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리산에서 기세 좋게 치고 올라온 한남정맥이다. 그 용맥은 관악산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동북쪽으로 내닫고 있다.
한남정맥은 거침없이 달린다. 청계산과 구룡산 그리고 대모산을 타고 넘으며 한강으로 머리를 막는다. 남부 서울을 단단하게
둘러싸고 풍수지리상으로도 배산(背山)의 기능을 단단하게 하고 있다.
구룡산과 대모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왕성한 기를 발산하면서 흐르는 양재천과 함께 그 내부의 땅을 명당으로 보호하고 있다.
구룡산의 정상은 306m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개포동, 서초구 염곡동, 내곡동 양재동 일대에 위치한 산이다.
구룡산의 주봉(主峰)은 국수봉(國守峰)이다. 그 전망대는 서울 강남, 강북과 경기도 한강하류와 상류지역까지를
관망할 수 있는 최적지로 주∙야경 조망 명소이다. 또한 구룡산은 약 300여미터의 산으로 높지 않고 길이 험하지 않아
가벼운 아침운동이나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산행으로 제격이며, 접근성도 용이하여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강남의 명소이다.
구룡산은 아홉 개의 계곡이 있는 산이다.
옛날 길을 지나던 임산부가 열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열 마리 중 아홉 마리는 승천하였으나 한 마리가 떨어져 죽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하늘에 오르지 못한 한 마리는 좋은 재목, 좋은 재산인 ‘물’이 되어 인간들에게 좋은 역할을 한다고 하여
‘양재천’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구룡산을 배산으로 형성하고 있는 강남의 노른자위 땅 개포지구이다.
옛날 주공 5층아파트단지에 최근 재개발의 붐을 타고 초고층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다.
강남 부촌의 상징 타워팰리스 등 대치동 도곡동 대형아파트단지가 강남3구의 중심으로 위용을 뽐내고 있다.
대모산은 주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산이다.
산이 유순하면서도 강남 남쪽을 지켜주는 어머니와 같은 든든한 산이다.
이곳 산세는 한남정맥 백운산(566m)에서 갈라져 나온 맥이 바라산(428m)과 국사봉(540m)을
거쳐 청계산(616m)을 세운다.청계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맥 하나가 경부고속도로 달이내 고개를 건너
구룡산(국수봉 327m)을 만들고 다시 북쪽으로 이어져 주산인 대모산을 만들었다.
대(大)자는 독립적 의지력과 강력한 에너지의 발현을 의미한다.
대모산은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수서동, 일원동 사이에 솟은 도심근린공원과 같은 산이다.
높이도 비교적 낮고, 도심에 근접해 있어 명산으로 대접받지 못하나 옛적엔 여러 임금이 날 복지명당처로
풍수가들이 예언한 산이다.대모산 정상 가까이에는 백제시대의 옛 성곽터가 잘 남아있다.
철탑 북서쪽에는 전망 좋은 바위(병풍바위)와 전망대가 있다. 철탑 바로 옆에 활공장 같은 헬기장이 있고
더 동쪽에는 정상 표지석이 있다. 도심 조망은 정상보다 헬기장이나 병풍바위 전망대가 낫다.
이 산의 모양이 마치 늙은 할미와 같다고 하여, '할미산' 또는,'대고산( 大姑山 )'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 원경왕후와 조선 태종을 모신 헌릉이 내곡동에 자리하면서, 어명에 의해서 '대모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산 모양이 여승의 앉은 모습과 같다는 것과, 구룡산 봉우리와 함께, 여성의 앞가슴 모양과 같다고 하여 대모산 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삼가 살펴보니 이 산은 장백산(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남쪽으로 수천리를 넘어 상주의 속리산에 이르고,
여기서 꺾어 북서쪽으로 또 수백리를 달려 과천 청계산에 이르고,또 꺾여 북동으로 달려와 한강을 등지고 멈추었다.
이것이 바로 대모산이다.땅의 영기가 멈추어 솟아 맑은 기운이 꿈틀거리니 아,하늘이 만들고 땅이 간직하여(天作地藏) 능의
길조로 기다림인가"
윤회(尹淮)가 지은 신도비(神道碑)음기(陰記)에는 이 헌릉의 터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세종 2년(1420)세상을 뜬 태종의 비 원경왕후는 그 2년 뒤 그녀의 뒤를 따른 태종과 함께 헌릉에 모셔졌다.
대모산 일대는 조선 초기부터 명당으로 이름을 얻고 있던 곳이다.
태종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의 사이는 가위 원수지간 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아버지가 아끼고 세자로 책봉까지 했던 자신의 이복동생 방석을 죽이지 않았는가.
태조가 돌아가시자 '고향 함흥에 묻어달라'는 유언과는 달리 구리 땅에 건원릉을 조성해
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모시고 그 곳을 조선 왕실의 선산으로 삼았다.
태종은 막상 죽어서 건원릉 그 선산으로 가지 않는다.
생전에 그렇게 두렵고 무서웠던 아버지를 피하고 싶었는 지 모른다.
풍수는 땅 기운이 물을 건너지 못한다(氣界水則止).
우리나라의 기(氣)는 수영을 못한다. 물을 만나면 꼼작 못한다.
한강은 풍수지리로 볼 때 우리나라 최대의 바리케이트다.
태종은 그렇게 한강을 바리케이트로 삼아 강 건너 대모산 남쪽 기슭에 자신의 유택(幽宅)을
남기려 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조선 초기의 소박한 자생풍수 논리로 보자면 그 생김새가 명당에 방불하다.
북쪽과 동쪽,서쪽으로는 대모산.인릉산.구룡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남쪽으로는 조금 떨어져
목동산(신원동 쪽)이 안산의 구실을 한다.
전형적인 장풍국(藏風局)의 형세인 셈이다.
태종이 자신의 부인을 묻고 자신도 뒤따랐던 한 이유로 볼 수도 있다.
대모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 용맥이 함차게 뻗어가고 있다.
일원동과 개포동 사이를 헤치고 나가는 용맥이다. 지하철 양재역이 있는 양재천 북쪽의 양재동은
대모산이 청계산을 지나 관악산을 이룬 후 남태령을 지나 우면산을 이루고 그 끝자락에서 다시 도곡동 뒷산인
매봉을 이룬 분지 안에 자리하고있다.과천의 관악산과 청계산에서 동쪽으로 흘러온 양재천이 영동1교 앞에서
염곡동에서 북출(北出)한 염곡천과 만나 개포동 앞을 지나대치동 끝에서 탄천과 다시 만나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곳의 대지가 지닌 향은 남향판이다.염곡천이 조래수(朝來水 앞에서 다가오는 물)를 이뤄 부(富)를 안겨준다.
그 중심 대치동은 뒤로 한강이 휘감아 돌아가고 동쪽은 백리가 시원하게 트여있다.
앞산인 대모산은 큰 말의 형상을 지녔고, 그 아래 작은 산들은 교자(轎子;당상관 이상 관리가 타던 가마)로
주인의 출행을 기다리고 있다.이곳 또한 하늘이 만들어준 땅이다.
일원동과 개포동은 마을이 북향한 대지다.대모산이 탄천과 양재천을 양쪽에 끼고 북쪽으로 올라와 학여울에서
전체 판을 마감하고 있다.서쪽에서 나온 양재천과 동쪽에서 흘러온 탄천이 학여울에서 만나 북쪽으로 진출해 한강을 만난다.
개포 대치 도곡 양재동 일대는 관통하는 양재천이다.
우리나라 지형은 동쪽이 높다. 물줄기는 동에서 서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양재천은 참으로 기이하게도 그 반대이다. 서쪽에서 발원해서 동쪽으로 흐른다.
양재천은 관악산에서 발원해서 과천 막계천을 거쳐 강남구와 서초구를 가로지른 뒤 탄천과 합류하는 길이 15.6㎞의 하천이다.
이 하천은 원래 한강의 제1지류로 탄천과 합류하지 않고 곧바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국가하천이었다. 1970년대 개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구불구불하던 곡류 하천이 직선화되면서 인위적으로 탄천과 연결됐다. 강남을 대표하는 별개의 하천이던
탄천과 양재천은 물길이 바뀌면서 탄천이 본류, 양재천이 지류가 됐다.
이렇게 역수(逆水)의 모양으로 흐르는 양재천은 대단한 생기를 품어내면서 주변의 지세를 높여준다.
양재천의 이름은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해서 불리워진 것이다. 이 하천을 끼고 있는 양재동도
같은 연유에서 붙여진 것이다.
이곳은 조선시대 교통의 중심지로 양재역(良才驛)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말에게 물을 먹이고 휴식을 취한 후
먼 길을 떠난다고 하여 말죽거리라는 지명이 붙었다. 오늘날도 그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다.
양재천 하류의 개포동 일대는 개발되기 이전까지만해도 갯벌지대였다.
조선시대는 이곳을 한여울이라고 불렀다. 한자로는 반곡동(盤谷洞)이라고 하였다.
한강이 이곳에 이르러 여울이 세게 되었으므로 한여울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 마을이 갯바닥에 있었기에 그 뜻을 따서 소반같이 생긴 포구가 있다고 해서
한자로 반곡이라고 불렀다고 전한다.
양재천 북쪽에 매봉이 있다.
신석기시대 삶의 터전과 고인돌이 출토되었던 매봉이다.
1947년 역사학자 이병도 교수가 발굴한 매봉 고인돌은 4개로 남방식 지석묘이다.
개포동은 풍수지리학적으로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풍수지리학에서는 차가운 북서풍을 막아줄 수 있는 산(山)이 집의 북쪽(뒤)에 있고
물은 남쪽(앞)에 위치한 배산임수(背山臨水) 지세를 명당자리로 꼽는다.
개포동은 정반대로 배수임산(背水臨山)지형이다. 북쪽(뒤)에는 양재천이 흐르고
남쪽(앞)에는 대모산과 구룡산 등 두 개의 산이 버티고 서 있다.
박정해 정통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개포동은 의자 등받이를 앞으로 해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양새”라며 “산이 남쪽에 있어 매우
불편한 형태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땅 기운(地氣)도 약한 편이다. 과거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 개포동 일대는 장화를 신고
다녀야 할 정도로 질퍽거리던 진흙땅이었다. 풍수지리학에서 진흙은 일반 흙과 달리 땅의 기운이 머물기 어렵다는 설명이다.
전항수 풍수지리원 연구원장은 “대모산·구룡산과 가까운 쪽은 땅이 딱딱해 땅 기운이 잘 머무르고 좋지만, 산과 좀 거리가 있는
개포동 일대는 진흙땅이라 땅 기운이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고 흩어지는 모양새”라고 분석했다.
도곡동은 풍수 지리학에서는 썩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도곡동의 위치는 용의 ‘허리’에 올라탄 모양새로 기운이 흘러가는 통로에 있어
땅 기운이 너무 강하고 제대로 그 기운을 이용하기 어려운 모양새라는 평가다.
박정해 정통풍수지리학회 이사장은 “도곡동은 우면산에서 시작된 기운이 대치동으로 흘러가는 능선 허리에 있다”며
“풍수지리에서 과룡처(過龍處·용이 지나는 자리)라고 부르는 곳에 있어 전기로 치면 고압선 중간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땅 기운을 감당하기가 어려울 정도”라고 말했다.
전항수 풍수지리원 연구원장은 “도곡동은 우면산에서 시작된 땅의 기운이 매봉산을 거쳐 이어지는 모양새”라며
“양재천에서 가까운 건물들이 배산임수가 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물길이 감싸고 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양재천과
떨어진 곳이 더 좋은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최고가 아파트의 대명사로 통용되는 타워팰리스도 풍수에서는 좋은 점수를 못 받았다. 박 이사장은 “타워팰리스가 있던 자리는 과거에 논으로 일종의 골짜기였다”며 “땅 기운이 모이기 어려운 자리고, 인근 양재천이
아파트를 둥글게 감싸고 돌지 않아 썩 좋은 위치는 아니다”고 말했다.
풍수에서는 물과 도로를 재물로 본다.
물이 모이는 곳에 사람과 재물이 모이므로 수관재물(水管財物)이라고 하였다.
우선적으로 한강을 끼고 있어 전국 어디든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두 번째는 탄천과 양재천이다.
탄천은 용인 구성과·수지 등에서 발원하여 삼성동과 청담동에서 한강과 합쳐진다. 두 물이 모이는 삼성동과 청담동이
발전하는 이유다.
양재천은 과천의 청계산과 관악산에서 발원하여 대치동에서 탄천과 합수한다.
대치동 일대가 발전하는 이유다. 외부 물과 접하지 않는 지역은 내부 물이 모여든다.
내부 물이 모이기 위해서는 사방으로 산들이 감싸며 보국을 형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 안에는 평탄한 지형이 존재해야 한다. 그 대표적인 곳이 강남역과 교대역이 위치한 서초동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