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年을 두고 기다리는 비
목이 탑니다’라고 말한다. 땡볕이 창끝처럼 黃土길을 찌르는 이 한여름에 ‘어머니, 불길같이 타오르는 갈증을 더 참을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나뭇그늘이 없다. 바람이 없다. 엿이 녹듯이 온몸이 늘어져서 이제는 한 치도 더 걸을 수가 없는 벌판 ─ 참새도 울지 않는다. ‘답답합니다. 어머니 속이 탑니다. 비는 왜 오지 않는가요. 땅은 저렇게 갈라져서 魔鬼의 입김 같은 地熱을 내뿜고, 우물을 들여다봐도 유리조각 같은 모래알이 다만 눈을 아리게 하는데 어찌하여 어머니, 비는 내리지 않는가요. 우리가 무슨 罪를 지었습니까. 남의 집 담너머를 넘겨다본 적이라도 있었습니까. 지아비가 있는 女人들의 몸을 탐내 본 적이라도 있었단 말입니까. 한 숟갈의 밥을 더 뜨기 위해서 어린애의 밥그릇을 훔치고, 하루를 더 살기 위해서 老人들의 수염을 건드린 적이 있던가요. 무슨 罪를 지었기에 어머니, 우리에게 몸을 숨길 한 뼘의 그늘도 주지 않는가요’ 이렇게 말할 때 어머니는 대답하신다.
‘얘야. 너에게 무슨 죄가 있겠니. 사령거*를 타고 거드름을 피울 힘도 없는 네가 무슨 罪를 지었겠니. 엽전 한 닢도 없는 네가 남을 무슨 수로 괴롭혔겠니. 힘없는 네가 누구의 얼굴에 침인들 뱉을 수 있었겠느냐. 억울해도 분해도 서러워도 어린애처럼 어머니밖에는 부를 줄 모르는 네가, 神에겐들 不敬한 마음을 품었겠느냐. 그러나 얘야, 걱정하지 말아라 목이 타더라도 가슴이 미어져도, 땀방울을 식힐 한 자루의 부채가 없을지라도 얘야, 슬퍼하지 말아라‘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언젠가는 물끼를 머금은 바람이 불어 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天使의 나팔소리처럼 천둥 벽력이 온누리를 뒤흔들고 대줄기 같은 시원한 빗줄기가 쏟아질 것’이라고 말씀 하신다. ‘잠든 새들이 놀래어 다시 깨고 날개깃을 퍼덕거리는 大地의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늘은 결코 그렇게 오랫동안 人間을 잊지는 않을 거다’라고 말씀 하신다.
‘어머니 목이 마릅니다. 그것이 언제입니까?’ 라고 묻는다. 그러나 말씀하신다. ‘얘야 그 날이 언제이냐고는 묻지 말아라. 千年을 두고 기다려온 비인데 그것이 언제냐고 묻지 말아라.’
*사령거(四欞車 ?): (欞 격자창/ 난간 령), 고귀한 신분의 사람이 타던 가마
지은이: 이어령
출 처 : 『문학사상』. 1973.7
난蘭에게서 배우다
난향蘭香에는 맑고 그윽한 기품이 있다. 요염한 장미향처럼 톡 쏘지도 않으며 사뭇 고요하고 너그럽다. 킁킁대며 꽃 대궁에 코를 갖다 대지 않아도 비단결처럼 다가와 소리 없이 들린다. 우리 선조들은 문향聞香한다고 했던가. 난의 고고한 자태와 향기에 취해 그것을 닮고자 했을까.
요즘 아침마다 일어나면 발코니를 향한다. 나를 부르는 은은한 향을 따라 자석에 이끌리듯 난분 앞에 앉는다. 청초하고 날렵하게 뻗은 잎사귀 사이로 수수한 몇 송이 꽃들이 다소곳한 조선의 여인을 닮았다. 그 색깔마저 잎들과 비슷한 선한 연두색에 가느다란 세로 줄이 보일 듯 말 듯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몇 줄기 물만 먹고도 우북우북 자라는 잎이며 가볍게 비상하는 학의 날개 같은 꽃들 앞에 숙연하다. 고매한 인품을 가진 선비를 유곡란幽谷蘭이라 하고, 고아한 선비 같다 해서 군자라 칭송했던 조상들이 지혜롭다. 고고하고도 겸손해 보이는 난을 바라보며 그것이 전하는 뜻을 헤아려 본다.
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였던 법정 스님도 본인의 생전 간행물들이 부끄럽다며 절판하고자 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던 그분도 생전 본인이 했던 구업口業을 염려했음이리라. 하물며 미욱하기 짝이 없는 나의 언행은 어땠을까.
제주에 며칠 다녀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난분 앞에서 노닥거리다 보니 구석 쪽에 있는 피라칸사가 말라가고 있었다. 하얀 꽃이 지고 초록 잎이 무성했던 그것이 희뿌연 색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란 나는 남편을 향해 레이저 눈빛을 날렸다. 그리고 급히 날선 말들이 직진하려던 찰나, 나는 잠시 멈췄다. 툭 튀어나오는 날선 언어들을 입안에서 뒹굴려 몽실하고 야들하게 했다.
"아휴, 얘가 날 기다리다 지쳤나. 하얗게 말라버렸네."
꽃 토하는 새처럼 곱게 말했다. 몇 년째 조롱조롱 하얀 꽃과 빨간 열매를 즐겼던 나는 그 망가진 모습에 놀라 무조건 남편에게 화를 돌리려 했던 것이다. 유난히 물을 좋아하는 녀석인데 왜 신경 쓰지 않았냐고 따지려던 참이었다, 애꿎은 사람에게 직구를 날리려던 순간에 나를 180도 회전, 순한 양으로 돌변시킨 것이다. 무딘 내가 발휘한 순발력에 스스로 놀라웠다. 사나운 고양이가 되어 발톱을 휘두른들 그것이 살아날 리도 없지 않은가. 그리 대수롭지도 않은 일로 애먼 사람에게 화살을 날릴 뻔 한 것이다. ‘3초의 기적’이었다, 그 아침의 평화가.
보수적인 나는 아이들 가정교육이라며 "너희는 설령 내가 틀린 말을 해도 그대로 따라야한다."고 호령 했었다. 나중에 시시비비를 가릴지언정 부모의 말은 일단 순종하는 것이 도리라고 송곳처럼 말했던 것이다. 내 안에 폭군이라도 앉아있었나 얼굴이 달아오른다. 요즘 세상에 그랬다가는 언어폭력에 해당되지 않을까.
부모 자격증이라도 받고 엄마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본다. 좌충우돌 시행착오가 적었을까. 언젠가 작은 아이를 훈육할 때였다.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조근 조근 따지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차라리 큰 소리로 말씀하세요. 그렇게 낮게 하면 더 무서워요."
결국 웃음이 나와 백기를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날카로운 정釘보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다는 이치理致다. 지난날 나의 언어에 모가 나고 조급했음이 부끄럽다. 난은 말이 없어도 그 향기만으로 나를 부르지 않는가. 달려가다가도 뒤를 돌아보라는 인디언 속담이 있다. 영혼이 잘 따라 오는지 확인하라는 뜻이란다. 때로는 쉼표를 찍고 내 안의 나를 들여다 볼 일이다. 여백이 있는 그림이 완성도가 높아 보이듯 좀 더 살진 일상이 되려니 싶다.
우스갯소리지만 나는 일찍이 양처가 되었다며 곧잘 신소리를 한다. 성이 양씨인 사람과 방을 함께 쓰니 누가 뭐래도 기정사실이라고. 지금부터라도 현모는 될 수 없을까. 인생이 드라마라면 NG를 선언하고 다시 촬영하고 싶다. 후반부에 반전하는 드라마도 있지 않은가. 난의 기품은 없어도 수수하고 속 깊은 엄마면 좋겠다. 명령형이 아닌 권유형이나 청유형의 향기가 묻어나는 온화한 말씨를 연습해야겠다. 세월의 무게만큼 마음의 그릇도 넓고 깊게, 늘어난 주름만큼 푸근한 모성애도 발휘해야지. 어떤 아들이 그랬단다. 엄마 글 속의 엄마처럼 살라고. 그래, 날마다 괜찮은 엄마 연습도 좋을 것 같다.
내 삶의 마디마디가 다 그러하기를….
고요하고 아름다운 난蘭에게서 배운다.
출처 : 『에세이포레』.2021.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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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아침>
너는 날개 없이 내게로 뛰어든다
너의 비상의 방식으로
나는 너를 받는다 온몸으로
날아왔다고 할 수밖에 없는
가고 싶은 거리
뛰어들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알몸의 무게
오늘의
태양
하루라는 짐승
-김선우시집 <<녹턴>>에서 -
<여름의 시>
여름이 아니라면 모르리라
신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게절을 돌려준다고
다소곳이 펼쳐진 여름날 오솔길
늙은 팽나무가
활짝 잎새를 펼친 것도
이 찜통 속 여름의 일이다
청평사
연못의 잉어들이 한창 때를 즐기는 것도
저 무성함 속에 여름이 익어가고 있다.
그리도 머지않아 신의 성궤를 찾는 일
경건함을 되찾는 일
-이승호 시집 <<행복에 바친 숱한 거짓말>>에서-
장마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오늘 새벽 춘천지역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렸었지요. 천둥치면서, 강풍이 불면서 빗발이 거셌습니다.
지금 잠시 비 그친 사이에, 매미 소리가 드높습니다.
바야흐르 여름의 절정에 와 있는 듯 합니다.
유정독서 모임, 2024 전학기, 내일 종강하게 됩니다.
2024연 7월 25.14:00 , 실레마을 김유정 역 앞에 있는 김유정 문학열차에서
김유정이 번역한 <잃어진 보석> 16~20 장까지 함께 읽게 됩니다.
내일 김유정문학열차에서 뵙겠습니다.
2024.7.24 강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