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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단편소설 / 신성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난 해가 밝았다. 전쟁의 기미는 무르익고 있었다. 조선에서도 그 낌새를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청나라는 명나라의 영토를 정복하며 그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인조는 여전히 친명 정책을 버리지 않고 청나라와 대립 관계를 갖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청 태종이었다. 그는 정묘호란의 실패를 거울삼아 조선을 확실하게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 조선에는 장만이 없도다. 장만이 없는 조선은 무서울 게 하나도 없다. 이제 우리는 전쟁을 할 때다. 지난 정묘호란 때 뼈아픈 실패를 거울삼아 이번만큼은 조선을 꼭 정복하리라!”
청 태종의 결의는 확고했다. 그는 그동안 조선을 침범하기 위해서 수십만 군사를 양성했다. 그는 그 군사들을 이끌고 직접 조선으로 침공할 계획이었다. 최명길은 그러한 청나라의 움직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장만이 자신에게 남긴 유언을 상기했다. 장만은 최명길에게 목숨을 걸고 나라와 백성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하면 우리가 대응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명길에게 전세가 뒤집기 어려우면 후퇴를 먼저 하고 그다음에 화친을 하라고 했다. 끝까지 적에게 저항하다가는 나라가 위태로울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최명길은 그러한 장만의 말을 가슴속 깊이 새겨들었다.
청나라 2대 임금인 홍타이지는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하여 1636년(인조 14년) 4월 11일에 금(金)이라는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천총(天聰)이라는 연호를 숭덕(崇德)으로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자 신료들은 조선과 당장이라도 전쟁을 벌여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들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홍타이지는 기회를 옅보기만 했다. 당장 전쟁을 일으키지 않고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홍타이지의 즉위식에는 만주인, 몽골인, 한인을 대표하는 신료들과 조선에서 온 사신인 나덕헌과 이확도 강제로 참석하고 있었다. 나덕헌은 춘 신사(春信使), 이확은 홍타이지의 국서에 대한 답장을 들고 온 회답사였다. 이들은 비록 강제로 끌려 식장에 참석은 했지만 황제가 된 홍타이지에 대해서는 절을 하지 않았다. 청나라 관료들은 그들을 째려보면서 소리쳤다.
“너 이놈들, 너희들은 어찌 된 놈이기에 황제 폐하 즉위식을 축하하기 위해서 온 사신이면서 황제께 절을 하지 않느냐? 어서 무릎을 꿇고 절하라.”
“그것은 우리 마음이오. 우리는 사신으로 온 것뿐이니 굳이 황제께 절까지 할 필요는 없소.”
나덕헌과 이확은 청나라 관원들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청나라 관원들이 그들을 때려서 의관이 부서지고 강제로 무릎을 꿇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너 이놈들! 무례하기가 짝이 없구나. 이놈들을 살려둬서는 안 되겠다. 당장 목을 베야겠다.”
청나라 관원들은 화가 극에 달했다. 그럼에도 나덕헌과 이확은 다리를 뻗대며 드러눕는 따위의 행동으로 끝까지 절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아직까지는 형제국인 조선의 사신일 뿐, 조선은 청나라에 소속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으로 청나라의 요청을 거절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이들 사신을 죽여 보았자 별로 얻는 게 없다고 판단하여 그들을 살려줬다. 대신에 이들에게 자신의 국서를 들려 조선으로 가도록 했다. 나덕헌과 이확은 국서의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맞섰으나 거의 강제로 휴대시켜 보내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이들은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러 청 태종의 국서를 열어본 다음 폐기하고, 대신 그 내용을 등사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청 태종의 국서 내용이 조정에 전해진 것은 인조 14년(1636년) 4월 26일 평안감사 홍명구의 보고를 통해서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국서를 휴대하고 나온 나덕헌· 이확 등을 자결하지 않았다고 매도하거나 처형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일었다. 이렇듯 조정에서 논란이 일자 인조는 이들을 유배 보냈다. 청 태종이 보낸 국서의 내용은 크게 4가지였다.
첫째, 용골대 일행이 한양에 갔을 때 인조가 몽골 출신 패륵을 만나주지 않은 것
둘째, 1619년 조선이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하는 군대를 파견한 것과 이후 명나라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식량을 준 것
셋째, 정묘호란 당시 가짜 왕제를 친왕제인 것처럼 속여서 볼모로 보낸 것
넷째, 정묘호란 이후 가도의 한인들을 조선 영토 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한 약속을 어긴 것
그러면서 조선이 후금을 원수라고 한 이상 자신들은 전쟁을 통해서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이며, 인조가 스스로 잘못을 깨달았다면 그 자제를 볼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조선이 청나라로부터 전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인조의 아들들을 볼모로 청나라에 보내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이제 조선과 청나라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청 태종이 보낸 국서를 보고 조정 대신들은 격분했다. 그들은 인조에게 강하게 청나라와 대적해야 한다고 맞섰다.
“전하, 청 태종의 무례가 극에 달했사옵니다. 우리는 오랑캐의 요구를 절대로 들어줄 수 없사옵니다. 그들과 결사 항쟁할 수밖에 없사옵니다. 우리가 이토록 치욕스러운 국서를 받고 그냥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청 태종에게 반드시 경고해야 하옵니다.”
이처럼 조선에서는 숭명배금의 기개는 높았지만 전쟁이 터질 경우 대비책이 마땅치 않았다. 전쟁이 터지면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을 간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이 또한 안심할 수 있는 대책이 아니었다. 인조의 강화도 입도 계획이 청 태종에게 들킨 데다, 공유덕과 경중명 등 명나라 수군 장수들의 투항으로 청나라가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토록 긴박해지니 조선은 인조 14년(1636년) 6월 17일에 청 태종의 국서에 답하는 격문 형식의 글을 보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묘년에 맺은 맹약이 깨진 것은 날쌔고 용감하여 싸우면 이기는 귀국(청나라) 탓이지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조선 탓이 아니다.
둘째, 화친을 약속한 처음에 조선이 명나라 조정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것을 첫째 조건으로 삼았는데, 요즘 명나라로 향하고 한인을 접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를 책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화친을 약속한 본래 뜻인가?
셋째, 변방의 조선 백성이 청나라 법을 범한 것은 잘못이지만 고의가 아니며 번번이 사과했다. 그럼에도 강홍립을 죽이고 사신을 홀대했다는 따위의 말은 간사한 자들의 무고이다.
넷째, 지난번 삽한(揷漢: 몽골) 왕자는 바로 망한 나라의 포로이니 귀국 왕자에 비할 바 아니어서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전한 말이 참으로 우리나라가 감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다.
다섯째, 명나라 조정은 조선에 대해서 지존이지만 조선을 깔보거나 수탈하지 않았다. 그런데 귀국은 어찌하여 이웃으로 화친하기를 약속하고도 번번이 조선을 업신여기고 꾸짖으며, 강매하고 마구 빼앗으며, 이번에 간 사신에게 온갖 곤욕을 주었는가?
여섯째, 당초에 맹약을 맺은 것은 국경을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고자 한 것인데, 지금은 고을마다 텅텅 비어 병화를 당한 것과 같다. 이에 나라 사람들이 화친을 잘못으로 여기고 있지만 조선 임금은 하늘에 한 맹약이므로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귀국이 조선에게 먼저 맹약을 깨트리려 했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일곱째, 우리 조선은 충분한 군사와 재물이 없으나, 강조하는 것은 대의이고 믿는 것은 하늘뿐이다. 과거 왜적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조선을 침략했으나 그가 죽자 자중지란(自中之亂)이 일어나 망했다. 그러나 조선과 우호 관계를 맺은 덕천가강(德川家康)은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다.
여덟째, 설사 우리가 의를 지키다가 병화를 입더라도 원래 그 임금의 죄가 아니면 민심은 떠나지 않고 국명도 보전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귀국이 공갈 협박을 하면서 요구와 책망을 해서 백성의 재산을 긁어가 살 수 없게 한다면 민심이 떠나가고 나라도 무너질 것이다.
인조는 이 국서를 통해서 청나라의 요구 조건을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혔다. 그러면서 청나라가 조선을 침략할 경우 청 태종이 임진왜란 때 풍신수길처럼 비참한 말로를 맞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최명길은 답답했다. 그는 인조가 말로만 척화의 기개를 높였지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은 것에 속이 탔다. 그는 인조에게 절박한 심정에서 쓴 글을 올렸다.
“요즘 대각(臺閣)에서는 사람마다 모두 척화를 주장하고 있으나 유독 간원의 차자만은 언론이 몹시 정당하고 방략이 채택할 만하옵니다. 전하의 뜻이 오로지 척화에 있다면 회계하는 말을 어찌 모두 엄호하여 한 가지도 시행함이 없게 한단 말입니까? 이것은 원래 정산(定算)은 없고 다만 지연시키기 위한 계책에 불과하옵니다. 대체로 간원의 의논을 받아들여 나가 싸우거나 물러나 지킬 계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신의 말을 받아들여 병화를 완화시킬 계책을 세우지 않으니 답답할 따름이옵니다. 이렇게 되면 하루아침에 노기(虜騎)가 휘몰아 오면 체찰사는 강화도로 들어가 지키고 원수는 정방산성에 물러가 있으면서 청천강 이북 여러 고을은 버리어 도적에게 주는 수밖에 없을 것이옵니다. 그리되면 안주성만 홀로 온전할 수 없어서 생령이 어육이 되고 종사가 파천하게 될 것이니 그 잘못은 누가 책임지겠사옵니까?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대가(大駕)가 진주하는 것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나 제찰사와 원수는 모두 평안도에 개부(開府)하고 병사(兵使)도 의주에 들어가 거처하여, 진격만 있고 퇴각은 없다는 것을 제장들과 약속하는 것이 전수(戰守)의 상도에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지옵니다.”
최명길은 주화론(主和論) 자이면서도 말로만 척화를 외치며 시간을 보내지 말라고 했다. 그는 시간을 보낼 경우 청나라 철기군이 국토 깊숙이 들어와 엄청난 피해가 우려되니 평안도 지역에 전선을 열고 거기서 결판을 내는 게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답하지 않았다. 그러니 최명길은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인조를 생각하며 한숨만 내쉬었다.
최명길이 주화의 입장에서 ‘총대를 메자’ 사간원 등에서 벌떼처럼 일어나 최명길을 공박했다. 인조 14년(1636년) 9월 27일 사간원은 ‘금나라에 대한 호칭 문제로 최명길이 관직을 삭탈하라’고 아뢰었다. 이어서 10월 1일에는 수찬 오달제가 최명길을 논박하는 소차를 올렸다. 11월 8일에는 부교리 윤집이 ‘최명길의 죄를 논하는 상소’를 제출했다. 이 상소에서 윤집은 ‘화의가 나라를 망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옛날부터 그러했으나 오늘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천조(天朝: 명나라)는 우리에게 부모의 나라이고, 노적(奴賊: 청나라)은 우리에게 부모의 원수다. 옛날에 화의를 주장한 자는 남송의 진회(秦檜) 보다 더 한 자가 없는데 당시에 그가 한 말과 행적이 사관(史官)의 필주를 피할 수 없었으니, 비록 크게 간악한 진회조차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이 명확하다. 대체로 진회도 감히 하지 못한 짓을 최명길이 하였으니 최명길은 전하의 죄인이 될 뿐 아니라 진회의 죄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최명길의 이름을 아예 사판(仕版)에서 지워버리라!’고 극언했다.
진회는 남송 초기의 정치가로 남송이 금나라(1115~1234)의 공격을 받자 화친을 주장했다 하여 화이론과 성리학적 가치를 추종하는 중화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매국노의 대명사로 낙인찍힌 인물이다. 윤집은 진회를 들먹이며 최명길을 진회보다 더한 매국노로 간주하였다. 최명길은 이러한 사정을 미리 간파하고 윤집의 소차가 올라오기 이틀 전인 11월 6일에 사직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에 우리 조정은 이렇듯 주화론자와 척화론자의 지루한 줄다리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1636년 12월 초에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말았다. 병자호란에서 청나라 군사는 만주군 7만, 몽골군 3만, 명나라에서 투항한 공유덕과 경중명의 군사가 2만 명 정도로 도합 12만 명이었다. 정묘호란 때 3만 명 군사보다 4배나 많은 군사였다. 이들은 거침없이 진군을 하여 의주를 지나고 곽산과 정주에 무혈입성했다. 또 일부 정예병들을 뽑아 철산과 가도· 운종도 일대를 공략하여 동강진을 제압하고자 했다.
이때 조선의 전략은 청나라의 철기군과 야전에서 맞붙을 경우 승산이 없다고 보아, 대로에 위치한 진을 버리고 군민을 주변의 산성에 집결시킨 다음 화포와 조총으로 맞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의주 군민은 백마산성(白馬山城), 평양 군민은 자모산성(慈母山城), 황주 군민은 정방산성(正方山城), 평산 군민은 장수산성(長壽山城)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러나 청군은 이러한 조선군의 의도에 말려들지 않았다. 청군은 산성을 공격하여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대로를 따라서 남으로 질주했다. 그들은 속전속결로 인조의 항복만 받아내면 된다는 속셈이었다.
이때 평안도에 주둔해 있던 조선군 지휘부는 치명적인 실수를 했다. 당시 의주 건너편 용골산 봉수대에서는 적의 침입을 알리는 봉화가 두 번씩이나 올랐으나 황주의 정방산성에 주둔하고 있던 도원수 김자점은 이를 도외시했다. 그는 청군이 겨울철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고, 봉화가 올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한양이 혼란스러워질 것을 우려하여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김자점은 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관을 ‘망녕된 말로 군정을 어지럽힌다’며 목을 베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청군이 안주를 지난 12월 10일에야 사실을 제대로 알고 조정에 적의 침투 사실을 알렸다. 그 사실은 12월 13일에야 조정에 전해졌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입한 지 12일이 지나서야 전쟁 사실이 조정에 알려진 것이다. 그 사이에 청군은 놀라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그들은 인조를 잡아서 항복시킬 목적으로 빠르게 진격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황급히 대책 회의가 열렸다. 영의정 김류가 다급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전하, 지금 조속히 경기도 일대의 군사를 모으고 강화도로 가셔야 하옵니다.”
그 말에 인조가 답했다.
“청군이 이곳까지 들어왔을 리 없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다음 날인 12월 14일에 청군이 이미 개성을 통과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인조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정신이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청군에게 잡혀갈 것만 같은 위기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인조는 그 길로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다. 이때 마부대가 이끄는 청군의 선봉은 양철평(良鐵坪: 녹본동 부근)을 지나 홍제원에 도착해 있었다. 결국 인조 일행은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했다. 한강이 얼어 배를 띄울 수 없는 데다 청군이 양천강(陽川江: 개화동 부근)을 차지하고 강화도 가는 길을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인조를 비롯한 조정 신료들의 강화도행이 좌절되자 도성 안은 공포 분위기에 휩싸였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적을 얕잡아 보다가 피난 기회를 놓치고 말았으니. 우리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인조의 한탄 소리에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렇게 조정이 허둥대는 사이에 피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도성은 그야말로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이때 최명길이 나섰다.
“전하, 신이 적진으로 가서 적장과 담판을 벌여서 시간을 벌어보겠나이다. 전하께 오서는 그 틈을 타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시옵소서.”
인조는 그야말로 적에게 포로로 잡힐 우려마저 있는 막다른 처지였다. 그는 앞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야말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좋은 생각이오. 그대가 적장을 만나서 시간을 최대한 끌어주시오.”
인조는 최명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순간 최명길에게 큰 고마움을 느꼈다. 아무도 나서지 않고 있을 때 최명길이 좋은 제안을 한 거였다. 그 제안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투 중에 적장에게 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이었다. 자칫 적장의 노여움을 산다면 그 자리에서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최명길이 그러한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최후의 수단으로 화친을 제시한 장만의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최명길은 그 순간 자신의 몸속에 장만이 들어있다는 생각을 했다. 최명길은 마치 자신이 장만의 분신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만약 장만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자신과 같은 말을 인조에게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조로부터 승낙을 받은 최명길은 거침없이 적장 앞으로 나갔다. 막 사현(沙峴: 무악재)을 넘어 곧바로 진군하고 있는 마부대 군영 앞에 최명길이 나타났다. 이는 누가 봐도 시간 끌기 작전으로 밖에 볼 수 없었다. 최명길은 사현에 도착해서 마부대를 만나서 일단 진군을 멈추게 했다. 그는 마부대에게 정묘년의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발동한 까닭을 따져가며 해가 저물 때까지 일부러 이야기를 길게 끌었다. 마부대는 최명길에게 ‘우리가 맹약을 어긴 것이 아니고 조선이 먼저 화친을 끊었으니, 인조를 만나서 그 까닭을 묻고자 한다’라고 했다. 그는 청 태종이 참전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최명길은 ‘임금께서는 남한산성으로 갔기 때문에 서로 만날 수 없다’고 했다. 최명길이 한양으로 돌아와 행재소로 치계하고 기다렸으나 회답하는 글이 올라오지 않자 마부대가 노하여 최명길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부장 하나가 ‘화친하는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그를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여 무사할 수 있었다. 인조는 최명길이 목숨을 걸고 적진에 나가서 시간을 벌어 준 덕분에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었다. 위기의 순간 최명길이 인조를 구해준 거였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인조는 기가 막혔다. 자신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개 국왕의 체면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때는 인조 14년(1637년) 12월 14일 밤 9시가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인조가 도성을 버리고 피난 간 것이 벌써 3번째 일이 되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에 이어서 피난 간 것이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지였지만 황망 중에 들어오다 보니 군사나 양곡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겨우 한 달 반 정도밖에 안 되었다. 그러자 영의정 김류는 인조에게 강청 했다.
“전하, 남한산성은 고립되어 있고 양곡과 말먹이가 부족하지만 강화도는 우리에게 편리하고 적들이 침범하기 어려우며, 적들은 명나라를 침략할 의도를 가지고 있으니 우리와 장기전을 벌이지 않을 것이옵니다.”
김류의 이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다. 청군은 일찍이 수군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공유덕· 경중명 등을 참전시킨 데다가 청 태종마저 직접 출전하여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러니 결코 물러나지 않을 태세였다. 강화도라고 해서 오래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인조 일행은 김류의 말을 듣고 이튿날인 12월 15일 새벽 강화도로 가기 위해서 남한산성을 나섰다. 하지만 눈길이 미끄러워 말을 탈 수 없었다. 인조도 말에서 내려걸어가다가 도저히 계속 갈 수 없어서 되돌아왔다. 이렇게 남한산성 탈출이 실패하자 고립된 산성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높아졌다.
적으로부터 시간을 끌기 위해서 적진에 나갔던 최명길이 남한산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인조에게 ‘조선이 맹약을 어겼기 때문에 새로운 화약을 맺기 위해 왔다’는 마부대의 말을 전했다. 최명길이 적이 왕제(王弟)와 대신을 인질로 삼기를 요구한다고 보고하자 능봉수(綾峯守)를 왕의 아우라고 칭하고, 판서 심집을 대신의 직함으로 가칭(假稱)하여 보내기로 했다. 정묘호란 이래 조선은 후금을 대하면서 알량한 화이론에 따라 오랑캐 따위는 속여도 괜찮다고 생각하여 후금을 속이고는 했다. 이때도 그 버릇대로 속임수를 썼다. 그러나 이들은 이튿날 적진에 갔다가 가짜임이 들통나고 능봉수를 왕제라고 증언한 박난영은 죽임을 당했다. 조선의 속임수에 화가 난 청나라 측은 한발 더 나아가 ‘왕세자를 보내지 않으면 화친은 없다’고 엄포를 놨다.
인조는 너무나도 난감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다. 바로 그 날(12월 15일) 저녁때 청나라 사자가 산성 근처에 나타나자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졌다. 적이 바로 눈앞에 있다는 게 실감 났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영의정 김류는 여전히 강화도행을 주장했다. 그 주장은 청군이 한강을 건너 봉은사 부근에 진을 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러나 김류는 남한산성 탈출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2월 17일에도 훈구대신 십여 명과 미복 차림으로 동문을 나가 곧장 충원(忠原: 충주)으로 향하든지, 영남이나 호남으로 가자고 했다. 그러자 인조가 나서서 얘기했다.
“영상은 어찌 그리도 상황 판단을 못하는가? 지금 적이 이곳까지 와서 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마당에 어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안 될 일이다.”
적의 대군은 12월 16일 남한산성을 포위했으며, 일부는 판교까지 나가 삼남지역으로 통하는 길목까지 차단했다. 당시 남한산성 안에 있던 인원은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서울과 지방의 군병 1만 2천여 명, 문· 무· 음관과 종실 및 그 노복을 합친 수가 대략 7백여 명이었다. 군병 중에는 비교적 훈련이 잘된 어영군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광주· 수원· 여주 등 남한산성 인근 지역에서 징집된 오합지졸이었다. 이런 병력으로 열 배나 되는 12만 명의 청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병력보다도 양식이 더 큰 문제였다. 인조 15년(1637년) 1월 8일 관량사 나만갑은 ‘원래 6천여 석(石)이었는데 현재는 2천8백여 석이 남아 있다’고 보고했다. 그는 지구전을 벌여서는 절대 안 된다고 진언했다. 이 보고대로라면 인조 일행이 남한산성에 들어온 다음 날인 12월 15일 아침부터 1월 8일까지의 24일 동안 3천2백여 석의 양곡을 소비했다는 계산이다. 하루 평균 133석 이상을 소비한 것이다. 이런 계산이면 2천8백여 석의 양곡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 고작 21일이다. 그렇게 되면 1월 29일이나 1월 30일쯤이면 양식이 바닥나게 되어 있었다. 남한산성에 들어온 이튿날인 12월 15일부터 기산하여 대략 45일 정도가 되면 양식이 다 떨어진다. 나만갑이 지구전을 반대한 것은 이런 우려 때문이었다.
“왕세자를 내보내라! 왕세자를 내보내라!”
남한산성을 포위한 적군은 산성 안을 향해 소리쳤다. 그들은 산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이것은 외부로부터 남한산성을 완전히 차단하여 고사시키겠다는 속셈이었다. 이렇게 되자 성안에 사람들은 불안감이 고조되어 일부 신하들은 화친을 다시 추진하자고 한 반면, 일부 신료들은 적과 결전을 벌이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인조가 신하들을 불러 모아서 의견을 물었다.
“적이 왕세자를 인질로 내보내라고 하는데 경들의 생각은 어떤가?”
이에 영의정 김류가 답했다.
“전하, 적이 또 군대를 크게 증강시켰는데, 형세가 위급하니 어떤 계책을 쓸지 모르겠나이다.”
장유가 이어서 답했다.
“전하, 신은 의견을 내고 싶어도 차마 입을 열지 못하겠나이다.”
그 말을 하면서 장유는 눈물을 보였다. 인조는 이를 눈치채고 답했다.
“이제 안 되겠다. 더는 못 기다리겠노라. 세자를 인질로 내보내야겠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의 부마 신익성과 양사 및 강원(講院)의 신하들은, ‘비변사 신하들이 세자를 볼모로 적진에 들여보내려 하니 나라를 망치는 말이라며 그 죄를 다스리라!’고 요구했다. 이에 대해 인조는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한 계책’이라고 말했으나 이 또한 마땅한 해결책이라 할 수 없었다.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만감이 교차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희비가 교차하는 감정의 기복을 보였다. 어느 순간 적개심에 불타오르다가도, 또 어느 순간에는 화친에 목을 매기도 했다. 세자를 인질로 보내자고 의논했던 날로부터 하루 뒤인 12월 18일, 인조는 남문에 행차하여 백관을 교유하고 전승의 결의를 다졌다. 이 자리에서 전 참봉 심광수가 최명길의 목을 베어 화의를 끊고 백성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난처해진 최명길이 자리를 피했다. 인조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신하들 앞에서 말했다.
“화의는 이미 끊어졌으니 우리에게 싸움만이 있을 뿐이다. 싸워서 이기면 상하가 함께 살고 지면 함께 죽을 것이다. 오직 죽음 가운데에서 삶을 구하고 위험에 처함으로써 안녕을 구해야 할 것이다. 마음과 힘을 합하여 떨치고 일어나서 적을 상대한다면 깊이 들어온 오랑캐의 고군(孤軍)은 아무리 강해도 쉽게 약화될 것이고, 사방의 원군병이 계속하여 올 것이니 하늘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전승을 것둘 수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사생결단(死生決斷)의 각오였다. 그러나 이러한 인조의 판단은 틀렸다. 청나라 군대는 외로운 군대가 아니었다. 청 태종이 이끄는 청의 증원군은 계속 남하하고 있는 반면, 조선의 원병은 남한산성 가까이에 있지도 않았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입성한 직후인 12월 16일부터 몇 차례에 걸쳐 각도 관찰사와 도원수· 부원수에게 납서(蠟書: 밀랍으로 뭉쳐 전한 글)를 보내 남한산성으로 들어와 구원하라고 지시했다. 전쟁 초기의 판단 착오로 일을 그르친 도원수 김자점은 서북지역 병력을 이끌고 청군의 후미를 쫓아 남하하다가 12월 25일, 황해도 토산(兔山)에서 적의 기습을 받았다. 그는 간신히 도주했으나 약 5천 명의 병력은 대부분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선봉장 이완이 이끄는 어영청 포수들의 분전으로 나머지 병력을 수습, 경기도 양근(楊根: 양평)으로 이동하여 유도대장 심기원의 부대와 만났다. 심기원도 이미 북한산 전투에서 청군에 패한 뒤였다.
한편, 각도 관찰사와 병마절도사 등도 왕의 지시에 따라서 근왕병을 소집하여 남한산성으로 진입하려 했다. 그러나 산성의 원근 외곽에 주둔한 적의 방어망에 걸려 뜻대로 되지 않았다.
1637년 1월 5일, 청군 지휘관 양고리가 이끄는 적군 5천 명이 공격해오자 조선군은 집중 사격으로 이들을 물리쳤다. 이튿날 양고리는 대포까지 동원하여 조선군 진영을 공격하는 한편 광교산 뒤쪽을 급습하여 방어선을 뚫고자 했다. 뒤쪽 방어선이 무너지자 김준룡은 유격부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그로 인해 전투는 혼전 양상으로 변했다. 이 와중에 적장 양고리가 조선 화기수가 쏜 총탄에 맞아 죽고, 적군은 급격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김준룡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적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김준룡이 거둔 이날의 승리는 병자호란 개전 이래 조선군이 거둔 최대의 승리였다. 조선군이 사살한 양고리는 청 태종의 매부인데, 조선군이 사살한 청나라 장수 중 가장 고위급이었다. 그러나 김준룡이 거둔 한 번의 승리로는 전체적인 전황을 반전시킬 수 없었다. 김준룡 부대는 군량과 화약 부족으로 광교산을 지키지 못하고 수원 남쪽으로 철수했다.
청군의 침입이 시작된 당시 평안감사 홍명구는 평양 북쪽의 자모산성에, 평안병사 유림은 안주성에 주둔해 있었다. 청군이 이들 성을 공격하지 않고 바로 내려오는 바람에 이들은 후금군을 뒤쫓아 남하했다. 1월 26일 강원도 김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진영 설치 문제로 의견 대립을 보이다가 각각 나누어 진을 설치하고 적을 맞았다. 1월 28일 홍명구 군이 공격을 받아 참패하고 그는 전사했다. 이어 유림의 부대도 공격을 받았지만 잘 막아내면서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곧이어 탄환과 화살이 떨어져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유림은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화천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가고자 했으나 2월 3일에야 겨우 가평에 도착했다. 그때는 이미 전쟁이 끝난 뒤였다.
이렇게 충청도와 가원도 근왕병이 연이어 패하니 남한산성에 구원군이 올 가망성은 더욱 낮아졌다. 이런 가운데 병자년(1636년)이 저물고 정축년이 왔다. 이튿날인 인조 15년(1637년) 1월 2일, 인조는 대신과 비변사 당상들을 모아 놓고 오랑캐에게 보낼 문서의 내용을 의논했다. 여기서 최명길이 얘기했다.
“전하, 청 태종이 멀리서 우리나라에 왔기에 국왕께오서 사람을 보내어 문안한다고 하시옵소서.”
그러자 김상헌이 나섰다.
“전하, 최명길의 말은 청 태종이 왔다는 말을 듣고 먼저 겁을 내어 차마 말하지 못할 일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옵니다.”
라고 말하며 반대했다. 그러나 대부분 신하들의 의견은 완곡하게 하여 보내자는 쪽이었다. 같은 날 홍서봉· 김신국· 이경직 등을 오랑캐 진영에 파견하여 글을 전하고, 홍서봉 등은 청 태종이 인조에게 주는 글을 받아왔다. 그 글의 내용은 이번 전쟁의 원인은 조선에게 있다면서 그동안 조선이 저지른 잘못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조가 몽골 출신 패륵들을 만나주지 않은 점,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내렸다가 용골대 등에게 탈취당한 유문의 내용 등을 문제 삼으며 조선을 질타했다. 청 태종은 과거 고려가 요(遼)· 금(金)· 원(元) 등에 칭신 하고 고개를 숙였던 점을 상기시키며 몽골의 패륵들은 원의 후손이고, 조선은 고려의 후예인데 조선왕이 몽골 패륵들을 만나주지 않은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끝으로 ‘항거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고 순종하는 자는 반드시 받아들일 것’이라며 항복을 종용했다.
인조는 그 글을 받아 들고는 온몸을 떨면서 분노했다. 신하들도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상헌은 이 글을 군사들에게 보여서 적개심을 고취시키자고 했다. 그러나 최명길은 ‘청 태종이 일단 이렇게 나온 이상 대적하기가 더욱 어려운데, 대적할 경우 반드시 나라가 망할 뿐’이라며 신중하게 대응하자고 했다. 인조는 청 태종의 글에 대한 답서를 당장 어떻게 써야 할지가 걱정이었다. 답서의 서식, 시작하는 단어, 내용에 들어갈 글자 하나까지 논란이 거듭되었다. 그것은 남한산성에 갇힌 상황을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감도 한몫을 했다. 아니 그 보다는 수백 년 동안 오랑캐라고 멸시해온 ‘여진족 추장’을 황제라고 부르고 ‘소중화의 임금’이 스스로 신하라고 칭해야 하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1월 3일에 최명길· 이식· 장유가 회답하는 글을 지었다. 인조는 그 글 중에서 최명길의 글을 채택했다. 그 글은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에게 말씀을 올리옵니다. 소방(小邦)이 대국에 죄를 지어 스스로 병화를 초래하여, 몸은 외로운 성에 깃들고 위태함이 조석에 박두하였사옵니다. 이에 사신을 보내 글을 받들어서 마음속의 정성을 전달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칼과 창으로 막히고 끊겨 스스로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로 시작되는 글이었다.
이 글은 그동안 조선이 잘못한 것도 있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것도 많다면서 ‘만일 정묘년에 하늘에 맹세하던 약속을 생각하고 소방의 백성의 목숨을 불쌍히 여겨 혹시라도 소방으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해 준다면 섬기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 싸움으로 결판내고자 한다면 소방은 시세가 극도에 달하여 죽음으로써 스스로 기약할 따름이다’라고 은근한 공갈로 끝을 맺었다. 개과천선할 기회를 부탁하면서도 여의치 않으면 옥쇄(玉碎)도 불사하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러나 삼사의 언관들이 최명길 등 비변사 당상들을 비판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인조는 최명길 등을 감쌌다. 이는 병자호란 직전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처럼 조선이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고 나왔는데도 청나라 측은 이 국서에 화답을 주지 않았다. 그 사이 청군은 남한산성을 더욱 봉쇄하는 한편, 강화도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청나라의 답서를 기다리다 지친 조선 측은 1월 12일, 홍서봉· 최명길 등을 적진에 다시 보내 글을 전했다. 이 국서의 내용은 상당히 공손했다.
‘소방은 바다 한쪽 구석에 위치하여 오직 시서(詩書)만을 일삼고 병혁(兵革)은 일삼지 않았사옵니다.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 복종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야말로 당연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서로 견주겠나이까? 다만 명나라와는 대대로 두터운 은혜를 받아 명분이 본래 정해졌사옵니다’라고 하면서 예의 임진왜란과 명나라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거론했다. 명나라의 재조지은은 광해군 때부터 수시로 써먹었던 명분이고, 누르하치 때까지만 해도 이를 인정해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청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청 태종은 1월 17일에 보낸 답서에서 ‘명나라가 곧 천하’이고 ‘명나라 황제가 곧 천자’라는 조선의 인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조선은 스스로 오랑캐(東夷)의 후예인 것은 맞지만 여진이나 거란, 또는 몽골족 따위와는 달리 중국 문화를 수입한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하고 있었다. 청 태종은 답서를 통해서 ‘너희들은 어째서 도리어 막연히 서로 관계가 없는 자로서 오히려 하늘(天)이란 한 글자로 견강부회하느냐?’라고 반문했다. 즉 화족(華族) 입장에서 보면 너희와 우리는 똑같은 오랑캐인데 너희는 촌수 가까운 우리는 오랑캐라고 멸시하면서 관계도 없는 명나라를 천하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근거도 없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것을 억지고 끌어다 붙였다는 얘기다. 청 태종은 이어서 우리의 아픈 점을 계속 지적했다.
‘너희는 곤궁하게 산성을 지키면서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런 빈 말을 하느냐? 천지의 도(道)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사악한 사람에게 화를 내려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다’면서 ‘살려면 귀순을 하고, 싸우려면 나와서 한 번 싸우자’고 협박했다. 그는 조선이 천자로 떠받드는 명나라 황제가 이 환란을 구해줄 수 있겠냐는 조롱과 함께 산성에 갇힌 주제에 명나라만 찾는 헛소리를 한다고 조롱했다. 이는 태어난 처음부터 대명 천자만 인정해온 조선의 화이론자들에게는 참으로 치욕적인 지적이었다.
이에 대해 최명길은 ‘청나라 황제는 참으로 관대하고 도량이 넓다. 진실로 산성을 공격하여 도륙하고자 한다면 청군 또한 상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는가? 만일 받아들이기 어려운 청을 한다면 대국은 마침내 시체가 쌓인 빈 성을 얻을 뿐이다. 그러니 이 또한 이로울 것이 없다’라고 적을 추켜세우는 말과 섬뜩한 공갈도 병용해 보았다. 그러나 이후 청과의 화친 교섭은 조선의 항복 조건을 다투는 꼴고 변질되고 있었다. 정묘호란 당시 맺은 형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 조선의 희망사항이었다면 청나라의 요구는 완전한 복속이었기 때문이다.
인조 15년(1637년) 1월 18일, 최명길은 청 태종에게 보낼 국서를 비변사에서 손보고 있었다. 이때 예조판서 김상헌이 들어왔다. 그는 다짜고짜 최명길에게 다가와서 국서를 빼앗아 찢어버렸다. 그러면서 그는 소리쳤다.
“나를 죽이시오. 나는 이처럼 치욕적인 국서를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소.”
그러자 최명길은 김상헌으로부터 찢어진 국서를 빼앗으며 대답했다.
“찢는 자도 있어야 하고, 붙이는 자도 있어야 하옵니다.”
이런 처절한 상황에서 나온 국서는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 황제에게 글을 올리옵니다. (이 밑에 ‘폐하’라는 두 글자가 있었는데 신하들이 간쟁하여 지웠다) 소방(小邦)은 10년 동안 형제의 나라로 있으면서 오히려 거꾸로 운세가 일어나는 초기에 죄를 얻었으니, 마음에 돌이켜 생각해 볼 때 후회해도 소용없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원하는 것은 단지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구습을 말끔히 씻고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藩國)과 대등하게 되는 것뿐이옵니다. 진실로 위태로운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스스로 새로워지도록 허락한다면 문서와 예절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의식이 저절로 있사옵니다. 이에 강구하여 시행하는 것이 오늘에 있다고 하겠사옵니다. 성에서 나오라고 하는 명이 실로 인자하게 감싸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생각해 보건대 겹겹의 포위가 풀리지 않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있는 때이니 이곳에 있으나 성을 나가거나 간에 죽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옵니다. 그래서 용정(龍旌)을 우러러보며 죽음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결정하자니 그 심정 또한 서글프옵니다. 옛날 사람이 성 위에서 천자에게 절했던 것은 대체로 예절도 폐할 수 없지만 군사의 위엄 또한 두려웠기 때문이옵니다.’
이 국서의 요지는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여러 번국과 대등하게 되는 것, 포위가 풀리지 않고 황제께서 한창 노여워하고 있는 때이니 성을 나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청나라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존해주고 인조가 출성(出城)하는 대신 황제가 떠날 때 멀리서 손만 흔들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청 측은 인조가 출성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이 국서 접수를 거부했다. 인조는 돌아온 사신 편에 먼젓번에 지웠던 ‘폐하’라는 두 글자를 넣어 다시 보냈으나 적은 인조의 출성과 함께 척화신 두세 명을 묶어서 먼저 보내라고 했다.
1월 19일에는 성 안으로 거위 알만한 포탄이 날아들어서 죽은 사람이 나왔다. 이는 인조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였다. 이에 성안은 공포감에 휩싸였다. 1월 21일 인조는 다시 청군 진영에 국서를 보냈다. 칭신은 물론이요, 청 태종을 폐하로 숭정이라는 명의 연호 대신 숭덕이란 청의 연호도 사용했다. 다만 하나, 인조의 출성만은 막고자 했다. 인조가 이처럼 출성을 겁낸 이유는 첫째 청 태종이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둘째 지존(至尊)으로서의 위신을 지키지 못하면 이후 왕 노릇 하기가 어렵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남한산성에서는 이처럼 조선과 청 사이에 인조 출성 문제를 놓고 줄다리기를 한참 하고 있었다. 바로 이즈음인 인조 15년(1637년) 1월 22일, 강화도가 적의 손에 넘어갔다. 당시 강화도에는 왕세자 빈 강 씨와 봉림대군· 인평대군 등 왕실 가족, 조정 신료들의 가족, 역대 왕들의 신주 등이 머물고 있었다.
인조는 1636년 12월 14일 파천을 결정하면서 김경징을 강도 검찰사로, 이민구를 부 검찰사로 임명하여 선왕들의 신주와 왕실· 신료들의 가족을 모시고 강화도로 먼저 가도록 조치했다. 그러면서 강화유수 장신은 주사대장(舟師大將)을 겸하게 했다. 김경징은 영의정 김류의 아들인데, 섬에 들어갈 때부터 제 가족만 챙기는 등 꼴불견의 짓거리를 하며 비난을 받았다. 그는 섬에 들어가서도 날마다 잔치를 열고 술판만 벌였다. 그는 아마도 청군이 수전(水戰)에 능하지 않기 때문에 천험의 강화도는 안전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 전쟁에는 명나라에서 투항해온 수군 출신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종군하고 있었다. 청군이 마음만 먹는다면 강화도쯤 함락시키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1월 22일 새벽 선박 1백여 척에 분승한 5천여 명의 청군은 홍이포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갑곶나루를 건너 마침내 강화도에 상륙했다. 월곶을 지키던 충청수사 강진흔이 휘하 병선 7척과 수군 2백 명을 거느리고 갑곶으로 가 적선 3척을 침몰시키는 등 분전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는 장신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장신은 도주했다. 이후 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한나절 만에 강화도는 적에게 완전히 제압되었다.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자결과 살육으로 목숨을 잃거나 포로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강화도를 제대로 수비하지 못한 책임으로 김경징은 사사(賜死), 장신은 자진토록 하고, 강진흔과 충청우후 변이척 등은 참형에 처해졌다.
1월 25일에는 용골대와 마부대가 사신을 청했다. 이에 이덕형· 최명길· 이서구 등이 갔더니 ‘청 태종이 내일 돌아갈 예정인데, 인조가 성에서 나오지 않으려거든 사신을 다시 보내지 말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국서를 모두 돌려줬다. 이에 최명길 등은 이야기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야말로 최후통첩이었다. 최명길 등이 돌아온 후 포격이 다시 시작되는 가운데 1월 26일에는 더욱 절망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훈련도감과 어영청 장졸들이 행궁으로 몰려와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척화신들을 붙잡아 청군 진영으로 보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해산 명령에도 불응하며 자칫 난을 일으킬 기미까지 보였다. 다급해진 인조는 세자를 적진에 보내겠다며 사신을 보내 적진에게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1월 26일 저녁때 홍서봉· 최명길· 김신국이 청군 진영에 가서 세자가 나온다는 뜻을 전달했다. 그러자 용골대는 ‘지금은 국왕이 직접 나오지 않는 한 결코 들어줄 수 없다’고 하고 해창군 윤방과 좌부승지 한흥일의 장계 및 봉림대군이 손수 쓴 편지를 전해주었다. 이때서야 최명길 등은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된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강화도가 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성안은 눈물과 공포로 얼룩졌다. 이와 더불어 분위기도 바뀌었다. 강화도가 무너지자 남한산성도 무너져, 인조의 결단만 바라보게 되었다. 이날 밤 인조는 출성을 결심했다. 그는 이튿날인 1월 27일에는 황제의 약속을 확인받으려는 국서를 보냈다. 그 글의 요지는 ‘황제의 성지를 받고나서부터 귀순하려는 마음이 있었지만 스스로 살펴보니 죄가 너무 많아 머뭇거리느라 그러지 못했는데, 이제 폐하께서 돌아가신다니 나가 뵙는다’는 것이었다. 또 만약 혹시라도 일이 어긋난다면 차라리 칼로 자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니 원하건데 성자(聖慈)께서는 진심에서 나오는 정성을 살피시어 조지(詔旨)를 분명하게 내려 신(인조)이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했다.
1월 28일 청 태종이 보내온 국서에는 항복에 따른 여러 가지 가혹한 조건들이 들어 있었다. 인조는 항복하는 마당에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그는 일단 살고 보는 게 중요했다. 그가 항복하지 않으면 살아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조건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앞으로 명나라가 준 고명(誥命)과 책인을 헌납하고, 그들과 수호를 끊고, 그들 연호를 버리며, 일체의 공문서에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도록 할 것.
둘째, 그대의 장자 및 차남을 인지로 삼고, 여러 대신은 아들이 있으면 아들을, 아들이 없으면 동생을 인질로 삼을 것.
셋째, 만약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칙을 내리고 사신을 보내 그대 나라의 보병· 기병· 수군을 조발하거든 수만 명을 기한 내에 모이도록 하여 착오가 없도록 할 것
그밖에도 황금, 표피, 차, 수달피, 청서 피, 후추, 호 요도, 소목, 호 대지, 순도, 호 소지, 오조룡석, 각종 화석, 백 저포, 각색 면주, 각색 세마포, 각색 세포, 포, 살 등 재물을 바치도록 했다.
인조는 1월 29일에는 화친을 배척한 윤집과 오달제를 잡아서 적진에 보냈다. 이들을 인조를 만나서 눈물로 하직했다. 드디어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내려와서 청군 진영으로 향했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인조의 출성을 재촉했다. 인조가 남염의(籃染衣: 평민복)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은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으로 뒤처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했다. 인조는 단지 삼공 및 판서· 승지 각 5인, 한림· 주서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 익위사의 관리들을 거느리고 삼전도에 따라 나갔다. 멀리 바라보니 청 태종이 황옥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옹립하였으며, 임금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임금을 전문 동쪽에 머물게 했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청 태종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라고 하자 인조가 대답하기를 ‘천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했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인조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했다. 인조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했다. 용골대 등이 인조를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했다. 대군 이하가 강화도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청 태종의 말로 인조에게 단에 오르도록 했다. 청 태종은 남쪽을 향해 앉고 인조는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인조는 이렇게 하여 삼전도의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말았다.
인조는 굴욕적인 항복을 했으나 자신의 목숨을 건지고 조선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만약 그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지 않았다면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으로 멸망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척화 쪽이었다. 그리하여 주화론을 주장한 최명길을 역적으로 처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그럼에도 최명길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목숨을 걸고 주화론을 주장했다. 그 주장의 이면에는 장만 장군의 유언이 있었다. 최명길은 장만이 없는 병자호란에서 장만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무릎을 꿇었던 것도 최명길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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