 것이며 마땅히 지체하였다가 밀물이 되거든 출발해야한다.”라고 만류하였으나 이록천은 듣지 않고 출동을 강행하였다. 배를 움직여 서경을 향하는데 중간지점에 이르자 물이 얕아 배가 모두 강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반란군은 작은 배에 섭 나무를 가득 실어두었다가 밀물이 들어오자 섭 나무에 불을 붙여 조수에 떠내려 보내니 이쪽의 많은 전함이 피할 사이도 없이 불길에 휩쓸리고 말았다. 이록천은 싸워보지도 못한 채 군사를 잃고 겨우 죽음을 면하여 도망쳐 나왔다(註:김부식전).
인종18년 경신(1140)년에 재상 김부식과 임 원개, 이 중, 최 주, 최 자, 정습명 등이 당시 바로잡아야할 「시폐10조」를 열거하여 임금께 상소하였다. 그리고 편전의 문 앞에 부복하여 3일간 기다렸으나 임금은 아무런 대답을 내리지 않았다. 최 자 등은 복합(伏閤)을 그만 끝내자고 하였으나 정습명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해 7월 임금은 낭사(중서문하성 소속 정3품 이하 관리를 총칭)의 진언에 따라 집주관 제도를 없애고 모두 내시별감, 내시원 별고 등으로 강등시켰다. 그리고 난 후 임금은 최 자 등을 불러 나아가 일을 보게 하였다. 그러나 정습명은 홀로 그것만으로는 진언을 끝내려고 하지 않았으며 임금이 종용하였으나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우상선 최 자 만이 진언에 참석하지 않았다. 직(職)을 받드는 것은 평상과 같았으나 식자들은 그를 비루한 사람으로 보았다(註:동국통감).
인종20년 병인(1142)년 5월에 임금이 태자에게 명하여 예부시랑 정습명으로부터 대우모(大禹謨:시경詩經의 편명篇名)에 대한 강론을 받게 하였다(註:고려사).
인종23년 을축(1145)년 12월에 재상 김부식이 고려최고의 역사서인「삼국사기」편수사항을 임금께 올린 글에 3인(김부식, 김충효, 정습명)이 함께 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註:고려사)
의종3년 기사(1149)년 4월에 정습명을 한림학사로 제수하였다.
같은 해 8월에 임금께서 평장사 고 조기, 어사대부 문 공원, 중서사인 왕 식, 좌승선 정습명 등을 불러 주상을 마련한 후 국사를 의논하였다(註:고려사).
의종5년 신미(1151)년 춘 3월21일 추밀원 지주사 정습명 선생께서 세상을 떠났다.
기록에 의하면 형양공 정습명선생은 세자(의종)의 스승으로 인종의 우려와 둘째왕자를 태자로 책봉하려는 왕비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종을 왕으로 추대함에 깊이 관여하셨는데 후에 인종께서 승하 시, 의종에 대한 보필을 당부 받은 고탁대신(雇托大臣)으로서 의종 즉위 초창기에 국왕을 보필하여 날로 다사다난한 국정을 다스려 광구 진력한 공헌이 크고 많았다.
그러나 포악하고 어두우며 방종했던 의종의 주변에는 많은 간신들이 에우고 있었다. 그들은 형양선생께서 임금을 가까이 하는 것을 엄중히 경계하였고 그의 충언이 임금을 설득하게 될 것을 꺼려하였다. 임금 또한 선생의 서슴없는 직언을 기피하려했으니 마침내 임금을 회개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선생께서는 선왕인 인종의 고탁을 이행치 못한 자책감과 간신인 김 존중, 정 함(의종의 유모 남편)등의 계속적인 모함상소에 병을 칭탁하여 사임을 아뢴다. 이에 의종은 김 존중으로 하여금 그 직책을 대신하게 하니 임금의 뜻이 자신에게서 떠났음을 안 정습명 선생은 약을 넘기시고 순절한 것이다. 그의 선견지명(후일 무신의 난을 지칭)을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것이다(註: 동국통감, 고려사).
의종7년 계유(1153)년 7월에 의종이 귀법사에 거둥(나들이)을 했을 때 현화사까지 이르게 되었는데 임금이 말을 달려 결국 달영다원에 이르게 되자 신하들 중 아무도 따르지 않았다.
임금은 혼자 달영다원의 기둥에 기대어 서서 거기에 있던 어떤 사람에게 말하기를 “지금 만약 정습명이 살아있었더라면 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라고 하였다(註:동국통감).
고현(古賢)을 회억(回憶)하며
〈유택〉
소의 병을 고치는 소의원이나 말을 길들이는 말 포리꾼들도 죽으면 그 영혼을 위로하는 향화(향불)가 자자손손 이어지는데 하물며 고려조의 명신인 선생의 산소가 긴 세월 잡초우거지고 염소들이 뜀박질하는 등 실전되었으니 어찌 슬프지 않았으랴.
다행히 우여곡절을 거쳐 중년에 이르러 주산은 지네가 달리는 형국이요. 용이 길게 누워있는 동해바다가 지척에 보이는 청림 옛터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내니 마치 선생의 넓은 도량을 보는 듯 명쾌하게 비추어지도다.
〈오천서원〉
작은 것이 큰 것을 포함하는 세상에 순백의 눈(目)으로 어둠에 들어, 큰 그림 마다하시고 오직 대의만을 생각하셨고 앞서가는 사람을 역사가 뒤따르지 못하니 고벽 함은 운명이런가?
엄숙한 빛으로 조정에 서시어 그 뛰어나심이 해동에 강상지맥(綱常之脈:삼강오륜의 기운)을 심어 사설위학(그릇된 학문)이 감히 근본을 범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사우(祠宇:사당)를 세워 보은함은 하늘의 뜻인가? 위충직절(爲忠直節)로 사승(史乘:역사책)을 밝게 기록되게 하시니 서원의 은혜로운 편액이 처마 밑에 번듯하도다.
〈절의〉
불같은 영혼은 자신마저 예정하였는지, 말년에 풍운을 만나 시(是:옳음)가 비(非:잘못됨)에 가려 있어도
우회하지 아니하시고 의로써 순절하시어 관통하시니 세인의 귀감이요. 절의의 표상이로다.
묘소의 밋밋한 봉분은 평소 백성을 위한 선생의 또 다른 마음의 발로인가?
천년이 지나서도 석죽화 시 한수가 세상 사람들로부터 애창됨은 우연이 아니듯
오색필로 역사의 저변에 임하셨기에 동해의 붉은 해와 개인 달이 이곳 먼저 비추누나.
*참고문헌: 형양선생실기
*한국학 중앙연구원 손 환일 박사가 최근 언론에 공개한 개인 소장 형양공
정습명 선생의 묘비명에 의하면 실기내용과는 달리 선생의 최종 관직이
대중대부 예부상서 (현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및 추밀원사(종2품), 한림학사, 지제고 등을
겸직 또는 역임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음.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다녀가심에 감사드립니다.
좋은 자료 뜻깊게 읽었습니다.
仁守님께서 이런 좋은 자료들을 나 혼자 읽기가 너무 아까워 나의 문장에 옴겨 많은 이들에게
仁守선생의 자료라 자랑하고픈데 옴길 수 없는것이 안타깝습니다. <포은종약회에 정몽주선생의 소회라든가
원보(정정용)님의 자료는 허용되어 여러분들에게 읽히고 있답니다>
스크렙 하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녀 가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