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瀋陽往還日記 (심양왕환일기)
7. 4월 23일 (칸의 선물)
1) 答禮品 辭讓 攻防 (답례품 사양 공방)
골자(骨者), 만월개(滿月介), 능시(能時), 대해(大海), 아벌아(阿伐阿), 박중남(朴仲男), 손이(孫你) 등이 칸의 뜻이라며 선사하는 예물을 가지고 찾아왔기에, 臣이 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번 나의 행차는 굳이 오지 않아도 될 행차였지만, 오로지 거절된 예단(禮單)을 다시 준비해서 왔으니 또한 춘신사(春信使)의 일개 심부름꾼일 뿐이다. 그런데 이전에 왔던 사신이 이미 으레 준 선물을 받았을 것인데, 내가 어찌 감히 이중으로 받겠는가? 게다가 병난 이후로 국가의 재정이 해마다 고갈되어 예물(禮物)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거절되기에 이르렀으니, 부끄럽고 창피스런 마음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으랴. 그런데도 또다시 주는 선물을 받으면 더욱더 몹시 부끄러울 것이니 감히 받을 수가 없다."
저들이 말하였습니다.
"사신에게 주는 선물이 어찌 한계가 있겠는가? 이웃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로는 단지 이러한 예물뿐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약 귀국에 갔는데 절사(節使 : 규칙적으로 보내던 사신)가 아니라면 예물을 주지 않겠는가?"
臣이 대답하였습니다.
"내 말은 정기적인 절사(節使)나 특별한 사명을 맡은 별사(別使)를 일러 말한 것이 아니다. 이번에 춘신사의 부끄러운 두 번째 행차를 내가 담당하고서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들이 말하였습니다.
"그렇더라도 칸이 보낸 바를 사양하는 것은 옳지 않다."
臣이 대답하였습니다.
"나도 공손하지 못한 줄 모르겠지만, 부끄러움을 머금고 보낸 바를 받으면 마음은 결코 편치 못하니 결단코 받기가 곤란하다."
그들리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칸에게 아뢰어야 하겠다."
이렇게 운운하고 일어나 갔다가, 조금 뒤에 다시 돌아와서 말하였습니다.
"사신의 말은 비록 예에서 나왔을 것이나, 우리가 사신을 접대하는 도리로도 예물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하물며 새 얼굴의 사신이 이곳에 당도하였는데, 어찌 노고에 보답하는 조치가 없겠는가? 모름지기 받아가라."
이와 같이 운운하거늘, 臣이 말하였습니다.
"칸의 뜻이 거듭 이와 같으니,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나 마음은 참으로 편치 못하다."
그들이 예물을 가져와 나누어주었다.
∙臣에게는 안구를 갖춘 안구마(鞍俱馬) 1필, 담비가죽 10령, 은자 50냥, 옥소(玉簫), 철소(鐵簫)
∙군관과 역관 등에게는 담비가죽 각 4령, 은자 각기 6냥
∙하인 등에게는 은자 각기 4냥
2) 禮物, 빈약하다 打撲 (예물, 빈약하다 타박)
능시(能時) 등이 또 칸의 뜻이라며 말을 전하였습니다.
"이전에 예물을 되돌려 보낸 것은 예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가 아니라기보다 단지 귀국이 점점 등한시하는 것에 대해 유감이라는 뜻이었다. 이번에 비록 갈아내고 다시 마련하여 보냈다 하나,
예컨대 값비싼 예물을 줄여서 값싼 예물로 메꾸었으니 크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화친을 맺은 도리가 손상될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귀국은 본디 원수가 된 적이 없으나 무오(1618년) 남조(명나라)가 우리의 경계를 침범하는데 지원군을 보낸 데다, 우리가 요동(遼東)을 토벌하여 요동의 백성들이 모두 우리나라 사람들인데도 귀국이 남조 사람들에게 청하여 도중(椵島)에 머물러 있게 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유인하게 한 것이 많았으니, 또한 한스럽지 아니한가? 이것을 하늘에 고하였더니, 1627년(丁卯)에 군대를 귀국으로 출동*시켰을 때 하늘의 도움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었다.
* 병자호란(1636년) 전인 1627년에 일으킨 정묘호란을 지칭함(게재자)
그때에 경성(京城)으로 곧장 쳐들어가고 팔도(八道)를 소탕하자는 논의가 있기도 하였지만, 귀국이 사죄하고 화친을 청하였으므로 하늘에 고하고 맹약을 맺은 뒤로 철군하였다. 원창군(原昌君)이 예단을 가지고 들어오자, 우리들끼리 서로 축하하며 말하기를 '이는 좋은 일이 아니냐? 만일 곧장 경성으로 쳐들어갔다면 필시 후회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 후로 신씨(申氏) 성을 가진 사람과 문관사신(文官使臣)이 되돌아간 뒤에는 예물이 점점 줄어드니, 이것이 어찌 정리(情理)란 말인가? 이제부터는 한결같이 신씨 성을 가진 사람과 그때의 사신처럼 예단을 보내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사신을 보낼 필요가 없고 나도 역시 사절을 보내지 않을 것이니, 이러한 뜻을 사신은 낱낱이 전달하여 귀국이 소홀하지 않게 하라. 이후의 예단이 만일 나의 뜻과 같지 않다면 사신이 필시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우리나라는 사람을 보내어 사신을 데려다가 귀국에 증거를 대며 사실여부를 물으면, 사신이 제대로 전달하지 않은 죄는 끝내 벗어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말한 신씨 성을 가진 사람이란 신경호(申景琥)를 가리켜 말한 것입니다. 臣이 웃으며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기어코 뜻에 맞는 예물을 보내도록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대체로 우리나라의 예(禮)로는 예물을 중하게 여기지 않고 예절과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데다, 정묘년 이후로 평안도와 황해도가 텅 비어 있음을 그대들이 아는 바이고, 더욱이 해마다 농사가 흉년이어서 백성들은 곤궁하고 재정은 고갈되어 예물이 마음에 들지 못한 까닭이다. 어찌 인정이 야박해서 그러했겠는가?"
3) 兩國, 利害의 對立 (양국 이해의 대립)
저들이 또 말하였습니다.
"맹약을 맺었을 때에 의주(義州)를 빌려서 주둔하였던 우리 군사들은 도중(椵島)과 귀국이 서로 드나들며 양식을 마련할 계책을 세우는 것을 금하였다. 귀국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우리 땅을 빼앗는 것이 그러한 터에 도중의 한인(漢人)들에게 양식을 도와줄 리가 만무하다'고 운운하여, 그 말을 믿고서 그저 조약만을 맺고 철군하였다.
그 후로 도중의 사람들은 '귀국이 양식을 도와주는 것에 힘입어 보전되었다.'고 운운하는 것을 듣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사신이 왕래하며 물으니, 매번 도와주지 않았다고 말하여 반신반의하였는데, 지난해 유흥치(劉興治)가 우리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남조가 군량을 보내지 않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만약 군량이 바닥나면 마땅히 투항해 들어가겠다'고 운운하여 손꼽아 기다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도중에 반란이 생겨 투항한 진달(眞㺚) 200여명이 이곳에 도착하여 말하는 가운데, '조선이 만약에 양식으로 구제하지 않았다면, 유흥치는 일찌감치 투항해 왔을 것이다. 조선이 양식으로 구제했기 때문에 이때까지 지연되었고 변란이 생기기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불만스럽게도 우리에게 패한 일 및 귀국 일에 대해서 어찌 이와 같이 실제와 다르게 말한단 말인가? 그러나 지나간 일일뿐이니 버려두고 논하지 않겠지만, 이제부터는 하나같이 당초의 약조(約條)에 의거하여 시행하겠는데, 은자와 인삼으로써 물품을 사고팔거나, 남조에 사신을 보내는 일에 대해서 우리는 금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한 됫박의 쌀이라도 서로 도와주었다는 말이 있어 우리가 군사를 충동시켜 의주를 차지하고서 막는 데에 이르게 되면 귀국이 우리를 남조인과 똑같이 대우하여 관례에 따라 배신(陪臣)*을 정해야 할 것이다.
* 관리등이 중국의 천자에 대해 자신을 가리킬때 사용(게재자)
그리고 양식을 운반하여 구제하려는 찰나에 우리들이 명나라 사람들과 싸우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버린 것인가? 반드시 해(害)가 귀국에 미칠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뜻을 낱낱이 귀국하여 전달하라"
臣이 대답하였습니다.
"도망한 죄인들의 말을 어찌 다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우리 백성들 제힘으로 살아가도록 하느라 겨를이 없는데 다른 나라 사람들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말을 꾸며대지 말라. 귀국은 매사에 으레 말을 꾸며대는 것이 많아 믿기 어렵다고 말할 뿐이다."
臣이 대답하였습니다.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 한인(漢人)들이 자기 배를 타고 간혹 연변(沿邊)에 이르러 마을사람들을 약탈하여 자기들끼리 억지로 팔았던 사실이 없지 않은 듯하나, 그렇더라도 조정에서 응당 양식을 주어야 할 일이 있었던가?"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억지로 꾸며서 회피하는 말을 하지 말라. 이미 지나간 일은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겠지만, 지금부터는 영영 끊고 주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만일 한 됫박이러도 주면 반드시 후회가 없지 않을 것이다."
臣이 다시 대답하였습니다.
"또 사신을 보내는 일은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저들이 대답하였습니다.
"도중(椵島)에 양식을 도와준 일과 강정(講定)할 일이 많아서였으니 답서를 겸하여 가지고 우리들에게 보내야 할 것이다."
臣이 말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칸이 쓴 초고를 보여 달라."
그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사로이 직접 꺼내 보여줄 수 없으니, 마땅히 칸에게 아뢰고 보여주겠다."
이렇게 운운하고 즉시 일어나 갔습니다.
(144-030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029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29일차에서도 '만회재공'의 파란만장한 삶이 밴드에 계속 게재 됩니다.
※ 주1) '만회재공' 편은 자료가 많은 관계로 총10회차에 걸쳐 게재되며, 이번차는 10회 중 7번째 입니다. 이번호에도 만회재공 할아버지께서 병조참판으로 후금의 수도 심양을 다녀온 과정(49일)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심양왕환일기"가 계속 게재됩니다.
▲ 심양왕환일기 : 명나라에 군량미를 제공한 사실을 후금이 트집잡는 등 외교적문제로 비화되자, 만회재공 할아버지께서 회답사로 심양을 방문하여 이를 성공리에 해결하고 돌아온 과정을 기록한 일기임
※ 주2) 읽는이의 편의를 위하여 게재자가 단락을 구분하고 일부 제목에 음을 달았습니다
(본문내용- 만회재공(정철)의 유고 계속, 10회 중 7번째)/ 무곡
양국(조선과 후금)의 신하들간 후금의 수도인 심양에서 치열한 외교전(사신 답례품 사양 문제, 예물에 대한 타박 등) 이 펼쳐지고 있어 참으로 긴장의 끈을 늦출수가 없습니다/ 무곡
외교란 서로 이해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아 늘 대립이 격화되는 양상입니다. 또한 외교의제와 관련 없는 부차적인 문제를 트집잡아 고의적으로 결렬시키기도 하지요./ 벽천
碧泉 위윤기 님!
사실 외교에서는 다소 본질을 벗어난 사소한 문제로, 주도권등을 잡기 위해 상호간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기도 하지요./ 무곡
무곡 위상환 님
결국 외교란 전쟁을 피하기위한 최선책이죠! 외교에 실패하면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되는거죠!/ 벽천
냉전시대에는 당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중국과 손을 잡은 닉슨의 핑퐁외교정책은 정말 대단했죠.
신문을 보니 당시 막후 주역인 키신저를 깎듯하게 예우하는 중국측의 인물들이 언론의 조명을 받는것 같더군요,
아?
어느때 인물인데!
그럼에도 100세인 키신저는 아직도 영향력이 있는것 같아요!/ 무곡
정치외교학에서 유럽외교사와 동남아외교사, 특히 태국외교사 등은 상당히 비중이 높은 과목에 속합니다. 이와 비교컨데 씨족의 특수성이 기록된 천년세고가 씨족 내 지성사의 효시로 자리 잡은 것은 자랑스럽습니다. 어느 씨족에도 없는 자랑스런 저서죠./ 벽천
그들이 예물을 가져와 나누어주었다.
∙臣에게는 안구를 갖춘 안구마(鞍俱馬) 1필, 담비가죽 10령, 은자 50냥, 옥소(玉簫), 철소(鐵簫)
∙군관과 역관 등에게는 담비가죽 각 4령, 은자 각기 6냥
∙하인 등에게는 은자 각기 4냥
2020년 1월10일자 장흥신문 기고문(http://www.jh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60044)과 동일내용의 2022년 장흥위씨종보(2022년 5월 발행) 박형상변호사가 쓴 '방촌 유물관의 ‘퉁소’, 두 <심양일기>(p81~p85 https://jhwi.or.kr/journal/22475)'의 내용중에 옥피리 철피리가 황제의 하사품으로 보기에 장식과 재질등이 소박하다고 기고하면서 가도에 주둔하고 있던 모문룡이나 명의 사절에게 받았을 것으로 의심했었는데... 오늘의 기고된 내용에 정확히 옥소(玉簫), 철소(鐵簫)가 칸(황제)에게 받은것이 '심양왕환일기'의 내용이므로 명백히 칸(황제)에게 받은것이 명약관화 (明若觀火)의 사실임이 밝혀졌습니다./ 재치
위에서 등장하는 선물마저도 사양하다가 "사신을 접대하는 도리로 보내는 차원의 최소한의 예물"이라는 취지의 칸의 말에 양국의 우호를 생각하여 받아 온 선물로 사료됩니다./ 무곡
만회재공의 심양왕환일기의 사료적 가치는 중요성이나 신빙성, 시기 등등 여러모로 볼때 조선후기(정조때)의 박지원의 열하일기보다도 한차원 위라는 생각이 듭니다./ 무곡
한자원문에는 옥소, 철소가 없어요. 한글번역본에 슬거머니 들어갔네요. 무언가 석연찮아요. 고의라면 선조미화요, 실수라면 무능이죠.
二十三日 전략 贈物分授, 鞍俱馬一匹, 貂皮十令, 銀子五十兩, 軍官驛官等, 則貂各四領, 銀子各六兩, 下人等, 則銀子各四兩是白齊/ 벽천
한자원문
二十三日 전략 贈物分授, 鞍俱馬一匹, 貂皮十令, 銀子五十兩, 軍官驛官等, 則貂各四領, 銀子各六兩, 下人等, 則銀子各四兩是白齊
한글역문
이와 같이 운운하거늘, 臣이 말하였습니다.
"칸의 뜻이 거듭 이와 같으니,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나 마음은 참으로 편치 못하다."
그들이 예물을 가져와 나누어주었다. 臣에게는 안구를 갖춘 안구마(鞍俱馬) 1필, 담비가죽 10령, 은자 50냥, (옥소(玉簫), 철소(鐵簫)), 군관과 역관 등에게는 담비가죽 각 4령, 은자 각기 6냥, 하인 등에게는 은자 각기 4냥/ 벽천
우리나라는 한문 번역에 있어서는 일가견이 있는것으로 아는데.
그런 문제가 발견되었네요
그렇다면 차제에라도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착오인지 아니면 다른 하자 문제가 있었는지 등등 그 원인을 규명해보고 그 결과 착오 내지 하자가 명백하다면 정정이 뒤따라야 될것으로 보입니다./ 무곡
어쩌면 이렇게 선조님둘의 명문장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과정에서 의미있는 일들이 발견된다면, 그자체로 재탄생의 절차를 거치는 여정으로 보입니다. 즉 주옥같은 글이 더욱 순도 높은 값진 보석으로의 재탄생 과정이라고 사료됩니다./ 무곡