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당 김공 묘갈명〔晩翠堂金公墓碣銘〕
공의 휘는 사원(士元)이며, 처음 자는 경방(景龎)이었는데 뒤에 경인(景仁)으로 고쳤다. 김씨(金氏)는 본래 안동(安東) 상락(上洛)을 본관으로 삼았는데, 고려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5대를 내려와 휘 자첨(子瞻)에 이르러 우리 공정왕(恭定王)이 전조(前朝) 명신(名臣)의 후예라는 이유로 관직을 내렸으나, 처자를 거느리고 문소(聞韶)의 사촌(沙村)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에 자손들이 계속 그곳에서 살게 되었다. 그의 손자는 극해(克諧)로 북평사(北評事)를 지냈으며 청렴한 명성과 곧은 절개로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국자감 진사 광수(光粹)에 이르러서는 태학에서 공부하다가 연산군의 무도함을 보고는 소매를 떨치고 향리로 돌아가 은거하면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 나가니, 세상에서 ‘송은(松隱) 선생’이라고 칭하였으며 사림들이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는데, 이분이 증조부이다. 조부는 당(溏)으로 참봉을 지냈고, 부친은 세우(世佑)로 인의(引儀)를 지냈고, 선비(先妣)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김만겸(金萬謙)의 따님이다.
공은 가정(嘉靖) 기해년(1539, 중종34)에 출생하고 만력 신축년(1601, 선조34)에 졸하여 63세를 살았다. 당초 공이 22살이 되던 해에 퇴도(退陶) 노선생을 뵙고 수업을 청하였는데, 선생이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의 〈관선재(觀善齋)〉를 써 주면서 “군은 나의 이 뜻을 알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문하의 여러 공과 함께 선생을 따라 청량산(淸涼山)의 연대사(蓮臺寺)에 놀러 가서 시를 수창하였다. 이로부터 4, 5년 동안 만월암(滿月庵)에 머물고 또 연대사에 머물다가, 얼마 뒤에 또 월란암(月瀾庵)에 머물렀는데, 책을 읽을 때마다 첨지(籤紙)를 붙여 두었다가 질문하고, 깨닫는 것이 있으면 서둘러 그 내용을 기록해 두었다. 대개 이때 함께 강학한 벗은 간재(艮齋) 이공 덕홍(李公德弘)과 조공 기백(趙公起伯)이다. 간재가 일찍이 금공 난수(琴公蘭秀)와 의논하여 도산(陶山)에 학사(學舍)를 지어 공부하러 찾아오는 이들을 수용하려고 하면서 편지로 공을 초청하자 공이 즉시 비용과 인력을 마련하고서 찾아갔는데, 선생이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번거롭게 일 벌이는 것을 원치 않노라.”라고 한 까닭에 일이 마침내 중단되었다.
공은 성품이 자애롭고 인자하였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다가 까마귀와 솔개가 시끄럽게 우는 것을 발견하고 가서 보니, 동사(凍死)한 자가 길가에 나뒹굴고 있으므로 그 즉시 옷을 벗어 덮어 주었고, 빈궁한 사람을 보면 반드시 부모에게 청하여 도와주도록 하였다. 송은공(松隱公)의 의롭고 방정한 가르침을 따라 부모를 모실 적에 효를 다하는 한편 친척과 마을 사람을 공경과 겸양으로 대하니, 아끼고 탄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노선생을 모시게 되자 마침내 과거 공부를 중단하고 정력을 집중하여 학문에 독실하게 힘썼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깊이 탐구하여 문목(問目)을 갖추어 선생에게 질의하자 선생이 조목을 갖추어 답장을 보내고 이어 말하기를 “고심하여 깊이 탐구하는 것은 도리어 학자의 병통이 되니, 경계할 일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산에 들어가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하다 병이 심하게 들자 선생이 몸소 약방문을 점검해 보여 주고는 또 경계하기를 “고인이 학문을 부지런히 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어찌 병이 나서 부모를 근심하게 하는 정도에까지 이르겠는가.”라고 하였다.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 문인들이 무슨 복(服)을 입어야 할지 결정을 못 하였는데, 공이 “고례(古禮)에 스승을 위하여 복을 입지 않았으니, 의기(義起)하는 것은 불가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흑립(黑笠)에 백의(白衣), 백대(白帶)를 하고서 상사를 치르고 3년 동안 잔치하고 즐기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다.
경진년(1580)과 임오년(1582)에 연거푸 부모상을 당하여 두 아우와 함께 시묘살이 3년을 마쳤다.
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가 일으킨 난리로 영남 지역의 의병장들이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할 적에, 김공 해(金公垓)를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공은 의성 정제장(義城整齊將)으로 삼았는데, 출동하여 가는 도중 마침 대장이 군진(軍陣)에서 죽자 결국 해산하고 돌아왔다. 이때 칼에 찔린 사람, 화살을 맞은 사람, 굶주림으로 초췌해진 사람 등이 공이 위급한 사람을 도와주는 의리의 소유자라는 말을 듣고서 계속해서 공을 찾았는데, 공은 피로한 기색 없이 이들을 받아 주었고, 부녀자가 찾아오면 집사람을 불러 대접하도록 하면서 죽을 주기도 하고 곡식을 주기도 하니, 이로써 목숨을 보전한 사람이 매우 많았다. 어떤 사람이 토지와 노비를 주면서 사례하려고 하자 공이 웃으며 물리치고는 “내 어찌 보답을 바란 것이겠소.”라고 말하였다. 이에 앞서 공은 집에 머무르면서 수양과 독서를 행하고 남은 힘을 이용해 농사일을 독려하여, 흉년이 되었을 때 약간의 남는 곡식을 먹고 살기 힘든 자들에게 빌려주는 한편, 가난하여 빌린 것을 갚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빌려줄 때 작성한 문서를 태워 버리니, 사람들이 이를 일컬어 김씨 의창(金氏義倉)이라고 하였다. 집 서쪽에 만년송(萬年松)이 있었는데, 송은공(松隱公)이 호를 취한 나무이다. 공 역시 거처하는 방의 편액을 ‘만취(晩翠)’라고 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가감하여 동규(洞規)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실천한 지 수십 년 만에 마을 풍속이 돈독하게 되었다.
초취(初娶)는 영양 남씨(英陽南氏)로 전적(典籍)을 지낸 남숭(南崧)의 따님이며, 1남 4녀를 두었다. 아들은 준(濬)으로 직장(直長)을 지냈고, 사위는 전적 권극명(權克明), 사인(士人) 김지선(金之善), 권득선(權得善), 안창(安昌)이다. 재취(再娶)는 일직 임씨(一直任氏)로, 1녀를 낳았다. 딸은 이집가(李執可)에게 출가하였다. 삼취(三娶)는 안동 권씨(安東權氏)로 역시 1녀를 두었다. 딸은 조강(趙綱)에게 출가하였다.
직장은 5남 2녀를 두었다. 아들은 호군(護軍)을 지낸 상원(尙瑗), 상기(尙琦), 상각(尙珏), 상빈(尙玭), 상린(尙璘)이다. 사위는 문박(文博)과 이조명(李朝鳴)인데 모두 진사이다. 증손과 현손 및 외손은 번창하여 다 기록하지 못한다. 현재 곤손(昆孫)인 상사(上舍) 종덕(宗德)이 학행(學行)으로 인하여 사림의 칭송을 받고 있으며, 세 아우는 시종(侍從)하는 반열에 출입하기도 하고 성균관에 오르기도 하니, 그 모두 이름난 조상의 자손이 되는 데에 부끄럽지 않다.
아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200년이 되어 서적이 망실된 나머지, 저술하였던 《대학질의(大學質疑)》, 《어록해(語錄解)》 등 여러 책까지도 모두 전해지지 않으니, 이는 후학들이 공히 한탄하며 애석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공은 일찍이 말하기를,
“선비는 세상을 살면서 의(義)가 아니면 녹(祿)을 구해서는 안 된다. 오직 본분에 진력하기만 한다면 거의 허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물며 ‘언행을 삼가고[愼言行]’, ‘독서를 부지런히 하고[勤讀書]’, ‘농상에 힘쓰는[務農桑]’ 세 가지 일은 스승의 가르침에 있는 것이니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스승의 문하에서 전수된 비결은 요약되고 평실(平實)하여 사람들이 모두 힘써 행할 만한 것이라, 성인(聖人)이 되고 현인(賢人)이 되는 기초가 반드시 이것에 바탕을 두었다.”
하였는바, 공이 평소 가슴에 새기면서 몸소 실천한 것은 요컨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후학들이 이것으로 공을 이해하고 또한 이것으로 스스로 힘쓴다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 할지라도 나는 믿지 않겠다. 공의 장지는 마산(馬山) 감좌(坎坐)의 언덕에 있으니, 바로 의성현(義城縣)의 북쪽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송은공 빼닮은 자손이며 松隱肖孫
퇴도 문하의 제자일세 退陶門徒
서재에서 학문에 힘쓰니 有齋藏修
노송의 곁이로세 古松之隅
날 알아주는 이 드무니 知我者稀
거두어 감춘들 뭐가 대수랴 卷懷何傷
훌륭한 후손에게 전해지니 貽厥令裔
명성이 환하게 빛나도다 有斐聲光
[주1] 무이정사잡영(武夷精舍雜詠)의 관선재(觀善齋) : 송(宋)나라 학자 주희(朱熹)의 12수 연작시 〈무이정사잡영〉 가운데 6번째 작품인 〈관선재〉를 말한다. 《晦庵集 卷9》
[주2] 이공 덕홍(李公德弘) : 이덕홍(1541~1596)으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굉중(宏仲), 호는 간재이다.
[주3] 조공 기백(趙公起伯) : 조진(趙振, 1535~?)으로,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기백, 호는 농은(聾隱)이다.
[주4] 금공 난수(琴公蘭秀) : 금난수(1539~1604)로, 본관은 봉화(奉化), 자는 문원(聞遠), 호는 성재(惺齋)ㆍ고산주인(孤山主人)이다.
[주5] 고례(古禮)에 …… 않았으니 : 《예기(禮記)》 〈단궁 상(檀弓上)〉에 “공자의 상에 문인들이 무슨 복을 입어야 할지 결정을 못 하였는데, 자공(子貢)이 말하기를 ‘옛날 부자께서 안연(顔淵)의 상을 당하였을 때 마치 아들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였으나 복은 없었으며 자로(子路)의 상을 당하였을 때에도 그러하였다. 청컨대 부자의 상을 당한 지금 아버지의 상을 당한 것처럼 하되 복은 입지 말자.’라고 하였다.” 하였다.
[주6] 의기(義起) : 《예기》 〈예운(禮運)〉에 “예라는 것은 의의 실질이니, 의에 맞추어서 맞으면 예는 비록 선왕 때에 없었더라도 의로써 새로 만들 수 있다.[禮也者, 義之實也. 協諸義而協, 則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라고 한 데서 온 말로서, 예문(禮文)에 없더라도 이치를 참작하여 새로운 예를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주7] 김공 해(金公垓) : 김해(1555~1593)의 자는 달원(達遠), 호는 근시재(近始齋)이다.
[주8] 의성 정제장(義城整齊將) : 대본에는 ‘義城齊整將’으로 되어 있다. 《대산집(大山集)》 권49 〈만취당김공행장(晩翠堂金公行狀)〉에 근거하여 ‘齊整’을 ‘整齊’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9] 여씨향약(呂氏鄕約) : 남전 여씨(藍田呂氏)의 향약(鄕約)을 가리킨다. 송(宋)나라 때 섬서성(陝西省)의 남전(藍田)에 살던 여대충(呂大忠), 여대방(呂大防), 여대균(呂大鈞), 여대림(呂大臨) 4형제가 그 고을 사람들과 자치 규범을 정하여 서로 지키기로 약속하였는데, 그 규범은 덕업(德業)을 서로 권하고, 과실(過失)을 서로 규계하고, 예속(禮俗)으로 서로 사귀고, 환난(患難)을 서로 구제한다는 등 네 조항이다. 《小學 善行》
[주10] 곤손(昆孫)인 상사(上舍) 종덕(宗德) : 김사원(金士元)의 6대손인 김종덕(金宗德, 1724~1797)으로, 자는 도언(道彦), 호는 천사(川沙)이다. 상사는 생원을 이른다.[주-D011] 세 아우 : 김종덕의 세 아우인 김종경(金宗敬), 김종발(金宗發), 김종섭(金宗燮)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