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동성당
은미희
누구든 역사는 있기 마련이다. 한 개인이든, 국가든,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무정물의 사물이든, 모두 나름의 역사를 지니기 마련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게 된 그 순간부터 고유의 역사를 가지게 되며, 아무도, 그 무엇도, 자신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한 개인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안 그 시간의 역사로부터 무관할 수 없다. 그 시간의 중심에 서서 치열하게 세상을 이끌어나가든, 아웃사이더로 방관만 하든, 한 시대를 사는 동안의 역사는 그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그러므로 그들을 역사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다.
5.18. 그 비극적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종교인도, 엄숙하고 신성해야할 종교적 제단도 예외일 수 없었다. 초파일, 대중들에게 자비를 설파하던 그 성스럽던 날에 광주는 연등으로 환하게 피어나는 대신 피바다를 이루었다. 피로 얼룩진 세상. 하늘도 그 피를 안타까워하는 듯 비를 뿌리며 피 묻은 아스팔트를 씻어 내렸다.
치밀하게 조직된 사회의 검열 시스템에 다들 숨죽이며, 지하로, 지하로 숨어들 때, 가톨릭 정의 평화 구현 사제단은 시국을 걱정하며, 목소리를 높여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끊임없이 군부독재의 위협과 테러협박이 있었지만 일신의 안위보다는 국가의 미래가 우선이라고 여긴 사제단은 꿋꿋하게 그 가시채찍의 형벌을 감수해냈다.
그 중심에 서울의 명동성당과 광주의 남동성당이 있었다. 남동성당은 박정희 정권 시절, 사제단은 물론 사회단체나 재야인사들, 뜻있는 시민들이 함께 모여 기도회를 열고, 정부와 당시 집권자들에게 민주화 요구와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은 물론 그 이상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기도회를 열어왔다. 어디 그뿐일까. 그 서슬 푸른 감시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투쟁을 하다가 아깝게 목숨을 빼앗긴 열사들을 위한 추모 미사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 엄혹했던 시절, 남동성당은 이 나라 민주화의 새벽을 열기 위해 부단히 새벽종을 울린 것이다.
그런 남동성당이, 민주화를 요구하던 인사들의 선봉에 섰던 남동성당이, 군부가 총칼로 위협했다고 해서 숨죽이며 있을 수 없었다. 80년 5월 18일, 광주는 정치는 물론이고, 교통, 행정, 경제, 생활전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활동이 정지 된 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계엄군은 화순과 목포, 서울과 담양, 무등산 방향과 구 상무대로 향하는 길목 등 6곳의 나들목에 군대를 배치하고 아무도 자유롭게 광주를 빠져나가거나 들어올 수 없게 지키고 있었다. 때문에 광주의 참상도, 위급한 상황도 외부로 알려질 수 없었다.
상황은 날로 악화돼가고 있었고, 사상자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게 불어나자 당시 남동성당의 주임신부였던 김성용 신부는 22일, 재야인사와 시민,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남동 성당 수습위원회’를 결성했다.
당시 남동성당 김성용 신부는 이렇게 울부짖었다.
“총성은 멎지 않는다. 얼마나 많은 의인의 피가 흘렀을 것인가. 자유를 위하여, 짓밟힌 인권을 되찾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인가.”
그때 당시에는 새롭게 결성된 남동성당 수습대책 위원회 외에 두 개의 수습위원회가 활동 중이었다. 장휴동(한일극장 대표), 최한영(독립운동가), 박윤종(前 광주시장), 이종기(변호사), 윤영규(YMCA이사), 김상형(전남대 강사), 이석연(전남대 교수) 등 15명으로 구성된 시민수습대책 위원회가 그 중 하나였고, 명노근, 송기숙 전남대교수를 고문으로 하고, 위원장에 김창길, 부위원장 김종배, 대변인 양원식, 허규정 등 15명으로 구성된 학생 수습대책위가 또 다른 한 곳이었다. 이들은 23일 오전부터 장례나 차량 통제 등의 실질적인 활동을 보여주며 항쟁초기의 무질서한 광주를 이끌어나갔다.
그밖에도 도청 수습위원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YWCA와 녹두서점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학생수습대책위원회를 지원하거나 잠적해있던 학생 운동권을 규합하는데 노력을 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다 이들은 항쟁후반부에 이르러서 학생수습위를 장악하고, 항쟁지도부를 결성, 마지막까지 광주항쟁을 이끈다.
그러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의 활동은 시민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얻지 못했다. 당시 계엄군과의 협상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맡고 있었지만 이들 위원들 가운데 관변인사들의 어정쩡한 태도를 시민들이 문제 삼으면서 새로운 대책위원회의 구성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새로운 수습대책위원회가 남동성당에서 결성되기에 이른다.
당시 남동수습대책위원회에 참여했던 인물은 홍남순(변호사), 조아라(장로), 이애신(YWCA 장로), 조비오(신부), 김성룡(신부), 이기홍(변호사), 장휴동, 송기숙(교수), 명노근(교수), 이성학(장로), 추길안, 김천배, 16명. 이들은 새롭게 남동성당 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게 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계엄군과 정부에 대한 8가지의 요구사항을 만든다.
①사태수습 전에 군 투입을 하지 말라. ②연행자 전원을 석방하라. ③군의 과잉진압을 인정하라. ④사후 보복 금지. ⑤책임면제. ⑥사망자 보상. ⑦이상이 관철되면 무장해제를 하겠다.
남동성당 수습대책위원회는 자체적으로 만든 8개의 요구 항을 들고 도청에서 활동하던 시민수습대책위원회와 만난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당시 계엄군에게 공식적으로 요구한 조건은 모두 7개항. 두 곳의 수습대책위원회에서 만들어진 요구조건들은 그 내용들이 동일해, 따로 조율할 필요가 없었다.
23일 저녁이 되자, 남동수습대책위원회와 시민수습대책위원회로 이원화되어있는 수습대책위원회를 단일화 시킬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조비오 신부가 통합작업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내부의 이견으로 말미암아 완전 통합에는 이루지 못한 채 몇몇 인사가 불참하고, 나머지 인사들만 참여하게 되는 합동수습대책위원회가 다시 꾸려졌다.
24일이 되자 합동수습대책위원회 11명은 계엄분소에 가 첫 협상을 시작한다. 당시 계엄분소에서는 김기석 소장, 기갑학교 교장, 헌병대장, 보안대장 등이 참석했고, 수습대책위원회에서는 명노근, 최한영, 이용기변호사, 장세동 장로, 조비오 신부, 장휴동 한일극장 대표 등이 참석했다. 분위기는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시민군에게 쫓겨 후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군의 사기가 크게 저하됐다고 생각한 군인들은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내민 7가지의 조항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정권찬탈이 목적이었던 이들에게 시민들의 요구조항은 세상 물정모르는 사람들의 말장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요구 사항을 하나하나 거론할 때면 이들 계엄군 측 대표들은 위압적이고도 분노에 찬 표정으로 거부했다. 이에 지지 않고 수습대책위원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요구사항들을 문건으로 남기고, 거부이유를 녹음으로 남겨두자고 제의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묵살당하고 말았다.
더욱이 구금자들을 무조건 석방하라는 대책위의 주장에 무조건 무기부터 반납하라고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무기회수에 따르는 상응의 대가는 없었다. 무기를 회수하는 데 어떠한 조건도 달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는 협상장의 창문을 거칠게 열어젖히며 바깥풍경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헬리콥터 3대가 하늘을 선회하고 있었고, 탱크는 금방이라도 발진할 듯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그 모습에 절망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도 인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고, 합동수습대책위원회에서 내건 요구조건은 하나도 들어줄 수 없으며, 총기 반납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라 무조건 반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무력에 의한 사태 종결의 의지를 내세우는 반면 시민수습대책위원들은 협상에 의한 항전 종식을 원했다. 시각차가 커도 너무 컸다. 협상에 의해 이견이 좁혀질 수 있는 가능성은 제로였다.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민들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학생 수습위원회 측은 강력하게 반발을 했다. 하지만 합동수습대책위원들은 그 이튿날인 25일, 2차 협상을 시도했다. 현재 구금돼 있는 학생과 시민들을 석방하는 조건에서 첨예하기 부딪쳤다. 전원석방을 주장하는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 계엄군측은 선별석방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밖의 요구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였고, 1차 협상과 마찬가지로 계엄군 측은 무조건 총기반납을 요구했다. 시민수습대책 위원측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 수습대책위원회 쪽도 내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온건파와 강경파간의 갈등이 생긴 것이다. 그 와중에 25일 밤까지 모두 4천 여 점의 총이 반납되었다.
학생 수습대책위원 가운데 이창길을 중심으로 한 온건파는 총기를 반납하고 자진 해산할 것을 주장했고, 윤상원을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이제까지 시민 학생들이 흘린 피가 헛되지 않도록 끝까지 결사항전을 주장했다.
그 와중에서 남동성당에서는 부녀자들이 나와 주먹밥을 만들어 부상자들이 입원해있는 병원과 광주의 치안을 맡고 있던 도청 수습위에 보낸다. 어디 남동성당 뿐일까. 각 교회와 성당에서는 자발적으로 아주머니들이 나와 주먹밥을 만들고 빵과 음료수를 준비해 시민군들에게 보냈다.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장악되기 하루 전인 26일, 시민수습대책위원회는 마지막 협상을 시도한다. 이들은 계엄분소로 가야하는데, 학생들이 내주는 차를 타고 갔다가는 후에 폭도로 몰릴 것을 염려해 26일 새벽, 40-50명의 시민대표들은 걸어서 계엄분소로 향했다. 이들을 따라오던 기자들이 쉴새없이 플래시를 터뜨렸고, 외신들은 이들의 행진을 ‘죽음의 행진’이라 명명했다.
계엄분소에 도착한 이들 가운데 15명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홍남순 변호사를 비롯한 시민대표들은 계엄군 측과 오전 10시부터 협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들이 요구한 것은 계엄군은 진주하지 말 것, 보도를 공정히 할 것, 죽은 사람들에게 시민장을 치러줄 것 등 5개항이었다.
하지만 계엄사령관은 26일 밤이 지나면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 말은 다음 날인 27일,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한다는 말이었다. 시민대표들은 3일간만 시간을 주라고 사정을 했다. 그 3일 동안 무기를 반납하고 자신 해산하겠다고 통사정했지만 그것 또한 거부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한가지였다. 누군가 서울로 가서 사태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 큰일을 맡은 사람이 바로 남동성당 주임신부인 김성용 신부였다. 그는 서울로 가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광주상황을 보고하고, 최고 실력자를 찾아가 광주 진주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또 홍남순 변호사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호남출신 정내혁 씨를 만나 총리와 최규하 대통령에게 광주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주도록 부탁해줄 것을 간청한다. 그 사이 김성용 신부는 약간의 돈과 함께 안전모를 쓰고 오토바이를 타고 광주를 빠져나간다.
하지만 도청 수습위원회 쪽에서는 강경파가 모든 권한을 장악한 채 전열을 재정비, 다가올 최후 항전에 대비한다. 김성용 신부는 영광으로 빠져 고창으로 해서 서울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김성용 신부는 A4용지 4장에 광주의 참상을 담은 ‘찢어진 깃폭’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김수환 추기경을 만나 광주의 비극을 알린다.
운명의 27일. 모든 기대를 저버린 채 계엄군은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로 진격해 들어온다.
그 후 광주는, 광주시민은 폭도라는 죄목을 뒤집어 쓴 채 핍박을 당한다. 하지만 남동성당은 외로운 투쟁을 계속한다.
사제단은 총칼로 입을 다물게 하는 군부의 폭압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82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5월 18일이면 5.18 추모미사를 집전, 억울하게 유명을 달리한 영령들을 달래며, 끊임없이 광주의 진상을 알리고 이에 상응한 보상을 해줄 것을 요구한다. 이것은 1982년 천주교 광주대교구사제단에서 광주사태 2주기를 맞아 발표한 성명문이다.
-진실을 바탕으로 한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광주사태의 진상과 그 책임소재를 규명하라.
-진정한 민족적 화합을 이루기 위해 광주사태로 구속된 구속자들을 전원 석방하라.
-공권력에 의해 국민의 생명이 천시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광주사태 희생자와 부상자에 대한 모든 적절한 대책을 강구하라.
-부당한 정치적 보복이 종식되기 위해 광주 사태로 인해 퇴교당한 학생의 복학과 시민들을 복직 및 복권시켜라.
-국민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부산, 미국 문화원 방화사건과 최기식 신부 구속사건의 정확한 진상과 재판 절차를 공개하라.
남동성당에서 추모미사가 집전되는 동안 밖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추모미사를 제지하려는 군부와, 이를 강행하려는 성당 측의 고집이 부딪치면서 또다시 강제해산이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던 것. 하지만 뜻있는 시민들은 속속 남동성당으로 모여들어 그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당시 광주의 불행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뿐만 아니라 남동성당은 82년 10월 전남대학교 박관현 총학생회장이 광주교도소에서 숨지자 빈소를 설치하기도 했다.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희망이 잠시 소생되었을 때, 좀 더 이 국민적 염원이 존중될 수 있었더라면 광주사태와 같은 민족적 비극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좀 더 밝게 진전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광주사태 자체의 쓰라린 체험을 아파할 뿐만 아니라, 그 사태에 대한 진실이 오늘가지도 은폐돼 있는 것을 한탄스럽게 생각합니다. 진실이 왜곡된 채 덮어져 있다는 것은, 큰 시련에서 마땅히 얻었어야 할 교훈과 슬기를 아직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요, 과거의 쓰라린 상처가 아직 아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요. 상처가 속으로 계속 곪아가고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광주사태의 진상이 온전히 밝혀지는 것은 앞으로 진정한 의미의 새 시대가 열릴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광주사태로 짓밟혀지고 만 민주주의가 소생할 때 비로소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과 같이 언론이 완전히 통제돼 있는 비민주적 현실이 지속되는 한, 진실은 밝혀질 수 없습니다.……
< 남동성당에서 집전한 광주사태 3주기 추도미사 강론 중에서>
남동성당은 지금도 그날의 정신을 계승해 이 땅의 불의를 배척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
출처: 노란장미의 환경이야기와 80518 원문보기 글쓴이: 黃薔(이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