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집 발문
기축년(1649, 인조 27)에 학봉(鶴峯) 김 선생(金先生)의 문집이 완성되었는데, 모두 몇 권이었다. 아아, 선생께서 평소에 지으신 글의 양이 이 정도에 그치지는 않을 것인데, 병란에 불탄 나머지 이것만이 남아 있으니, 이른바 ‘인간 세상에 떨어진 것은 태산 가운데 터럭 하나일 뿐이다.’라는 것이다.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지금 57년이 되었다. 선생의 문하에 있던 인사들이 거의 다 죽어서 선생의 글을 영원히 전하기를 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여강(廬江)의 산장(山長)인 전 현감 이홍조(李弘祚), 전 직장 남업(南礏)이 이 점에 대해 몹시 개탄하여 전 참봉 유의남(柳義男)ㆍ박정(朴烶), 생원 이설(李渫)ㆍ유숙(柳橚)과 선생의 종손(從孫) 김시온(金是榲) 등 여러 사람들과 의논을 모아 비로소 여강에서 간행하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 그러자 도내 열읍(列邑)의 수령과 사림(士林)이 모두 비용을 도와서 몇 달 뒤에는 역사를 마칠 수가 있었다.
얼마 뒤에 제공(諸公)들이 내가 선생 사위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간행하게 된 전말을 책 끝에 기록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내가 일어나서 말하기를, “선생의 덕행은 사람들의 눈과 귀 속에 있으며, 공훈과 업적은 사책(史冊)에 실려 있으니, 모아서 간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학문 조예의 깊고 얕음과 문장 체격(體格)의 높고 낮음에 대해서는 이 문집이 아니면 전할 수가 없기에 제현들께서 의기(義氣)를 내어 이 역사를 마쳤으니, 그 공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그리고 또한 어찌 사문(斯文)의 흥폐와 관계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아, 나는 이에 대해서 다시금 느껴지는 바가 있다. 무릇 천지(天地)의 순수하고 굳세며 바르고 큰 기운이 사람에게 모였는바, 그것이 축적되어서 덕행(德行)이 되고, 발하여서 문장(文章)이 되며, 시행되어서 사공(事功)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는 혹 축적된 것과 발한 것이 부족함이 없는데도 시행하기를 끝까지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선생께서는 금과 같이 단단하고 옥과 같이 윤택한 자질을 가지고서 퇴계 선생(退溪先生)의 알맞게 키워 주는 교화를 받아 오랫동안 힘을 축적하여 얻은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예(造詣)의 정밀함은 나와 같은 후생 말학으로서는 엿볼 수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문(師門)에서 권면하며 추켜줌이 저와 같아서 후학들이 더욱더 독실하게 존숭하였으니, 여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선생이 조정에 있을 적에 선생에 대해서 잘 모르는 자는 족히 말할 것도 없지만, 선생에 대해서 잘 아는 자들조차도 혹 절개가 곧은 신하이고 문학에 뛰어난 선비라고만 여길 뿐이었다. 그러다가 일본(日本)에 사신으로 가서 성신(誠信)이 오랑캐에게 드러나고, 경상우도(慶尙右道)에서 명을 받들어서 충의(忠義)가 사민(士民)들을 감동시켜, 왜인들의 짐승 같은 마음을 교화시키고, 망해 가는 나라를 다시 회복시킨 공을 이룬 다음에야, 지난날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서 선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던 자들이 모두 다 선생을 바로 보게 되었다. 이것으로 말한다면 선생께서 험난함을 겪고 위급함을 당하였던 것은 불행이 아니라 다행인 것이다.
바야흐로 수십 명밖에 안 되는 외로운 군사를 데리고 백만이나 되는 강력한 왜구를 상대하면서도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백우선(白羽扇)을 부치며 태연자약하게 담소하였다. 이것은 맹자(孟子)의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한 것.[舍生取義]’이나 정자(程子)의 ‘포기하고 달관한 것.[舍去達去]’과 더불어서 천 년의 세월을 격해 있으면서도 그 도(道)가 같은 것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흉악한 왜적들이 스스로 물러나 군사들의 사기가 비로소 떨치었으니, 하늘이 국운(國運)을 길게 하여 충신을 보호하였다는 것을 단연코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큰 공훈을 다 이루기도 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어 이 백성들로 하여금 경상우도의 사민들처럼 되지 못하게 하고 말았단 말인가. 이것은 축적된 것과 발한 것이 부족함이 없는데도 시행하기를 끝까지 하지 못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또 어찌 시대의 운수와 나라의 액운에 관계되어 천지에 유감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선생의 도가 당세(當世)에 행해지는 것은 한때에 그칠 뿐이지만, 선생의 도가 후대에 행해지는 것은 만 대가 흘러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문집을 후세에 전하는 것은 바로 이 도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당세에서 행하여 한때에 그치는 것과 비교해 볼 때, 과연 어느 것이 얻은 것이고 어느 것이 잃은 것이겠는가. 이 점에 대해서는 반드시 능히 판단할 자가 있을 것이다.
기축년 4월 모일에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편수관(行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 김응조(金應祖)는 삼가 쓴다.
鶴峯先生文集跋[金應祖]
己丑歲。鶴峯金先生文集成。摠若干卷。嗚呼。先生平日所著。簡袠之多。宜不止此。而此獨全於灰燼之餘。所謂流落人間者。泰山一毫芒耳。先生下世。今五十七年。及門之士。零落殆盡。無能謀所以壽其傳者。廬江山長前縣監李君弘祚,前直長南君礏。深有慨于此。與前參奉柳君義男,朴君烶生員李君渫,柳君橚及先生之從孫是榲諸公合議。始役于廬江。於是道內列邑守宰及士林。咸助其費。閱月而工告訖。旣而諸公以余忝在先生門壻之後。命識刊役顚末于卷 尾。余作而言曰。先生之德行。在人耳目。勳業載國簡策。無以集爲也。若其學問造詣之淺深。文章體格之高下。非斯集。莫之傳也。則諸賢之出義氣了此役。其功豈不偉哉。亦豈非有關於斯文之興喪也哉。噫。余於是重有感矣。夫天地鍾純剛正大之氣於人。蘊之爲德行。發之爲文章。施之爲事功。其或蘊而發者無歉。而施有所未究者。何哉。先生以金精玉潤之資。被溪上時雨之化。眞積力久而有得焉。則其所造之精粗。非後生末學所可窺測。而師門之奬詡如彼。後學之尊尙益篤。則此其必有所以然者。雖然。先生之在朝廷。其不知者。不足言。其知者。間或以爲直節之臣文學之士而已。迨夫專對日域而誠信著於蠻貊。奉命江右而忠義動於士民。有以致狼心之化。辦取日之功。然後向之不知而談先生者。從而翕然隨以定。以此而言。先生之履險艱當急難。非不幸也。幸也。方其提數十之孤軍。當百萬之劇寇。坐胡床麾白羽。譚笑自若。此其與孟子之舍生取義。程子之舍去達去。隔千載而其揆一也。遂使兇鋒自退。士氣始振。天之祚宋而護忠。斷可見矣。奈何大勳未集。曾簀遽易。使斯民不得爲江右之士民而止。斯非蘊而發者無歉。而施有所未究者歟。又豈非關時運係邦厄。天地之有遺憾者歟。雖然。先生之道行於世。則一時而止耳。先生之道行於後。則萬世而未沬焉。是集之傳於後。卽是道之傳於後也。其與行於世而一時而止者。果孰得而孰失耶。此必有能卞之者。己丑四月日。通訓大夫。行弘文館副應敎,知製敎兼經筵侍講官,春秋館編修官金應祖。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