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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람할 만한 단양(丹陽)의 산수에 대한 속기(續記)
가정 무신년(1548, 명종3) 봄 내가 처음 단양에 수령(守令)으로 나갔었는데, 마침 그해 흉년을 만나 공사 간에 곤급(困急)하고, 질병의 우환이 더하여, 흉년을 다스리는 정사 외에는 항상 마음이 우울하여 문을 닫고 날을 지낼 뿐이며, 산수(山水)에 노는 것이 여의치 못하였다. 간혹 기민(飢民)을 구제하려고 때로 시냇가나 산곡 사이를 왕래하다가 한두 군데 좋은 곳을 얻어 보았다. 급기야 편력한 곳이 더욱 많아지고, 보는 바가 더욱 기이하게 되어서는 스스로 ‘단양의 산수에는 거의 남은 유감이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최후에 이른바 구담(龜潭)이란 곳을 보고는, 비로소 앞에 본 것은 기이함이 되지 못하고 여지승람(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것과 전 사람의 기술(紀述)에 실려 있는 것이 오히려 갖추어지지 못함을 알았다. 우선 내가 다녀본 차례대로 말하려 한다.
고을의 서쪽에 단구협(丹丘峽)이 있다. 협이 끝나는 곳에서 남으로 들어가서 설마동(雪馬洞)에 당도하니, 동문(洞門)이 깊숙하고 길다. 동서의 돌벼랑에 붉고 푸른 것이 서로 마주 비치고, 맑은 샘이 솟아나고 흰 돌이 쭈뼛쭈뼛하다. 시내를 따라 몇 리가량 가는데, 그 계곡이 끝날 때까지 옥이 구르는 듯한 물소리가 사랑스럽다.
벼랑이 다해서는 넓은 골짝이 보이는데, 깊숙하고 그윽하여 살 만도 하고, 밭을 갈 만도 하니, 유유자적하며 은거해 살 만한 곳인데, 이제 백성이 수십 호만 그 가운데 살고 있으니, 애석하다. 동으로 장림역(長林驛)에 나와서 오른쪽으로 구부러져 시내를 따라 10리쯤 들어가면 사인암(舍人巖)이란 것이 있으며, 천석(泉石)이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옛 군수 임제광(林霽光)의 기문(紀文)에 나타나 있다.
또 거기에서 남으로 8, 9리를 가는데 시내와 골짜기가 아름다워 구경할 만하다. 북으로 매포(買浦)로 건너가는 나루가 있으니, 상진(上津)이라 한다. 그 아래에 석벽이 하늘에 닿고 그림자가 푸른 못에 거꾸로 비친 곳은 탁영공(濯纓公 김일손(金馹孫))이 말한 서골암(棲鶻巖)이라는 곳이다. 나루를 건너 북으로 가다가 동으로 빙 둘러 들어가면, 큰 바위의 세 봉우리가 물 가운데 높이 솟은 것이 있는데, 이것이 이른바 도담(島潭)이요, 또 서쪽 벼랑의 승경과 돌문[石門]의 기이함이 있는데, 이것이 홀로 세상에 이름 난 것으로 승람(勝覽)에 기재되어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나의 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남천(南川) 위에 부처바위[佛巖]란 것이 있으니, 가장 기이하나 역시 임후의 기문(紀文)에 나타나 있다.
내가 일찍이 찾아가 보았는데 빈 골짝으로 들어가 맑은 물을 건너서 높은 산에 올라 끊어진 산기슭에 다다라 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아득하게 속세를 버릴 생각이 나게 하였다. 산을 내려와 구름과 나무 아래의 맑은 내와 흰 돌 사이 걷기를 또 6, 7리 만에 부처바위에 이르렀다. 바위가 양산(兩山) 곁 붉은 벼랑 아래 있는데, 시내 위에 백여 보의 바위가 깔려 있는데 흰 눈이 덮이고 흰 담요가 첩첩으로 쌓인 것 같다. 그렇게 모두 세 층계인데, 물이 그 사이로 흘러 굽이돌며 요란하게 소리를 내면서 폭포가 아래층 아래로 떨어져, 합하며 하나의 깊고 넓은 웅덩이가 되니, 푸르고 맑기가 거울과 같다. 피라미 10여 마리가 뛰어 놀고 그 위에는 석대(石臺)가 천연적으로 이루어져 평탄하고 윤택하여 앉아서 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할 만하다. 그 동쪽에 여러 바위가 서로 기대서 있는 것이 보기 좋게 담아 놓은 음식과 같고, 그 아래는 텅 비어 집 모양이 되었으니 비를 피할 만하다.
바위의 사면(四面)에는 봄이면 철쭉꽃[躑躅]이 타는 노을 같고 가을이면 단풍(丹楓)이 찬란한 비단 같으니, 바위는 진실로 기이한 경치 중에서 더욱 기이하다. 임후가 불(佛) 자를 고쳐 선(仙) 자로 대신한 것은 매우 좋으나, 다만 그 돌형태를 형용한 것이 너무 실상에서 벗어났으니, 아마 임후는 일찍이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남이 자랑하는 말만 듣고, 드디어 붓을 들어 쓴 까닭인가 한다. 아아, 내가 얻은 바가 이에 이르러 드디어 스스로 족한 마음이 생기는 까닭은 내가 본 것이 넓지 못함에 있으리라.
여름 5월에 내가 첩보(牒報)하는 일로 청풍(淸風)에 가려고 하진(下津)에서 배를 타서 단구협(丹丘峽)을 나가 구담(龜潭)을 경유하여 화탄(花灘)에서 내렸다. 이날은 비가 내렸다 개었다 하여 구름과 안개를 토하고 삼킴에 언덕과 골짜기가 나타났다 없어졌다 하여 잠깐 사이에 만 번이나 변하고 넘치는 물은 급하게 흐르니, 배가 너무 빨리 가므로 비록 그 거룩한 장관은 무궁하나 제대로 구경할 길이 없었다.
그날 밤 나는 청풍군 응청각(凝淸閣)에 유숙하고 이튿날 새벽의 서늘함을 틈타서 사람을 시켜 배를 끌어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삼지탄(三智灘)을 지나 내매담(迺邁潭) 위에 이르러 지붕을 걷고 바라보니, 물이 두 골짜기 사이에서 나와 높은 데서 바로 쏟아지니, 굴러 내리는 돌이 그 아래 있는 뭇 돌을 치며 성난 기세가 분주히 달아나 구름이나 눈 같은 물결이 출렁거리고 용솟음치는 것은 화탄(花灘)이요, 산봉우리는 그림 같고 골짜기는 서로 마주 벌어져 있는데, 물은 그 가운데에 괴어서 넓고 맑고 엉키고 푸르러 거울을 새로 갈아서 공중에 걸어 놓은 것 같은 것은 구담(龜潭)이다.
화탄을 거슬러 남쪽 언덕 절벽 아래로 따라 오르면, 그 위에 여러 봉우리를 깎아 세운 것이 죽순(竹筍) 같아서 높이가 천백 장(丈)이나 되며 우뚝하게 기둥처럼 버티고 서 있는데, 그 빛은 푸르기도 하고 창백(蒼白)하기도 하다. 푸른 등나무와 고목(古木)이 우거져 아득하고 침침한데 멀리서 볼 수는 있어도 오르지는 못하겠다. 내가 옥순봉(玉筍峯)이라 이름 지은 것은 그 형상 때문이다. 구담의 북쪽 가는 곧 적성산(赤城山)의 한 줄기가 남으로 달리다가 우뚝 끊어져 있다. 그 봉우리 중에 큰 것이 세 개 있는데 다 물에 다다라서 높이 빼어났지만, 가운데 봉우리가 가장 높은데 층층으로 된 바위가 다투어 빼어나고 우뚝우뚝한 돌이 서로 끌어당겨 귀신이 새긴 것 같으며 기기(奇奇)하고 괴괴(恠恠)함은 이루 다 형언할 수 없다.
이때에 처음으로 산에 비가 개어서 골짜기의 기운은 새롭고 운물(雲物)이 맑고 고왔다. 마침 현학(玄鶴)이 가운데 봉우리에서 날아와 몇 차례 빙빙 돌다가 구름 낀 하늘로 멀리 들어가는지라, 내가 배 안에서 술을 들고 시를 읊으니 초연히 서늘한 바람을 타고 허공에 노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때문에 그 봉우리 아래에 있는 것을 채운(彩雲)이라 하고, 그 가운데 봉우리를 현학(玄鶴)이라 한 것은 그 보이는 대로 지은 것이고, 그 상봉을 오로(五老)라 한 것은 그 형상을 따른 것이다. 배를 저어 조금 올라가다가 꺾여서 북으로 가니 이미 가운데 봉우리를 지나 오로봉 아래에 배가 닿았다. 그 봉우리의 동쪽에 또 큰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단구(丹丘) 골짜기와 서로 이어졌으니, 이것은 지지(地誌)에 이른바 가은암(加隱巖) 산이며 가은성(可隱城)이 그곳에 있다. 물이 장회탄(長會灘)으로 흘러 서쪽으로 구봉(龜峯) 언덕에 부딪쳐 돌아 구담의 머리가 되고, 또 북으로 돌아서 서쪽으로 꺾여서 구담의 허리가 되고, 구담의 꼬리는 채운봉의 발치에서 다하였다. 가은봉이란 곳은 물이 북으로 돌아 서로 꺾어지는 구비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오로봉과 서로 대하였고, 그 두 봉우리 사이에 골짜기가 있으니, 아연하게 남으로 향하였으며, 깊고 고요하여 사람의 자취가 끊어졌고 동문(洞門) 밖에 편편한 자갈밭[磯]이 있는데, 물에 다다른 것이 마루와 뜰 같아서 낚시하며 놀 수가 있다. 오직 이 한 구비에서 모든 경치가 모여 있는 것을 감상할 수 있으니 옛사람이 가은(可隱)이라 이름 지은 뜻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에 내가 미투리를 신고 대지팡이를 짚고 운문(雲門)을 두드리고 고적(古跡)을 찾아 옛사람이 은거하던 곳을 찾아 은자의 약속을 맺고자 하여도 병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두자미(杜子美)의, ‘어느 때나 한 띳집[茅屋]으로 흰 구름[白雲] 가에서 늘그막을 보낼꼬.’라고 한 글귀를 세 번이나 읽고 깊이 탄식하였다.
그 구봉은 동으로 못 복판을 막아주고, 북으로 못 구비를 내려다보는데 붉은 벼랑 푸른 절벽이 더욱 그 가운데에 빼어나니, 이것은 한 못으로 말미암아 이룩한 것이라 구봉(龜峯)이라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를 지나서 단구협(丹丘峽)으로 들어가니, 단구협의 절승함은 탁영공의 이요루(二樂樓) 기문(紀文)에 다 기록되어 있으므로, 나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아, 탁영공이 일을 좋아하고 기이함을 숭상하여 다만 단구(丹丘), 골암(鶻巖)에만 관심을 쏟고 다른 데에 미치지 않음은, 진실로 이것은 버리고 저것만 취한 것이 아니라, 대개 공의 본 바가 지나가는 틈에 본 것이니 두루 미치지 못했던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임후는 이곳의 수령(守令)이 되어 놀 만한 산수는 마땅히 모두 얻어서 기록하였을 것인데, 선암(仙巖)은 잘못 기록하고 구담(龜潭)은 미치지 못했으니 어째서인가. 승람(勝覽)의 글을 펼쳐 보면, 조그마한 물과 조그마한 두둑이라도 다 채집하여 기록하였는데, 구담에 대해서는 겨우 그 이름만 기록하였고, 도담(島潭)에 대해서도 아예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가 한스럽게 여기는 까닭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산수(山水)를 좋아하는 것은 그 맑고 높음을 좋아하는 것이다. 맑은 것은 스스로 맑고 높은 것은 스스로 높은지라, 사람이 알아주고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산과 물은 스스로 한탄하지 않는데, 나는 한탄하니, 이것은 내가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한탄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탁영공에게 알려지지 못한 것을 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탁영공의 기문에, “말을 단구에 세우고 가은(可隱)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신선될 난가(爛柯)의 생각이 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비록 구담을 보지는 못하였으나 구담의 절승함은 이미 홀로 가슴 가운데 얻은 것이니, 내가 또한 무슨 한탄이 있겠는가. 특히 한 읍 안의 신령스럽고 참된 경지인 적성산(赤城山) 같은 곳은 나의 발길이 아직 미치지 못하였으니, 그렇다면 또다시 구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줄을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내가 얻을 것은 무궁(無窮)하게 될 것이다. 이해 6월 모일에 진성 이황은 쓴다.
丹陽山水可遊者續記
嘉靖戊申之春。余始出守于丹。而値歲之凶。公私困急。加之以疾病憂患。自理荒政之外。恆悒悒然閉戶度日。其於山水之役。蓋未遑及也。顧以賑救飢民之故。時出入往來溪山間。因得窺
其勝槩之一二。及其所歷益多。所見益奇。則自以爲於丹之山水。殆無餘憾矣。最後而見所謂龜潭者。然後始知前所見者未爲奇。而勝覽之載。前人之述。猶有所未備也。姑以余所歷之次言之。郡西有丹丘峽。峽盡南入而得雪馬洞。洞門幽敻。東西石崖。丹碧相映。淸泉瀉出。白石齒齒。溪行數里許。盡鏘鏘然水樂之聲。可愛也。崖窮而見曠谷邃崦。可棲可耕。爲隱居盤桓之所。而今有編氓數十戶處其中。爲可惜也。東出長林驛。右轉緣溪而入。可十里有曰舍人巖。泉石
甚佳。見於故郡守林侯霽光所記。而又自此南行八九里。磵壑之美。多可賞也。北走買浦。有渡曰上津。其下石壁巉天而倒影於碧潭者。濯纓公所謂棲鶻巖也。渡津北行。迤東而入。有巨石三峯岌然峙于水中者。卽所謂島潭也。而又有西崖之勝。石門之異。此其獨鳴於世。而見稱於勝覽者。固不待余言也。南川之上。有曰佛巖。最奇。亦見於林侯之記。余嘗往而尋焉。入空谷涉淸流。登高山臨絶壑。令人窅然有出塵之想。下山而行雲木之下淸溪白石之間又六七里。乃
至佛巖。巖在兩山之夾丹崖之下。盤礴于溪上百餘步。若白雪平鋪。素氈疊積者。凡爲三層。而水流其間。縈廻汨
。而瀑落於下層之下。匯爲一泓。綠淨可鑑。鯈魚十數尾。潑剌而游。當泓之上。石臺天成。平坦膩滑。可坐而觀魚也。其東有衆石相倚而立。如飣餖然。空其下爲广。可避雨也。巖之四際。春則躑躅如蒸霞。秋則丹楓如爛錦。巖固異境之尤也。林侯之改佛爲仙。甚善。第其狀石之態。太過其實。豈侯未嘗目覩。而聞人詫異之說。遂信筆書之之故耶。噫。余之所得。至
是而遽有自足之心者。是余之未廣也。夏五月。余沿牒將往淸風。乘舟于下津。出于丹丘峽。歷龜潭下花灘。是日也乍雨乍晴。雲烟吐呑。崖谷出沒。頃刻萬變。而漲水奔流。舟行甚駃。雖偉觀無窮。而不能得其要領也。其夜。余宿于淸風郡之凝淸閣。翌日。乘曉涼。使人挽舟泝流而上。過三智灘。至迺邁潭之上。搴篷而望之。則水出于兩峽之間。從高而直下。礧擊于衆石。怒勢奔放。雲濤雪浪。洶涌而澎湃者。花灘也。峯巒如畫。峽門對拆。水積于其中。而涵泓凝碧。如鏡新磨。如在空中者。龜潭也。泝灘而進。循南涯絶壁下。其上諸峯。削立如筍。高可千百丈。突兀橕柱。其色或翠或白。蒼藤古木。縹緲晻靄。可仰而不可攀也。請名之曰玉筍峯。以其形也。潭之北涯。卽赤城山一支南騖而陡斷者也。其峯之大有三。皆臨水峭拔。而中峯爲最。層巖競秀。矗石爭挐。如鬼刻神剜。奇奇怪怪。不可具狀焉。于時山雨初霽。峽氣如新。雲物淸姸。適有玄鶴。自中峯飛出。盤廻數匝而入於雲霄之表。余於舟中。取酒吟詩。超然有御泠風遊汗漫之意。因以名其峯之在下者曰彩雲。其中者曰玄鶴。以其所見也。其上者曰五老。以其形也。棹舟稍上。截流而北。則已過中峯而泊于五老峯之下。峯之東。又有一大峯。與丹丘峽相接。實地誌之所謂加隱巖山。而可隱城在焉。水下長會灘西。觸于龜峯之崖。匯而爲龜潭之首。又北轉西折。而爲龜潭之腰。而潭之尾盡於彩雲峯之趾。可隱峯者。當北轉西折之曲。而西與五老峯相對。兩峯之間。有洞呀然而南向。窈闃幽深。人跡四絶。洞門之外。有石磯臨水如堂陛。可以釣遊。惟此一曲。盡得諸勝之會。古人名之曰可隱。意其在此乎。余於是。欲以芒鞋竹杖。叩雲門訪古跡。尋考槃之地。結幽人之約。而病不可得也。則三復子美何時一茅屋。送老白雲邊之句。而喟然發嘆也。其曰龜峯者。東捍潭衝。而北俯潭曲。丹崖翠壁尤絶特。是一潭之所由成也。故名之曰龜峯。過此則入于丹丘峽。峽之勝。濯纓公二樂樓記盡之。余可以無言矣。嗟乎。以濯纓公之好事尙奇。獨拳拳於丹丘,鶻巖。而不及其他者。非固去此而取彼。蓋公之所見。得於逆旅之暇。其不能徧及。宜也至於林侯爲守於此。而記山水之可遊者。則宜若盡得。而於仙巖則誤記。於龜潭則不及焉。何哉。考之勝覽。涓流蟻垤。亦或采錄。而龜潭則僅書其名而已。獨於島潭。稱之不容口。此余所以爲恨也。雖然。山水之好。好其淸高耳。淸者自淸。高者自高。其於人之知不知。何預哉。山與水不自以爲恨。而余恨之。余則癡矣。然余之所恨。非恨其不見知於人人。恨其不見知於濯纓公也。然而濯纓公之記有曰。立馬丹丘而望可隱。依俙然有爛柯之想云爾。則是雖不見龜潭。而龜潭之勝。固已獨得於胸中矣。余亦何恨之有哉。特一邑之內。靈眞之境如赤城山之類。吾之遊屐。尙未及焉。則又安知復有勝於龜潭者哉。而吾之所得。其無窮也已。是歲六月日。眞城李滉。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