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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레올 주교.
1845년 프랑스 사제 두 명이 조선에 들어온다. 성 페레올 주교와 성 다블뤼(St. A. Daveluy) 부주교였다. 그들은 김대건 안드레아신부와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출발하여 제주 용소를 경유 나바위로 입국하였다. 두 신부는 조선에 천주의 복음을 전하려다 박해를 당해 죽은 천주교 성인이다. 다블뤼 주교는 내포지방 신리에 주교관을 세우고 각지를 다니며 또는 교우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 들은 순교자들의 행적에 대하여 정리하여 조선 순교사 비망록을 집필하는 중이었다. 그때 조선 신자들에게 믿지 못할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이미 선교사가 들어오기 도전에 스스로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파시킨 자가 있다는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이 놀라운 일을 듣고 조선순교사 비망기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시작한 글에 이 내용을 빠르게 적었다.
스스로 천주교를 전파한 이는 바로 광암 이벽이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정확하게 기록한 사람은 다름 아닌 정약용이었다. 약용은 18년간의 유배가 끝나 고향 마재로 돌아와 그는 어릴 적 형제들과 이벽과 함께 뛰어놀던 천진암 주어사를 자주 찾아갔다, 그리고 자신이 엮고 있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에 다음과 같이 적어 놓는다. 1779년 오래된 암자에서 은밀한 모임이 있었다. 권철신과 그의 동생 권 일신, 그리고 정약용과 그의 형 정약전 등 십여 명의 신비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 좌장인 권철신을 제외하고는 십 대, 이십 때 젊은이들이었다.
또한 다산은 기해(1779)년 겨울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을 했다(己亥冬講學干 天眞菴 走魚寺)라고 녹암 권철신 묘지명(여유당전서)에 적었다. 모인 이유가 강학 때문이라고 적었다. 당시 강학은 오늘날 세미나로서 유교적 성리학적 측면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때 그 시간 서둘러 눈 길을 헤쳐 가는 이가 있었다. 이벽이었다. 이벽은 강학이 열린다는 소식을 늦게 듣고 밤중에 넘어야 할 산은 거대한 산이었고 눈더미에 덮여 있었으며 수많은 호랑이와 맹수가 접근을 막고 있었다. 이벽은 그래도 상관없었다
유학을 공부하던 강학은 그가 도착하자마자 그 성격이 바뀐다. 그가 말하는 내용은 유학의 경지를 넘는 새로운 사상이었다. 즉 천주교에 관한 것이었다. 모임은 열흘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때 하늘과 세상과 인간본성 등에 관한 천주교적 사상과 모든 유학의 문제들이 깊이 다루어졌고 유학의 모든 의문점들과 선현의 의견이 논의되었다.
그 당시 이벽 지었다는 천주공경가가 있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집안에는 어른이 있고 나라에는 임금이 있듯이 내 몸에는 영혼이 있고 하늘에는 천주가 있다. 기해년(1779) 섣달 주어사에서 이벽이 작사하였다는 국문으로 적은 공경가가 전해 오지만 그 사실에 대하여 인정할만한 근거가 부족하여 확인을 하지 못하고 학계에서는 부정적이다. 그의 저서로 알려진《숭례의 설(崇禮義說)》은 현존하지 않으며 《만천유고》의 잡고 편에 수록된《성교요지》, 《천주 공경가(天主恭敬歌)》는 그의 저작임이 불분명하다. 이러한 이유는 만천유고의 신빙성이 확실하지 않은 이유에 기인한다. 한양도성 돈의문(서대문) 밖으로 무악재에서 발원하여 염초교와 서소문 성지, 청파동 남쪽을 휘어 감고 한강으로 합수되는 샛강이 있다 지금은 복개되어 도시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옛사람들은 만천(蔓川)이라 불렀다. 만리재 부근에 살던 한국천주교에 첫 세례자 이승훈(1756-1801)은 자신의 호를 샛강의 이름을 빌려 만천(蔓川)이라 하였다. 만천유교는 이승훈의 문집이라는 하는 것인데 이 책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67년 8월27일 자 가톨릭 시보 제582호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현재 이 책은 숭실대학 기독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 이 책에 수록된 이벽의 성교요지가 교계와 천주교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 책에 대한 고증은 위작으로 기울었다. 이를 본격적으로 위작이라 제기한 사람은 손골성지에 머물며 한국천주교사를 연구한 윤민구 신부이다. 당시 이벽과 함께 강학에 참여하였던 정약용은 18년의 유배에 풀려 난 마재로 돌아와 이벽을 그리워하며 그와 관련된 일을 기록해 두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를 정리한 글은 찾아볼 수 없다. 단지 그의 학문적 동료였던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에 이벽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이 일부 전할 뿐이다.
아무튼 그래도 주어사 강학은 한국 천주교가 출발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종교 법적으로 1784년 말에 천주교가 창설되지만 창설의 계기가 마련된 것은 1779년 겨울에 있었던 강학이다. 그리고 그러한 단초를 제공한 것이 바로 이벽이다. 진지한 학문에 불타던 불굴에 젊은 남인 유학자들에게 이벽은 기존의 유학적 사고를 뛰어넘는 새로운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이를 간파한
다블뤼 주교는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의 역사는 이벽의 저 위대한 강학에서 시작되었다고 적었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 여명이 비친 것이다. 여명은 이벽과 정약용 형제들과 대화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된다. 정약용의 형수이며 이벽의 누님 경주이 씨 기일날 제사를 모시고 배를 타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날, 선상에서 이벽이 그 좋은 입담으로 풀어놓는 천지조화의 시작과 육신과 영혼의 생사에 대한 이치를 듣고 정약용 형제들은 정신이 아득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이벽은 다산 형제들에게 몇 권의 책을 권하였다. 천주교의 기본 안내서인 천주실의라는 책이었다. 천주실의는 16세기 북경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이태리 신부 마태오 릿지(1552-1610)의 저서다. 그는 동양인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유학경전을 이용하여 천주교를 설명했다. 서양에서 말하는 천주는 곧 유교의 상제와 같다는 논리였다. 마태오 릿지는 중국에 들어갈 때 상호 대립된 관계로 보지 않고 천주교가 유교이론을 보충해 준다는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 입장이 바로 보유론(補儒論)이다. 이러한 책을 읽은 이벽은 유학을 기초로 천주학인 서학을 받아들이려 한 것이다. 당시 북경에서는 서양의 학문인 서학이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었다. 선교사들은 동양인의 관심을 끌 목적으로 천주교 서적뿐만 아니라 철학, 수학, 천문학 등 서양의 과학기술서까지 한문으로 번역하여 소개하고 있었다. 새로운 서양의 학문은 폐쇄적인 조선에도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외국과의 유일한 접촉 수단이었던 사신을 통해서였다. 새롭게 전개되는 서학은 주자학만 중용하던 조선사회에 충격으로 다가왔고 성호이익을 필두로 실학으로 이어졌다. 성호 이익(1681-1763)에게 학문이란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목적의 도구였고 사회제도는 개혁이 필요한 낡은 관습에 지나지 않았다. 이익은 마태오 릿지의 천주실의를 비롯하여 수많은 서양인들의 저서를 읽었다. 이벽은 바로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모시는 남인계열의 학풍에 속해 있었다. 스승들의 학풍은 그 당시 주자학의 범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주자학으로부터 탈출 성향이 강했던 것이다. 이벽은 그러한 성향을 받아들여서 서학이라 불리던 천주실의 성향을 완전하게 갖게 된 사람이었다.
이벽의 그러한 의지는 서서히 인척관계였던 정약용 형제들에게 뿌리를 내리게 한다. 누구보다도 학문에 대한 열의가 깊었던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은 평소에도 마재을 떠나 능내를 지나 예빈산 기슭을 타고 올라 한양으로 봉화불을 지펴 타오르게 하는 예봉산 끝 봉까지 올라 학문의 도를 밝히는 의견을 서로 나누며 한양하늘을 자주 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봉의 이름을 철문봉이라 불렀다고 한다. 철문봉 아래로는 두미강 협곡으로 물이 빠르게 한강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그 강물 선상(船上)에서 정약용 형제들에게 천주사상을 전하기 시작 한 곳이다. 이벽의 이야기는 한양 살곶이 석교(石橋)에 다 달를 때까지 이어졌다.
학문이 깊었던 정약용형제들은 평소 이벽의 식견을 존중하고 있었다. 이벽은 조선에 늦게 들어온 양명학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심취한 경험이 있었다. 그는 벼슬 길에 나가는 것을 잊고 모든 학문에 대하여 꿰뚫고 있는 자였다. 그의 손에 잡힌 서학책과 서양종교를 설명하는 천주실의 등 책들은 선대 이경상이 소현세자와 함께 불모로 가 있다. 아담샬을 만나러 갈 때 동석하는 등 그 영향에 힘입어 귀국 시 집에 반입되어 6세 때부터 천진암에서 공부를 했다는 이벽에 손에 잡혔다는 이야기도 조심스럽게 짐작하고 동지사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책을 입수하여 읽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새로운 학문에 늘 목말랐던 이벽에게 서학과 서양종교를 알리는 책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접하고 읽고 연구한 이벽은 당시 똑똑하고 학문의 깊이를 갖고 있던 지식인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배경이 열흘간 지속된 강학에서 남인 지식인들과 학문적 소양을 갖추고 있던 10대 소년들까지 충격을 준 것이다. 이벽과 선상에서 대화를 나누고 한양으로 돌아온 정약용 형제들은 곧바로 이벽의 집으로 가 설명을 더 듣고 책을 빌려 본 정약용 형제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서학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서학의 공부를 넘어 점차 서양종교에 이끌리도록 한 자는 바로 이벽이었다. 결국 이벽이 쳐 놓은 종교적 덧에 세례를 받으며 한국천주교 창립과정 중심으로 다가 가 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형제들과 함께 한국천주교 창립과 지도자와 구심점 역할을 한 사람은 대부분은 정약용 집안과 혈연을 맺은 이승훈, 홍재영, 황사영도 있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한국천주교사를 이야기하면서 정 씨 형제들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천진암 주어사 강학에서 돌아온 지 4년이 지나도록 이벽은 고심이 깊어졌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천주에 대한 지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쉽게 해결할 수 없었다. 그때 귀가 번쩍 트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1783년 겨울 만천 이승훈이 서장관 부친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북경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승훈을 만나 설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경에 대하여 많은 정보를 갖고 있던 이벽은 북당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많은 성물과 관련 종교서적을 갖고 들어 오라고 설득하여 허락을 받았다. 실로 중요한 시간이었다. 당시 북경 성당의 분위기는 다음과 같았다.
마테오 리치는 북경을 천주교 전파의 본거지로 삼았다. 흠천감에서 근무하며 세계지도, 자명종, 혼천의 등으로 황실의 환심으로 황제를 선교하고자 하였다. 황제가 하사한 땅에 성당을 짓고 지속적으로 서양문물과 종교를 알리면서 중국인들의 주목을 끌어내었다. 북경은 중국인만의 도시가 아니라 새로운 정보와 지식의 넘치는 국제도시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북경에 처음 세워진 남당(南堂)은 명나라 말에 세워졌지만 청나라에 접어들면서 동당(東堂), 북당(北堂), 서당(西堂) 순으로 지어지는데 총애하는 선교사들을 위하여 황제들이 나서서 땅을 하사하였기 때문이었다. 동당(東堂) 은 순치제가 하사하였고 북당(北堂)은 강희제가 학질을 고쳐준 대가로 폰타네(Jean de Fontaney. 洪若翰) 신부에게 하사한 땅에 건립되었다.
동지사(冬至使) 직책은 조선의 북경외교 사절이다. 직책 수준으로 본다면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외 30명으로 구성되고 연관된 인원 200명에서 300명으로 구성되는 사대의 성격을 지닌 조공이 목적이었다. 이들은 한양을 떠나 의주- 압록강을 건너 봉황성- 선양경유하여 북경으로 가는 약 3000리의 고단한 길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공적인 일은 끝내고 나면 개인적으로 중국인 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유리창(琉璃廠)의 서점에 들러 책을 구입하고 관광도 다녔다. 그리고 서장관 친인척 중에서 자제군관으로 동행하여 서양과학문물을 접하거나 선교사들과도 어울렸다.
특히 이승훈을 비롯하여 홍대용, 이기지, 김창업 등은 자제군관으로 북경으로 간 인물들이다. 북경은 그들에게 서양의과학과 학문에 열의를 갖도록 하였으며 북경에 천주성당을 통하여 세계화를 경험하는 산실이 되었다. 이러한 계기의 흘러 들어온 정보들을 갖고 있던 인물이 바로 광암 이벽이었던 것이다. 이로서 이벽은 한국 천주교의 자생적 토대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북경으로 가는 동지사들은 자연스럽게 북경 성당을 찾았다. 선교사들을 만나 필담을 나누며 진기한 서양물건들을 선물 받는 매력도 있었지만 그들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학서와 서양의 과학과 그들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조선 관리 동지사만이 갖는 특권이었다. 그리고 중국황제의 도움으로 건축된 남당과 동당을 방문하여 만나는 선교사들은 동지사 서장관 자제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을 파악하고 있던 광암 이덕조(벽)가 이승훈을 선택한 일 아무리 이들 관계가 친구관계였고 또한 한편으로는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님에게 장가를 들었고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에게 시집온 이벽의 누님이 있으니 둘 관계는 정약용형제를 매개로 인척이 성립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서로 결집될 수 있는 조건이 있었지만 꼭 필요한 시기에 이승훈이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은 우연이 아닌 종교적 필연으로 생각하여도 큰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기록에 의하면은 김창업은 1712년 남당을 방문하여 천주상, 혼천의와 자명종을 보게 되었고 이기지는 1720 때에 아홉 번을 성당을 돌아가며 방문하였는데 남당을 방문하여 카르도소(Cardoso, Jean Francois) 신부외 수아레즈, 마갈헨즈, 쾨글러 신부 4명 등을 만나 포도주를 대접받았다 한다. 북당을 방문하여서는 천리경, 서양 고약, 천주실의, 곤여도 각각 2권씩과 칠극 3권을 받았다. 또한 1729년 김순협은 동당으로 가 서광계가 저술한 벽망 2권을 받았으며 1765년 동당을 방문한 홍대용은 관상대인 흠천감 내부를 구경하고 근무하던 선교사들 통해 천문지식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조선 연경사들의 방문을 통해 현지에 살고 중국관리 격인 흠천감에 근무하던 서양 선교사들은 내심 동지사들 서장관 자제군관을 반겼다. 그들은 갖은 서양문물을 소개하고 과학서적을 주면서 그 안에 종교서적들을 끼워 주었다. 그것은 바로 조선에 대한 선교전략이었던 것이다. 특히 이기지에게는 고약을 만드는 법을 전수해 주며 교류하기를 원하였다. 북경을 드나들던 서장관 자제군관들은 시간이 갈수록 과학보다는 종교에 관심이 높아져 갔다. 조선 사신들이 북경에 가면 묵던 옥하관(玉河館) 근처 남당이 있어 선교사들과 접촉이 활발해지면서 생긴 현상이다.
광암 이벽의 부탁을 받은 이 승훈은 1783년 서장관 아버지 이동욱을 따라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으로 가서 북당을 방문한 후 신부를 만나 조선의 입장을 소상하게 알리고 여건을 갖춘 후 1784년 1월 북당에서 예수회 그라몽(Jean-Joseph Grammont. 梁 棟 材)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이승훈이 세례를 받은 후부터 천주교 북당은 조선 천주교와 긴밀한 연락 장소가 된다. 그리고 연락의 밀사 자격으로 1790년 윤유일, 1793년, 지황, 1823년,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은 연행사의 일원이 되어 여러 가지 조선교회의 사정을 전달하고 성직자를 모시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결국 이들은 뜻을 이루지만 대부분 박해를 통해 조선 천주교의 희생 제물이 되어 박해를 통하여 순교를 하게 된다.
특히 한국천주교 중심에 놓인 정약용 형제들은 각각 다른 선택으로 삶을 살게 되지만 깊은 사유를 통해 그 맥은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들은 신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종교라 한다. 그래서 그랬을까? 정재원의 셋째 아들 약종은 인간을 구원한다는 신(神)을 저버리지 않고 신을 선택하고 순교로 삶을 접는다. 둘째 약전은 가장 빠르게 신앙에 빠져들고 신의 이름으로 전교를 한 사람이지만 신과의 관계를 내려 놀고 섬 사람인 어부를 선택하고 그들의 삶을 사랑하며 살다 그곳에서 죽었다. 막내 약용은 신을 내려놓고 정치를 선택하여 백성들의 미래를 구제하려 인본주의를 앞세운 수많은 책을 간행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과 형제와 권일신 형제, 이벽의 삶을 증거 하는 글과 한국천주교의 창설과 관련된 글을 남겼다. 그러나 형 약종과 가족인 이승훈, 황사영 등에 대한 종교적 행적은 글로 남기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명한 배교자로 몰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저런 사유를 들어 배교하지 않았으며 신앙의 증거자이며 희생자라 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 것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수많은 박해 속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종교적 영성은 한국천주교 창설 200주년이 되어 1984년 5월 방한 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하여 103위 시성식을 갖았고 아울러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식을 그들을 박해했던 관리들이 상주하던 광화문에서 갖으며 그리스도의 승리를 선포하게 이른다. 세계 어디를 보나 이러한 천주교의 창설과 믿음은 없으며 단 한국 천주교에서만 볼 수 있는 기적 같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천주교 아시아 전교 및 중국 天主敎 年譜 | ||
1253 | 인노센트4세 교황과 루이9세 국왕 프란치스코 형제회 수사 루브르크 몽고에 파견, 최초 복음전파 | |
1271 | 교황 그레고리10세 마르코폴로 부자 원나라 파견 함 | |
1275 | 마르코폴로 연경에 도착 17년 동안 견문록 저술 | |
1294 | 이태리 코르비노 대주교 몽고입국 3만명 입교시킴 | |
1517 | 마루틴 루터 종교개혁 | |
1534 | 종교개혁 자극받은 후 이그나티오 로욜라와 프란치스코 자비에르 예수회 설립 | |
1578.9.13 | 마태오 릿지 인도 고아 도착 | |
1582.08.07 | 마카오 도착 | |
1583. | 미쉘 르지에리 신부와 함께 짜오칭 도착 | |
1584 | 마태오 릿지 곤여만국전도 출판 | |
1591-1594 | 마태오 릿지 四書 라틴어 번역, 수도복에서 유학자 복장 착용 | |
1595 | 마태오 릿지남경으로 출발 6월28일 난창 도착 | |
1595 | 마태오 릿지 첫 한문으로 교우론(交友論) 저술 | |
1596 | 마태오 릿지 서양기억술 초고 완성 | |
1588 | 먀태오 릿지 북경 전입시도 실패 | |
1599 | 마태오 릿지 난징(남경)도착 | |
1601,01.24 | 마타오 릿지 북경 전입 성공, 황제를 위한 크라비어코드를 위한8곡 작곡 지음 | |
1601.05.28 | 자명종 수리공으로 북경 거주 허락받음 | |
1602 | 곤여만국전도 개정판 출간 | |
1603 | 천주실의 출판 | |
1607 | 유크리트 기하원본 전반부 6권 서광계와 공동번역 출판 | |
1608.1-4월 | 기인십편(畸人十篇)출판 | |
1608. | 예수회에 의한 기독교 중국전교에 관하여 집필 | |
1609.09.08 | 성모 마리아회 창립 | |
1610.05.11 | 마태오 릿지 선종 | |
1703 | 북당완공 | |
1704 | 중국, 인도 의례 교황청에게 단죄 | |
1703 | 교황특사 루트론 주교 제조사공 건으로 강희제 접견 | |
1707 | 교황특사 메크로 주교 강희제 접견후 선교사 추방 결정 | |
1722 | 교황특사 매차바르바 강희제 13번 접견 8개타협안 제시, 제조사공건 미해결 | |
1722 | 옹정제 즉위 천주교 말살정책 펴기 시작함 | |
1723 | 복건성 선교사 전원 추방단행 | |
1727 | 중, 러 수호조약후 북경에 정교회 설립 | |
1742 | 중국의례 베네딕토 14세의 칙령1942년 신부들 피해 발생후 교황 비오 12세 제조사공 금지령 해제함 | |
1744 | 인도의례 단죄 | |
1773 | 예수회 해산 | |
1782.12 | 구베아 신부 북경 교구장 주교로 임명 | |
1785 | 구베아 주교 북경교구장 취임 | |
1814 | 예수회 재복원 | |
韓國 天主敎 年報 | ||
1603 | 북경사신 이광정(李光庭) 곤여만국전도 갖고 귀국 | |
1611 | 지봉 이수광 1590,1597,1611 북경 다녀옴 | |
1614 | 20권으로 된 백과사전 지봉유설 편찬 | |
1722 | 조선 동지사 이이명 북경에서 서양신부 접촉 | |
1776 | 정조즉위 | |
1777-79 | 권철신 주도 천진암, 주어사 강학주최 | |
1782.12 | 구베아 주교 북경 교구장 임명 | |
1783 | 겨울 이승훈, 서장관으로 임명된 부친 따라 북경 감 | |
1784.01 | 이승훈 북당에서 그라몽 신부로부터 영세받음 | |
1784.03 | 김범우 세례 받은 후집회장소제공 첨례시작, 교회창립 | |
1785 | 구베아 주교 북경 교구장으로 취임 | |
1785.03 | 을사추조적발. 김범우 밀양 단장으로 유배 김범우는 1751년 서울 남부 명례방(현, 명동주교좌 성당)에서 중인 역관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784년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권면으로 입교 이승훈 베드로에게 토마스라는 세례며으로 세례를 받았다. 자신의 집에서 정기적인 집회를 가졌으며 1785년 을사추조사건이 발생하여 지방의 밀양 단장으로 유배되어 2년 후 1787년9월14일 3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동안 달레가 쓴 한국천주교사에 근거하여 충북 단양으로 유배간 것으로 알려졌으나 1980년 초 김범우 후손이 나타나 밀양 단장(丹場)이 유배지 임이 밝혀졌으며 이를 근거로 밀양과 삼랑진을 수소문하다 1989년 김범우 왼손의 도움으로 묘를 발견하여 출토된 유물도 후손들의 증언을 토대로 김범우 묘소임을 단정하여 2011년 9월, 묘지 주변에 교구 레지아의 협조와 교구민들의 협조로 성모동굴 성당이 봉헌되었다. | |
1785.06.14 | 광암 이벽 요한 세례자 순교 | |
1786-88 | 가성직제도 시행 | |
1787. | 겨울 정미반회사건 | |
1787.09.14 | 김범우 선종 | |
1789.10 | 윤유일 북경밀사1차 파견 | |
1790.07 | 윤유일 사제파견 요청 건으로 북경 2차 파견 | |
1790.10 | 구베아 주교 조선교회 창립 후, 중국인 레메디오스 신부 파견, 교우들과 조우 실패 레메디오스 신부 1793년 선종 | |
1791.05 | 신해박해, 진산사건으로 윤지충, 권상연 순교 | |
1792 | 조선 푸르투칼 보호권 구베아 주교에게 위임됨 | |
1794.12.24 | 주문모 신부 야고보 신부 밀입국 | |
1795.04.05 | 주문모 신부 첫 미사 (계동에서 부활대축일) | |
1795.06.08 | 을묘박해 윤유일, 지황, 최인길 순교 | |
1800 | 순조즉위, 정순왕후 수렴청정 | |
1801 | 신유대박해 1.9 박해렬 오가작통법 시행 1.29 책룡사건(정약종 서책) 천주교 지도급 인사 체포 3.12 주문모 신부 자수와 연관 신자들 순교 9.29 황사영백서로 박해가 가열됨 12.22척사윤음 반포 박해 종식 | |
1808 | 구베아 주교 선종, 사라비아 주교 후임으로 취임 | |
1811 | 성직자 영입운동 전개(주교와 교황에게 1차 청원서 보냄) | |
1815 | 을해박해 | |
1819 | 기묘박해 | |
1825 | 정하상,유진길, 이여진, 교황에게 2차 청원서 발송 | |
1827 | 정해박해 | |
1827.09 | 포교성성 장관(카펠라리 추기경(그레고리오 16세 교황), 조선교회 포교 활동을 담당해 줄 것을 파리 외방선교회 교장 랑글르와 신부에게 요청,태국의 부 주교였던 브뤼기애르 주교가 자원 | |
1831.01 | 유방제 중국인 신부 조선 파견목적으로 나폴리 성가정 신학교 출발 | |
1831.09.09 | 조선 대목구 설정 브뤼기에르 부주교 조선 대목구장으로 임명 | |
1833.04. |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 전교 수락 | |
1834.01.03 | 유방제 신부 정하상 안내로 변문으로 입국 1월.16일 정하상 집에서 거주 | |
1835.10.20 |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애르 주교 만주에서 선종(조선 교우들을 앞세운 유방제 신부의 교묘한 입국 반대,) | |
1833 | 계사박해 | |
1836.01 | 모방 신부 입국 | |
1836 | 앵베르신부 조선교구 부주교 임명 | |
1836.12.02 | 모방신부 유방제 신부 추방,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소년 마카오로 유힉보냄 | |
1836 | 병신박해 | |
1837.01.15 | 샤스탕 신부 입국 | |
1837.12.30 | 앵베르 주교 입국 | |
1838.08.14 | 페레올 신부 벨린(Belline)명의 주교로 계승권을 받은 조선의 보좌주교로 임명 | |
1838.12.01 | 앵베르 주교, 교황에게 조선교구가 북경 교구에서 독립 기념으로 조선의 주보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요청 | |
1839 | 기해대박해 | |
1841.08.22 | 교황 그레고리오16세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 조선 대목구의 주보 허락 | |
1842.02.15 | 김대건, 매스트르 신부와 세실 함장의 프랑스 군함 에리곤 호에 승선 마 카오 출발 | |
1842.07.17 | 최양업, 만주 선교사 브뤼니애르 신부와 프랑스 군함 파보리트호에 승선 마카오 출발 | |
1843.12.31 | 만주교구 베롤주교에 의해 페레올 주교성성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 | |
1844.12.15 |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 만주 소팔가자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부제서품 받음 | |
1845.01.01 | 김대건 부제 봉황성 변문으로 밀사와 함께 입국 | |
1845.01.15 | 김대건 부제 한양도착 후 석정동(돌우물골)에서 유숙함 | |
1845.04.30 | 김대건 부제주교 영입을 위해 제물포 출발하여 중국으로 감 | |
1845.08.17 | 상해 김가항(金家港) 성당에서 김대건 사제 서품(페레올 주교 집전) 첫 미사(45.8.24일 만당 소신학교 / 다블뤼 신부 보좌) | |
1845.08.31 |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라파엘 호를 타고 상해 출발 | |
1845.09.28 | 김대건 신부 일행 제주 용소 도착 첫 미사와 배 수리 | |
1845.10.12 | 김대건 신부 일행 강경 황산포 나바위 상륙 | |
1846.05.14 | 병오대박해 김대건 신부 교우들과 마포출발, 25일 연평도 도착 27일 순위도 등산진 도착 29일 중국어선과 접촉, 편지와 서신 메스트로 신부에게 보냄 06.01 등산진으로 돌아옴 06.05 김대건 신부 검문 끝에 체포됨 09.15 의금부 신문끝에 사형선고 09.16 새남터 형장에서 순교 09.20 현석문외 8명 교우 순교 | |
1846.11.02 | 1836년 프랑스에서 설립된 성모성심회를 참고하여 페레올 주교 성모 성심회 창설, 충청도 공주 수리치골 | |
1849.04.15 | 최양업 신부 단신 입국하여 페레올 신부 만남 | |
1852.08 | 메스트로 신부 고군산도로 입국 | |
1853.02.03 | 페레올 신부 선종 미리내 안장 | |
1853.12 | 12,175명 신자로 늘어남 | |
1854.03 | 장슈신부 입국, 입국 배편으로 패낭신학생 3명 보냄 | |
1854.06.18 | 장슈 신부 내포 둠병이에서 뇌염으로 선종 | |
1854 08.05 | 만주 교구 베르뇌 부주교 조선4 대교구장으로 임명 | |
1854.12.21 | 만주교구 베르뇌 주교 성성식, 교구장 만주 베롬 교구장 주례 | |
1856.03.27 | 베르뇌 주교 프티니콜라신부,프르티에 신부 입국 | |
1857.03.25 | 다블뤼 보좌 주교 성성식 조선에서 최초 거행됨 | |
1857.03.26 | 조선교구 성직자 회의 3일 동안 개최 | |
1857.03.31 | 페롱신부 입국 | |
1857.08.02 | 베르뇌 장주교 윤시제우서 반포(조선 최초의 사목서한) 성직자 행동지침으로 성직자는 부동산 매입금지, 의식주에 쓰고 남은 돈은 교구에 반납 | |
1857.12.20 | 메스트로 신부 과로 선종 | |
1859.12. | 신자수 16,700명 | |
1860. | 경신박해 좌,우 포도대장 임태영,신명순 개인 사감으로 신자들 박해, 이들 파직으로 종결됨 | |
1860 | 천도교(동학)를 최제우가 창설 | |
1861.03.21 | 랑드르, 죠안노, 리델, 칼레신부,교우 김 안토니오(김효임 골룸바의 오빠) 안내로 입국 | |
1861.06.15 |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문경에서 과로로 쓰러져 푸르티에 신부 종부성사, 선종하여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됨 | |
1861.10.22 | 베르뇌 주교는 조선의 포교지를 거룩한 동정 성모께 봉헌하는 조선 교구를 성모 마리아의 축일로 선정하여 8개 구역으로 서울교구 성모무염시태, 충청 홍주 성모성탄, 경상도 서북권 성모승천, 충청도 동북부 성모자헌, 공주 성모영보, 내포 성모왕고, 경상도 서부 성모취결례, 성요셉신학교 배론, 구분하였다. | |
1862 | 진주 민란 시작으로 전국으로 민란 확대 | |
1862.07.26 | 기해박해의 밀고(배교)자 김순성 처형됨 헌종의 모친인 조 대왕대비와 손 잡고 철종을 폐위 시키고 이하전을 왕위에 옹립하기로 모의하여 체포되어 처형됨 | |
1863.04.13 | 조안느 신부 공주 듬벙이 에서 선종 | |
1863.06 | 오메트르 신부입국 | |
1863.09.15 | 랑드르 신부 충청 황무실에서 선종 | |
1864 | 고종 등극 | |
1865.05 | 브르뜨니에르, 볼리웨, 도리, 위엥 신부 4명 입국 | |
1866. 01. | 러시아 인 국경 침범 후 통상요구 승지 남종삼 요한은 러시아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대원군 만나 국내에서 활동하는 주교의 힘을 빌리면 물리칠 수 있다고 장담함 이에 대원군 주교를 만나기를 원하였으나 사정으로 불발됨 | |
1866 | 병인대박해 02.23 베르뇌 주교 이선이 밀고로 체포 02.26 블,뜨니에르 신부 정의배 마르코 회장 체포 02.27 볼리웨, 도리, 신부체포 03.07 베르뇌, 브르뜨니에르, 볼리웨, 도리신부 새남터에서 참수 만종삼, 홍봉주 서소문 형장에서 치명 03.10 최형베드로 전장윤 요한 참수치명 03.11 푸티니콜라, 푸르티에 신부, 정의배 마르코, 우세영알렉시오, 새남터 순교 다블뤼 주교, 오메르트, 위앵, 장주기 체포 03.29 다블뤼주교, 오매르트, 위앵 신부 황석두, 장주기 갈매못에서 참수 치명 | |
1866.06.29 | 리텔 신부 박해사실을 알리고 조선의 새 성직자 영입을 위해 조선탈출, 중국으로 감 프랑스 해군 함장 로즈를 만나 도움 요청 | |
1866.07.20 | 베르뇌,브르드니에르, 프르티에, 프트니콜라, 볼리웨, 도리, 우세영 왜고개에 이장 | |
1866.09.20 | 프랑스 함대 제물포 도착, 소득없이 귀함 | |
1866.10.12 | 페롱, 칼렌 신부 조선탈출. 조선교구 이후 10년간 성직자 없음 | |
1866.10.13 | 병인양요. 로지제독 프랑스 함대 7척으로 강화도 침입, 문화재 약탈 병인양요로 천주교 박해가 가혹해지기 시작함 | |
1866.12.19 | 교황 비오 6세 박해로 순교자 발생한 사실을 알고 조선 교우에게 위로 교서 발표함 | |
1868 | 무진박해 | |
1868 | 독일오페르트 남연군묘 도굴, 대원군 격분 척화비 세우고 박해가 더욱 더 강해짐 | |
1868.02.27 | 리텔 신부 제6대 조선 교구장 선임, 교황 비오 9세 임명 | |
1870.06.05 | 리텔 주교 성성식 교황청에서 갖음 | |
1871 | 신미양요 | |
1873.11.04 | 최익현 대원군 비리 적은 상소문 올려 대원군 실각 | |
대원군 실각하고 고종 친정 시작 | ||
1874. | 샤를르 달레 신부 한국천주교사 2권 파리에서 간행 | |
1876.02.27 | 일본과 병자수호조약 체결. 문호개방 | |
1882.11 | 리델주교 신병으로 프랑스귀국 블랑 부주교 업무 위임받음 페낭신학교로 1884년까지 21명 조선 청소년 유학 보내 그중 10명 사제 서품받음 | |
1882 | 임오군란으로 대원군 재집정. | |
1883.07.08 | 블랑 주교 제7대 조선교구장 서임 성성식 일본나고야에서 거행됨 | |
1883. | 블랑주교 명례방에 성당부지 매입 | |
1885 | 코스트, 머리발,보드네 신부입국 | |
1886.06.4 | 한불수호조약 체결, 종교의 자유 | |
1887 | 용산 함벽정 여주 부흥신학교 이전하여 예수성심신학교로 설립 | |
1887.09.21 | 블랑주교 조선교리지도서 공포 | |
1888.07.22 | 성 바오로 수녀회 진출 | |
1888.06,08 | 조선교구 예수성심께 봉헌 장엄미사 | |
1890.02 | 명동 주교관 건립 봉헌, 혜화동 수렛골 강당 건립 | |
1890.08.03 | 블랑주교 선종 | |
1890.08.21 | 뮈텔주교 성성식, 파리외방전교회 신힉교에 거행 | |
1891. | 용산 신학교 건립 | |
1891.02.02 | 뮈텔주교 제물포로 입국 | |
1892.08.05 | 명동성당 정초식 | |
1893.09.25 | 약현성당 축성 | |
1894. | 황사영 백서 원본 의금부 보관본 발견 이건영 요셉 뮈텔주교에게 헌납 | |
1895 | 뮈텔주교 치명일기 편찬. 병인박해 순교자 행적과 순교상황 기록물 | |
1896 | 서재필 정동 천주교 인쇄소에서 독립신문 발간 및 애국가 발표 | |
1896 | 고종 아관파천 민비 일본낭인들에게 참살되지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관으로 피신 | |
1897.02.20 | 고종 아관파천후 1년만에 환궁 | |
1897.10.12 | 고종 원구단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 변경 광무연호 사용 | |
1898.05.29 | 명동 주교좌 성당 축성 | |
1899.03,09 | 교민조약 체결(뮈텔주교와 조선 내무지방국장 정준식 | |
1899 | 년말 프랑스 페이네 신부, 김원영신부 제주도 부임 | |
1901.05.28 | 제주교난 발생 | |
1904.06.27 | 제주교난 종결됨 | |
1905 | 기해일기 뮈텔판 간행 | |
1909 | 성 베네딕도 수도회 제물포로 입국하여 동소문 성곽 안쪽 으로 토지매입하여 기슬학교 등 설립 | |
1910 | 한일합방 | |
1911.04.08 | 대구대목구 분리ㅡ 르망즈 신부초대교구장 서임 | |
1920.08.25 | 드망즈 신부 주교 성성식 명동성당 | |
1920.08.25 | 함경도 덕원교구, 간도교구로 분리 베네딕도 사우어 주교 서임 | |
1921.05.01 | 서울교구 드브레 부주교 성성식 | |
1922.07 | 만주 연길교구 분리하여 브레허 주교 임명 | |
1923.03월 | 미극메리뇰 외방전교회 진출 | |
1925.03 | 뮈텔주교 대주교로 승품 | |
1925.07.05 | 교황비오 11세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거행 | |
1926.01.18 | 서울교구 드브레 부주교 선종 | |
1926.05.01 | 라리보 부주교 성성식 | |
1926. | 총독부 관화문 건물 완공 입주 | |
1927 | 평양교구 창설 | |
1931.04 | 주교회의 개최, 한국 전주교회 지도서 개정 | |
1931.05 | 전라지역 감목대리구로 설정 초대 교구장 김양홍 신주 임명 | |
1931.09.26 | 교구설정 백주년 기념대회 브뤼기에르 주교 만주에서 용산 성지자 묘역으로 이장 | |
1937.04.15 | 대구교구에서 분리 광주교구 창설 | |
1938.02.09 | 드망즈 주교 선종 | |
1938.02.25 | 평양교구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 설립 | |
1938 | 한글사용금지 및 창씨개명요구 신사참배 강요 | |
1939.04.25. | 춘천지목구 설정 | |
1941 | 태평양전쟁 발발한 후 평양교구 건물 일본군 막사로 징발 성직자 교외로 추방 | |
1942.01 | 경성교구 라리보 원 주교 모든 직책을 노기남 바오로 신부에게 위임 후 은퇴 선언 | |
1942.12.20 | 한국인 최초 주교 성성 식 명동성당에서 거행 | |
1943.02 | 대구교구, 광주교구장으로 일본인 신부 취임 | |
1944.06.29 | 홍용호 주교 성성식 평양교구에서 거행 | |
1944 | 신사 거부 한국인 신부 체포하기 시작 | |
1945.08.15 | 해방. | |
1945.08.18 | 해방 후 노기남 주교 고유(告諭) 발표 | |
1945.09.09 | 노기남 주교 미군 사령관, 하지중장, 뉴욕교구 대주교 스펠만 추기경 참석한 가운데 연합군 승리 감사 미사 봉헌 | |
1946 | 서울교구 소공동 정판사 인수하여 대건인쇄소 설립 및 경향신문발행 발행인 윤형중 신부) | |
1946.09.16 | 한국 순교자 현양회 결성.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 | |
1947.08 | 미국 메리놀 외방전교회 번 신부를 교황사절로 임명, 부임함 | |
1948.05 | 남한 단독으로 선거 | |
1948.08.15 | 대한민국 건국 | |
1949.05 | 덕원교구 사우에르 주교 외 59명의 신부, 수사, 수녀 등 체포 수감함 | |
1950.2. | 새남터 토지 매입, 기념탑 건립 | |
1950 | 성모성심회 1950년 상주에서 설립 1976년 미리내 성지로 이전 1986년 페레올 주교가 세운 최초 성모성심 수리치골을 개발하여 이전함 | |
1951 | 가톨릭 군종 신부단 설립 | |
1951.06.25 | 전쟁 전후로 성직자 20명 총살당함 체포되어 구금된 신부,수사, 수녀 신학생 등 150명임. | |
1956 | 절두산 성지 토지 매입 | |
1957.01.21 | 부산 대목구 설정 | |
1958.06.23 | 청주, 대전 대목구 설정 | |
1963 | 요한 23세 교황 전례헌장과 매스미디어 관한 교령 발표 | |
1963 .06 | 교황바오로 6세 즉위, 한국어 미사 시작 | |
1963.10.07 | 수원교구 설정 | |
1963.02.15 | 마산교구 설정 | |
1966.03.10 | 절두산 성지 순교자 기념관 기공식 | |
1967.10.22 | 절두산 기념관 낙성식 | |
1968 07.23 | 대전에서 전국 교구대표들 모여 평신도 중앙협의회 설립 | |
1968.10.06 | 베르뇌 주교 이하 24명 복자위 시복식 | |
1969.04.25 | 김수환 추기경교황 바오로6세에 의하여 최연소 추기경으로 서임됨 | |
1969.05.29 | 안동교구 설정 | |
1971 | 서울대교구 토요 특전미사 시행하기 시작함 | |
1974.08.26 | 정의사제구현단 활동시작, 지학순 주교 구속됨 | |
1976.03.01 | 3.1 명동성당 사건 발생 | |
1977. | 공동번역 성서 간행 | |
1977.03.02 | 제주교구 설정 | |
1981.10 | 한국 초초 한국외방선교회발족하여 파푸아뉘기니ㅇ | |
1981-87 | 김수환 추기경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장 역임 | |
1984.05.06 | 한국 천주교 200백주년 행사로 100만 신도 모인 가운데 최초 교황청 외부에서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열어 103위 성인 반열에 올림 | |
1989.10.09 |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 주제로 제44차 세계성체 대회를 개최 | |
1989.01.23 | 군종교구 설정 | |
1998 | 서울대교구 교구장 30년 직무 후 은퇴 | |
2002.09.04 | 교황청 124위 시복시성추진 승인 | |
2004.06.24 | 의정부 교구 설정 | |
2005.04.08 | 교황 요한바오로2세 장례미사 참석 | |
2005.04.24 | 김수환 추기경 교황 베네딕도 16세 즉위 미사 공동 집전 | |
2006.02.22 | 정진석 추기경 서임 | |
2009.02.16 | 김수환 추기경 87세로 선종하여 용인 성직자 묘역에 안장 | |
2013.03.13 | 214위 시복시성 추진 승인(조선왕조때 133위, 근, 현대 81위) | |
2013.05.23 | 교황청 214위 시복시성추진 승인 | |
2014.01.12 | 염수정 추기경 서임, 프란치스코 교황 | |
2014.08.13 | 17일까지 아시아 청년대회 솔뫼 성지에서 개최 | |
2014.08.14 | 프란치스코 교황 입국 | |
15- 대전월드컵 경기장 성모승천 대축일 미사 집전 솔뫼성지 방문 16- 124위 시복식 광화문에서 미사집전, 꽃동네 방문 17-아시아 주교회의 참석,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 폐막미사 .해미성지. 18-한반도 평화와 민족의 화해를 위힌 미사 집전. 명동성당 | ||
2014.08.18 | 프란치스코 교황 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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