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심포지움>
-‘한양의 수도 성곽’의 역사적 가치 활용-
1. 서울의 성곽을 돌 때 흥미로운 것은 성곽을 구성하고 있는 돌들의 모양이 다르다는 점이다. 자연석에 가까운 돌들을 쌓은 아래층과 정방형의 다듬은 돌들로 구성된 위층은 서울 성곽이 오랜 시간에 걸쳐 보수 개축되었다는 점을 알려준다. 성곽 안내에는 서울 성곽은 크게 3번에 걸친 변화가 있었다고 전해준다. 조선 태조 때 처음 만들어진 성곽은 세종 때 증축이 이루어졌고 한참 지난 18세기 숙종 때 대규모의 개축이 시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숙종 때 이런 사업이 벌어졌을까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다. 축성과 관련된 또 다른 의문 중의 하나는 북한산에 왜 대규모의 산성을 건립한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 서울의 방어에 별다른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장소에 만들어진 북한산성은 어떤 실효성이 있었을까라는 점도 항상 갖고있던 질문이었다.
2. 이런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다. 2023년 11월 24(금) 서울역사박물관에서 <한양의 수도성곽, 역사적 가치와 활용>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움이 열렸다. 심포지움에서는 수도 성곽, 특히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을 중심으로 하나의 기조강연과 7개의 개별주제가 발표되었다. 북한산성과 서울성곽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주제의 심포지움이 열리게 된 것은 2022년 ‘한양도성-탕춘대성-북한산성’을 연결하는 수도의 방위시설을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하기로 결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이러한 노력들을 집결시켜 2027년 최종 결정에 영향을 주기 위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우연하게 발견한 심포지움이지만, 평소 산성에 대한 흥미를 갖고 있던 나에게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3. 1711년(숙종 37) 완성된 북한산성은 조선 후기 새로운 국가방위 체제에 대한 고민의 결과라 할 수 있다. 16세기(임진왜란)와 17세기(병자호란)에 걸쳐 두 번의 거대한 국난을 겪고 난 정부는 변화하는 국내외의 환경에 맞추어 새로운 국가방어책을 구상하게 되는데, 이때 나온 것이 국경선 중심의 방어 대신 수도 중심의 방어책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5군영체제로 전환하고 서울의 종사와 사직을 보호하기 위한 그동안 보장지로 만든 ‘강화외성’과 ‘남한산성’이 별로 효과를 보지 못하자, 한양 가까운 데 좀 더 강력한 보장처를 만들고 방비를 강화하는 것으로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한양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더 이상 수도를 방치할 수 없다는 정치적, 사회적, 군사적 요인에 따른 결과였다. 북한산성에 산성을 건축하는 일은 상당한 반대에 직면했지만 숙종의 결단과 의지로 결국 완성하게 된다. 그 후 한양도성과 북한산성을 이어주는 연결축으로 탕춘대성의 완공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4.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은 훈련도감과 어영청, 근위영 3군부가 역할을 분담하여 건축에 참여하였고 이후에도 방비를 맡아 운영하였다. 북한산성 체제는 영조 때 일어난 ‘이인좌 난’을 계기로 좀 더 효율적인 체제로 전환되었다고 한 연구자가 밝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기록된 북한산성과 관련된 기록을 보면 북한산성의 방어체제는 상당히 느슨해지고 성벽은 무너졌을 뿐 아니라 군사적 성격보다는 민가들이 늘어나는 일종의 거주지 형태로 전환되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심은 도성과 내4산(인왕산-남산-북악산-낙산)에만 쏠리게 되어 국가적 방어체제의 혁신적 대의로 시작된 방어체제는 약화되어갔다.
5. 그럼에도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의 건설은 오랫동안 유람기의 대상으로만 삼았던 북한산을 국가 방어의 중요한 축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했고, 서구인들의 여행기 속에도 방어망의 강건하고 단단함을 경이롭게 보는 시각을 만들었다. 비롯 힘든 코스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의 코스를 답사하였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북한산성의 중요성을 증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오랫동안 진행된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구축된 산성체제가 시대의 변화에 따른 오랜 평화와 기술적 진행에 의해서 효율적으로 작동되지 못했고 결국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방어망의 위치나 구축의 의의에 대해서는 좋은 평가를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6. 흥미로운 것은 ‘탕춘대성’에 대한 인식이다. 발표자 중에서도 이번 심포지움 참여를 통해서 처음 ‘탕춘대성’에 대하여 알았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인식도가 낮은 것이다. 탕춘대성은 창의문에서 세검정 쪽으로 이어지는 홍제천 주변 탕춘대에 건설된 성으로 그동안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최근 이루어진 발굴에서는 석성과 토성의 흔적이 혼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성곽학회’ 회장은 북한산성과 한양도성이 석성으로 만들어졌고 굳이 토성을 쌓을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토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학계 관계자들의 토론에서 볼 수 있듯이 현재 ‘탕춘대성’은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미지의 영역일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탕춘대성의 건설이 한양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의 연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비록 한번도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시설이었지만 말이다.
7. 그밖에도 북한산의 식생, 북한산 내부의 문화유산과 사찰, 서구인들의 북한산성에 대한 인식, 북한산성과 탕춘대성의 문화적 활용 등이 발표되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심포지움에서 얻은 성과는 북한산성이 건축된 이유와 건축과정 그리고 한양도성과 탕춘대성과 관계된 국가의 방어체제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정부는 나름 국방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았고 국가 체제를 강화시키기 위한 노력에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런 고민의 결과가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건설로 이어졌고, 후대 정조의 화성 건설까지 연결된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18세기에 집중되었던 국가 재건 프로그램의 시도는 정치적 혼란과 권력층의 부패에 따라 좌절되었고 19세기 이후에는 소수의 권력층에 의한 착취와 탄압 속에서 여러 가지 국가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북한산성과 탕춘대성 시설도 방치되었고 성은 무너졌으며 북한산은 황폐해져갔다. 20세기 초 북한산을 찍은 사진을 보면 나무 한 그루도 제대로 자라지 않은 황폐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어쩌면 ‘북한산성’은 국가의 본질을 위해 시도되었던 조선 후대의 정치적 실험 중에 하나였으며, 비록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지만 국가 방어에 대해 고민했던 흔적이 남아있는 역사적 장소라 할 수 있다.
첫댓글 - 북한산과 북악산을 연결해주는 능선을 방어벽으로 쌓은 것이 탕춘대성으로 알고 돌아다녔다. 산과 산 사이의 빈틈을 막기 위한 벽으로서. 아직도 낡은 기와장들과 벽돌들이 널부러져 있는 곳이 많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