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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브레(DEVRED, 1877-1926, 한국명 유세준)주교는 1877년 1월 7일 프랑스 ROUCOURT에서 출생하였고, 1898년 9월 15일 파리외방전교회에 들어간 뒤 1899년 9월 23일 서품 후 1899년 11월 15일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원주 본당의 3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6년간 전교에 전념함으로써 강원도 지방의 교세 신장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 풍수원 본당 신부와 협의하여 1904년 용소막 성당을 새로 탄생시켰다. 1906년 드망즈 신부가 경향신문사 사장으로 전임되자 그의 후임으로 신학교를 맡아 신학생들을 돌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군복무를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다시 한국으로 들어와 계승권을 지닌 보좌 주교로 취임, 1921년 5월 1일 주교성성식을 갖고 이후 5년동안 서울교구 지도서를 출판하는 한편, 1866년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자료 수집 등 한국교회발전을 위한 지대한 공헌을 남기고 1926년 1월 18일 갑자기 졸도하여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
2004년 3월 17일
지상을 통해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金大建∙1822~1846) 신부의
순교사를 그린 1920년대 연극대본이 발견되었음이 알려졌다.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연극대본 ‘김신부전’(金神父傳)을 공개했는데, 이 대본은 당시 조선교구 보좌주교였던 드브레
에밀 알렉산드레 조셉 주교(한국명 유세준)가 라틴어로 쓴
원작 연극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이었다. 그러나 그가 창작한 라틴어 원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 피숑 신부의 업적과 행적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한국 선교사. 세례명은 레오. 한국명은 홍세흥(洪世興).
1896년 프랑스 브류타뉴(Bretagne) 지방의 서부에 있는 플루달메조 (Ploudalm zeau)에서 출생하였으며, 1910년 9월 17일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였다. 1921년 9월 24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선교사로 임명 직후 11월 28일 배편으로 출발하여 이듬해인 1922년 1월 24일 부산에 도착, 급행열차로 그날 즉시 서울에 도착하였다. 신부는 1923년 9월 강원도 이천(당시는 망답(望沓)) 본당 주교로 임명된 후 1927년까지 4년간 머물렀다.
1933년 6월에 월간지 《가톨릭 청년》이 창간되자, 피숑 신부는 이 잡지에 한국 교회사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는 ‘송세홍’이라는 한국명으로 4월호인 9호를 시작으로, 1934년 10월에서 1935년 8월까지 신설된 덕정리(德亭里)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된 초기 10개월 동안을 제외하면 1936년 12월 폐간되기까지 거의 매호에 기고하였다. 그의 논문들은 16∼17세기의 전사(前史)로부터 기해박해까지의 통사적인 것이었다(1933.9∼1934.4). 전사에 관한 연구는 다블뤼 주교의 《조선 순교자 역사 비방기》에 언급된 “천주교회는 이벽의 교리 연구회가 개최되기 근 200년 전에 조선에 알려져 있었다”라는 정약용(丁若鏞)의 말에 착안하여 시작한 것으로, 이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피숑 신부에게 비롯되었다.
덕정리 본당 부임 직후인 11월 가을 판공 성사를 주기
위해 공소 방문을 강행하였고 아마도 본당이 완공되던 1936년까지 주교관에 거처하면서 매일 왕래해야만
했었을 것이다. 당시 덕정리 본당의 공소는 20개, 신자수는 1,148명이었다.
신부는 《가톨릭 청년》 1936년 4월에 펴낸 ‘정약용 서거 100주년’ 기념 특집호에서 그의 신앙 여부와 한국 교회 초기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서 왕성했던 활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특히 정약용에 관한 논문 두 편을 통하여 그가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깊은 신앙인이었음을 처음으로 교회 내외에 밝히기도 하였다.
1938년에 그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들을 묶어 서울 대목구 인쇄소에서 《조선성교사료》(Pro Corea Documenta) 라는 단행본으로, 그 불어판 (Pour la Corée Documenta)은 분책으로 간행하였다. 라틴어 표제나 한자 표제는 ‘조선 성교 사료집’이지만 그 내용은 김대건 신부의 서한집인 것으로 보아 피숑 신부는 한국 교회사에 관한 사료집을 시리즈로 간행할 계획을 갖고 제1집을 ‘김대건 신부의 서한집’으로 택한 것이 분명하다. 라틴어 서한집의 판형은 국판, 면수는 화보까지 포함하여 180쪽에 달한다. 본문 서한편에는 풍부한 각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는 16편 의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한글 서한은 신부가 처음으로 찾아낸 것으로, 그 출처에 대하여 ‘1885년 실행한 순교자 조사 문적 중에서 발견된 것으로, 비록 원본은 아닐지라도 여러 가지로 대조한 결과 원본을 등사한 것으로 추측된다.’라는 역사가다운 각주를 덧붙였다.
신부의 전사에 관한 논문은 1934년 프랑스의 《선교 역사지》(Revue de I’histoire des Missions)에 ‘코레아누스’ (Coreanus)라는 가명으로 발표되었고, 1944년에는 일본의 센다이(仙台) 교구장인 우라가와 와사부로(浦川和三郞) 주교의 《조선 순교사》에 거의 그 전문이 번역될 정도로 당시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김대건 신부, 브뤼기에르 주교, 모방 신부 등의 특수사에 관한 연구들은 그들의 생애를 그들 자신이 남긴 제1차 사료인 서한들을 중심으로, 또 그것에 의거해서만 서술하였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신부는 한국 교회사 연구의 기초가 되는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철저히 검토하며 연구하였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사》의 원고인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와 다블뤼 주교가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에 관해 대부분의 사실을 인용한 정약용의 《조선복음전래사》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특히 달레가 집필한 초기 교회사에 관한 부분을 한국측 자료로 확인하고 고치거나 또는 보완하기 위해 자료의 수집과 답사를 병행하였으며, 잊혀진 순교자들의 묘소를 찾아내기 위해 그 후손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다녔다. 이러한 끈질긴 노력으로 1927년 구산(龜山)에서 김성우(金星禹, 안토니오)의 묘소 발견을 시작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의 묘, 그리고 허계임(許季任, 막달레나)과 그 일가 5명의 묘소를 잇달아 찾아냈다.
1945년 초봄 판공을 위해 공소를 순회하던 중 티푸스에 걸린 피숑 신부는 즉시 상경하여 성모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병은 날로 악화되어 결국 2월 25일 주일 새벽 2시 반경에 선종하였다. 한국 신자들을 사랑한 나머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희생한 그는, 한국민들과 해방의 기쁨을 나누지 못한 채 수난의 선교 생활 24년을 마감하였다. 2월 26일 서울 대목구장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고 용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피숑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서 선구자적이고 개척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그는 원사료에 의한 연구의 선구자로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를 역사서가 아니라 자료집으로 간주하고 그 일차적인 원사료들을 확인하려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38년 김대건 신부의 라틴어 서한집 간행이다. 또 그는 사진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100여 점에 이르는 귀중한 사진들을 수집하여 유리원판으로 만들어 남겼다.
(3) 뮈텔 신부의 업적과 행적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프랑스어: Gustave-Charles-Marie Mutel, 1854~1933)은 조선에 파송되어 일제 강점기까지 활동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 선교사로 한국이름은 민덕효(閔德孝)이다. 조선대목구가 분리되어 조선대목구가 이름 변경된 경성대목구장을 지냈다 경성대목구는 일제때 서울대목구의 전신이다.
1881년 조선에 와서 선교에 힘썼다.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가,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이 되어 다시 조선에 왔다. 조선 가톨릭 교회의 확립을 위해 힘썼으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문에 능하였고, 순교자의 공적을 조사하였으며, 가톨릭 교회의 자료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06년 경향신문을 발간하였고,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주교는 대한성공회와도 관련이 있는데 성공회신문에 실린 뮈텔주교의 글에 따르면 한국에 오는 배에서 대한 성공회 3대교구장인 마크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주교를 만났다.
뮈텔의 일기와 편지를 번역한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자이자 천주교회의 원로인 최석우 신부에 따르면, 뮈텔은 조선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우월의식이 있었으며, 동양의 미개한 지역에 와서 봉사한다고 생각해 조선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서는 뮈텔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항일 의병들을 약탈자와 산적에 비유하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대신학생들을 퇴학시키는 등 조선인 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참여를 봉쇄하고 오직 신앙만을 강조했으나, 정작 자국의 국가적 위기인 제1차 세계대전 때는 다르게 행동했던 사실을 지적하였다.
191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수행할 당시, 뮈텔은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하고 그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으며, 처형을 앞두고 종부성사를 위해 프랑스인 사제를 보내달라는 안중근과 그 일가족의 요청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안중근을 찾아가 종부성사를 집행한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조세프마리 빌렘을 징계하는 등의 행각을 벌인 사실이 그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 뮈텔은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2.
(1) 장면의 교회사 서술
장면의 천주교회사 인식이 가장 많이 포함되고 표출된 것은 ‘조선천주공교회약사’라는 저서이다. 총 111쪽의 소책자이며 초기교회부터 당시까지를 대상으로 한 통사로서 5기의 내용으로 구성 되어진 이 책자는 한국인에 의해서 한국 천주교회사가 바르게 쓰여지는 궤도를 차려놓은 점에서 그 가치가 높게 평가되고 있다.
일부 서양인 선교사들이 한국 천주교회의 시점을 임진왜란 당시 예수회 선교사의 조선선교 시도를 그 기점으로 잡으려는 시도를 완전히 뿌리치고, 조선 사람의 자율적인 노력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내용을 서술함으로써 한국천주교회사가 바르게 쓰여지는 궤도를 차려놓았다는 의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장면의 역사인식은 가톨릭적 전통의 존중, 가톨릭적 역사해석의 견지, 역사의 실천적 의미 중시, 순교 전통의 강화와 민족주의 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리하여 당대의 시대사조로서 가톨릭을 위협하던 사회주의 내지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가톨릭 신앙에 대한 도전으로 여기고 이들로부터의 가톨릭 공격에 대해 과감한 호교론을 펼쳤다. 또한 독일 프로테스탄트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면죄부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은사(恩赦)의 교리적 근거를 명백히 하여 이단을 배척하고 정통 신앙인으로서 가톨릭의 입장을 강화하는데 노력했고, 영국 성공회의 개종운동(가톨릭으로의 귀정 운동)을 높이 평가하고 개인적 도덕이 역사적 사건 전환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또한 근대 과학의 발전에 미친 가톨릭교회의 긍정적 기여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교회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야말로 교회가 직면한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다는 실천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었다. 또한 가톨릭 신앙이 바로 순교의 전통 위에 서 있으므로 순교적 신앙실천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 책은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조선교회 선교에 종사했던 모든 선교사들에게 감사를 표하면서 천주교 신앙의 자주적 수용을 널리 알리고, 조선 순교자를 현양하며, 신도들의 각성을 촉구하여 하느님 나라 건설에 매진하도록 하려는 목적과 동시에 당시 사학계의 일각에서 논의되던 실증주의 사학과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동시에 조선 역사와 문화, 교회의 일본화 등을 추진하던 식민사관에 대한 거부도 견지하고 있었다.
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다소 호교적 개선주의적 입장에서 교회사를 서술하는 문제점을 남겨주면서 박해의 원인을 외교도의 시기로 규정하는 등 일부 부정확한 인식의 오류도 발견되고 있다고도 본다.
(2) 이능화의 교회사
일제 강점기 한국인이 간행한 천주교 통사로서의 이능화의 ‘조선기독교급외교사’는 그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22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후 1939년 해산 때까지 활동하면서 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관찬사료와 불어로 된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참고로 해서 1925년경 초고를 완성하고 1928년 이 책을 편찬 간행하게 되었다.
이 책이 갖는 장점을 김수태는 ‘그리스도교가 한국에 수용됨으로써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함으로써 사람들이 그리스도교를 믿게 되면서 신분이나 지역의 차별이 없어져서 평등하게 되었고 양반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 당하던 피지배층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큰 역할을 담당하도록 해준 것이라고 했다.
반면 그의 교회사 서술이 깊은 숙고나 문제의식이 없이 너무나 가볍게 사료를 임의로 편집하고 해석한 나머지
현재의 일부 한국인 연구자들까지 다소간의 혼란에 빠트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음은 그에게 있어 조선 천주교의 기원이나 발생이 어떻게 되든 별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며, 이를 통해 사료 편찬에 대한 무책임감이 주는 폐해를 볼 수 있어서 부정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 우라가와 주교의 ’조선 순교사’
(1) 시대적 배경
1935년~ 1944년은 일본인에 의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의 2기라고 보는 시기이며, 한반도를 넘어서 전
일본학계로 교회사연구가 확대되는 시기였다. 연구 경향도 단순히 사실의 탐구에 머물지 않고 사회사, 사상사 등 다양한 연구 방법론을 적용하기 시작했고, 교회사 논문이 일본 본토에서 발행되는 다양한 학술잡지에 실리기도 했다.
우라가와 와사부로(센다이교구 제4대 교구장)는 일본 오사카에서 1944년 5월 일본어로 된 ‘조선순교사’를 간행하였다. 이석원 교수는 이 책의 특징을 천주교의 순교신심과 일본제국주의의 충군애국의 정신을 결합하여 일본적 천주교회로 조선 천주교회를 통합하려는 지향을 갖고 있었으며, 호교론과 식민주의 사관을 결합하여 ‘천주교적 내선일체’를 시도했다고 파악했다. 이 밖에도 한국사의 독자적 성격을 부정하는 반도적 성격 내지 사대주의, 한국의 폐쇄성과 낙후의 원인을 쇄국주의로 돌리는 경향 등 일제 식민사관의 주요한 특징들이 뚜렷이 드러나는 근본적인 한계점을 갖고 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2) 기존의 연구 성과 반영 정도
이 책은 달레(Ch. Dallet)의 《한국 천주교회사》(Histoire de L' Eglise de Coree), 로네(A.C. Launay)의 《프랑스와 한국 순교자들(1836∼1846)》(Martyrs fransais et core ns)과 <백서>(帛書), 《기해일기》(己亥日記) 등을 참고로 저술되었는데, 그 중 《한국 천주교회사》와 《프랑스와 한국 순교자들(1836∼1846)》의 내용이 거의 그대로 번역·수록되었다. 그리고 ‘조선 천주교선사’ 부분은 피숑(L. Pichon) 신부가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 문서고에서 수집한 선교사들의 기록을 참고하여 편술(編述)되었다. 이렇듯 대부분의 내용을 두 책의 내용을 그대로 번역 수록한 것으로 병오박해 때까지만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박해시대의 교회사도 온전히 다루지 못한 내용적으로도 미완성작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조선에서 나온 사료를 직접 분석하고 활용하지 못한 사료적 한계 외에도 박해의 원인을 당쟁으로 보아 1801년은 물론이고 1839년의 기해박해도 벽파가 당쟁을 일으킨 천주교의 적이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1805년 시파(김조순)에 의한 집권 이후 현실적으로 시벽간의 갈등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 기해박해 때 척사를 주장한 풍산홍씨가 신유박해 당시의 시파였다는 사실마저 알지 못하는 등 조선시대 정치사에 대한 기본적인 사실 인식마저 제대로 안된 그의 학문적 소양의 부족마저 드러낸다고 비판받고 있다.
♣ 참고 : 강의 교안(원재연), 안토니오의 집(블로그), 네이버 사전,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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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언제나 정성스런 답변 감사합니다. 오타로 보이는 단어가 있네요. 피숑 신부의 한국명은 홍세흥이 아니라 송세흥인듯 합니다. 또 비망기가 비방기로 되어 있군요 ㅎ ㅎ ~~ 앗 혹시 제 강의안의 실수(오타)를 그대로 긁어서 나타난 것이 아닐른지요? 그렇다면 제가 무척 죄송해지네요. ~~
참고로 조언을 조금 드립니다. 김성우, 허계임, 최경환 등의 1930년대 전후 묘소 발견은 피숑 신부도 참여했겠지만, 그 독자적인 발견은 아닌 듯합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 최경환 성인의 묘소는 그의 며느리 송아가다(최경환의 5남 최신정 델레신포르의 부인)의 인도로 찾아냈다고 하는 증언이 최양업 신부의 조카가 쓴 진술서에 나옵니다.
세밀하게 오류 부분 지적과 조언 부분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제님!감사합니다.학우 여러분의 노력덕에 즐겁고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