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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지십(聞一知十)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는 뜻으로, 아주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聞 : 들을 문(耳/8)
一 : 한 일(一/0)
知 : 알 지(矢/3)
十 : 열 십(十/0)
(유의어)
박학다식(博學多識)
일거반삼(一擧反三)
출전 : 논어(論語) 공야장편(公冶長篇)
사람을 가르치고 인격을 길러주는 교육의 중요성은 동서를 막론하고 금언에 많이 남아 있다.
타인을 가르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이다는 영국 격언은 가르치는 것이 배우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는 예기(禮記)의 교학상장(敎學相長)과 통한다.
교육의 목적은 사람을 만드는데 있다고 한 말은 황금을 물려주기 보다 경전을 가르치라고 한 말과 맥이 닿는다. 사람의 능력은 천차만별이라 스승이 제자의 개성을 파악하여 옳게 지도한다면 좋은 성과를 이룰 수 있다.
그런데 아주 똑똑한 제자가 있어 하나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면 스승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며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몰려든 제자가 3000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뛰어난 70인을 압축하여 칠십자(七十子)나 칠십이현(七十二賢)이라 부른다. 또 그들 중 스승과 고락을 함께 한 10명을 압축하여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한다.
덕행에 뛰어난 안회(顏回)는 항상 수제자로 꼽히며 후세에 안자(顔子)로 불리는 사람이다. 말재주가 뛰어난 자공(子貢)은 스승까지도 말문이 막힐 때가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이 두 사람을 비교한 것이 공야장(公冶長)편에 실려 있다.
공자가 자공을 불러 물었다. '너는 안회와 비교하여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는가(女與回也 孰愈/ 여여회야 숙유)?'
자공이 대답했다. '제가 어찌 감히 안회와 견주기를 바라겠습니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알 뿐입니다(何敢望回 回也 聞一以知十 賜也 聞一以知二/ 하감망회 회야 문일이지십 사야 문일이지이).' 줄 사(賜)는 자공의 본이름이다.
자공은 변설에 능해 공자를 수행하여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유세에 성공했고, 이재에도 밝아 주유의 자금을 댄 사람이다. 하지만 자신이 안회보다는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낮추는 현명함도 갖췄다.
가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학문에 힘썼던 안회가 31세에 요절하자 공자는 대성통곡했다.
가르쳐 주지 않아도 스스로 깨달아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보다는 못하더라도 배운 것을 잘 활용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어떤 문제에 닥쳤을 때 기존의 방식을 두고 체제가 바뀌어 못마땅하다며 새로운 해결책을 찾는 것을 종종 보는데 현명치 못하다.
문일지십(聞一知十)
공자는 4대 성인(聖人)으로 불릴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이다. 비록 어려운 환경에서 나고 자랐지만, 당대는 물론 2,500여 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과 철학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은 공자와 그의 제자 안회(顔回), 자공(子貢)과 관련해 그 유래를 갖고 있다.
공자는 그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도 특히 안회를 아꼈다. 그와 연배도 비슷하고 또 뛰어난 제자로 일컬어지는 자공에게 안회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자공아, 너와 안회 둘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자공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고 제자들 중에서도 뛰어났기 때문에 혹시라도 자만해 있지나 않을까, 한 번 떠 본 것이다.
그러자 자공은 공자에게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지만 저는 하나를 들으면 겨우 둘을 아는데 제가 어떻게 안회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여기서 문일지십(聞一知十)이 유래되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으로 매우 총명함을 이르는 말이 되었다.
안회는 어떻게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총명하고 뛰어난 사람이 되었을까?
총명함을 타고나서 그런 걸까, 아니면 후천적인 노력이 있었을까?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안회의 개인적인 업적이나 학문적 성과는 전해지지 않지만 그가 가난한 중에도 도(道)를 즐기고 학문과 덕이 높다고 칭송받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논어나 몇몇 서적에 그의 뛰어난 덕행을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실천하는 가운데 스승의 가르침이 삶에 녹아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구체화된 산지식으로 적용됐던 것이다.
학문을 즐기는 그의 태도로 볼 때, 배운 내용이 삶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다른 부분들도 열심히 탐구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안회와 같이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총명함을 갖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총명함을 타고났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두 손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
안회의 삶을 보면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총명함이 결코 타고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자세에서 그 총명함의 이유를 찾아 보자.
첫 번째는 학문을 즐겼다는 것이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갔지만 공부를 즐겨했다. 열심히 배워 출세를 하거나 많은 돈을 벌기 위해서 공부한 것이 아니라 공부 그 자체를 즐겼다.
지금 우리의 공부 환경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일수 있지만,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얼마나 호기심 많고 배우기를 즐겨 했는지 돌이켜 보면, 그 호기심과 알고자 하는 욕구를 잘 살려주지 못한 것이 끝내 미안할 따름이다.
안회는 어릴 적부터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호기심, 배우기를 즐겨 하는 마음을 어른이 되어서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공부를 어떤 수단과 도구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수한 배움에의 욕구가 계속 있었기 때문에 공부에 대한 내적 동기가 끝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얼마나 이 내적 동기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할 수 있다.
아이들이 좋은 성적을 받아왔을 때 그것에 대해 외적 보상을 해주면 해 줄수록 공부에 대한 동기와 흥미는 떨어진다. 결국 공부를 즐겨 할 수 없게된다.
두 번째는 배운 것을 실천했다는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허투루 듣지 않고 누구보다 실천에 힘썼다. 배운 것을 삶(구체적인 상황)에 적용한다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학습전략이다.
단편적이고 추상적일 수 있는 개념을 실천하고 구체화함으로써 더욱 효과적으로 지식을 기억하고 확장할 수 있다.
세 번째는 도덕성이 뛰어났다는 것이다. 안회는 공자의 제자 중에서 덕행이 뛰어난 인물로 공문십철(孔門十哲) 중 한 명이었다.
도덕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단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덕성이 뛰어나다는 것은 인지(도덕적 판단), 정서(태도), 행동에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도덕성이 뛰어난 사람은 바른 판단력(뛰어난 인지능력)을 가지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태도로,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태도로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맡은 일을 성실하게 이루어낸다.
솔선수범하며 다른 이들과 적극적 소통을 하는 가운데 큰 영향력을 끼치는 리더로서의 품성을 갖는다. 도덕성이 학업성취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은 연구를 통해 증명되었고, TV와 관련 서적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와 같은 안회의 공부에 대한 태도와 삶의 자세는 그의 총명함이 빛을 발하게 했다. 곧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게 되는(聞一知十) 총명함을 얻게 된 것이다.
부모가 우리 아이들이 이와 같은 삶의 자세로 배움을 대하고 공부를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문일지십(聞一知十)과 안회(顔回)
공부하기 쉽지 않다. 만약 이 결론에까지 이르렀다면 그는 공부를 시작해도 된다. 멀리 갈 채비는 갖추었기 때문이다. 내일이라도 생경한 외국어 공부를 하나 시작해 보라. 이거 간단치 않다. 당장 하루 소홀히 하면 이틀 공부가 실종된다.
당장 일본어 한자 읽기와 독일어 명사 성별, 그리고 중국어 네 성조, 이런 각 언어의 낯선 요소들은 우리 유구한 배달민족의 혀와 뇌에 고약하게 쓰거나 매운 맛을 선사한다. 하물며 더 고차원의 논리적 사고가 요구되는 학문 분야라면 '8부 능선'까지 오르기가 마음처럼 그리 수월치 않다.
'문일지십(聞一知十)'이다. 공부하기와 무관하지 않은 이 네 글자는 우선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를 듣다'가 '문일(聞一)'이고, '열을 안다'가 '지십(知十)'이다. 하나를 듣고 능히 열을 아는 인물이 있을까. 안회(顔回)가 이런 인물이었다.
공자가 하루는 제자 자공(子貢)을 따로 부르더니 질문 하나를 툭 건넨다. "너는 너와 안회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냐?" "뭐, 뭐요?", 자공은 이런 표정으로 반응한다. 질문이 벌써 우문(愚問)이기 때문이다.
스승은 늘 안회를 공개적으로 칭찬해 왔다. 제자라면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이 평판을 스승이 새삼 묻고 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자공은 표정까지 진지하게 바꾸어 현답(賢答)으로 위기를 수습한다.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능히 열을 알지만, 저는 겨우 둘을 압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 편에 기록된 이 우문현답 일화가 바로 문일지십(聞一知十)의 유래다.
우리는 이 문일지십(聞一知十) 문구 자체의 현대적 이해에 있어 핵심을 두 가지 각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경청하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둘째, 스스로 추리하는 능력의 중요성이다. 안회가 이 두 장점을 갖춘 인물이기에 스승도 다른 제자들도 젊은 그를 가볍게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안회는 말수도 적고 내성적인 인물이었다. 공자 조차도 초기엔 어쩌면 그가 우매한 인물일 수도 있겠다고 의심했을 정도다. 하지만 안회와 긴 대화를 나눠본 이후 스승 공자는 의심을 거두고 그를 각별히 아꼈다.
그는 공자의 유교적 가르침을 따르는 삶에 장애물이라고 판단해 공자의 적극적 권유에도 관직 진출을 마다하고 학문에만 매진했다. 재물에도 무심했다. 경제적으로 그리 여유롭지 않았음에도 행실이나 처신이 이러했다.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생애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단명했다. 근대 이전 동양 사회의 인물평인 품인록(品人錄) 문화에서 동량지재(棟梁之材)의 으뜸으로 언급되곤 한다.
그런데 필자는 앞의 '문일지십(聞一知十)' 일화에서 자공의 비유적 현답에도 마음이 간다. 특히 거기에 등장하는 숫자들에 주목할 필요는 느낀다. 근대화를 거친 이후 중국에서도 자공에 대해서는 평가가 나쁘지 않다. 자공은 상인으로서의 자질이 출중했다. 누구보다 숫자에 밝았다. 이 짧은 즉흥적 답변에서 그는 숫자 1, 10, 그리고 2를 언급한다. 그가 언급한 이 숫자들은 당시에도 여러 함축적 의미가 있었다.
숫자 1은 현대 수학의 초심자라면 여전히 주기적으로 곱씹고 고민하는 숫자다. '대체 1이란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두뇌에 이 숫자 1이 정의되고 안착해야 비로소 정수론 체계가 잡혀 가깝게는 가감승제에서 멀게는 선형대수까지 수학 세계의 엔진에 시동이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공이 자신의 수준으로 겸허히 언급한 이 숫자 2는 요즘 AI 시대의 핵심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그가 언급한 숫자 10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그 의미가 크다. 숫자 10은 10진법 체계의 요체일 뿐만 아니라 '완전하다'라는 뜻도 함축되어 있다. 불교에서 상하까지 아우르는 모든 방향, 즉 공간을 뜻하는 시방(十方)이란 말도 쓰인다.
최근 교육 정책과 관련하여 말들의 성찬이 오가며 다투고 있다. 그 와중에 '과잉 경쟁'과 '적정 경쟁'이라는 표현도 등장했다. 하지만 어디까지가 '적정'인가는 다시 우리에게 표준화와 계량화라는 숙제를 남긴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다. 교육 정책에 더 명징한 통찰과 더 투명한 숫자 제시의 병행이 요구되는 이유다.
▶️ 聞(들을 문)은 ❶형성문자로 闻(문)은 간자(簡字), 䎹(문), 䎽(문)은 고자(古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귀 이(耳; 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門(문; 입구)으로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聞자는 ‘듣다’나 ‘들리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聞자는 門(문 문)자와 耳(귀 이)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그런데 갑골문에 나온 聞자를 보면 사람의 귀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고대에는 어둑해진 저녁에서야 결혼할 신랑이 신부의 집에 당도했다고 한다. 그래서 갑골문에서는 이렇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을 ‘혼인하다’라는 뜻으로 썼었다. 후에 이러한 모습이 바뀌면서 사람은 女(여자 여)자와 昏(어두울 혼)자가 결합한 婚(혼인할 혼)자가 되었고 사람의 귀는 耳(귀 이)자에 門자를 더한 聞자로 분리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聞자는 문밖에서 나는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에서 ‘듣다’나 ‘소식’이라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聞(문)은 소리가 귀로 들어가다라는 말로 듣다, 들리다의 뜻으로 ①듣다 ②소리가 들리다 ③알다, 깨우치다 ④소문나다, 알려지다 ⑤냄새를 맡다 ⑥방문하다, 소식을 전하다 ⑦묻다, 질문하다 ⑧아뢰다(말씀드려 알리다), 알리다 ⑨틈을 타다, 기회를 노리다 ⑩견문(見聞), 식견(識見) ⑪소식(消息), 소문(所聞) ⑫명성(名聲), 명망(名望) ⑬식견(識見) 있는 사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들을 령/영(聆), 들을 청(聽)이다. 용례로는 듣고 보는 것으로 깨달아 얻은 지식을 문견(聞見), 도를 들음 또는 도를 듣고 깨달음을 문도(聞道), 들어서 얻음을 문득(聞得), 이름이 널리 알려져 숭앙되는 일을 문망(聞望), 부고를 들음을 문부(聞訃), 소문으로 전하여 들음을 문소문(聞所聞), 들어서 손해 봄을 문손(聞損),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람을 문인(聞人), 들어서 앎을 문지(聞知), 들어서 배움을 문학(聞學), 뜬 소문을 들음을 문풍(聞風), 향내를 맡음을 문향(聞香), 이름이 세상에 드러남을 문달(聞達), 들려 오는 떠도는 말을 소문(所聞), 듣거나 보거나 하여 깨달아 얻은 지식을 견문(見聞), 전하여 들음을 전문(傳聞), 퍼져 돌아다니는 소문 또는 설교나 연설 따위를 들음을 청문(聽聞), 아름답지 못한 소문을 추문(醜聞), 이전에 들은 소문을 구문(舊聞), 여러 번 들음을 천문(千聞), 바람결에 들리는 소문으로 실상 없이 떠도는 말을 풍문(風聞), 들어서 앎 또는 듣고 앎을 문이지지(聞而知之),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미루어 안다는 문일지십(聞一知十)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知(알 지)는 ❶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이다.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말한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이나,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등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知자는 '알다'나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知자는 矢(화살 시)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知자는 소전에서야 등장한 글자로 금문에서는 智(지혜 지)자가 '알다'나 '지혜'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슬기로운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智자는 '지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知자는 '알다'라는 뜻으로 분리되었다. 智자는 아는 것이 많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말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知자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知(지)는 (1)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작용하는 힘. 깨닫는 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알다 ②알리다, 알게 하다 ③나타내다, 드러내다 ④맡다, 주재하다 ⑤주관하다 ⑥대접하다 ⑦사귀다 ⑧병이 낫다 ⑨사귐 ⑩친한 친구 ⑪나를 알아주는 사람 ⑫짝, 배우자(配偶者) ⑬대접(待接), 대우(待遇) ⑭슬기, 지혜(智慧) ⑮지식(知識), 앎 ⑯지사(知事) ⑰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을 지식(知識),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지적 활동의 능력을 지능(知能),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지식이 있는 것 또는 지식에 관한 것을 지적(知的),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 능력을 지각(知覺),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아는 사람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봄을 지인(知人),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은혜를 앎을 지은(知恩), 지식이 많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을 지자(知者),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자기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앎을 지지(知止),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어떤 일을 느끼어 아는 것을 감지(感知),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지(朋知), 기별하여 알림을 통지(通知), 인정하여 앎을 인지(認知), 아는 것이 없음을 무지(無知), 고하여 알림을 고지(告知), 더듬어 살펴 알아냄을 탐지(探知),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거나 알게 함을 공지(公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행합일(知行合一),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등에 쓰인다.
▶️ 十(열 십)은 ❶지사문자로 什(십), 拾(십)은 동자(同字)이다. 두 손을 엇갈리게 하여 합친 모양을 나타내어 열을 뜻한다. 옛날 수를 나타낼 때 하나로부터 차례로 가로줄을 긋되, 우수리 없는 수, 다섯은 ×, 열은 Ⅰ과 같이 눈에 띄는 기호를 사용하였다. 나중에 十(십)이라 썼다. ❷상형문자로 十자는 ‘열’이나 ‘열 번’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十자는 상하좌우로 획을 그은 것으로 숫자 ‘열’을 뜻한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十자를 보면 단순히 세로획 하나만이 그어져 있었다. 이것은 나무막대기를 세워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이렇게 막대기를 세우는 방식으로 숫자 10을 표기했었다. 후에 금문에서부터 세로획 중간에 점이 찍힌 형태로 발전하면서 지금의 十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十자는 부수로 지정되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모양자 역할만을 할 뿐 의미는 전달하지 않는다. 그래서 十(십)은 ①열 ②열 번 ③열 배 ④전부(全部), 일체(一切), 완전(完全) ⑤열 배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한 해 가운데 열째 달을 시월(十月), 충분히 또는 넉넉히로 부족함 없이를 십분(十分), 어떤 분야에 뛰어난 열 사람의 인물을 십걸(十傑), 보통 4km 거리를 십리(十里), 사람이 받는 열 가지 고통을 십고(十苦), 열 살로부터 열아홉 살까지의 소년층을 십대(十代), 썩 잘 된 일이나 물건을 두고 이르는 말을 십성(十成), 오래 살고 죽지 아니한다는 열 가지 물건을 십장생(十長生), 실을 십자형으로 교차시켜 놓는 수를 십자수(十字繡),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는 십벌지목(十伐之木), 열 사람이 한 술씩 보태면 한 사람 먹을 분량이 된다는 십시일반(十匙一飯), 열에 여덟이나 아홉이라는 십중팔구(十中八九), 열 번 살고 아홉 번 죽는다는 십생구사(十生九死), 열 사람의 눈이 보고 있다는 십목소시(十目所視), 십년 동안 사람이 찾아 오지 않아 쓸쓸한 창문이라는 십년한창(十年寒窓), 열흘 동안 춥다가 하루 볕이 쬔다는 십한일폭(十寒一曝), 오래 전부터 친히 사귀어 온 친구를 십년지기(十年知己), 열 사람이면 열 사람의 성격이나 사람됨이 제각기 다름을 십인십색(十人十色)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