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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는 정치적 이론과 그와 관련한 운동은 물론 사회적 소유와 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자기관리가 특징으로 하는 일정한 범위으 경제 및 사회제도이다.
공상적 사회주의 | 생시몽, 오웬, 푸리에 |
과학적 사회주의 | 마르크스, 엥겔스 |
산업자본의 미성숙 단계에서 자본주의의 본질과 미래사회의 이상은 밝혔으나 아직 계급투쟁이론에는 미치지 못한 사회주의.
공상적 사회주의(空想的社會主義) 또는 이상적 사회주의는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 사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다.즉, 마르크스에 의해 논리를 갖춘 사회주의인 마르크스주의(과학적 사회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에 존재하던 원류 사회주의를 일컫는다. 공상적 사회주의의 시초는 영국 노동운동가인 로버트 오언과 잉글랜드의 토머스 모어의 사회주의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 사회주의자들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프랑수아노엘 바뵈프(Francois Emile Babeuf, 1760 ~ 1797)는 19세기 말 봉건영주의 부정에 통분하여 빈농층의 해방을 위해 토지의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생산물의 국가 관리에 의한 공산주의를 주창했다.
생시몽[편집]
생시몽(Saint Simon, 1760- 1825)은 불로 소득의 계급을 배제하고, 과학과 산업이 지배하는 사회를 종교적으로 통일시킴으로써 이상사회를 실현시킬 것을 구상했다.
샤를 푸리에[편집]
또한 푸리에(Franois Marie Fourier, 1772 ~ 1837)는 프랑스 혁명 후의 사회에 통렬한 야유를 퍼붓었다. 푸리에는 팔랑주(협동조합)를 이상 사회의 단위로 해서 생산을 합리화하고, 소비를 절약하는 전형적인 소생산자 사회를 실현시킴으로써 모든 사회 모순이 해결된다고 생각하였다. 푸리에의 팔랑주에서 구성원들은 하나의 건물안에서 살며, 수입을 각자 제공한 노동의 양에 따라 분배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푸리에는 계급투쟁을 부정하고 사회의 평화적 개조를 믿었다. 밀림의 성자 알베르트 슈바이처가 《물과 원시림사이에서》 를 쓸 때에 뿌리에의 손자를 만났다고 쓴 것을 보면,지식인들에게 널리 존중받았던 것 같다.
로버트 오언[편집]
영국의 감리교 신자인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 ~ 1858)은 인간의 행복은 성격과 환경에 의해 결정된다고 판단, 뉴라나크의 공장에서 협동사업체를 구성하여 이를 실험하고, 기독교 사상에 의한 노동자인권향상에 힘썼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에서의 뉴하머니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 뒤 영국으로 귀국하여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을 펼쳤으나 이 역시 실패로 끝났다.하지만 그의 사상은 엥겔스가 기계처럼 정교한 이론이라고 할만큼 훌륭한 이론이고, 그의 협동조합운동과 노동조합운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비판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사유재산제도의 철폐를 주장하였으며, 사회주의 사회의 도래를 예건하는 등 사회주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당시 노동계급이 제대로 발달하지 않았고 자본가-노동자간 계급대립이 뚜렷이 대두되지 않은 관계로 노동계급을 단순히 구제의 대상으로 보았을 뿐 혁명의 주체로 인식하지 않았다.(맑스의 논박)
과학적 사회주의(科學的社會主義)는 마르크스주의가 스스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용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의 발전을 모순의 발전으로서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내부적 모순에 의한 붕괴와 프롤레타리아의 역사적 사명에 관한 방향을 제시했다. 공상적 사회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모순을 극복할 가능성을 프롤레타리아 자신 속에서 계급 투쟁의 필요성만으로 보았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는 여러 저작을 통해 공상적 사회주의를 비판하였다. 하지만 스스로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과학적 사회주의의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역사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 있다.
명칭에 대한 비판[편집]
1896년 안토니오 라브리올라(Antonio Labriola)교수는 《공산당 선언을 기념하여, 유물론적 역사관에 대한 평가》(In memoria del Manifesto dei Communisti. Saggi intorno alla concezione materialistica della storia. I)를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표현보다는 비판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지지한다. 여기에 대한 이유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잉여 가치가 발생시킬 수 있는 계급 투쟁이 과학적인 차원보다는 윤리적인 차원에서 이뤄지며, 이러한 경향성은 역사적으로 기계적 운동보다는 사회의 요청을 통해서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후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 등의 수정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된다.
생산 수단의 공동 소유, 생산보다 분배에 주목, 계획 경제
플라톤의 이상 사회, 초기 그리스도교 사상, 모어의 유토피아
플라톤의 이상 사회 | 통치 계급의 재산 공유와 국가에 의한 자녀의 공동 양육 |
초기그리스도교 사상 | 공동 작업을 토대로 소박한 생활을 강조함(야코프 후터(Jacob Hutter) |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 공동 생산과 공동 분배 제도를 토대로 공유제를 주장함 |
공상적 사회주의 | 사유 재산권의 폐해를 지적하고 공동체 생활을 추구함 |
마르크스·엥겔스의 사회주의 |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 사회주의 혁명을 주장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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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사회주의: 페이비언 협회와 프랑크푸르트 선언
㈎ 페이비언 협회(Fabian society)
페이비언 협회는 1884년에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는 가장 오래된 사회주의 사상의 싱크탱크(thinktank, 두뇌 집단)이다.
㈏ 프랑크푸르트선언
이상 | 계급 없는 평등 사회 |
현실 | 자유의 결핍 → 창의성과 책임성 결여 |
② 러시아 혁명이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는 모두 평등 사회를 이상으로 하였음
'계급 없는 평등 사회'라는 유토피아적 목표를 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함
국민의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못하는 체제는 결국 무너짐
체제의 결함과 문제점에 대한 자유로운 비판을 통해 대안을 모색함
예)국가의 경제 개입
② 인간 존엄성을 바탕으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추구함 → 인간다운 삶의 실현
◇복지 자본주의
서구에서 시작된 복지 자본주의는 완전 고용, 최저 임금, 사회 보장 제도 등을 통해 경기 침체, 실업 문제, 빈부 격차 등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이바지해 왔다.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생산 수단 없이 노동으로 살아가는 계층
물질적 토대: 사회의 모든 물질적 생산 관계의 총체(=하부 구조)
역설: 어떤 주장이나 이론이 겉보기에는 모순되는 것 같으나 그 속에 중요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는 것
Karl Marx ( 1818.5.5.~1883.3.14.)
독일의 철학자, 경제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정치이론가, 언론인 및 사회혁명주의자
출생 : 독일 Trier에서 유태인 중산층 가정
학무 : 대학에서 법과 철학 공부. 정치 출판물 때문에 무국적이 되고 영국에 망명하여 수십년 생활하였으며 여기에서 독일 사상가 Friedrich Engels와 협력하여 그의 사상을 계속 발전시키고 저술을 발표하고 대영박물관의 독서실에서 연구하였다. 가장 잘 알려진 주제는 1848년 소책자인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과 3권으로 된 자본론(Das Kapital)이다. 그의 정치 및 철학 사상은 후의 지적, 경제적 및 정치사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의 이름은 사회이론의 형용사, 명사 및 학파로 사용되었다.
종합적으로 마르크스주의(Marxism)으로 이해되는 Marx의 사회, 자본주의에서 (bourgeoisie로 알려진) 지배계급과 임금에 대한 대가로 그들의 노동력을 팔아서 이들 수단을 가능하게 하는 the proletariat)로 알려진 노동계급간의 갈등에서 드러난다. 역사적 유물론으로 알려진 비판적 접근방법을 사용하여 Marx는 이전의 사회경제제도와 같이 자본주의는 그 스스로 파멸과 새로운 제도인 사호주의에 의한 대체에 이르는 내부 긴장을 생기게 하였다. 일어나게 했다. Marx에게는 자본주의 하에서 부분적으로 그 무능력과 위기취약성향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의 전개를 가져오고 계급 적대감은 정치권력의 정복에 이르고 결국 생산자의 자유결합에 의하여 조직된 계급없는 공산주의사회의 정착에 이른다. Marx는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사회경제적 노예해방을 성취할 조직화된 혁명행동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그 이행을 촉구하였다.
Marx는 인간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 중 한명으로 기술되어 왔고 그의 저술은 칭찬과 비판 둘다를 받았다. 경제학에서 그의 저술은 노동과 자본에의 그 관계의 현재의 이해와 후속 경제사상의 다수에 기초를 제공했다. 세계적으로 많은 지식인들, 노동조합, 예술가와 정당들은 그의 사상을 수정 또는 채택하여 Marx의 저술에 영향을 받았다. Marx는 대체로 현대 사회과학의 주요 설계자중의 한명이라고 인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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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아이냐, 노후 여유냐’ 갈등하는 중국사회 (2015) 듕국이야기
2016. 10. 8. 13:25
http://blog.naver.com/okdoong2/220831093118
#중국 정부기구 중엔 ‘위생 및 계획생육 위원회’란 생소한 이름이 있다. 수십 년 동안 이 기구의 시책을 따르지 않고 둘째를 낳았을 경우 직업을 잃거나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던, 공안부문만큼 무서운 곳이었 다. 그런데 올 1월 이 부서의 상하이지부는 ‘가족구조의 안정과 사회발전을 위해 두 자녀를 낳아야 한다’ 고 주장하고 나섰다. 위원회의 ‘강요 아닌 강요’로 아이 하나 낳고 늙어버린 부모세대들에겐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광저우에 사는 샤오쥔(가명)은 아이 하나를 둔 80허우(80년대 출생세대) 아버지다. 자매가 있는 아내와 달리 외롭게 큰 그는 몇 년 전 어머니 간병을 하면서 형제자매가 절실해져 자신도 둘째를 낳고 싶어졌다. 때마침 정부 정책이 바뀌어 외동아들로 큰 자신도 둘째를 낳을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아내와 상의 끝에 둘째 출산 신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돈 때문이었다. 부부가 맞벌이를 해도 매달 월급의 3분의 1이 집 살 때 진 은행 빚으로 나가고, 차도 아직 못 샀다. 양가 부모님에게 둘째 키워달라고 부탁하기는커녕 노후를 돌봐드려야하는 형편이다. 이 부부에게 둘째 양육은 사치였던 것이다.
중국 정부가 2013년 말 산아제한 정책을 한층 더 완화한 ‘단독이태(单独二胎)’ 실시를 선언했다. 부부 양쪽이 외동일 경우에만 둘째를 낳을 수 있었던 걸 더 풀어 이제는 둘 중 한 사람만 외동이어도 둘째를 낳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당초 정부는 이 정책으로 신생아가 연간 130만~160만 명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지난해 말까지 신청한 커플은 예상보다 훨씬 저조한 107만 쌍에 그쳤다. 다산다복의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던 중국, 수십 년 동안 산아제한 정책으로 ‘어쩔 수 없이’ 둘째를 포기해야 했던 중국인들이 언제부터 아이를 낳지 않으려 하게 됐을까.
엄혹했던 산아제한
‘불효유삼 무후위대(不孝有三 無後爲大)’, 즉 ‘세 가지 불효 중 후대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 는 경구는 맹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0~1960년대 마오쩌둥 시절까지만 해도 중국 사회엔 ‘인구가 힘(人多力量大)’이라는 사고방식이 통했다. 맬더스의 인구론을 구실로 중국의 엄청난 인구와 식량문제를 우려했던 미국에, 마오쩌둥은 이렇게 대답했다. “인구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몇 배로 늘더라도 상관없다. 혁명을 통해 생산력을 높이면 된다.”
상황이 바뀐 것은 1970년대였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인구를 자원과 식량이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는 우려가 나오면서 1971년 경제발전계획에 처음으로 ‘계획생육(산아제한)’이라는 단어가 포함됐다. 1980년대 들어 위기감은 더욱 커졌다. 1949년 건국 당시만 해도 5.4억 명이었던 인구가 30년새 4억 이 넘게 늘어 10억에 육박했던 것이다. 이대로라면 ‘20년 후엔 12억, 30년 후엔 15억의 인구대국이 될 것’, ‘의식주와 공공서비스 부족으로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등 우려가 쏟아졌다. 결국 개혁 개방 직후인 1982년 12대 당대회에서 산아제한이 국가의 기본정책으로 규정됐다. 두 달 후, 헌법 제 49조에 ‘부부 쌍방은 계획생육을 시행할 의무가 있다’는 조항이 포함됨으로써 산아제한이 의무화됐다. 이 때부터 태어난 80허우 세대들은 대부분 형제자매가 없는 ‘한 자녀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계획생육은 ‘만혼(晚婚), 만육(晚育), 소생(少生), 우생(优生)’으로 요약된다. 늦게 결혼해 늦게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는 것이다. 1980년대 한국 사회의 ‘둘만 낳아 잘 기르자’와 유사하게, 당시 중국 농가의 담벼락에는 ‘하나만 낳는 것이 좋다(只生一个好)’, ‘적게 낳고 잘 낳아 일생을 행복하게(少生 优生幸福一生)’와 같은 표어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피바다가 될 지라도 초과출산을 허용할 수 없다’ 와 같은 섬뜩한 문구가 걸리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만 낳는 것이 국가적으로는 좋은 일일지 몰라도, 모든 가정에게 그런 것은 아니었다. 특히 자녀가 노동력이자 자산이었던 농촌에서는 더욱 그랬다. 이에 따라 정부 몰래 태어나 출생신고를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둠의 자식들, 소위 ‘헤이하이쯔(黑孩子)’들도 무수히 생겨났다. 2010년 인구센서스 조사에서는 어둠의 자식들만 1,300만 명을 헤아릴 정도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부모가 한족(漢族)이 아닌 소수민족인 경우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농촌에서는 첫째가 딸인 경우 둘째를 허용하는 소위 ‘1.5자녀’ 정책이 시행됐다. 첫째가 ‘비선천성’ 장애로 노동이 어려운 경우 등도 둘째를 허용했다. 예외조항에 해당되지 않는데도 둘째를 출산하면 거액의 ‘사회부양비’를 내야 한다. 거주지 기준 도시평균소득을 내거나 이보다 형편이 좋으면, 연소득의 2~10배를 내야 한다. 거부들이 벌금으로 때우는 것을 막기 위해 사회부양비를 소득과 연동시켜 놓았다. 영화 ‘붉은 수수밭’ 등으로 유명한 중국의 국민감독 장이머우(张艺谋)가 아이를 셋이나 둔 것이 2013년 드러나면서 우리 돈 약 13억원의 벌금을 낸 것이 유명한 예이다. 공무원의 경우 둘째를 낳으면, 퇴직해야 했다.
산아제한의 법망을 피해 몰래 아이를 낳는 각종 수법들도 생겨났다. 홍콩 원정출산, 서류상 재혼해 둘째 낳기, 심지어 농촌에서는 첫째 아이 출생신고를 일부러 미루다, 둘째가 태어나면 쌍둥이로 신고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올해 초에는 조직적으로 갓난 아기를 인신매매한 조직범죄단이 붙잡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 중국의 산아제한 정책은 국제적으로 인권 이슈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맹인 인권변호사 천광청(陈光诚)이 강제낙태 행태를 폭로하고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고, 노벨문학상 수상자 모옌(莫言)은 농촌을 돌며 강제 낙태를 시술하는 의사 이야기를 소재로 산아제한 정책이 초래한 뒤틀린 사회상을 그려내기도 했다.
산아제한 완화, 그 효과는
엄격했던 산아제한 정책은 1990년대 말 들어 완화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부모 양쪽이 모두 독자인 경우 둘째를 낳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쌍독이태(双独二胎)’ 정책이 출시된 것이다. 동북3성에서 시범적으로 먼저 실시된 이 정책은 2011년 허난성을 마지막으로 전국적으로 확대 적용되었 다. 당시 아이를 둘 낳고 싶어하는 미혼자들 사이에선 배우자 감이 외동인지 여부가 중요한 고려대상이 됐다.
더 나아가 2013년 시진핑 지도부가 국가권력을 완전 장악한 뒤 열린 연말 공산당 18대 3중전회에서, 산아제한을 한층 더 완화하는 ‘단독이태’ 정책이 채택됐다. 쌍독이태의 전국 확산이 완료된 지 불과 2년만의 일이고, 그것도 시범구 실시 후 전국 확산도 아닌 곧바로 전국 시행이었다. 출산 높이기가 발등의 불이 됐던 것이다.
갑작스런 정책변경으로 베이비 붐이 일어날 것이란 예상이 있었지만, 기우로 판명됐다. 당초 연간 130만~160만의 신생아가 더 태어날 것으로 전망했는데, 정책이 시행된 지난해 4월부터 연말까지 신청자는 107만 쌍에 불과했다. 107만 쌍도 신청을 했다는 것이지 당장 107만 명의 신생아가 태어나 는 것이 아니다. 신청 부부들이 가족 계획, 경제적 여건 등에 따라 앞으로 몇 년 동안 나눠 출산할 것 이기 때문이다. 이번 단독이태 정책이 시행되지 않았더라도 벌금을 내고서라도(또는 등록하지 않고) 둘째를 낳았을 부부들까지 감안한다면 이번 정책선회가 효과가 거의 없는 것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온다.
지난 해 11월 중국청년보가 전국적으로 샘플조사를 진행한 결과, 단독이태 자격을 갖춘 부부 중 25%만 신청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건을 갖춘 부부의 절반은 신청할 것이란 기대가 절반만 맞은 셈이다. 상하이의 경우에는 출산 적령기 여성의 90%가 단독이태 조건에 부합하지만, 둘째 신청 비율은 5%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실 상하이는 이미 쌍독이태 시행 당시에도 신청률이 저조한 도시였다.
정부는 부부가 아직 준비가 덜 된 것일 수 있다며 점차 늘어날 것이란 입장이다. 둘째를 낳기 위 한 신체적, 정신적, 금전적 준비에 시간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산아제한 벌금이 재정 수입원인 지방정부가 중앙의 정책 전환에 여전히 소극적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 40년간 거둬들인 산아제한 위반 벌금은 무려 2조 위안(약 360조 원)에 달한다.[1] 얼마 전에는 임신 5개월째인 구이저우성의 한 여교사가 고향인 안후이성으로 호적을 옮겨 둘째 출산증을 받았으나 구이저우 측이 ‘전 결혼에서 아이가 있다면 단독이태에 해당이 안 된다’고 해 사단이 났다. 구이저우 지방정부는 “낙태를 하지 않으면 교사 직을 박탈하겠다”는 ‘시대를 거꾸로 사는 듯한’ 통지를 보냈다가 비판여론이 거세지자 결국 백지화했다.
늘어나는 딩크족
둘째 제한을 사실상 풀어도 정책 효과가 미지근하자, 중국 언론에서는 본격적으로 ‘저출산의 함정’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사회과학원은 2015년 경제전망 보고를 통해 중국의 합계출산율(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신생아 수)이 1.4에 불과해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 선인 2.1보다 낮을 뿐 아니라, 저출산 함정의 기준점인 1.3에 근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2]
애초에 출산율을 떨어뜨린 것은 산아제한 정책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최근 나오고 있다. 한 자녀 정책이 의무화된 1980년대가 아니라 이미 1970년대부터 출산율은 낮아지는 추세였다는 것이다. 이 연구에 따르면 중국의 합계출 산율은 1970년 5.8명에서 1979년 2.8명으로 절반으로 떨어졌다. 결국 중국인들은 산아제한 정책으로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낳을 수 없던 것만이 아니라 ‘낳고 싶지 않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1960년대 태어난 상하이 공무원인 장다(50)는 아이가 없다. 서른 무렵까지는 ‘여전히 더 놀고 싶어’ 아이를 갖지 않았으나 마흔이 넘자 ‘딱히 아이가 필요하지 않다’란 생각이 들었고, 쉰이 된 지금도 재미있게 나날을 보낸다. 가방 끈이 긴 아내도 처음엔 남편을 이상하게 생각했으나, 지금은 부부만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다. 대학이나 고등학교 입시생을 둔 친구들을 보면, 장씨 부부는 더욱 자유롭고 행복하다고 느낀다. 소득이 꽤 높은 이 부부는 노후를 위한 각종 보험도 들어놨다. 장씨는 “우리는 외둥이들이 아니라 아이가 없어도 괜찮았지만, 우리 다음 세대는 외둥이들이 많아 딩크족으로 살기엔 부모세대의 반대가 심할 것”이라고 말한다.
#‘80 허우’ 세대인 펑제(31)와 그의 아내는 8년 전 아이 대신 애완동물을 키우자고 결심했다. 경제적으로 여력이 되자 시츄 종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해 커허라고 이름을 붙였다. 펑제는 “커허 덕택에 우리 부부도 집 밖에도 자주 나가 산책하게 됐다”고 말한다. 애완동물에 쏟는 돈이 만만치 않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계생위가 5월 발표한 <가정발전보고(2015)>에 따르면, 중국 가정은 규모가 작아지고 가족형태는 다양해지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2, 3인 가구가 주류를 이루며 1인가족, 노인가족, 딩크족도 늘어난 다는 것이다.
중국의 딩크족 현황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언론보도 등에 따르면 2012년 중국 대도시의 딩크족이 60만 가구에 달한다고 한다. 상하이의 경우 2002년에 이미 딩크족 비율이 전체 가정의 12%에 달했다는 주장도 있다. 영문으로 ‘Double Income, No Kids’를 뜻하는 딩크(DINK)는 중국어로 ‘딩커(丁克)’라고 쓴다. 딩커의 앞 글자인 딩(丁) 앞에 ‘공연히, 헛되이’ 라는 뜻의 ‘바이(白)’를 붙인 ‘바이딩(白丁)’이라는 신조어도 생겼는데, 딩크족을 고수하다가 결국 아이를 낳은 사람들이 해당된 다. 이와 반대로 결심이 매우 굳은 ‘철의 딩크족’은 무쇠를 뜻하는 ‘톄(铁)’를 붙여 ‘톄딩’이라고 부른다. 이외에도 아이 대신 애완동물을 기르는 ‘딩충(丁宠, 딩펫족)’, 딩크족을 고수 중이라는 뜻의 ‘딩커잉(ing)’, 어쩔 수 없이 딩크족이 됐다는 뜻의 ‘딩커드(ed)’ 등 딩크족에 관한 다양한 신조어들이 나타나 사회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딩크족에 대한 생각도 많이 바뀌고 있는데, 2008년 인민대학 사회학과와 홍콩과기대학 사회과학부의 조사에 따르면 70허우와 80허우 세대의 30%가 딩크족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답했다. 2014년 중국 결혼중개 사이트 바이허왕(百合网)에서는 ‘배우자가 아이를 갖지 말자고 한다면’이라는 질문에 여성의 19%, 남성의 6%가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라고 답했고, 약 40%가 ‘고려해볼 수 있다’고 답했다.
왜 안 낳나?
가정의 출산 의향과 실제 출산 행위를 결정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가 더 이상 정부의 정 책이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요소임은 분명해 보인다. 중국인들이 전보다 아이를 덜 낳고 싶어하게 된 이유와 배경은 무엇일까?
조사에 따르면, ‘단독이태’ 조건에 부합함에도 둘째 출산을 신청하지 않은 이유 중 가장 많은 대답은(복수응답) ‘육아의 경제적 비용이 너무 높아서’(58.1%)였고, 두 번째가 ‘육아의 시간적 비용이 너무 높아서’였다.
크레딧스위스 은행의 계산에 따르면 중국의 가정에서 아이를 낳아서 18세까지 기르는데 매년 23,000위안(약 400만 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이는 보통 가정의 연간 소득(약 54,000위안)의 절반 에 해당한다. 베이징에 거주하는 한 블로거는 임신부터 자녀를 대학에 보낼 때까지 비용을 단계적으로 계산해보니 최소 43만 위안(약 7,500만 원)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만약 중국산 제품을 믿을 수 없어 아이에게 수입 분유를 먹이려 한다면 육아 비용은 더 늘어난다. 실제로 최근 멜라민 분유와 같은 사건으로, 값비싼 수입 분유와 기저귀를 찾는 부모들이 많아졌다. 중국 부모들이 홍콩에서 분유를 쓸어가는 바람에 품귀사태가 자주 빚어지자 홍콩정부가 1인당 국외로 가지고 갈 수 있는 분유를 두 통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농경사회에서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비용은 적었던 반면 효용은 컸다. 몇 년만 자라면 노동력으 로서 구실을 할 수 있었고, 늙으면 자연히 부모를 봉양했기 때문에 생산자원으로나 노후 보험으로나 큰 의미를 가졌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돈벌이할 만큼 교육을 받기까지 많은 자원이 투입돼야 하고, 노후부양은 엄두도 못 내는 경우가 많으니 출산은 투자대비 효율이 매우 낮아졌다.
사고방식의 변화도 경제적인 이유만큼이나 중요한 요소다. 지금 결혼하고 출산하는 80허우, 90허 우 세대는 외동으로 풍요롭게 자란 세대다. 조부모 넷, 부모 둘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자란, 소위 4-2-1 가정의 ‘소황제’들이다. 이들에게 ‘한 자녀’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며, 삶의 중심을 나에게서 아이로 옮겨야 하는 일도 쉽지만은 않다. 이들은 ‘하이누(孩奴, 아이의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딩커’가 되겠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앞의 조사에서, 둘째를 원하지 않는다고 대답한 전체 응답자의 비율이 47.3%였는데, 80허우와 90허우 세대는 이 비율이 56.8%로, 뚜렷하게 높았다.
만혼도 출산 저하의 원인이다. 상하이시의 경우 지난해 평균 초혼연령이 남성 30.1세 여성 28.1 세로 3년 전에 비해 1살 가까이 많아졌다. 안정적 삶의 기반 구축에 긴 시간이 소요되면서 만혼과 미혼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출산도 줄어드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남성 32.4세 여성 29.8세로 약 2 년 더 늦지만, 초혼 연령이 늦춰지는 속도는 중국(상하이)이 더 빠르다. 저출산의 원인은 한국이나 중국이나 유사하다. 그러나 육아비용의 증가 외에, 한국과 같이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서 여성이 일을 그만둔다거나, 아이를 돌보기 힘들만큼 노동시간이 길거나 출산 및 육아휴직을 편하게 쓰지 못하 는 분위기, ‘경단녀(경력단절녀)’ 등의 문제는 중국에서는 아직까지 큰 이슈가 되고 있지 않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보다는 덜 심각한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사회 전반의 변화 없이 저출산 해결은 어려울 듯
인구의 급증을 우려했던 중국은 지금 ‘부유해지기 전에 늙어버릴’ 것을 걱정하고 있다. 1980년, 중국의 65세 이상 인구는 5%도 되지 않았으나, 2014년 10%로 늘어났다. 반면 15~59세의 노동가능 인구는 2012년을 기점으로 절대수가 지속 감소하고 있다. 노동 수급 구조의 변화는 구인난과 인건비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구구조의 변화는 노동시장뿐 아니라 중국경제 전반에 큰 변화를 미치는데, 바로 인구보너스의 상실이다.
노동 인구는 풍부하고 부양해야 할 노년층은 적었던 ‘보너스’ 시절의 인구구조는 경제성장에 유리 했다. 이제 풍부한 저임 노동력을 바탕으로 성장해온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됐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중국정부는 성장방식을 전환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는 한편, 변화의 충격을 늦추기 위해 산아제한 완화에 나선 것이다. 최근 인터넷에는 단독이태에 이어 곧 산아제한 정책이 전면적으로 폐지될 것이란 소문이 돌고 있다. 당국은 ‘결정된 바가 없다’고 부인했지만, 인구구조의 변화 및 기존 정책효과 분석 결과에 따라 현 완화정책을 한층 더 완화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아제한을 했던 중국이 반세기만에 또다시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출산을 장려하는 모습은 일견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변화해버린 사회적 환경과 사고방식으로 인해 정책만으로 상황을 돌리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2세를 갖고 싶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반영한다. 현 사회에 만족감이 낮거나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란 기대가 없다면 출산 의향은 높아지기 힘들다. 최근 환경 및 경쟁악화 등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출산 의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산아조절 정책이 아닌 종합적인 사회의 개선이 있어야 출산율은 높아질 것이
[출처] ‘둘째 아이냐, 노후 여유냐’ 갈등하는 중국사회 (2015)|작성자 둥둥
1단계: 출산장려단계 (1949~1953) | 1950.03.20 | 북경시위생국에서는 북경시 소속 각 단위, 부녀간부 낙태 제한 방법을 공포하여 비합법인 낙태를 금지시킴 |
1950.04.20 | 중앙 인민정부위생부와 중앙군위위생부에서 <기관과 군대 간부 부녀의 낙태 제한 방법> 을 공포함 | |
1951.12.31 | 위생부에서는 <절육 및 인공유산을 제한하는 잠시 조치>를 발표. 비 법규로 인해 피임 도구의 관리와 사용이 엄격하게 제한 당함. | |
1953.01.14 | 위생부는 <절육 도구 및 약품의 등기 관리 규칙>을 제정하고, 1월 20일에는 피임 약품의 수입을 일괄적으로 금지시킴. | |
2단계: 출산정책의 전환 단계(1953~1959) | 1957.03 | 위생부의 지도에 따라 전면적인 산아제한운동이 개시 됨. 대표적으로 마인추의 <신인구론>이 있음. |
1958년 이후 | 대약진과 반우경의 착오와 자연재해 등의 원인으로 국민경제가 심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시기. 이에 수많은 백성이 식량 부족으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전체 인구수의 감소현상이 나타나게 됨. | |
3단계: 출산의 억제 단계 (1959~1980) | 1962.12 | 국무원에서는 <계획 생육 산아제한을 참답게 제창함에 관한 지시>를 발표함. 또한 <인구 억제 문제에 관한 지시>를 발의하여 산아제한에 대한 광범위한 선전과 피임 교육을 실시함. |
1964 | 국무원의 계획생육위원회가 설립됨. | |
1965 | 계획생육정책을 홍보하는 '하나는 적지 않고 둘은 마침하며 셋은 많다' 슬로건이 정식으로 제출됨. 이에 출산억제정책이 본격적으로 전개됨. | |
1973 | 국무원에서는 산아제한 지도자 팀을 설립함. 인구정책 및 집행 작업은 전국적인 범위 내에서 전개됨. | |
1980 | '한 가정 한 자녀' 정책을 시작한 후에 2명 이상의 자녀를 낳으면 벌금을 물리거나 공직에서 불이익을 주는 등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시킴. | |
4단계: 출산억제 유지단계 (1990~2013) | 1980.9 | 증극 공산당 중앙에서는 <중국 인구증가억제에 관한 전체 공산당원 · 공청단원에게 보내는 공개편지>를 발표하였으며, 중국 인구증장을 제어하기 위해 한 쌍의 부부가 1자녀 출산을 격려한다고 명확히 제출함. |
1984 | 국무원에서는 <계획생육 상황에 관한 회보> 서류에서 산동성의 경험.즉, 농촌에서 제2태 생육을 적당히 제공하며 계획을 초과하여 2태, 3태 이상으로 생육하는 행위를 방지하는 정책을 집행함. | |
1986~1990년대 초 | 전국의 각 성, 시, 자치구는 지역 계획 생육 조례를 발표 | |
2001.12.29 | <중화인민공화국 계획 생육법>을 발표하였으며, 원 정책성 규정을 법률화 했음. "국가에서는 안정된 생육정책을 집행하며 국민들의 만혼, 만육을 격려하며 한 쌍의 부부가 자식을 하나만 낳아야 한다...." | |
5단계: 출산억제 완화단계 (2013~) | 2013 | 국가위생 및 가족계획위원회 국가위생계위에서 1자녀 정책에 대한 조정방안을 발표함. 요컨대 최근중국의 출산정책은 1자녀 정책에서, 단독이태로 전환하는 정책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2014년에 시범적으로 실시 됨. 단돋이태: 한명 독생자녀인 부부가 첫쨰 아이를 한명 낳은 경우 둘쨰를 낳을 수 있는 정책. |
2013.3~ | 각 성마다 단톡이태 정책을 시작한 시간이 통일되지 않으며, 각성, 시가 지역 실제 상황에 따라 시행하기 시작함. |
추가적으로 리시루(李希如) 중국 국가통계국 인구와 취업사(司) 사장은 "두 자녀 정책을 시행한 후 중국의 인구수가 확연히 늘어났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2015년 두 자녀 정책이 시행된 이후 신생아 출산 수는 2016년, 2017년 각각 1786만 명, 1723명을 기록했다. 이는 두 자녀 정책을 시행하기 전인 ‘12차 5개년 계획’ 연평균 출생 인구수보다 142만 명, 79만 명이 증가한 수치입니다.
특히 중국은 ‘13차 5개년 계획’ 기간에도 두 번째 자녀의 출생률이 지속적인 증가세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7년 기준 출생한 신생아 가운데 두 번째 자녀의 점유율이 50%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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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추 약력>
자: 元善
국적: 중국
민족: 한족
출생지: 浙江省绍兴市嵊县浦口镇(今嵊州市浦口街道)
출생일자: 1882년 6월 24일
사망일자: 1982년 5월 10일
직업: 교수
졸업학교: 천진북양대학(천진대학), 미국예일대학, 미국콜롬비아대학
대표저작: 《新人口论》、《通货新论》、《马寅初文集》 등
마인추는 중국 저장 성 출신으로 톈진 시 베이양(北洋)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해 예일대학, 컬럼비아대학 경제학을 수학하였다. 베이징대학 경제학 교수, 교무장을 지냈으며 1928년 난징 국민정부 입법위원, 재정위원, 그 후 중앙대학, 상하이와 베이징 교통대학 경제학 교수를 지냈다. 중일전쟁 기간 장제스 정권의 반공 우선 정책에 항의하다가 구이저우 성의 식봉(息烽) 수용소에 1940년 12월부터 1942년 8월까지 감금 되었다. 풀려난 후에도 계속해서 국민정부 탄압에 항거하는 입장을 굳혔다. 중공정권 수립 이전 1949년 8월 저장대학 교장이 되었으며 중공 정부 발족에 참여해 중앙인민정부 위원이 되었다. 1952년 5월부터 1960년 1월까지 베이징대학 교장을 지냈다. 1979년 베이징대학 명예 교장으로 복권되었다. 주요저작으로는 <중국은행론> (1929), <전시경제논문집>(1945), <나의 경제이론 및 철학사상과 정치 입장>(1958), <신인구론>(1979) 등이 있다.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타고난 아이
마인추는 생년월일시의 사주가 모두 12간지의 말로 마씨성과 함께 5마가 되는 예사롭지 않은 운명을 띄고 태어났다고 한다. 마인추는 1882년 6월 24일 절강 소흥에서 양조업을 운영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부친은 양질의 물을 찾아 황택강과 담강이 만나는 승현 포구진으로 이사를 갔다. 마인추는 다섯 아들 중 막내였으나, 부친은 총명한 마인추에게 가게 장부를 관리하고 가업을 잇도록 요구하였으나, 마인추는 도시로 나가서 공부하기를 원했다. 부친과 싸운 후, 황택강에 몸을 던져 자살하고자 하였으나, 동네 사람들이 구해주어 살아났다. 이후 부친의 친구인 장강성이 상해에서 승현으로 와서 이 일을 알고 마인추를 데리고 상해로 가서 공부를 시키게 되었다. 1989년 17세인 마인추는 상해교회학교 육미서관에서 중학과정을 공부한다. 성적은 항상 상위였다. 1901년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부모님의 소개로 장인매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된다.
미국 유학길을 떠나다
마인추는 1910년, 예일대학에서 경제학석사학위를 받은 후, 컬럼비아대학 경제학과의 박사생이 된다. 32살이 되던 해에 마인추는 컬럼비아대학에서 경제학박사학위와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당시 중국 유학생들은 대부분 미국 지도교수가 잘 모르는 중국에 관한 내용으로 논문을 썼는데, 마인추는 굳이 “뉴욕시 재정”에 관한 논문을 썼다.
북경대 교수직을 맡다
마인추는 1916년 귀국하여 북경대학 채원배 교장의 요청으로 북경대학에서 경제학 교수를 맡게 된다.
두 번째 결혼을 하다
1917년, 마인추는 승현에서 왕중정이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된다. 왕중정은 마인추보다 22살이 어리고, 초등학교를 졸업했으며 예뻤다고 한다. 이후 마인추는 장인매와 왕중정을 북경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정인매와의 사이에는 딸을 셋 두었고, 왕중정과의 사이에는 딸 둘, 아들 둘을 두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의 가족계획을 주장했던 마인추 자신은 두 부인에게서 7명의 자녀를 둔 다산가족이었다.
신중국 건국 후, 북경대 초대 총장이 되다
신중국 건국 후, 마인추는 주은래 총리의 천거로 북경대학 초대 총장이 되었다. 그러나 “신인구론”이 채택되지 않자 야인으로 물러나 있다가 명예 북경대 총장으로 복권되어 1982년 만 100세를 1개월 앞두고 서거하였다.
인구 조절의 필요성을 제기하다
마인추, 우징차오, 천다, 천창헝 등의 지식인들은 1950년대에 여러 편의 글을 통해 인구 조절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지식인들은 1958년을 시작으로 호된 비판을 받았고, 그 비판은 1960년까지 계속되었다. 1950년대 인구 조절론을 제기했던 학자는 마인추 외에도 여럿이 있지만, 실제로 인구 조절론으로 인해서 비판을 받았던 학자는 마인추가 거의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중반에 북경대학교 교장직을 맡고 있던 마인추는 중국공산당과 국가지도자들에게 중국의 인구증가를 억제해야 하며, 가족계획(계획생육)을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했었다. 마인추는 중국의 인구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1955년 <인구통제와 과학연구>를 썼고, 이어서 <신인구론>. <중국인구문제와 생산력발전의 관계>, <왜 인구의 질을 강조해야 하는가>등의 글을 썼다.
1957년에 마인추의 <신인구론>의 인구증가억제정책이 전인대에 제출되어 토론되었는데, 당시 모택동은 “사람이 많은 게 좋은가 아니면 사람이 적은 게 좋은가? 내 생각에는 지금은 사람이 많은 게 좋다”고 1957년 1월 최고국무회의석상에서 발언한다. 이후 마인추는 비판을 받고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마인추는 이에 굴하지 않고, <나의 청구를 다시 신청함>이라는 글을 써서 “나의 인구론은 반박을 받아 이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 하지만, 반박을 받아 아무 것도 남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박을 받아 마음이 넓어지고 몸도 뚱뚱해졌다”고 적었다. 그러나 마인추는 변명할 수 있는 권한도 금방 박탈당했다.
북경대학의 모든 간행물과 전국각지의 신문은 맹렬하게 <신인구론>을 비판했다. 그러나 마인추는 절대 자아비판을 수용하지 않았고, 예전처럼 웃으면서 북경대학을 출입했다. 1960년 1월에는 “마인추가 투항하지 않는다면 그를 소멸시키자”는 구호아래, 이 타협을 모르는 학자의 북경대학 교장의 직무를 박탈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중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직무도 박탈당했다. 이후로 마인추는 정치와 학술무대에서 사라졌다. 이 와중에도 그는 대량의 농촌지역에 대한 조사를 거쳐 심혈을 기울여 100만 여자의 <농서>를 집필한다. 그러나 “문혁”이 시작되자 그는 부득이 “다른 사람이 태워버리느니 내가 태워버리겠다”면서 수십 권의 원고를 스스로 불태워버린다.
낙관적인구론 vs 비관적인구론
1950년대 중반, 중국 학계에서 제기되었던 인구 관련 지식은 대체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왕야난과 같은 학자들이 제기했던 낙관적 인구론으로서, 기본적으로 산아 제한에는 찬성하지만, 그 근본 이유를 인민의 복지에 두는 경우이다. 과도한 출산과 양육이 가사의 부담을 가중시키면서 일반 사람들의 건강과 노동, 학습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따라서 산아 제한을 통하여 그들을 과중한 가사에서 해방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다른 하나는 비관적 인구론인데, 마인추나 우징차오 등이 바로 여기에 속한다. 그들이 보기에, 산아를 제한하는 것은 단순히 사람들의 복지 차원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시 중국의 경제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시행되어야 하는 정책이었다. 과도한 인구가 생산 수준을 넘어서는 소비를 야기하면서, 투자로 이어져야 할 자금을 마련하지 못하게 하였고, 그런 점에서 과도한 인구가 당시 중국에서 사회경제적 발전의 장애물로 지적되었다.
두 번의 마인추 비판
1950년대 말의 마인추 비판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 비판이 장기간 지속되었던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중단과 재개가 있었던 두 차례 사건이었다는 점이다. ‘1958년 비판’은 사실 마인추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1958년 1월 그는 『나의 경제이론, 철학사상, 그리고 정치입장』이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여기에 「신인구론」이 수록되어 있다. ‘1958년 비판’은 마인추의 『나의 경제이론, 철학사상, 그리고 정치입장』의 출판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마인추가 그 책을 출판함으로써, 반우파 운동 종결과 함께 지나칠 수 있었던 인구 조절론에 대한 비판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측면이 있다. ‘1958년 비판’이 진행되는 동안 마인추는 끊임없이 반박하는 글을 발표함으로써 그 비판의 수준과 강도를 키웠다. 1958년에 마인추는 『광명일보』 상의 비판 글에 계속해서 주목하였고, 나아가 그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끊임없이 제기함으로써, 비판이 계속되어야 할 이유를 스스로 만들었다. 그는 1958년 5월과 7월, 두 차례에 걸쳐 자신의 ‘회전 이론’을 보충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이 때부터 ‘1958년 비판’은 『광명일보』 상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라 『경제연구』 와 『학술월간』 으로 번져갔다. ‘1960년 비판’ 역시 그 상황은 ‘1958년 비판’과 동일하다. ‘1958년 비판’이 중단되었던 이유, 그리고 다시 ‘1960년 비판’이 재개된 이유, 마지막으로 ‘1960년 비판’이 ‘1958년 비판’보다 더 강렬하고 정치적이었던 이유가 모두 그의 학술 활동, 곧 출판 및 발표 활동과 상당한 관련이 있다. 1958년 7월 이후부터 1959년 11월까지 그는 어떤 글도 발표하지 않았고, 그의 글이 더 이상 발표되지 않자, ‘1958년 비판’은 자연스럽게 약해져서, 1959년이 되면 거의 어떤 비판 글도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로 1959년 『광명일보』에는 그를 비판하는 글이 단 한편도 게재되지 않았다.
‘1960년 비판’의 시작은 마인추의 또 다른 글 발표에서 비롯되었다. 1960년 가을, 마인추는 『신건설』과 『북경대학학보』에 「나의 철학사사상과 경제이론」이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 글은 기존에 발표했던 자신의 글을 다시 정리한 것으로 특별히 새로운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 글 뒤에 첨부되어 있던 두 편의 「부대성명」이 문제였는데, 특히 그 중 「광명일보의 도전을 받아들이며」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단어들로 가득 차 있어서 비장감마저 느끼게 할 정도였다. 비판은 『광명일보』를 벗어나 거의 모든 학술 잡지와 신문으로 번졌고, 그 내용도 기존의 경제 사상과 인구 조절론은 물론, 베이징 대학 총장 시절의 사소한 언사와 행동, 심지어는 학생들에게 외국어 학습을 권장했던 것까지 다뤄졌다. 1960년 1월, 그는 다시 한 번 『신건설』에 글을 발표하는데, 그 글의 제목은 「다시 나의 부탁을 펼침」이었다. 거기서 그는 자신이 발표했던 글을 학술과 연구의 차원에서 다시 읽어줄 것을 부탁하고 있으며, 그 기대와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다시 나의 부탁을 펼침」을 끝으로 마인추의 글은 더 이상 발표되지 않는다. 여기서도 ‘1958년 비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인추의 글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으면서 그 비판 역시 약해진다는 점이다.
중국공산당은 왜 마인추 글의 발표를 허용하였나?
‘1958년 비판’과 ‘1960년 비판’은 그 발단과 전개 과정에서 마인추 글의 출판과 발표를 언제나 전제하고 있다. 심지어 그에 대한 비판이 두 번으로 나뉘게 된 것도 결국은 그의 출판 및 발표 활동 여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기되어야 하는 질문은 어째서 중국 공산당은 마인추의 글을 못마땅해 하면서도 발표와 출판을 허용하였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마인추 글의 발표와 출판은 그냥 단순히 허용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되고 평가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이 첨부된 상태에서 발표되고 출판되었다는 사실이다. ‘1958년 비판’과 ‘1960년 비판’ 과정 중의 마인추 글은 언제나 별(*)표가 달려있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비문’, 혹은 ‘착오’였다. 이것이 발표와 출한의 전제 조건이었던 셈인데, 그러한 표지가 독자의 해석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무엇이 사회주의 인구론인지 여전히 모호했던 당시 상황에서 국가가 제시하는 공식적인 평가를 무시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두 차례 비판 속에서 발표된 마인추의 글들은 처음부터 어떤 편견과 선입관 없이 읽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반드시 부정적으로 읽혀야 했기 때문에, 그 해석과 평가의 폭이 처음부터 한계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은 그 표지를 안고서라도 굳이 마인추의 글을 발표하였던 것은 결국 비판을 유도하기 위함이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점이다. 사람들에게 마인추의 지식이 잘못된 것임을 보일 뿐 아니라, 그 잘못된 지식으로 인해 어떻게 비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마인추가 두 번의 비판을 받았던 데에는 그가 끊임없이 자신의 의견을 글로 발표할 수 있었던 것이 중요 배경이 되었고, 그러한 발표는 기본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의도와 기획아래 진행된 것으로, 무엇이 사회주의 인구론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조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마인추 비판이 진행되는 과정에서야 중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비로소 인구 조절론에 대한 어떤 명확한 태도를 보이게 된다. 마인추 비판 속에서, 중국 공산당은 그 태도를 명확히 하였고, 낙관적 인구론을 사회주의 인구이론으로 확정하였다. 따라서 1970년대 말까지 인구 문제가 거론될 때에는 어김없이 모두 낙관적 인구론에 입각하여 논의된다.
马寅初大事年表
1882年 6月24日, 저장성에서 출생함. (浙江省绍兴市嵊县浦口镇)
1898年,상해에서 중학교에 다님(현上海市澄衷高级中学)
1901年,고향 사람인 ‘张团妹’와 결혼함. 천진북양대학에 입학해서 채광과 야금학을 전공함.
1906年,미국으로 유학을 떠남. (북양정부에서 국비유학생으로 미국 예일대학에 보내줌.)
1910年,예일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 취득함.
1914年,콜롬비아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함.
1915年,귀국 후 북양정부의 재정부에서 직원으로 일함.
1916年,(채원배의 요청으로) 북경대학 경제학과 교수 겸 주임교수를 맡음.
1919年,북경대 제1대 교무처장을 맡음.
1921年,国立东南大学(현南京大学)분설上海商科大学에서 上海商科大学(현上海财经大学)제 1대 교무주임을 맡음. 중국 은행 총 발행인을 겸임함.
1923至1925年,在北京交通大学经管学院任教,教授银行货币和国外汇兑。북경 교통대학 경제관리 학원에서 교수를 역임함. 은행 화폐와 외국환을 가르침.
1927年,到浙江财务学校任教并任浙江省省府委员。저장재무학교에서 가르치면서, 저장성 성 정부 위원을 맡아서 활동함.
1928年,남경정부 입법위원 역임.
1929年后,出任财政委员会委员长、经济委员会委员长,兼任南京国立中央大学、陆军大学和上海交通大学教授。1929년 후, 재정위원회위원장과 경제위원회위원장을 맡고, 남경국립중앙대학, 陆军大学(육군대학)과 상해교통대학 교수직을 겸임함.
1932年至1936年,任上海交通大学教授。1932년부터 1936년까지 상해 교통대학 교수 역임.
1938年,抗日战争期间,在重庆大学商学院任院长兼教授,着重研究中国战时经济问题。1938년, 항일전쟁 기간 중경대학상학원에서 원장과 교수의 직무를 맡음. 중국 전시의 경제문제에 대해 중점적으로 연구함.
1946年9月, 상해사립중화공상전문대학에서 교수를 맡음.
1948年,제1대 중앙연구원 원사로 당선됨.
1949年8月,절강대학교 총장을 맡음,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 중화인민공화국정무원재정경제위원회부주임, 화동군정위원회부주임을 맡음.
1951年,북경대학 총장을 맡음.
1960年1月4日,因发表《新人口论》被迫辞去北大校长职务,居家赋闲。《新人口论》발표로 인해
서 북경대 총장에서 사직함.
1979年4月19日,经中共中央批准,北京大学党委召开会议,为其彻底平反,恢复名誉。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을 거쳐서 북경대학 당위원회에서 회의를 열고 잘못된 판결과 정치적 결론을 시정하고 명예를 회복시킴.
1979年7月26日,中央人民广播电台播发题为《党组织为马寅初彻底平反恢复名誉》。중앙인민방송국에서 《党组织为马寅初彻底平反恢复名誉》이라는 제목의 방송을 발표함.
1979年9月,平反后担任北京大学名誉校长,并增选为第五届全国人民代表大会常务委员会委员。복권 후 북경대학 명예 교장에 당선됨. 제5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위원으로도 선발됨.
1981年2月27日,当选为中国人口学会名誉会长、顾问。중국인민학회 명예회장, 고문으로 당선됨.
1981年3月29日,当选为中国经济学团体联合会第一届理事会顾问。중국 경제학 단체 연합회 제1회 이사회 고문으로 당선됨.
1982年5月10日,马寅初因病逝世。질병으로 별세함.
1993年8月,获首届中华人口奖“特别荣誉奖”。제1차 중화인구상 “특별공로상”을 수상함.
[출처] 马寅初, 그는 왜 우파가 되었나?|작성자 juan
과목 코드 | 2018_학년 _2_학기 _중간__고사 | 경제 | 시행일 | 10월 1일(월) | |||||
11 | 학년 | 2 | 단위수 | 4 | 문항유형 | 문항번호 | 문항수 | 점수 | 총점 |
과정 | 인문사회 | 해당학급 | 3.6반 | 선택형 (단답형 포함) | 1번 ~ 25번 | 25 | 100 | 100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